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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네스 Nov 02. 2020

판도라의 상자

내가 몰랐던 남편의 이야기

남편을 사랑하는 내 감정은

다시 말하면 관계에 대한 집착이자 의지다.


결혼 전, 청첩장을 돌리며 남편이 사랑하는 친구들이

전여자친구와 추억을 함께한 모임이라는 것을 알았다.


충격, 배신감과 질투심이 내 자존심과 뒤죽박죽 섞여

결혼을 못할 뻔 한 적도 있다.


사건 하나로 끊어내기엔 함께 쌓아온 추억들이 마음 한 켠에 남았다.

남편과 모임 친구들의 사과를 들으며 결혼을 시작했다.


결혼의 일상은 행복하다.

내가 꿈꾸던 가족의 울타리에서 남편과 일상을 보냈다.


우연한 계기로 판도라의 상자를 열어보지만 않았다면

더없이 충만했을 내 결혼 일상이었다.


그 날은 유독 날이 흐렸다.

가을바람 선선히 불고 맑은 하늘아래 낙엽이 흩날리던 어제와 달리

우중충한 하늘에는 여우비가 내렸다.


모임에서 전여자친구의 얘기를 꺼낸 당사자의 결혼이 있었다.

많은 망설임 끝에 남편과 결혼식장을 방문했다.

마음은 좋지 않았다. 한 구석 불편한 마음을 숨겼다.


귀가 후 피곤한 남편이 낮잠을 들고

남편의 코고는 소리를 안주삼아 와인을 한두모금 마시던 차에

우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아 핸드폰을 뒤적였다.


우연을 가장한 의도를 숨기며 남편과 전여자친구를 검색어로 적어본다.

치밀하지 못한 남편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주는 포스팅 한 개.

그녀와 남편은 5년을 함께 한 사이였다.


그녀와 남편의 시간은 그들과 함께했고

남편의 대학생활부터 취준까지를 함께했다.

남편에게 제일 행복했던 기억으로 꼽히는 학창시절의 기억들은 연애기간과 겹쳤다.


마음이 쓰리고 심장박동이 빨라진다.

과거의 인연 이제와서 그 끈을 다시 잡은 것도 아닌데

남편이 지운 과거를 나는 지우지 못한다.


남편의 핸드폰을 열어보았다.

더더욱 해서는 안되는 일이었다.

그날따라 기억의 뿌리를 뽑자며 이상한 결심을 했다.


페이스북 메세지에는 그녀와의 기록이 남아있다.

애칭을 부르며 꿀떨어지는 그들의 대화 기록 속에

서로를 향한 애정과 응원과 위로가 녹아있다. 


첫 사랑과 삶의 모든 부분을 함께하게 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지만

나는 이성적이지 못하게 남편의 과거가 슬프다. 


내가 부르던 남편을 향한 애칭이 그녀가 부르던 그것과 닮아있어 싫어졌다.

내가 만지던 남편의 몸 구석구석이 그녀가 만지던 그것이라 싫어졌다.

내가 소개받았던 남편의 친구들이 그녀를 기억하고 있기에 싫어졌다.


그녀와 5년의 기록을 함께한 그들은

남편의 결혼 소식에도 나보다는 그녀를 아쉬워 했다.


진주커플을 응원했다며 그녀와 함께 살던 그녀의 룸메이트가 농담한다.

그들의 카톡방에서 우리의 결혼은 충격과 변화였고 유희였다.

전여자친구의 친구였을 그들에게 수줍게 인사를 건넸던 나와의 첫 만남에서

그들은 어떤 기분이었을까? 나는 얼마나 우습게 여겨졌을까?


배신감이 커졌다.

남편의 잘못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복합적이고 그보다 미묘한 감정이라

속으로만 울컥하고 곤히 자는 남편을 괜히 쿡쿡 찔렀다.


5년 동안 그들을 위해 자리를 비워줘야 했다며

농담하는 그녀의 룸메이트가 밉다.

이렇게 깊이있게 통수를 때린 그들이 내 아픔엔 무관심하다는게 서럽다.


무엇보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되고 

남편을 탓할 수 없다는 게 마음이 쓰리다.


오늘은 최악의 날인데 

비적비적 일어나 애교를 부리는 남편은 밉지 않다.

나를 향한 애교에서 그녀와의 추억이 연상될 때마다 남편에게 심술을 부려본다.

그래도 여전히 슬프다.


아픈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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