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에 와서 처음으로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난 후, 지루한 겨울에 우울하지 않고 즐겁게 보내려면 취미 생활과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주로 골프를 취미로 많이 하지만 겨울에는 할 수 없기도 하고, 나는 골프라는 운동에 영 재미를 못 붙이는 타입이기도 하다. 특히 미끄러지고 넘어지는 것에 대해 극한의 공포를 느끼는 나는 겨울 스포츠인 스노보드나 스키, 스케이트는 아예 시도조차 하지 못한다.
집에 콕 박혀서 음악을 듣거나 독서, 글쓰기 등 다소 수동적인 취미를 가진 나는 다른 곳은 몰라도 캐나다에서만큼은 이런 내향적 성향과 취미를 조금 개조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6개월이나 되는 기나긴 겨울 동안 계속 이렇게 지내면 퍽 우울해질 것 같았다. 실제로 겨울 중반이 되면 꽤 우울해지기도 했다.
그러던 중 우연히 내가 사는 지역 한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있는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북클럽 회원 모집 공고를 발견했다. 공고를 본 순간, 나는 속으로 크게 외쳤다. "유레카!"
그렇게 '23년 11월에 시작된 북클럽에서 7개월간 총 4권의 책을 회원들과 같이 읽었다.
북클럽 활동명은 <에나레토스>. 상담학을 전공하신 한인 여성 목사님을 주축으로 총 일곱 명의 여성으로만 이루어진 북클럽은 매주 1회 약 3시간~4시간 동안 심도 깊게 책에 대해 토론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는 모임이 되었다.
첫 번째 북클럽 선정 도서
타지에서 처음 보는 낯선 이들이지만 한국인이라는 것만으로 우리 사이에는 이미 유대감이 흘렀다. 그리고 대부분 비슷한 연령대라 비슷한 고민과 타국에서의 어려운 삶을 서로 나누고 위로하며 점차 끈끈한 우정을 만들어 나갔다. 우리는 북클럽 내에서는 서로의 이름을 각각 지어 불렀다. 내 이름은 다정, 어떤 분은 함덕바다, 또 어떤 분은 소피아 등등.....
북 클럽 내에서만큼은 우리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가 아닌 온전한 자기 자신으로 있을 수 있었다. 물론, 책의 내용을 이야기하다가 아줌마 특유의 만렙 수다 스킬로 삼천포에 종종 빠지곤 했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모습에 불편해하는 분은 없었다. 무엇보다 인상 깊었던 것은 서로에게 놀랄 만큼 솔직했던 점이다. 서로의 고민을 여과 없이 말하고, 그 고민을 내 고민처럼 듣고 서로를 진심으로 위로했다. 그래서 나는 북클럽장을 비롯한 중년의 이 여성들에게 깊은 감동을 받았다.
첫 번째 책을 약 3개월에 걸쳐 꼼꼼하게 읽은 후, 드디어 책거리를 하는 날. 회원들은 그냥 보내기 아쉽다며 작게나마 우리끼리의 파티로 자축하기로 했다. 캐나다 식으로 각자 음식을 만들어 나누는 포트락 파티를 하기로 했고, 음식 테마는 분식. 떡볶이, 김밥, 어묵, 만두 등 음식 메뉴가 나올 때마다 회원들은 어린 소녀들처럼 손뼉 치며 기뻐했다. 분식은 나이 불문 한국 여성들의 소울 푸드임은 확실하다. ^^
에나레토스 1기 첫 번째 책거리 날 북클럽장 마노 목사님이 손수 이렇게 예쁜 카드를 만들어 주셨다. 회원들이 각자 솜씨를 발휘 해 준비해 온 분식
우리는 회원들끼리 각자 가지고 있는 도서를 돌려 보기도 했다. 나는 주로 시와 수필집을 빌려 주었고, 다른 회원에게 공지영 소설을 빌려 읽었다.
북클럽 장소는 북클럽 장님이 살고 있는 집이자 교회였다. 사방이 작은 숲으로 둘러싸인 커다란 석조 주택이었는데 숲을 바라보는 곳을 유리로 마감해 집 안에서 숲을 한눈에 내다볼 수 있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다.
북클럽 리더인 마노 목사님은 나와 동갑내기이자 두 아이의 엄마다. 나와 나이는 같지만 나는 진심으로 이분을 존경한다. 조용하고 우아한 성품의 소유자인데 심리학 서적을 함께 읽으면서 우리 스스로가 자신의 상처를 돌아보고 이겨낼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다.
북클럽이 있는 날이면 유독 눈보라가 몰아치곤 했다. 하지만 힐링 자체였던 시간이기에 나를 비롯해 회원들이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눈 속을 뚫고 미끄러운 눈 길을 헤치며 기어이 모임에 임했던 것 같다.
책을 읽는 일은 그저 활자를 읽고 해독하는 것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책을 읽는 일은 곧 나를 읽는 일이요, 인생을 읽는 일이라는 것을 모두 잘 알기 때문이다.
첫 번째 책 마지막 날, 단체 기념사진 찰칵
첫 번째 책을 약 석 달에 걸쳐 읽은 후 에나레토스 1기가 드디어 끝이 났다. 북클럽 리더는 다음 2기 준비를 위해 잠시 휴식에 들어가기로 했다. 하지만 남은 회원들은 이대로 그냥 끝내는 것이 마냥 아쉬웠다. 그래서 리더님과 대학원에 입학한 회원을 빼고 나머지 멤버들로 계속 책을 읽어나가기로 했다.
모임은 내가 주최하고 장소 역시 우리 집으로 정해졌다. 늘 모이던 목요일 오전 10시 반의 만남은 끊어지지 않고 캐나다의 봄을 함께 맞이했다. 약 넉 달에 걸쳐 소설 <내 영혼의 따듯했던 날들>과 <전망 좋은 방>, 그리고 내 소설 <재인의 계절>을 회원들과 함께 읽었다.
책을 같이 읽는 우리는 그 시간 동안 함께 울고 함께 웃었다. 책이 매개체가 되어 이토록 귀한 우정을 얻을 수 있다는 사실에 진심으로 행복했다.
그렇게 쉼 없이 달려온 끝에 각자의 학업과 아이들 방학, 한국 방문 일정 등이 겹친 5월 중순부터 8월 말까지 우리는 방학을 갖기로 했다. 나는 이 기간 동안 열심히 웹소설을 쓰고 있는 중이다. 회원들을 만나지 못한 지 어언 2주가 넘어갔다. 문득, 모두들 어디에서 어떻게 지내고 있나 궁금하던 찰나, 오랜만에 단톡방에 메시지가 올라왔다.
"시간 되시는 분 계심 티타임 할까요?"
이심전심이라고..... 보고 싶은 내 마음을 우찌 알고.....
나는 냉큼 답했다.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