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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an 30. 2020

집 떠나면 개고생이다.

아들 넷과 떠나온 뉴질랜드 첫날.


39.2도

공항에 도착했을 때, 1호의 이마가 불덩이처럼 달아올랐다. 며칠 전 2호가 중이염 때문에 고열을 앓았기에 제발 이번만큼은 1호와 3호에게 옮기지 않고 지나가 주기를 바랐지만, 모든 걸 똑같이 겪는 세 쌍둥이 엄마에게 그 작은 바람마저 지나친 욕심이었나 보다. 서둘러 1호에게 해열제를 먹였다. 다행히 가방 안에는 여분의 해열제와 감기약, 그리고 체온계가 있었다. 불안한 마음으로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시간만 11시간 반

아이들과 장거리 비행은 처음이었다. 지난번 괌에 다녀왔을 때 새벽 비행기에서 잠을 자지 못하고 울었던 아이들 때문에 밤을 꼴딱 새우고 말았는데, 그래서 이번 비행을 앞두고 걱정을 많이 했다. 하필 남편이 사내 교육에 들어가서 함께 가지 못하게 되었다. 도무지 나 혼자 아들 넷을 데리고 비행기에 오르기는 힘들 것 같아, 친정엄마에게 부탁을 드렸다. 다행히 엄마가 며칠간 함께 있어주기로 했다. 친정엄마는 큰애, 3호와 함께 비행기 반대편에 앉았고, 나는 1,2호와 창가 쪽 자리에 앉았다. 밤이 깊어지자 3호까지 덩달아 열이 올랐다. 아이들을 간신히 달래어가며 이번에도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오클랜드 하늘은 유난히 맑았다. 이십 년 만에 밟아보는 오클랜드 땅에는 싱그러움이 가득했다. 나에게 오클랜드는 태어나서 처음 마주했던 첫 외국이었다. 두려움과 설렘으로 가득 차 첫 외국 땅을 밟았던 열일곱 소녀는 서른일곱의 아줌마가 되어 이곳으로 돌아왔다. 잊고 있었던 유년의 기억들이 온몸에 천천히 스며들었다. 다시 그때로 돌아간 것처럼 두렵고 설렜다. 이십 년 전의 그때처럼, 두렵고 설렜다.      






가장 먼저 집으로 이동했다. 가계약을 해놓은 집에서 부동산 담당자를 만나 실제 계약을 해야 했다. 계약서에 대해 설명받고 사인을 했다. 4주 치의 디파짓(bond)을 걸고 집 내부 점검(inspection)을 했다. 그런데 집 군데군데에 바퀴벌레가 기어 다녔다. 벽 모서리에는 거미줄이 쳐있었다. 태어나 바퀴벌레를 처음 본 아이들은 꺄악 소리를 지르며 집 이곳저곳을 뛰어다녔다. 도무지 당장 들어가 살 수 없는 수준이었다. 인터넷 부동산 사이트 (트레이드미)에서 보았던 집 사진은 포토샵으로 위장된 사진이었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당장 임시 숙소를 알아볼 수는 없다. 지난밤 한 시간도 제대로 자지 못한 탓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열이 나는 아이들도 덩달아 짜증내고 보챘다. 어떻게 해야 하나 걱정이 밀려들었다. 막막함에 눈물이 고였다.    



  

결국 부동산 담당자(Richard)에게 컴플레인을 했다. 뉴질랜드는 오래된 집들이 많아 바퀴벌레가 있다는 글을 읽고 사전에 방역 요청을 했었는데, 그는 이전에도 어린아이가 살았던 집이라며 나의 요구를 몇 번이고 거절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바퀴벌레가 기어 다니는 걸 본 Richard는 결국 할 말이 없었는지 방역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 그런데 문제가 발생했다. 방역과 클리닝이 완료되고 나서 4~5시간은 집을 비워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프고 지친 아이들을 데리고 늦은 시각까지 밖에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별 수 없이 한두 시간 동안만이라도 아이들과 친정엄마를 근처 맥도널드 놀이터에 데려다주었다. 그리고 나는 서둘러 사전에 약속한 가전, 가구업체에 방문하기로 했다.       




이곳 뉴질랜드는 배달이 오래 걸리는 편이다. 이곳은 목재를 100% 수입에 의존하기 때문에 가구가 꽤나 비싼 편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없는 휑한 집에서 아이들과 잘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최대한 중고로 가전, 가구를 구매하기로 했다. 출국 전 뉴질랜드 교민 사이트(Korea post)에 괜찮은 중고물품이 올라올 때마다 미리 연락해서 흥정하고는 했는데, 운이 좋게 냉장고, 세탁기, TV 등 큼지막한 가전제품을 한꺼번에 판매하는 사람과 연락이 되어 한국인 운송업체를 통해 그날 배달을 받기로 했다. 식탁과 책상도 중고로 구입할 수 있었고, 소파와 매트리스는 근처의 저렴한 중국인 가구매장에서 다행히 당일 배달을 해주기로 했다. 휑하게 비어있던 커다란 집이 조금씩 채워졌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아이들을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아직 마르지 않은 카펫을 밟자 양말이 젖어들었다. 아이들과 나는 간신히 눕힌 딱딱한 매트리스 위에 몸을 모로 뉘었다. 싸늘하게 식은 오클랜드의 밤공기가 코끝에 닿아왔다. 쌔근쌔근 식은땀을 잔뜩 흘리며 곤히 잠든 아이들을 바라보고 있자 나도 모르게 울컥 눈물이 밀려들었다.

아늑한 내 집을 떠나 이 낯선 타국의 땅에 나는 왜 왔을까.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남편을 떠나 기러기가 되기로 결심한 걸까.

첫날부터 무너져버린 나의 나약함은 가녀린 공기에조차 바스라 질 정도로 연약한 것이었던가.

두 눈에 뜨거운 눈물이 고였다. 앞으로 잘 헤쳐 나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몸은 지쳐있었지만 의식은 또렷해져 왔다.

현실을 부정할 수는 없다.

엎질러진 물을 주어 담을 수는 없다.

이를 악물었다. 지금 내가 해야 할 일들을 떠올렸다.

그리고는 잠든 아이들을 뒤로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세 개의 대형 이민 가방과 한 개의 대형 캐리어. 풀지 못한 거대한 짐들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다 갑자기 아이들을 데리고 이 많은 짐을 가지고 온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터져 나왔다. 수화물에서 짐을 찾고 2대의 세 쌍둥이 유모차와 2대의 카트에 네 개의 대형 이민 가방을 낑낑대고 끌던 오늘 아침의 내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나란 사람은 내가 생각해도 참 무식하고 용감한 사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오늘의 힘듦도 이렇게 지나가지 않았던가.

휑하게 비어있던 집도 조금씩 사람의 온기로 채워지지 않았던가.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오늘의 힘듦도 조금씩. 조금씩.     




모두가 잠든 밤,

그렇게 나는 짐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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