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즈니 만화 영화 중 가장 사랑하는 영화를 꼽으라면 나는 언제나 <인어공주>였다. 나 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인어공주를 사랑할 것이다. <인어공주>가 처음 개봉됐을 때의 그 인기는 아마 <겨울왕국>에 버금갈 것 같다. 가재 집사 세바스찬이 부른 <Under the sea>와 애리얼이 부른 <Part of your world>는 그 수 많은 디즈니 애니메이션 OST 중 최고라고 생각한다.
디즈니 버전의 <인어공주>를 좋아하는 이유는 안데르센의 원작과 달리 주인공 인어공주를 현대적으로 재해석하고 해피엔딩으로 끝냈기 때문이다. 물론, 디즈니 특유의 유머나 OST도 한 몫 했지만...그래서 인어공주가 실사화 된다고 했을 때 무척 반가웠다. 나 역시 여타의 인어공주 팬들처럼 캐스팅이 궁금했다. 처음에 인어공주를 흑인으로 캐스팅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낯선 기분은 들었지만 솔직히 반가움이 더 컸다. 디즈니의 공주들 대부분은 백인인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디즈니 애니메이션에 흑인 공주가 없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공주는 백인이다.
디즈니의 역대 공주님들
여주인공으로 타 인종보다 백인을 선호한다고 디즈니를 비판할 의도로 글을 쓰는 것은 아니다. 인기 많은 원작을 따라 가다 보니 대부분 주인공이 백인인 것 뿐이다. 하지만 영화나 드라마 등을 제작할 때 의도적으로 백인 중심에서 타 인종의 출연을 확대해 가는 요즘의 추세는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넷플릭스에서 <오징어 게임> 다음으로 인기가 많았던 <브리저튼>이라는 드라마가 대표적 사례다.
18세기 영국, 조지 3세가 통치하던 영국을 배경으로 하는 이 드라마는 조지 왕의 부인 샬럿 여왕에게 흑인의 핏줄이 섞여 있을것이라는 가설을 택해 여왕을 흑인으로 설정한다. 그리고 흑인 여왕의 비호 아래 흑인들 또한 신진 귀족으로 급성장했을 거라 상상하고 극을 만들었다. 그래서 시즌 1과 시즌 2, 시즌 3(외전)까지 주인공을 백인과 흑인으로 균등하게 배치하고 있다. 시즌 1에서는 백인 여주인공과 흑인 남주인공의 사랑 이야기가 중심이고 시즌 2는 남녀 주인공의 인종이 바뀐다. 시즌 3는 샬럿 여왕과 조지 왕의 젊은 시절의 사랑 이야기이다.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하는 제인 오스틴 원작의 드라마 <오만과 편견>, <이성과 감성>,<설득>, <노생거 사원>, <엠마> 등에서는 흑인을 단 한명도 볼 수 없다. 영국의 중산층 이상의 신분을 대상으로 쓰인 소설이니 흑인이 없는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브리저튼에서 백인들만이 주인공인 18세기 19세기 영국 사회를 흑인들에게도 열어 준 것이다. 처음에 브리저튼을 시청할 때 귀족 드레스를 입은 흑인 배우들의 모습이 어색했다. 하지만 드라마 중반에 이르러 그런 어색함이 사라져 버렸다. 미디어로부터 나도 모르게 학습해 온 흑인에 대한 고정관념 - 귀족들이 입는 드레스와 양복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 을 미디어가 다시 부숴뜨려 주는 것에 대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브리저튼 시즌 1의 주요 인물들
인어공주 실사영화는 예고편이 개봉되기도 전에 캐스팅 된 여주인공의 외모를 보고 비하하고 비웃는 여론이 일고 있었다. 그리고 예고편이 개봉되자 기다렸다는 듯 여주인공의 외모를 조롱하는 수 많은 유튜브 영상이 쇼츠에 뜨기 시작했다. 댓글들도 수위가 심각하다. 예를 들어 '인종차별이 아니라 원작모욕', '해양생태계 오염을 경고하는 영화', '심해의 공포', '왕자가 눈을 뜨고 인어공주를 본 순간 살려주세요라고 할 듯' 등등.
애리얼이 흑인이기 때문에 드레드라는 흑인 고유의 헤어스타일을 하는 것은 흑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잘 나타내기 때문인데 이 드레드 헤어스타일도 애리얼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비난한다. 흑인들은 머리가 워낙 곱슬이라 이런 머리를 할 수 밖에 없다. 드레드 대신 직모를 만들기 위해서는 수 많은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 따라서 드레드는 흑인이라면 자연스럽게 선택하는 헤어 스타일이다.
애리얼 역의 Halle Bailey
원작의 애리얼과 외모가 전혀 다르다고 이렇게까지 주인공을 조롱할 일인지 참으로 의문이다. 내 기대나 예상과 많이 벗어난다고 해서 이렇게까지 혐오를 보이는 인터넷상의 댓글들을 보며 중세시대 마녀사냥과 별다를 바 없는 일들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도 여전하다는 사실이 자못 씁쓸하다. 백설공주나 신데렐라의 여주인공이 흑인이 되면 안되는 가? 우리나라 고전 심청이와 춘향이 역에 필리핀 인을 캐스팅하면 큰 일이라도 나는가?
새로운 관점으로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받아들이려는 디즈니의 용감한 선택을 나는 적극 지지한다. 물론 개인의 취향이나 호불호에 따라 디즈니의 이런 정책을 지지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리고 표현에도 자유가 있다. 그러나 도를 넘는 조롱과 혐오의 표현은 이제 막 피어나려는 어린 배우에게 너무나 가혹한 처사가 아닐 수 없다. 건전한 비판을 하기 보다 조롱하고 비웃는 표현은 상대에게 심각한 폭력이 될 수 있다.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살고 있지만 자신에게 편리함만 주는 변화는 재빨리 받아들이고, 나에게 불편함을 주는 변화는 거부하려는 선택적 관성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