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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정은 Jun 05. 2024

캐나다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려면

3년 전쯤 유튜브에서 미국인과 캐나다인을 비교한 영상을 본 적이 있다. 결론은 미국인에 비해 캐나다인이 좀 더 점잖고 친절하다는 것이었다.


캐나다에 온 첫 해, 내가 집 주변이나 공원을 산책할 때 캐네디언마다 눈을 마주치고 "Good Morning."이나 "Hello." 등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 그리고 쇼핑몰이나 마트에서 캐네디언 자신이 타인의 진로를 조금이라도 침범하면 "Sorry"라는 말이 거의 자동으로 나오는 걸 목격했다.


처음엔 이런 인사 문화가 예의 바르고 친절하다 여겼지만 시간이 흐르니 차차 이 또한 습관적인 문화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았다. 물론 안 하는 것보다야 백배 낫지만.


캐나다로 처음 이사온 집의 오른쪽에는 태국에서 이민 오신 나이 지긋한 할머니가 살았고, 왼쪽에는 삼십 대 후반으로 보이는 백인 부부가 살았다.  시차 적응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이웃과 인사도 할 겸 잡채를 만들어 양쪽 이웃집에 나누어 준 적이 있었다.


며칠 후, 태국 할머니는 태국 전통 전병을 만들어 내 호의에 보답해 주었다. 할머니는 특히 정원을 잘 가꾸었는데 내가 할머니가 키우는 '며느리발톱꽃'을 칭찬하자, 한뿌리 캐어 내게 덥석 쥐어주시기도 했다. 반면, 왼쪽 이웃인 백인 부부는 내 그릇을 되돌려 주지도 않았고, 집 앞에서 만나면 먼저 인사해도 데면데면 굴었다. 처음엔 영어로 애써 노력하며 친근하게 굴던 나도 점점 이 이웃을 만나면 그저 웃기만 할 뿐 말을 더는 붙이지 않게 되었다.


친절하다는 캐네디언은 칼리지에서도 그다지 만나보진 못했다. 같은 클래스의 친구들은 십 대 후반에서 이십 대 중반의 젊은 친구들이라 친해지기 어렵기도 했고, 캐네디언들이 나와 같은 유학생에게 먼저 말을 건네는 일은 드물었다. 저절로 이끌리고 친해지는 사람들은 대부분 아시아인들이었다.


물론 친절한 교수님들도 더러 있긴 했지만 뭐랄까...... 직업적인 친절함 그 이상은 느껴보지 못한 것 같다.


캐나다에 살 게 된 지, 1년이 되자 문득 궁금해졌다. 도대체 그 친절하다던 캐나다인은 다 어디로 간 걸까.


칼리지를 다녀도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으로 와야 하는 가정주부의 숙명 때문에 영어 말하기 향상이 거북이처럼 느렸던 나는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고심하다가 우연히 캐네디언 교회에서 뉴커머(Newcomer, 캐나다에 새로 온 사람들)를 위해 영어 클래스를 저렴하게 운영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런던에는 이런 클래스를 운영하는 대형교회가 몇 개 있었고, 다행히 우리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큰 교회에서 영어 교실을 개설하고 있었다.


매주 토요일 오전 9시부터 12시까지 3시간 동안 총 10주 차 코스를 선택한 나는 첫날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교회로 향했다. 너른 교회 주차장에는 이미 자동차가 가득했다. 나처럼 수업을 받으러 온 사람들이 백여 명이 넘었다. 한국인, 중국인, 남미인, 필리핀인 등 다양한 국가의 사람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교육 등록을 마친 나는 간단하게 레벨 테스트를 받은 후 내 수준에 맞는 반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반을 찾아 처음 교실에 들어갔을 때, 교실에는 나이 지긋한 백인 할아버지 한 분과 백인 할머니 두 분이 나를 정겹게 맞아 주었다.


이 세 분의 나이 드신 선생님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친절하고 유쾌한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교회와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해 자원하여 학생들을 가르치는 이 교회의 성도들이다. 물론 선교와 전도가 목적인 만큼 교재는 기독교에 관련된 내용이었지만 학생들은 대부분 종교와 무관하게 영어를 공부하고 싶어 오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나는 그때까지 이 분들처럼 재기 발랄하고, 친절한 캐나다인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칼리지에 다니는 한인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자 대부분 비슷한 경험을 했다고 입을 모았다. 중장년 세대의 캐나다인은 외국인들에게 별로 친절하지 않지만 백인 할아버지 할머니들은 무척 친절하다고 말이다. 물론 case by case이겠지만 이곳에서 만난 백인 노인들은 타인을 돕는데 주저하지 않고 자신의 일처럼 돕는 친절한 분이 많았다.


백인에 대해 다소 차가운 인상을 받아왔던 나의 고정관념이 이 노인 선생님(평균 연령이 70을 훌쩍 넘는다)을 통해 완전히 바뀌게 되었다. 10주간의 시간 동안 영어가 서툰 이민자와 유학생들에게 친절하고 재미있게 수업하려 노력하는 백발의 할아버지 할머니를 보며 내 안에 나도 모르게 쌓아두었던 벽이 서서히 무너져 내렸다.


하지만 이 수업은 매주 토요일 아침에 시작되기 때문에 칼리지 전공 과제에 치이거나 주말 동안 가족들과 놀러 가고 싶은 마음이 들면서 수업에 지각 하거나 심지어 빠지는 일이 일어났다. 장기적으로 다니기에는 나 스스로의 한계를 느꼈다. 그리고 좀 더 효과적인 말하기 수업을 듣고 싶어 1:1 온라인 클래스를 수강해서 몇 달간 수업을 들었다. 선생님은 40대의 지적인 백인 여성이었다. 이 분과는 매주 2번 1시간씩 대화를 나눴고, 나의 소소한 일상과 소설 이야기 등을 종종 나누었다. 한국에서 2년간 영어선생을 하다가 캐나다로 돌아왔는 이 선생은 내 이야기 듣는 걸 참으로 좋아했다.


하지만 몇 달이 흐르자 늘 비슷한 수업 방식과 내용 때문에 어느 순간 영어 정체기가 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라인 수업이 아니라 직접 얼굴을 보고 캐나다인과 대화를 나누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때마침 그런 시기에 백인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무료 클래스를 알게 되었다.


그 할아버지의 이름은 바로 댄(Dan)


독일계 캐네디언인 댄 할아버지의 이름은 대니얼 샤퍼지만 우리는 애칭인 댄으로 이름을 부른다. 일흔여섯이 된 이 할아버지는 사실 수줍음이 많은 분이다.


사람들의 눈을 잘 쳐다보지 못하고, 가끔은 말을 더듬기도 하는 할아버지는 산림직 공무원으로 40년 가까이 재직하다가 은퇴 후 런던에 살면서 나와 같은 한국인 유학생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공부를 가르쳐주고 있다. 할아버지는 이 일을 자원봉사로 하기 때문에 학생들은 수업료를 지불하지 않는다. 학생 수는 대게 4명~5명 정도 한국인으로 이뤄진다.


댄 할아버지 역시 교회를 다니는 백인 할아버지지만 그렇다고해서 학생들에게 기독교를 전도하거나 강요하는 일은 없었다. 기독교적인 가치를 입으로 말하는 대신 몸소 실천하며 사는 분이었다. 댄과 우리 학생들은 눈이 많이 내리는 겨울에는 줌(zoom)에서 만나 수업했다. 수업 방식은 대화 주제와 질문을 댄 할아버지가 만들어오셨고, 우리는 그 질문에 열심히 영어로 답을 한다. 만일 우리가 말한 영어 문장이 틀리거나 발음이 이상하면 댄 할아버지가 코칭을 해 주었다.


겨울이 끝나고 봄이 되면서 온라인으로 진행하던 수업은 대면 수업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요즘은 댄 할아버지가 강력하게 추천하는 원서를 선정해 같이 읽고 있다.


나는 이 수업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아마도 선생님이 좋고 같이 수업하는 학생들이 좋아서 더 그런 것 같다.


댄 할아버지는 수줍음이 많지만 대신 한번씩 생각지도 못하게 유머감각을 뽐낸다. 예를 들면, 내가 몇 주 전에 '나는 집에서 호랑이랍니다. 아빠와 아이들은 내가 한번 화를 내면 무척 무서워해요.' 라고 말 한 적이 있었다. 다음 번 수업 시간에 내가 무슨 말을 했다가 다른 한국인 학생들이 나를 놀리자 댄 할아버지가 갑자기 싱긋 웃으며 말했다. "조심해! 릴리(내 이름)는 호랑이라는 걸 잊지 마!" 그 말에 나를 비롯해 다른 학생들이 빵 터지고 말았다.


그렇게 학생들이 했던 말을 잘 기억해 두었다가 적재적소에서 유머로 사용하는 댄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수업은 늘 화기애애한 경향이 있다. 댄 할아버지는 오랫동안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이런 영어 수업을 무료로 진행해 오셨다.


이민자와 유학생들이 낯선 나라에서 잘 적응하도록 돕고 싶은 마음에 이런 봉사활동을 시작했다는 댄 할아버지는 최근에 우크라이나에서 넘어온 난민 가족을 직접 돌보고 있다. 그는 직접 토론토 공항으로 가서 난민 가족을 픽업해 자신의 집으로 데려왔고, 새로운 직업을 얻을 때까지 이들을 돌봐주는 봉사를 하고 있다.


나와 다른 학생들은 이런 댄을 캐나다에서 만난 '선한 사마리안'이라고 부른다.


'선한 사마리안'이란 용어는 성경에서 나왔다. 선민사상에 젖어있던 성경 속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천하다고 멸시하곤 했는데 어느 날 유대인 율법학자들이 예수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까?"

그러자 예수가 대답했다.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해라."

율법학자가 다시 물었다. "그러면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이때, 예수가 대답 대신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다.


한 유대인 상인이 여리고라는 도시로 가다가 강도를 당하게 되었다. 초주검이 된 상태로 길에 누워 있던 그를 유대인 성직자가 지나가다가 발견했지만 무시하고 지나쳐버린다. 또 다른 유대인 역시 상인을 발견했지만 자신도 강도를 당할까 두려워 줄행랑을 치고 만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멸시하는 사마리아인이 그를 발견하고 그를 여관에 데려가 치료해 준다. 그리고 떠나기 전 여관 주인에게 돈을 더 주며 이 유대인 상인을 자기 대신 돌봐줄 것을 부탁한다. 심지어 돈이 더 들면 자신이 돌아오면서 여관에 들러 갚겠다고까지 말한다.


여기에서 나온 용어가 바로 '선한 사마리안'이다.


스승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댄을 초대해 한식을 대접해 드린 날. 잡채를 무척 좋아하셔서 따로 포장해 드리기도.




댄이 선한 사마리안이라면 66세의 네덜란드 이민 2세대인 주디 할머니는 '유쾌한 사마리안'이다.


키가 거의 180 가까이 되는 장신의 주디 할머니 역시 교회에 다니는 분으로 한국인을 대상으로 독서 클래스를 운영하고 있다. 검은 머리카락은 한 올도 없는 은발의 주디 할머니는 항상 웃음기 가득하고 씩씩한 말괄량이 여성이다. 런던 외곽에서 남편이 농장을 하고 있는 주디는 일주일에 한 번 런던에 와서 자폐 어린이를 교육하고 놀아주는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그리고 런던에 온 김에 런던에 사는 한인 여성들에게 무료로 책을 선물하고 함께 원서 읽기를 하고 있다.


긍정적인 열정이 넘치는 주디 할머니는 주변을 환하게 밝혀주는 햇살 같은 사람이다. 주디 역시 유학생들에게 영어 독서 클럽을 봉사차원에서 오랫동안 해 오고 있다. 올해 초, 그녀의 학생이 한국으로 돌아갔는데 그 학생의 초청으로 주디 할머니 부부는 올 가을에 한국으로 3주간 여행도 떠난다고 한다.


주디는 진심으로 한인 여성들과 교류하며 우정을 만들어나가는 걸 기뻐하는 분이다. 이분 역시 이런 자원 봉사의 일차 목적은 기독교 전파지만 우리에게 무턱대고 종교를 강요하진 않는다. 우리는 만남의 시간 두 시간 가운데 한 시간은 책을 읽지만 나머지 한 시간은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데 보낸다. 같은 여성이라 공감대가 많이 형성되기도 하고, 여성 특유의 수다 스킬은 인종 불문하고 공통인 모양인지 여성들끼리 정말 재미있게 수다를 떨게 된다.


이곳에서 만난 친절하고 유쾌한 백인 할아버지와 할머니들 덕분에 나는 캐나다라는 나라에 가진 처음의 차가운 이미지가 봄 눈 녹듯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그 어떤 영어 수업보다 이 분들과의 만남이 가장 효과적인 영어 공부가 되고 있다.


가장 좋은 영어 선생은 바로 '관계'와 '우정'이란 걸 이곳 캐나다에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영어 말하기에 자신감이 생기니 이제는 어디를 가도 현지 사람들에게 자신감을 가지고 임하게 된다. 자신감이 생기니 여유가 따라오고 그 여유는 나에게 타인에 대해 친절할 수 있도록 에너지를 만들어 준다. 그래서 내게 조금은 데면데면 대하는 다른 캐네디언을 만나도 먼저 손 내밀고 인사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차갑게 구는 캐네디언이 알고 보니 그저 소심하고 수줍어서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고.....


한국이든, 캐나다이든, 어디를 가든, 나쁜 사람들은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보이지 않는 곳에서 선하고 밝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기에 나에게 세상은 여전히 살아갈 만한 좋은 곳이다.


캐나다에서 좋은 사람을 만나고 싶다면 나는 이렇게 권하고 싶다.


우선,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친해지세요. ㅎㅎㅎ


제가 만난 모든 캐나다 노인분들 정말 멋지고 정정하고 따듯했답니다 :-)


스트랫퍼드에서 만난 96세 할아버지와 92세 할머니. 시종일관 유쾌하고 젠틀했던 노부부를 보며 나도 남편과 저렇게 늙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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