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테두리는 자신이 걸어온 딱 그만큼의 영역으로 존재한다. 지금까지 걸어왔던 내 삶의 동선에 변화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내 일상은 네모난 테두리를 빙그르르 돌다가 또다시 원점으로 가게 될 것이다. 삶의 반경이 넓다고 그 인생이 반드시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람마다 추구하는 가치가 다를 것이고 그 안에서 건져 올린 의미가 다르게 와 닿을 것이다. 한때 나는 그 작은 테두리 안에서 만족하지 못하는 나 자신에게 화가 난 적도 있었다. 엄마라는 자리에만 만족하지 못하고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항상 만들어내려는 나 자신이 버거웠다. 과정은 늘 그렇듯 고통을 남겼다. 그러나 고통의 끝에 마주한 성취는 나라는 성질의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가치가 되어 돌아왔다.
이 성취란 단지 성공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세 쌍둥이를 출산하고 8년간 몸담았던 대기업을 나와야 했을 때, 지난 나의 커리어를 포기하고 한 사람으로서의 기능에 상실감을 느껴야 했을 때, 24시간 집에 갇혀 아들 넷 독박 육아를 견뎌야 했을 때, 날카롭게 파고드는 아기들의 울음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 글이라는 매개로 내 가슴의 찌꺼기를 쏟아내며 삶을 버텨내었을 때, 지난 4년간 걸어왔던 지난한 시간들은 삶이 무엇인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며 살아야 할지를 깨닫게 해준 전환점이 되었다. 그렇게 나는 결심했다. 비록 세상에서 정의하는 성공이라는 기준에 걸맞은 삶을 살지 못하더라도, 내게 주어진 삶의 테두리 안에서 내가 생각하는 작은 삶의 가치들을 실현하며 살자고 말이다. 늘 배우고 도전하며 깨어있고 싶었다. 생각하고 느끼며 매 순간 후회 없이 살아내고 싶었다. 두 권의 책을 연달아 출간하고 갑작스럽게 계획한 뉴질랜드행은 내게 그런 종류의 도전이었다. 지금 떠나지 않는다면 정말 두려워질 것 같았다.
뉴질랜드에서의 삶은 행복했다. 어디든 넓게 펼쳐진 초록색 잔디를 마구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깊게 풀내음을 맡고 있을 때마다, 밤하늘을 빼곡히 채운 별들을 올려볼 때마다 나는 영혼이 정화됨을 느꼈다. 할 수 있는 한 많은 일들을 해보고 싶었다. 낯선 땅에서 시작하는 삶에 대한 불안감보다 설렘이 내겐 늘 더 컸다.
유학생 엄마로서도 할 수 있는 것은 많았다. 큰애 학교에서는 인터내셔널 학생 부모를 위한 수업을 매일 아침 진행하고 있었다. 나는 기회가 될 때마다 이 수업을 들었다. 다른 나라에서 온 엄마들도 사귀었고 우리는 비슷한 공감대를 나누며 친밀해졌다. 연이어 커뮤니티 호스피스 샵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곳은 이웃인 JJ가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곳이었다. 현지인들과 함께 일하는 거라 영어가 걱정되었지만 JJ는 내게 충분히 잘할 수 있을 것이라며 나를 응원해주었다. 이외에도 도서관에서 열리는 수업을 듣거나, 현지인들의 온라인 커뮤니티인 Meet up을 통해 관심이 가는 지역모임에도 나갔다. 세 쌍둥이를 유치원에 보낸 하루 6시간은 내게 뛰어다녀도 모자를 바쁜 자유였다.
“유학생 엄마로도 이미 충분해. 더 이상은, 힘들게 살지 마.”
어느 날 갑자기 내가 대학원에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남편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한국에 있는 부모님과 동생도 또 다른 무언가를 벌려보겠다는 나를 말렸다.
“유학생 엄마임에 불구하고 당신처럼 이렇게 바쁘고 알차게 하루를 보내는 사람이 어딨어. 그것도 아들 넷을 데리고 혼자 왔는데 말이야.”
“언니, 나였다면 매일 관광 다니고 놀러 다녔을 거야. 왜 항상 더 힘들게 살려고 해. 언니는 지금으로도 충분해. 그냥 계획한 만큼 3년만 지내고 와...”
내가 대학원을 고민하게 된 것은 아이들의 학비 문제였다. 당장 내년에 뉴질랜드 기준으로 초등학교 입학하게 될 세 쌍둥이를 고려하면 4명의 인터내셔널 학비가 지출될 예정이었다. 적지 않은 금액이었다. 아니, 내게는 정말 큰돈이었다. 조금 더 장기적으로 이곳에 머물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3년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가게 되면 중학교 입학을 하게 될 큰애가 자유로운 뉴질랜드 교육환경에서 경쟁이 심화된 한국 교육의 틀 안에 다시 잘 적응할 수 있을지, 솔직히 이야기하면 그것도 걱정이었다. 나는 아이들이 행복했으면 했다. 경쟁하지 않아도, 굳이 사회가 정해놓은 코스대로 성장하지 않아도 행복한 삶, 자유와 삶의 가치들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8년간 근무했던 대기업에서 쫓기듯 나와야 했을 때 느꼈던 지난 삼십 년간의 삶에 대한 회의감을 내 아이들에게는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과연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아이들을 위해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이 질문에 대해 나는 지난 몇 달 동안 깊이 있게 고민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았다. 한국 경력을 살려 이곳에서 당장 취업을 하는 것과 대학원에서 공부를 하는 것을 고민했다. 한인 무역회사 한 곳과 면접을 보고 일을 해보자는 제안을 받았지만 아이들의 학비를 지원받을 수 있는 3년 워크 비자를 받기 힘든 소규모의 회사였다. 확실하게 공부를 선택하기로 했다.
유학원에서는 직장경력을 살려 비즈니스 대학원을 권유했다. Level 9 과정을 듣게 되면 당장 내년부터 아이들의 학비지원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러나 졸업 후 진로도 불투명했고 현지 기업보다는 한인(아시아계) 회사에 취업하게 될 확률이 높아 보였다. 또한 장기적으로 봤을 때 이민 비자를 획득하는데도 메리트가 없었다. 보통은 IT, 간호사, 유치원 교사 등이 향후 이민 비자를 준비하는 데 유리한 부족 직업군이었다.
교육대학원에서 유치원 교사 과정을 졸업하고 자격증을 취득하면 교사협회에 등록된 정교사가 될 수 있다고 했다. ECE과정으로 유치원생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가르칠 수 있는 자격증이라 향후 초등학교에서 근무도 가능하다. 새로운 공부를 하게 된다면 어떤 공부를 하고 싶은지 자신에게 물었다. 경영학과를 전공하고 지겨운 회사생활을 했던 내게 일개 회사원이라는 자리는 삶의 회의감을 안겨준 자리다. 또다시 비즈니스를 공부해 그 자리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교사가 되는 것은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교사라는 자리는 누군가에게 선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자리다. 자신을 위해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사랑을, 그 에너지를 누군가에게 전하는 삶도 즐거운 일이다. 아이들을 키우며 한때 아동심리나 행동에 대해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종종 했었는데 처음에는 내 아이들을 잘 키우고 싶은 마음이었다. 다시 공부를 한다면 이쪽이 더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현실에 맞춰하는 선택이 아닌 정말 내 가슴을 움직이게 하는 공부를 하고 싶었다.
“IELTs 7.0 (PTE 65) 만들기가 쉬운 줄 아세요? Reading, Writing, Speaking, Listening 모든 영역에서 7.0 이상이 나와야 가능한 코스예요. 애기 엄마라 현실적인 조언을 해드리고 싶은데.. 있잖아요. 제 지인은 한국에서 영어강사였는데도 2년을 준비했는데도 결국에는 이 점수가 안 나와서 포기했어요. 간호사와 유치원 교사만 IELTs 7.0 이상을 받아야 해요. 그만큼 어렵다는 거죠. 이런 얘기해서 미안한데, 겂 없이 시작하는 게 아니에요.”
이 과정을 준비해보고 싶다고 이야기하자 한 상담자는 내게 이런 말을 던졌다. 그녀의 뼈 때리는 조언이 가슴속을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아직 공부를 시작하지도 않은 나를 당신이 얼마나 알기에 이런 서슬 같은 말을 함부로 던지는 것인지, 정작 이 말을 뱉고 있는 이 사람은 자기 앞에 있는 타인에 대한 일말의 배려심이라도 있었을지, 그녀의 한 마디는 내가 딛고 있는 이 자리가 아들 넷 엄마, 서른일곱의 한 무력한 아줌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현실을 다시 한번 마주하게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화가 솟아올랐다. 이 화는 그녀를 향한 것이 아니었다. 바로 나 자신에 대한 화였다. 그런 말을 듣고도 공부할 엄두를 못 냈던 매 순간 비겁한 변명을 찾았던 나 자신에 대한 분노였다. 그날부터 바로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마침 코로나로 뉴질랜드 국경이 봉쇄되고 외출금지령이 내려졌다. 아이들이 학교/유치원을 갈 수 없었기에 공부를 할 수 있는 시간은 더욱 없었지만 최선을 다했다. 아이가 잠들면 공부를 했다. 국경 봉쇄로 언제 다시 만나게 될지 모르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 막막한 현실, 불안함을 공부를 하며 쏟아냈다. 나는 에너지를 쏟아야 사는 사람이었다. 아들 넷 육아의 지난한 시간들을 글쓰기를 하며 버텨왔던 것처럼 집중할 무언가를 찾고 그것에 마음속의 온갖 부정적인 감정들을 쏟아내야 평온함을 느꼈다. 그렇게 매일 밤을 공부했다. 한 달 반이 지났다.
시티에 위치한 시험장에는 코로나 여파인지 학생들이 많지 않았다. 인도 남자, 브라질 남자, 중국 여자, 그리고 내가 한 방에 들어가게 되었다. 시험이 시작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스피킹 시험이 바로 시작되는데 이런 염소 목소리로 제대로 시험을 볼 수 있을지 불안했다. 불현듯 세 쌍둥이 2호가 떠올랐다. 아직도 영어를 하지 못하는 세 쌍둥이는 유치원에서 발표를 할 때마다 기가 죽어 한 마디도 하지 못한다고 했는데, 웬일인지 2호가 얼마 전 발표를 잘했다고 담임이 칭찬을 해주라고 이야기한 적이 있었다.
“시원아, 어떻게 그렇게 발표를 했어? 영어도 아직 서투른데 정말 대단해. 우리 아들.”
“엄마, 그냥 용기를 냈어. 용기를 내면 될 것 같았어.”
대수롭지 않은 아이들의 말은 가끔씩 심장에 쾅하고 박힌다. 아이의 그 말이 내게는 그랬다. 용기라는 말. 이제는 내 삶과 영영 멀어져 버렸을 것 같은 용기라는 말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듯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슴이 세차게 요동치자 나는 ‘용기’를 떠올렸다. 그래. 결과가 어떻든 용기를 내자. 한 번에 다 패스할 수는 없을 거야. 첫 시험이니 즐기자. 그동안 열심히 했으니 뭐 한 영역이라도 패스하겠지. 아님 말고!
어느 순간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그렇게 나는 세 시간을 하얗게 불태웠다. 시험을 마치고 시티를 홀로 걷는데 청바지에 책가방을 메고 도시 한복판을 걷고 있는 거울에 비친 어색한 내 모습이 눈물 나게 예뻐 보였다. 5개월 전 한국에 있던 나는 과연 상상할 수 있었을까. 5개월 후 뉴질랜드의 어느 대학에서 내가 영어시험을 보게 될 줄이라고...?
얼마 후 시험 결과가 나왔다. 첫 시험에 정말 운이 좋게도 나는 모든 영역에서 IELTs 7.0 (PTE 65) 이상의 점수를 받게 되었다. 정말 운이 좋았다. 그저 운이었다. 시험 결과를 보자마자 나는 거실을 캥거루처럼 방방 뛰었다. 아이들은 뭔지도 모르고 함께 내 뒤를 따랐다. 그렇게 우리는 한참을 거실에서 뛰어놀다가 우르르 한쪽으로 뒹굴어졌다. 거실에 누워 생각했다. 내게 주어진 삶이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었다. 단번에 받은 좋은 점수도 감사했지만 조금씩이라도 무언가 만들고 있는 나 자신에, 여전히 삶의 희열을 느낄 수 있는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다는 확신에 감사했다.
이제 큰 산 하나를 넘었다. 그러나 현재 가디언 비자로 체류 중인 내가 대학원에 가기 위해서는 학생비자로 비자 전환이 필요한데 아이들이 많은 나는 더욱 쉽지 않다고 한다. 한국에 들어가 재신청을 해야 한다고 한다. 최악에는 이 비자가 만료되는 내년 3월까지 기다려야 할 수도 있다. 여전히 내게 주어진 삶은 불투명하다. 잘 되어 대학원에 진학한다고 하더라도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공부를 하는 것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두려움보다는 설렘이 앞선다. 다시 캠퍼스를 활보하게 될 나의 모습이 두 눈에 그려지고, 아이들에게 짜증 내며 과제를 낑낑대고 있을 나의 모습에 미소가 지어진다. 그래서 나아가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