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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ul 17. 2020

남편이 울어버렸다.

코로나로 이산가족이 된 지 5개월째.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모두가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지만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에 어느 순간부터 우리는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이제 고작 네 돌 된 세쌍둥이마저 그것을 알고 있었다. 아이라고 떼를 쓰거나 징징대는 법이 없었다. 그저 아이들은 푸른 하늘 위를 비행기가 지나갈 때마다 해맑은 표정으로 ‘아빠’하며 크게 소리치고는 했다. 그때마다 가슴 한편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차라리 아빠가 보고 싶다며 징징대거나 울어버렸으면 했다. 이제 겨우 네 돌밖에 되지 않은 핏덩이 같은 아이들이 뭘 안다고 슬픔을 꾸역꾸역 참고 있는 것인지 기가 찼다.      


가녀린 아이들의 목에 큼지막한 핏줄이 솟아올랐다.

-아빠! 비행기에 우리 아빠가 있다! 빨리 와. 아빠!

그 외침이 날카로운 서슬이 되어 심장 속을 파고드는 것 같았다. 쩌렁쩌렁 울리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시야에서 감쪽같이 사라져 버린 비행기처럼 일순 파란 하늘 속으로 사그라졌다. 아이들은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나에게 묻지도 않았다. 아빠가 도대체 언제 오는 것인지, 언제쯤 도착하는 것인지, 묻지 않았다.    



 

“바이러스 때문이야. 코로나 바이러스!”

아이의 조막만 한 입술에서 바이러스라는 단어가 튀어나온 건 아주 오래전이었다. 뉴질랜드가 국경 봉쇄와 대대적인 락다운(외출금지령)을 시작한 뒤 얼마 지나지 않은 시점에 아이들은 우리가 왜 집을 나갈 수 없으며, 학교와 유치원에 갈 수 없는지, 수영장, 공원, 놀이터조차 갈 수 없고 간단한 산책조차도 허용이 되지 않는지, 그에 대한 이유를 바로 이 한 단어로 이해하고 있었다. 아빠가 이곳에 올 수 없는 이유도 그러했다. 바이러스라는 한 단어는 이 복잡한 여러 다른 상황과 질문들을 아주 명쾌하게 일축하게 만들었다. 어느 순간부터 아이들은 더 이상 질문을 하지 않았다. 엄마 아빠의 입에서 뾰족한 대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인지, 아님 바이러스라는 단어가 가지고 있는 무게를 이미 깨달은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질문하기를 멈췄다. 한순간 사람들의 입을 마스크로 가리게 만들고, 사람들의 입에서 쉽게 뱉어낼 수 있는 ‘왜’라는 질문조차 할 수 없게 만드는 것. 바이러스는 무력보다 두려운 공포였다.     




“방법은 없습니다. 올해 말까지는 당연하고요. 내년도 불투명하죠.”

여러 에이전트와 상담을 해보았고 인 법무사에게도 자문을 구해보았지만 대답은 부정적이었다. 현재 뉴질랜드는 시민권자와 영주권자에게만 국경을 열고 있기에 남편이 뉴질랜드에 정당하게 입국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대부분의 한국 에이전트와 법무사는 처음부터 도움을 줄 수 없다며 단칼에 질문을 잘라버렸다. 학교상담을 할 때는 생글생글 웃으며 어떤 때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친절하더니 복잡하고 돈이 되지 않는 문제에 있어서는 본연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쉽게 흘러나왔다.


그러던 중 뉴질랜드 법무사에게 상담을 요청했다. 그녀는 결과는 장담할 수 없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라고 이야기했다. 이민성 홈페이지에 인도주의적 예외 입국 신청을 할 수 있는데 이것을 시도해보자고 했다. 현재 그녀는 남편과 두 아이를 키우는 데도 육아가 너무나도 힘든데, 타국에서 홀로 네 아이를 키우고 있는 내가 정말 대단하다며 같은 엄마로서 도움을 주고 싶다고 했다. 결과를 장담할 수 없으니 수수료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순전히 나를 돕고 싶은 마음이라고 했다. 그렇게 그녀는 이민성 직원에게 패스트 트랙으로 검토 요청을 신청하여 남편에 대한 인도주의적 예외 입국 요청을 했다. 시커먼 먹구름을 뚫고 실낱같은 빛줄기가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조금씩 희망이 보이는 듯했고 상황이 나아질 거라 믿었다. 그러나 결과는 완벽한 ‘거절’이었다.





3개월 전, 이민성으로부터 거절을 받고 난 후 우리 부부에게는 더 이상의 방법도 존재하지 않았다. 절망감. 그저 기다리는 것. 상황이 나아지기만을 기도하는 것. 하루에도 수십 번씩 습관처럼 뉴스 기사를 검색하고 코로나 상황을 지켜보는 것. 우리에게 남겨진 것은 불투명한 현재와 막막한 기다림뿐이었다. 아주 자연스럽게 우리는 언제 만날 수 있을지에 대한 질문을 서로에게 하지 않았다. 그것에 대한 화두를 꺼내지 않을뿐더러 서로에게 으르렁대며 짜증 내지도 않았다. 가슴 한 구석에 ‘다시 만날 그날에 대한 희망’을 고이고이 접어둔 채 그렇게 우리는 하루를 견뎠다.      




“올해까지는 버티겠는데 내년에는 이렇게는 솔직히 못할 것 같아...”

남편이 눈물을 쏟은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아이들과 핸드폰 동영상을 보다가 오래전 동영상을 우연히 찾게 되었는데 나는 남편을 놀릴 생각으로 그 동영상을 전송했다. 문제의 동영상은 바로 남편이 이직을 하고 첫 비행을 다녀온 영상이었다. 현관문이 열리자 반팔티셔츠에 기저귀만 찬 세쌍둥이와 첫애가 쪼르르 서서 남편에게 ‘차렷! 경례!’를 한다. 이윽고 나는 남편에게 ‘오늘, 첫 비행은 어떠셨나요?’하고 말을 건네는데 아이들 때문에 새벽까지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채 첫 비행에 나섰던 남편은 대답은커녕 잔뜩 짜증을 낸다.

-이런 영상을 찍은 적이 있었나?

나는 반갑고도 신기한 마음에 (그리고 절반은 남편을 놀릴 요량으로) 그에게 동영상을 전송했는데, 남편이 과거 자신의 행동에 너무나도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내가 도대체 왜 그랬을까. 이렇게 사랑스러운 아이들에게 왜 짜증을 퍼부었을까. 여보, 당장 이 영상 지워줘. 아이들이 나를 이렇게 기억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남편은 홀로 심각해졌다. 그리고 갑자기 눈물을 쏟았다. 그것도 펑펑 우는 것이었다. 자신이 없다고 했다. 아이들이 너무 보고 싶어서 가슴이 무너져 내릴 것 같다고 했다. 그렇게 우는 남편의 모습은 결혼 십 년 만에 처음이었다. 나의 눈에도 어느새 한가득 눈물이 고였다.   



   

“나 벌써 갱년기 왔나 봐. 왜 이러는지. 미안해.”

그 후 남편은 울보가 되었다. 내가 예전 추억을 회상하는 이야기를 꺼내거나 아이들이 해맑은 목소리로 ‘아빠, 바이러스 끝나면 빨리 와.’라는 말을 던질 때마다 그는 너무나도 쉽게 울보가 되어버린다. 그때마다 내 마음은 얽히고설킨 실타래처럼 복잡해진다. 나를 이곳으로 가라고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남편이었는데 그가 이럴 때마다 야속하기도 하고, 타지에서 홀로 아이들을 키우며 하루를 버티고 있는 건 바로 나인데 남편이 무너져 내릴 때마다 실망스럽기도 하다. 그가 눈물을 보일 때마다 그날 밤은 도저히 잠을 이룰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복잡해진다. 생각이 깊어진다.

-그러나 과연 지금 가장 힘든 건 누굴까. 내가 가장 힘들다는 생각은 오만이 아니었을까.

삶의 중심이 되어버린 아이들. 과연 나는 아이들 없이 단 일주일, 한 달이라도 견딜 수 있을까.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파묻혀 하루를 보내고 있는 나보다 고독한 하루를 쓸쓸하게 보내고 있을 남편이 안쓰러운 건 아닐까. 남편의 눈물은 나의 오만을 깨닫게 한다. 버티고 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었음을. 남편과 나, 사랑스러운 아이들. 우리 모두 하루하루를 버티고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나는 오늘도 꿈을 꾼다. 공항에 마중 나가 남편의 커다란 손을 잡게 될 그날을. 우리 가족 모두 얼싸안고 기쁨에 겨운 눈물을 흘리게 될 그날을. 습관처럼 사진첩을 열어 사진을 바라본다. 투닥거리며 으르렁댔던 그와 함께 했던 지난날들이 이렇게나 눈물 나게 그리울 줄은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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