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의 의미에 대하여.>
그 애로부터 이별통보를 받던 날, 그날은 잔인할 정도로 눈이 부신 어느 이른 봄날이었다. 햇살이 너무 부셔서, 날이 너무 좋아서, 이별을 건네던 그 애의 작은 표정까지 또렷이 기억나서, 그래서 더 아팠다. 내 이십 대는 온통 그 애와의 기억들로 얼룩져있다. 처음 그 애에게서 고백을 받던 날, 그의 마음을 거절하고 그냥 친구가 되기로 했던 날, 변함없는 그의 마음에 내 마음이 처음으로 움직였던 날, 달빛이 내려앉은 가로등 아래에서의 첫 키스. 그렇게 우리는 4년을 만났다. 대학에 들어가 캠퍼스 커플로 연애를 시작해서 그 애가 군대에 들어가 제대를 하고, 내가 어학연수를 다녀올 때까지, 그렇게 우리는 나란히 풋내 나던 신입생에서 취업준비생이 되었던 그날까지, 사랑했다.
“솔직히 말해 이제 다른 사람을 만나보고 싶어.”
그의 이별 사유는 잔인했다. 그 말이 내게는 너무나도 잔인해서, 이제 우리에게 더 이상의 작은 여지조차 남아있지 않은 것 같아서, 차라리 희망고문이라도 받고 싶지만 그렇게 할 수 없는 냉정한 그의 태도에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의 마음을 이해해보려 노력했다. 첫사랑이었고, 항상 함께였고, 이제 취업을 하게 되면 나를 책임져야 할 것 같은 부담감이 들었다는 그의 이야기가 가끔은 이해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미 어느 정도 마음의 정리가 끝난 것 같은 담담한 그의 표정이 서글펐다. 그것은 지난 4년이라는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느낌이었다.
몇 날 밤을 침대에 웅크린 채 울었는지 모른다. 눈이 퉁퉁 부은 채로 하루 종일 이별 노래를 들으며 통곡을 했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술을 먹고 그에게 전화를 걸어 질척거린 후 그 다음날 이불 킥을 날리기도 했다. 그를 만나며 한 번도 이별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의 사랑은 내가 아닌 그 애에게서 시작되었지만 그의 마음이 싸늘히 식어갈 동안 내 가슴은 더욱 뜨거워졌다. 그 애와 이별한 후 세상이 무너져버린 것 같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 애 아니면 내 인생은 안 될 것 같았고, 그 애를 사랑한 만큼 다시 누군가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러나 세차게 휘몰아친 감정의 소용돌이가 잦아들자 그를 향한 사랑이 무엇이었는지, 그를 향한 내 감정의 본질은 어떤 것이었는지 헷갈렸다. 가끔씩 마음이 일렁였다. 그것은 사랑이었을까. 집착이었을까. 욕심이었을까. 익숙해진 그의 몸짓이었을까. 외로움이었을까. 배신감에 타오른 분노였을까. 아니면 그저 지나간 추억에 대한 연민이었을까...
사랑은 사랑으로 잊혀졌다. 그 애와 이별을 겪고 정확히 2년 후 어느 기차 안에서 한 남자를 만났다. 다시는 오지 않을 것 같았던 얼어붙은 내 가슴에도 따뜻한 봄이 찾아왔다. 사랑은 계절처럼 돌고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리고 영원할 줄 알았던 그 애와의 사랑도 차가운 겨울의 세계 속에 눈송이처럼 희미하게 흩날려버렸다. 불꽃처럼 활활 타올랐던 새로운 사랑은 강렬했고 뜨거웠다. 만난 지 고작 2개월 만에 나는 엄마가 되었고 위험할지도 모를 이 새로운 사랑에 과감히 인생을 던졌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서로에 대한 믿음이 있었고 충동적이었지만 뜨거웠던 사랑의 결실에 대한 일종의 책임감도 있었다.
너와 나의 아이가 생겼다는 것.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의 의미는 더욱 다채롭게, 깊이 있게 빛났다. 그리고 어린 내가 가졌던 사랑에 대한 지난 생각이 거대한 우주의 티끌만큼이나 연약하고 치기 어린것이었다는 걸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 깨달았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 태어나서 경험해본 어떤 일보다 까다롭고 힘들며 예측이 불가능했다. 준비 없이 부모가 되었기에 모든 것이 불안하게 느껴졌다. 나와 남편은 아기의 울음소리에 벌벌 떨며 자는 아기를 최대한 깨우지 않기 위해 까치발로 거실을 걸었고, 아기가 아프면 전전긍긍하며 노트에 아이의 체온을 세심히 기록했다. 세 쌍둥이가 태어났을 때는 쪽잠을 자며 새벽 수유 당번을 돌아가며 맡았고, 함께 아기들을 재우고, 먹이고, 씻겼다. 아이들이 잠들 때면 잠시 밖으로 나가 함께 상쾌한 밤공기를 쐬거나, 방구석에 나란히 앉아 맥주 한 캔을 기울였다. 물론 현실이 그러하듯 모든 감정이 행복했던 것만은 아니다. 육아가 힘들 때면 남편이 가장 미웠고 애정과 증오의 경계에서 그를 바라보기도 했다. 우리는 부부이기 전에 동지였고, 같은 길을 걷는 전우이자 동반자였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의 삶과 삶에 깊숙이 배여든 채 서로의 삶이 되었다.
지난 십 년, 수많은 감정들이 세월 속에 스며들며 나에게 사랑은 더욱 확장되고 성숙한 의미로 다가왔다. 한 아이를 책임지려 했던 무모한 모험심도 사랑이었고, 가족이라는 견고한 울타리 안에서 쌓아 올린 서로에 대한 신뢰와 인내심도 사랑이었으며, 한꺼번에 찾아온 세 쌍둥이를 지키기 위해 내던졌던 목숨과 고통도 사랑이었고, 누군가를 위해 나를 헌신하고 기꺼이 나의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는 감정. 그것들도 사랑이었다. 서른일곱, 나에게 사랑은 이제 보다 복합적인 의미가 되었다. 세월을 온몸으로 맞은 나의 얼굴처럼 사랑도 함께 늙은 것 같다.
어쩌면 사랑에는 애초부터 조건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것이었다. 진정한 사랑에는 상대로부터 그만큼 받아야 한다는 질투와 욕심이 존재하지 않았다. 사랑한다는 행위. 그것으로부터 파생되는 어떤 결과나 기대 없이 그 행위 자체로 행복한 것, 그것이 사랑이었다. 아이들을 바라볼 때마다 조건이 필요하지 않은 사랑이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생각한다. 아이는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사랑스럽다. 심지어 아기의 발가락 사이에 자리 잡은 조그마한 떼, 아기의 머리에서 솔솔 올라오는 쉰내, 작은 입에서 뿜어져 나왔던 아이의 가녀린 들숨과 날숨, 씰룩거리는 콧구멍마저도 사랑스럽다. 지난한 육아를 함께 했던 남편의 얼굴도 그렇다. 아기에게 팔베개를 한 채 피곤에 지쳐 곤히 잠에 빠졌던 남편의 퉁퉁 부은 얼굴, 아이들에게 화상통화로 열심히 책을 읽어주는 그의 정다운 목소리, 아이들이 보고 싶어 붉게 눈시울을 적시는 그의 얼굴도 내게는 눈물겹게 사랑스러운 삶의 단면들이다.
얼마 전 나는 이곳 뉴질랜드에서 홀로 결혼 10주년을 맞이했다. 십 년 전 첫애를 뱃속에 임신한 채 불룩한 배로 결혼식장에 들어섰던 스물일곱의 풋풋했던 내가 스쳐 지나간다. 그와 함께한 수많은 밤이 떠오르고, 한 가정을 지탱하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계절이 떠오른다. 지난 십 년간 남편의 얼굴에는 포동포동 살이 붙었고, 내 머리에는 희끗한 흰머리가 내려앉았다. 풋풋했던 신혼부부는 어느새 중년을 코에 앞둔 아들 넷의 부부가 되었다. 세월에 따라 늘어가는 얼굴의 주름만큼이나 우리의 사랑도 깊게 익어가고 있다. 불완전한 부모였던 우리가 쌓아 올린 가정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아이들은 사랑을 배우고 그 사랑을 또다시 누군가에게 전할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들이 우리 곁을 모두 떠난 후 우리는 다시 둘이 될 것이다.
그때도 지금처럼, 거칠어진 그의 손을 따뜻하게 감싸 잡고 수십 년간 함께 걸어왔던 그 길을 그와 나란히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