가족들과 함께 주말마다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드라마가 있다. 바로 드라마 <환혼>이다. 아이들이 빨리 자라 아쉽다가도 함께 볼 수 있는 영화와 드라마의 종류가 많아지니 이 또한 이대로 즐거운 일이다.
원래도 사극을 좋아했지만 판타지가 가미된 사극을 볼 때면 영국 사람들이 <반지의 제왕>을 볼 때 이런 느낌이겠구나 싶어진다. <구가의 서>, <홍천기> 등을 워낙 재밌게 봤는데 무협까지 가미되니 <환혼>은 아니볼 수 없다.
<환혼> 6회까지 시청하다보니 대학생 시절 중국의 유명한 작가 김 용(1924-2018)의 무협소설을 읽느라 여름 방학 두 달간 두문불출하던 때가 생각난다. 방학땐 아르바이트를 하거나 학교 도서관에서 영어 공부를 하곤 했는데 2학년 여름방학이 시작되고 우연히 거실 책장에 꽂힌 영웅문을 호기심에 집어들었다가 덜컥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고려원에서 출간된 오래되고 낡은 영웅문의 첫 시리즈 <사조영웅전> 첫 장을 펼친 순간 나는 시간여행자가 되어 중국 중원의 무림세계로 훌쩍 떠났다. 거의 유체이탈 수준이었기 때문에 밥먹고 화장실 가고 잠자는 시간 빼고 좀비처럼 소설만 읽었다. <사조영웅전>, <신조협려>, <의천도룡기>로 묶이는 영웅문 시리즈와 <녹정기>, <천룡팔부>, <소오강호> 등 굵직한 중국 역사와 중원 무림세계가 적절히 섞인 이 소설들에 특히 반한 이유는 소설 속 캐릭터들이 내가 이전까지 읽어 온 소설의 캐릭터들과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소설의 캐릭터는 이래저래야 한다는 선입견이 산산이 부숴졌달까.
제1부 몽고의 별은 사조영웅전, 제2부 영웅의 별은 신조협려, 제3부 중원의 별은 의천도령기가 원제목이다. 출처: https://dannyocean.tistory.com/75
김용의 작품들은 무협 고전 영화, 예를 들면 <취권>에서처럼 주인공이 아버지나 스승의 죽음으로 각성한 후 수련에 수련을 거쳐 엄청난 고수가 되는 뻔한 스토리와는 많이 다르다. 물론 가문의 복수가 주인공을 움직이는 장치로 기능은 하지만 수련을 거쳐 고수가 되는 과정이 상상을 초월하는 일들로 그려진다. 또, <황비홍>이나 <엽문>의 주인공들처럼 의롭고 진중한 영웅들과 달리 김용 작품의 영웅들은 상당히 인간적(?)이다. 주인공 대부분이 자신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운명에 휘말리며 영웅이 된다. 본인은 영웅이 되려고 한 것이 아닌데 여러 정황들이 그를 영웅의 길로 이끈다. 또, <사조영웅전>의 주인공 곽정이나 <신조협려>의 양과, <의천도령기>의 장무기 등 남자주인공들의 공통점이라고 하면 지독하게도 운이 좋다는 점이다. 남들이 수 십년 노력하여 얻을 무공과 진기를 순전히 운으로 얻게 된다. 드라마 <환혼>의 주인공 장욱(이재욱 분) 역시 지독하게 운이 좋은데 아무래도 김용 소설의 캐릭터를 본 딴 것 같다.
무엇보다 김용 소설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건 여성 캐릭터 들이다. <사조영웅전>의 여주인공 황용은 어딘지 순박하고 아둔하기까지 한 남주인공 곽정을 요리조리 요리하여 천하제일 고수로 만드는 여자 대장부로 무공은 이미 대단한 경지에 이르렀고 머리가 아주 비상한데다 때로는 교활하기까지 하다. 서브 여주들의 경우에도 괴팍하거나 독하거나 대단히 악랄하다. 성격도 워낙 강해서 남자들에게 절대 지지 않는다.심은하, 이영애, 황수정 등 참하고 청순한 여배우들이 탑스타였던 대학생 시절에 칼과 독, 뱀을 잘 쓰고 화가 나면 눈 하나 깜짝않고 자신의 팔도 잘라버리는 여자 캐릭터들의 괴팍함에 혀를 내두르면서도 한편으로는 카타르시스를 느꼈다. 작가가 소설 속 여성들을 그저 여성으로서가 아닌 무림인으로 남성 캐릭터들과 동등하게 대하는 태도도 좋았던 것 같다.
<환혼> 포스터, 낙수를 스승으로 삼으며 장욱이 무릎을 꿇고 있다. 속으로는 '나의 미친 스승님아 첫눈에 알아봤다'라면서 ㅎㅎㅎ
<신조협려>의 여주인공 소용녀는 주인공 양과의 스승이 되는 도사이다. 어린 나이지만 무공도 대단히 높다. 드라마 <환혼>에 나오는 낙수(정소민 분)를 보면 소용녀와 황용을 적절히 버무린 인물 같다. 무엇보다 무림 세계에서 여자 스승과 남자 제자의 사랑이라는 금기를 깨고 소용녀와 양과 두 주인공이 지고지순한 사랑을 하게 되는데 환혼의 주인공들 역시 스승과 제자이면서 사랑에 빠지게 되니 이 또한 설정이 비슷하다. 신조협려는 김 용 작품 중 가장 로맨틱한 무협 소설로 작가 본인도 자신의 여러 작품 가운데서도 신조협려의 두 연인을 가장 아꼈다고 한다.
<환혼> 속 주인공 낙수는 상당히 입체적인 인물로 치수의 경지에 오른 술사이자 잔인하고 냉혹한 살수다. 목적을 위해서는 제자의 목숨도 기꺼이 바치려하고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자는 반드시 죽이려 마음 먹지만 한편으로는 순진하고 마음도 여리며 허당일 때도 있다. 머리 회전도 대단히 빠르고 상황 파악과 위기 대처 능력 역시 좋아서 어려움이 닥칠 때 마다 비상한 머리로 위기를 극복한다. 게으르고 약삭빠른 장욱이지만 제자라는 이유로 권위적으로 그를 억누르지 않는다. 장욱이 헤쳐나갈 수 밖에 없도록 주변의 상황을 역이용하니 <사조영웅전>의 황용의 교활함이 연상된다.
낙수와 장욱은 사제지간이면서 동시에 주인과 종의 관계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제목이기도 한 '환혼'은 최고의 경지에 오른 술사가 사람의 혼을 바꾸는 술법을 뜻하는데 낙수가 죽음을 맞이하기 전 자신의 혼을 무덕이의 육체로 옮기면서 드라마의 이야기가 시작된다. 장욱은 왕이 될 운명을 태어났기 때문에 아버지인 장강이 기문을 막아 술사가 되지 못하도록 하고는 길을 떠나버렸다. 사람들 사이에서 어머니의 사생아로 낙인 찍힌 장욱은 아버지처럼 최고의 술사가 되고 싶어 몸이 바뀐 채 자신의 종으로 지내는 낙수를 스승으로 삼게 된다.
<환혼>에 등장하는 낙수와 장욱 두 사람의 티키타카가 꽤나 즐겁다. 장욱의 성격 또한 전형적인 남주와 약간 결이 다르다. 철도 없고 근성도 없어 뵈는데 또 속은 깊다. 낙수를 늘 놀려 먹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낙수에게 뒤통수를 맞는다. 하지만 내가 제일 좋아하는 캐릭터는 따로 있다. 바로 '허염 선생'. 드라마의 배경이 되는 대호국의 최고 술사 중 한명이면서 의사이기도 한 허염 선생은 술을 좋아하는 마음씨 고운 할아버지인데 배역을 맡은 배우분이 찰떡으로 연기하는 듯 하다. 할아버지인데 엄청 귀엽고 사랑스럽다.
<환혼>은 연기력 논란이나 판타지 설정이 어색하다는 지적이 좀 있는 것 같다. 하지만 무협 장르를 원체 좋아하는데다 김용 소설도 연상되다 보니 무척 재밌게 보고 있다. 6회차에서 장욱과 무덕이 서율 이렇게 삼각 관계가 형성되다가 세자까지 러브라인에 들어오고 있어 더욱 흥미진진하게 보는 중이다. <환혼>의 영어 제목이 <Alchemy of Soul(영혼의 연금술)>인데 마치 물질간의 화학작용처럼 혼과 혼의 화학작용이 연상되니 단순히 혼이 바뀌는 개념의 <환혼>보다는 좀 더 로맨틱한 느낌이다. 다다익선이라고 나는 사각관계 찬성일세!
친정아버지가 무협 장르를 그렇게 좋아하셨는데 아버지의 취향을 닮은 나 역시 어릴 때부터 무협 영화를 섭렵했었다. 사춘기 시절 내내 <황비홍>에 나오는 황비홍이 내 이상형이기도 했다. 나는 권법 위주로 힘 자랑하는 북권보다는 경공술을 잘 쓰고 우아하게 칼을 휘두르는 남권을 더 좋아했는데 아버지는 나와 달리 북권파였던 것 같다. 나랑 아버지가 나란히 누워 비디오 가게에서 빌려온 무협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친정 어머니는 혀를 끌끌 차며 늘 이런 말씀을 하셨다. '순 거짓말만 하는 영화가 뭐가 좋다고 둘이 그렇게 재밌게 보느냐'고 말이다. 30년이 지난 지금도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좋아하는 걸 보니 취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