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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Aug 16. 2020

당신에게 나는 단지 며느리일 뿐인가요?

그에게 나도 한 사람이고 싶다. 열렬히.


“솔직히 난 홈씩(homesick)이 뭔지 모르겠어.”

십여 년 전 캐나다에 갔을 때도 그랬다. 집에 가고 싶다며 울먹이는 친구의 말에 가슴이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그런 말을 하는 친구가 나약해 보였다. 부모의 지원 덕에 걱정 없이 유학을 온 그들과 나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었다. 아빠 회사의 갑작스러운 부도로 유학 대신 시작했던 국내 인턴쉽. 그 회사의 상사의 권유로 나는 조금 늦게 유학길에 올랐다. 육 개월 동안 모아 온 얼마 되지 않은 월급과 어렸을 때부터 저축해온 적금, 그리고 아빠 몰래 엄마의 지원이 있었다. 그 피눈물 젖은 돈을 엄마에게서 받았던 날, 흔들리던 엄마의 눈동자를 잊을 수 없다. 끝까지 이기적인 년이라며 비난하던 언니를 뒤로 하며 심장이 세차게 철렁거렸던 그날도 선명하다. 그렇게 이를 악물로 시작한 캐나다행이었다. 주어진 시간을 허투루 쓰지 않기 위해 낮에는 공부를 밤에는 아르바이트를 했다. 독하게 버텨야 했다.      




여전히 나는 홈씩이 무언지 모르겠다. 십여 년 전 캐나다에 갔을 때는 각박한 현실이 어린 나를 혹독하게 몰아붙여 아주 작은 감정적인 사치도 허락하지 않았지만, 지금의 나에게는 절실함과 견줄만한 혹독한 현실의 무게는 없다. 이곳에서 꼭 버텨야 할 이유도 없다. 당장 돌아가더라도 나를 비난할 자는 없다. 그럼에도 나는 한국이 그립지 않았다. 생의 대부분을 살아왔던 곳, 태어나 소중한 유년시절을 보내고 가정을 이룬 곳, 그곳이 이상하게 그립지 않다.      




“한국에 돌아가고 싶지 않아...” 

입 밖으로 터져 나온 말을 어찌하지 못한 채 나의 얇은 입술은 자꾸만 달싹거렸다. 짧은 정적이 우리를 감쌌다. 나의 반응이 남편에게 차가운 비수가 되었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진심이었다. 그립다는 감정은 나에게 한국이 아니라 남편이라는 대상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참을 있다 남편이 공연히 너스레를 떨며 한 마디를 던졌다. 허허. 여보는 정말 별난 사람인 것 같다니까.     




남편이 미치도록 보고 싶은 건 사실이었다. 달려가 당장 그의 품에 안기고 싶고 맥주 캔을 부딪히며 껄껄 웃고도 싶다. 아이들과 커다란 원처럼 포개져 서로가 서로를 안고 마음껏 뽀뽀하고도 싶다. 그에게 달려간다. 호탕하게 웃어젖히던 그의 목소리, 커다랗고 유난히도 따뜻했던 그의 손, 보드라운 살결. 신기루처럼 찰나의 환영은 눈앞에 아른거리다 이내 사라져 버린다. 나의 모든 감각은 그 행위들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래서 당장이라도 잡으려고 뻗으면 잡을 수 있을 것 같지만, 그는 내게 여전히 기약 없는 사람일 뿐이다. 추억은 사라지고 감정만 남는다. 그립다는 마음만.     




그럼에도 이곳에 머물고 싶은 이유.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다. 새로운 삶이 주는 환기와 즐거움, 그리고 도전. 처음에는 이것들이 그 이유라고 생각했다. 내가 살고 있는 오클랜드 동쪽의 작은 마을은 어디로 가든 바닷가에 쉽게 도달한다. 탁 트인 해변과 고운 모래, 수평선 너머로 펼쳐진 청명한 하늘, 해안선을 수놓는 알록달록한 귀여운 집들,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뭉게구름을 올려다보며 나는 가슴속이 뻥 뚫리는 것처럼 시원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디든 차를 대고 풍광을 만끽했다. 차가운 바다에 발을 담가보기도 하고, 장화를 신고 호미로 조개를 캐기도 했다. 특히나 쏟아지는 햇살 아래서 읽는 한국 책은 꿀맛이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데리고 제법 먼 곳까지 차를 끌었다. 시내에 있는 동물원에 가기도 했고, 테마파크에 간 적도 있다. 가끔은 식당에서 외식을 했다. 남편 없이는 집 앞 놀이터에 조차 아이들을 데리고 나가기 겁나 했던 과거의 나는 온데간데없다.      






지난주에 시아버지의 생신이 있었다. 형님이 시아버지 생신상을 혼자 준비한다는 말을 듣고 가슴 한편이 무거워졌다. 형님에게 연락을 해 혼자 고생하는데 도와주지도 못해 미안하다고 이야기했다. 카톡을 보내고 오랜만에 긴 통화를 나누었다. 그래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결국 시아버지 생신 당일에도 한 번 더 페이스톡으로 전화를 했다. 먼저 사촌 지간인 아이들끼리 통화를 하고 자연스럽게 남편에게 형님을 바꿔달라고 이야기했다. 그런데 갑자기 시어머니가 전화기를 뺏어 들었다. 


“전화만 바꿔달라고 하면 뭐하냐. 고생은 네 형님이 다했는데...”

심장이 빠르게 요동쳤다. 당황스러운 마음을 진정시키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말을 이으려 노력했다. 

“맞아요. 너무 고생하셔서 한 말씀드리려고요...” 


통화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전화를 끊자 씁쓸한 여운이 몰려들었다. 내가 이곳에 머물고 싶었던 그 이유. 그 이유가 선명히 떠오르는 것 같았다. 그랬다. 그것은 구속이었다. 바로 내가 이곳에 있고 싶은 이유, 어디든 무얼 하든 그 중심에는 내가 있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껏 움직이며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는 삶. 결혼 십 년 만에 나는 온전히 자유를 누렸다. 비록 아이들과 함께 있는 시간은 그럴 수 없었지만 그 외의 시간에는 누구도 나를 간섭하지 않았다. 누구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고 누군가와 불편한 공기를 억지로 나눠 마시지 않아도 되었다. 단지 그것만으로 지난 시간 내 어깨를 짓눌러왔던 그동안의 무게가 사라져 버리는 듯했다. 한 사람이기 전에 책임만 강요되었던 며느리라는 자리. 그 자리를 박차고 떠난 해방감은 실로 컸다.     




‘기억해야 할 가족의 행사’

하얀 A4 종이 위에는 ‘기억해야 할 가족의 행사’라는 제목으로 아주버니를 포함한 가족들의 생일과 할머니, 할아버지, 증조모, 증조부 제삿날이 빼곡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결혼을 앞둔 어느 날 시어머니는 조용히 나를 불러 그 종이를 건넸다. 이후 나는 그 행사들을 챙기기 위해 사력을 다했다. 시어머니, 시아버지의 생신에는 어김없이 생신상을 차렸고 제삿날에는 이른 아침부터 시댁으로 건너가 하루 종일 전을 부쳤다. 왜 꼭 생신상을 차려야만 할까. 온 가족이 함께 외식을 해도 생일이라는 의미는 충분히 되새길 수 있는 것 아닐까. 생일이면 으레 근처의 맛집으로 우르르 몰려가 왁자지껄한 분위기에 밥을 먹었던 친정과 시댁의 모습은 사뭇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나로 인해 그 집안의 공기를 바꾸고 싶지 않았다. 더욱이 유난히 엄격하신 시부모님에게 반기를 드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내가 이 집안에 완벽한 타인이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건 시어머니의 달력을 우연히 보았던 날이었다. 정확히 어느 해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부터 시어머니의 달력에는 두 며느리의 생일이 적혀있지 않았다. 크고 작은 집안의 모든 행사를 습관처럼 달력에 메모하는 시어머니라는 것을 알기에 그것은 내게 실로 충격적인 일이었다. 시어머니에게 나는 가족이었던 걸까. 그저 며느리였던 것이었을까. 그날 나는 깨달았다. 며느리는 가족에 종속될 수 없는 완벽한 타인이라는 것을. 자신의 아들의 아내이고, 손주들의 어미인 것이지 그 이상은 아니라는 것을. 그녀에게 나는 한 인간이기 전에 단지 며느리라는 역할과 책임으로서만 존재한다는 것을.     




세 쌍둥이를 출산하고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았다. 그중 한 가지는 며느리로서의 무게였다. 사랑받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며느리는 되지 않기로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상처 받지 않을 만큼만, 주어진 역할 딱 그만큼만 움직이기로 했다. 아들 넷 엄마라는 자리를 버터야만 했기에 그 외의 감정적 노동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은 뜻대로 되지 않았다. 형님보다 음식을 덜 준비하게 되었을 때는 여전히 마음이 무거웠고 어린 아기들 때문에 움직이지 못했을 때는 마치 죄인이 된 것 같았다. 며느리라는 자리는 여전히 나를 억압하고 구속하였다. 


그러나 뉴질랜드에 온 후 나는 처음으로 지난 십 년간 나를 묶어왔던 그 사슬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꼈다. 어디든 무얼 하든 그 중심에는 내가 있었고, 원하는 것이 있으면 마음껏 움직이며 누구의 구속도 받지 않았다. 나는 누구의 아내, 누구의 며느리라는 역할에서 벗어나 온전한 나를 누렸다. 단지 그것만으로 마음이 가벼워졌다. 오랜만에 나를 찾은 기분이었다.     




‘뉴질랜드 102일 만에 지역감염 발생, 오클랜드 외출 금지령 재개...’

여전히 삶은 내게 변화무쌍한 파도다.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거센 파도 속에서 나는 힘겹게 하루를 버티고 있다. 또다시 외출 금지령이 시작되었다. 이 같은 상황에서 국경이 언제 완화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남편을 언제 볼 수 있을까. 나는 이곳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잠시나마 꿈꿨던 계획들을 실현할 수는 있을까. 칠흑 같은 어둠이 사방을 에워싼 기분이다.      




그러나 한 가지만은 확실하다. 한국에는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것. 그것만이 두둥실 떠올라 머릿속을 어지럽히다 이내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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