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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Apr 27. 2020

삶이 힘든 이유

<모든 아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도대체 내 인생은 어디서부터 꼬여버린 걸까.’

한동안 이 질문에 사로잡혀 있었다. 얽히고설킨 실타래를 조심스럽게 풀어내듯 내 삶도 그렇게 바로잡아보고 싶었던 마음이었던 것 같다. 어렸을 적 꿈꿨던 미래의 모습처럼 지금의 나의 그림을 도려내고 색을 입혀 내 인생을 조금 더 근사한 그림으로 바꿔보고 싶은 이기적인 마음이기도 했다.



      

내 인생이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한 건 십 년 전 남편을 만난 부산행 기차에서였다. 기차에서 만난 남자와의 첫날 밤에 아기가 생겼고 당시 대기업의 신입사원이었던 나는 사랑에 빠진 지 단 두 달 만에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도 모른 채 엄마가 되었던 스물일곱의 어린 엄마는 엄마보다는 나의 삶이 중요했던 철부지였다. 그렇게 미친듯이 일했다. 그러나 일과 육아, 두 마리 토끼를 잡고 싶었던 열혈 워킹맘으로 고군분투하며 삶이 어느 정도 안정적인 궤도에 진입했다고 느꼈을 즈음, 느지막이 계획한 둘째 임신에 세 쌍둥이가 찾아왔다. 병원에서는 산모와 아이에게 위험한 출산이라며 선택 유산을 권유했지만 아이들을 모두 품기로 결심을 하고 끝내 만삭의 주수까지 버텨 건강한 아이들을 출산했다. 하지만 시련은 끝난 게 아니었다. 출산 후 갑작스럽게 몸담았던 회사가 파산을 했고 하루아침에 실직자가 된 것이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8년을 몸담은 회사였다. 흔히 이야기하는 평범하고 바른 삶을 살아왔다고 자부했고 누구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치열하게 경쟁하며 살아왔는데, 그 순간 내 인생이 실패한 것처럼 느껴졌다. 한 사람으로서의 나의 기능은 사라져 버리고 이 사회 안의 나라는 사람은 아들 넷 엄마 그 이상, 이하도 아니라는 잔인한 사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걷잡을 수 없는 삶의 상실감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열등감에 사로잡히고는 했다. 그리고 습관처럼 지나간 시간들을 하염없이 되짚고는 했다.      




‘세 쌍둥이 육아를 포기하고 이직 제의를 받아들였어야 했을까.’   

‘세 쌍둥이를 낳지 않았다면 내 삶은 어떻게 되었을까. 아니, 아예 엄마가 되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결국 이 모든 것이 십 년 전 부산행 기차에서 남편을 만난 것 때문이야. 그날 밤 남편의 문자에 답장을 하지 말았어야 했어. 그와 만나지 말았어야 했어...’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을 부정해버리고 싶은 욕망. 어김없이 잡념은 현실에 대한 부정과 비난으로 끝이 나버렸다. 시간은 흘렀지만 여전히 나의 마음은 나이 먹지 못했고, 과거는 사라져 버렸지만 희미한 기억의 파편 아래 영원히 숨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렇게 되었다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 나의 바람처럼 과거를 되돌릴 수 있었다면 지금쯤 어떤 길을 걷고 있을까. 내 인생은 내가 바라던 대로 더 나은 그림이 되었을까. 결국 나라는 사람은 나에 만족하며 살 수 있었을까.....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나비효과>라는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삶의 불운들이 꼼꼼히 기록된 일기장에서 우연히 타임슬립을 발견하고 과거로 돌아가 그때를 바로잡으려 한다. 그러나 불운이라고 여겼던 삶의 어느 지점을 거슬러 삶을 역행하려 하면 할수록 더욱 끔찍한 불행과 고난이 그를 기다린다. 결국 영화의 마지막은 끔찍한 비극으로 끝이 난다. 자신의 삶이 나아지기를 바라며 스쳐온 지난 순간순간들을 교정하려 했지만 삶은 더욱 힘든 방향으로 비뚤어지고 만 것이다.   



   

어쩌면 삶이란 것 자체가 바로 잡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욱 어긋나 버리는 그런 성질을 갖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 안에도 수없이 일어나는 무수한 선택과 그에 따라 변화되는 작은 날갯짓. 이 작은 날갯짓들이 커다란 파도가 되어 남겨진 삶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몰고 가버린다. 어쩌면 삶이란 하나의 사건으로 인해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아주 미세한 작은 선택과 계기들, 그리고 당시의 마음가짐이 모이고 모여 변화된 것이어서 그것들을 완벽하게 분리할 수 없게끔 설계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무언가 강한 이끌림이 그것을 애초부터 거부할 수 없도록 만들어놓은 것 같다.     




그동안 아이 탓을 참 많이 하며 살았다. 아들 넷을 키우기로 한 것은 그 누구도 아닌 나의 결정이었고 내 몸에서 일어났던 변화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이들 때문에, 남편 때문에, 결혼이라는 제도 때문에, 내 삶이 어긋나 버렸다고 불평했다. 결혼이라는 현실은, 더욱이 이 나라의 제도 안에서 엄마라는, 여자라는 자리는 여전히 엄격하고 수많은 희생을 치러야 하는 그런 자리임에는 분명했다. 나 역시도 엄마가 되는 순간 나를 둘러싼 모든 삶의 결정을 엄마라는 척도에서 새로 시작하고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했으니까.    



  

그러나 지난 십 년간의 여정에서, 엄마라는 고되고 반복적이고 어쩌면 다소 초라한 자리에서, 나는 모순적으로 삶의 의미를 깨달았다. 내 삶이 이렇게 설계된 이유, 내게 온 시련의 의미, 그리고 마음가짐의 자세. 평범하고 고요했던 일상, 온전히 자신만을 위해 달려왔던 이기적이었고 미성숙했던 지난 나의 삶 안에는 누군가와 함께 사는 법에 대한 작은 이해도 삶의 가치에 대한 깊이에 대한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엄마가 되는 시간들은 매 순간 삶과 존재의 이유에 대해 생각하게 하였고, 이전에는 상상할 수 없었던 감정의 깊이, 분노, 상처, 환희, 기쁨을 경험하고, 이타적인 삶, 무조건적인 사랑, 그것의 가치에 대해 깨닫게 하였다. 그리고 이 시간들이 나를 얼마나 내면적으로 강하게 이끌었는지도 알고 있다. 그동안 단 한 번도 내게 주어진 시련을 회피해본 적은 없다. 무모했지만 맞섰고 두려웠지만 부딪혔다. 그것이 내가 내게 주어진 힘듦을 마주하는 자세였고 어쩌면 이것이 이 삶에서 풀어나가야 할 여전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서른일곱, 나를 바라본다. 또다시 무모한 여행을 시작한 위태로운 나를 바라본다. 외로움에 찌들고 여전히 불안한 나를 바라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나’였고, 여전히 ‘나’이며, 앞으로도 ‘나’ 일 것이라고 끄덕인다. 어쩌면 매 순간 도망칠 수 있었지만 도망치지 않은 것도 ‘나’였다고 이야기한다. 안정되고 고요한 일상 너머 더 깊이 있는 삶의 가치를 찾고 싶었던 것도 역시 ‘나’였다고 이야기한다.




세상에는 행복하기만 한 삶은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의 삶도 불행하고, 슬프고, 안타깝다. 그러나 모든 아픔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모든 시련에는 그 안에 숨겨진 본질적인 가치가 있을 것이다. 아픈 시간을 이겨내는 것이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듯, 그 의미를 발견하는 것도 자기 자신일 것이다. 그 시간을 회피하고 불평하고 주변을 탓할 것인지, 아니면 그것들의 의미를 되새기고 한층 더 성숙한 존재가 될 것인지는 온전히 자신의 결정일 것이다. 지난 시간, 불완전했던 나의 존재는 조금씩 성숙해지고 한 사람으로서 더욱 여물어졌다고 믿는다. 그리고 십 년이 지난 지금 나의 모습은 비록 과거 내가 원했던 화려한 삶의 모습은 아닐지라도 과거의 나보다 훨씬 더 성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일 것이라 생각한다. 삶이 힘든 이유. 나는 그 이유를 찾았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넘어지고, 배우고, 깨닫기로 했다.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내게 주어진 시련을 정면으로 바라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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