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수하려고 세면대가 있는 화장실 거울 앞에 섰을 때였다. 이마 아래로 흘러내린 흰 머리카락 한 올이 내 눈을 잡아끌었다. 머리숱 관리 차원에서 흰 머리카락을 뽑지 않지만 눈에 거슬릴 만큼 은빛으로 반짝반짝 존재감을 나타내는 머리카락은 한 두 개 정도 뽑곤 했다. 이 날도 눈에 거슬려 뽑으려고 잡았는데 머리카락이 히마리 없이 쑥 뽑히는 거다. 물리력을 행사하기 전 이미 자연사한 머리카락의 잔해를 쓰레기통에 무심코 툭 던지려는데 갑작스레 마음속에 먹구름이 몰려왔다.
반 평생 갈색으로 염색을 했다. 인공적으로 만든 갈색 머리가 태생적으로 흑발을 가진 내 얼굴에 훨씬 잘 어울렸기 때문이다. 백옥 같은 하얀 피부가 아니고서야 검은색 머리는 동양인의 누런 얼굴을 더욱 추레하게 만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나다로 떠나기 한 달 전 처음으로 검은색으로 염색했다. 캐나다는 미용 서비스 비용도 만만찮고 어차피 화장을 할 것 같지도 않아 이십여 년간 염색약에 시달렸을 내 두피를 좀 쉬게 하고 싶었다.
머리색이 진한 황금색을 띤 갈색일 때 미처 몰랐던 것을 흑발이 되고서야 알았다. 나에게 흰 머리카락이 이렇게 많다는 것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에서 메릴 스트립의 백발이 무척 매력적이던데 이 참에 나도 멋스러운 백발을 추구해 볼까... 싶다가도 머리를 도리도리 휘저었다. 정신 차려. 작은 나무! 넌 메릴 스트립이 아니라고!! 강경화 전 외교부 장관은 더더욱 아니고!!!
옅은 갈색 사이에서 나도 갈색 인양 숨죽이고 있던 흰 머리카락이 검은색 배경을 등에 업고 강렬한 존재감을 뽐내기 시작하니 거울을 볼 때마다 조금 곤혹스럽다. 일일이 뽑기에는 흰 머리카락이 너무 많고 안 뽑자니 나이 들어 보이기도 하고 지저분해 뵈기도 한다. 그래서 학교에 갈 땐 늘 야구모자를 쓴다. 누가 내 머리를 유심히 볼 것도 아닌데 뭘 그리 숨기려는지... 아등바등 젊어 보이려는 모습이 참 서글프면서도 우습다.
거리에는 울긋불긋 단풍이 들었다. 어제는 비까지 내려 만추에 접어든 거리가 꽤나 쓸쓸하게 느껴졌다. 봄에서 여름, 가을과 겨울, 그리고 다시 봄... 계절의 이 끊임없는 순환은 단순한 자연의 반복인 걸까. 아니면 계절의 반복만큼이나 자연도 나이 들어가는 걸까. 나는 한번 나이 들면 다시 젊어지지는 않을 테다. 그러니 늘 반복해서 다시 봄을 맞이하는 자연이 퍽 부럽다. 하지만 조금만 생각해보면 나 역시 또 다른 생으로 반복하는 것 같다. 나는 자녀를 낳았고 그 자녀가 봄에서 여름이 되고 가을도 겨울도 되는 모습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 내 자녀는 또 자녀를 낳을 테고... 세대의 이어짐은 종족 번식의 본능이 아니라 자연의 반복적인 사이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닐지도 모르겠다.
40대 중반이 되니 뭔가 결실을 맺어야 할 시기가 아닌가 싶어 조바심이 난다. 존재에 의미를 자꾸 부여하려니 인간은 끊임없이 불행해져 가는 것임을 알고 있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이 의미 지옥에서 헤어 나오질 못하겠다. 그러니 자꾸만 내가 선 좌표가 어디쯤인지 궁금하다. 지금 나는 어느 계절에 서 있는 걸까. 아름다운 꽃과 같은 청춘을 벌써 지났고 열매를 키워나가고 있으니 늦여름 혹은 초가을이라고 봐야 할까... 만추가 다가오기 전에, 이파리들이 모두 떨어져 나가기 전에 나는 뭐라도 되고 싶다.
밤새 내린 차가운 가을비에 단풍 든 이파리들이 바닥에 우수수 떨어져 나뒹굴고 있다. 수 백, 수 천 개의 싱싱하고 아름다운 이파리를 손에 쥐고 있던 나무는 지금 어떤 마음일까. 신록이 우거지던 전성시대를 그리워하고 있을까. 곧 불어닥칠 툰드라의 북풍을 어떻게 견딜지 고민하고 있을까.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생명으로만 존재하는 것일까.
나무를 바라보는 나를, 굵고 탐스러운 꼬리를 가진 청설모가 몰래 지켜보고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후닥닥 나무 위로 올라가 버린다. 청설모의 머리 한가운데로 줄무늬처럼 흰 털이 반짝거린다. 청설모는 분명 사람 나이로 치면 40대 중반의 아줌마일 것이다. 먹이를 구하려고 한 겨울 눈을 헤치고도 나무에 오르는 청설모를 보니 이러면 안 되겠다 싶다. 잡념을 떨치기 위해 청소기를 집어 든다. 지금은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만 하기로 마음먹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