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넷맘 Oct 29. 2020

서른일곱, 다시 대학에 갈 수 있을까.

어느 이방인의 삶의 모험에 대하여



벌써 4개월이 지났다. 지난 6월, 대학원 진학을 위해 치른 영어 시험에서 나는 전 영역 IELTS 7.0 (PTE 65)이상의 점수를 받았다. 첫 시험이었다. 그것도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 독학한 결과였다. 봉쇄령(외출 금지령)이 내려진 락다운 기간 동안 아이들을 재우고 매일 밤 10시부터 새벽 한 시까지 공부했다. 다들 이 점수를 만드는 게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시작도 해보기 전에 포기하기는 싫었다. 어느 누구도 나에게 공부하라고 강요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저 내달렸다. 새로운 삶의 목표가 생겼다는 것이 행복했고 아들 넷의 무력한 엄마인 줄 알았던 내가 여전히 무언가를 도전할 수 있다는 것이 흥분되었다. 이 감정은 처음 내가 글쓰기를 만나 책을 출간하기까지 느꼈던 기분과 비슷했다. 무모했지만 불안하거나 두렵지는 않은 감정이었다. 잃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될 대로 되라지.

영어시험을 보기 위해 시티에 가는 길, 떨리는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마음을 다독였다. 첫 시험에 전 영역에서 모두 원하는 점수를 받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늘은 단지 경험일 뿐이야. 단번에 원하는 점수를 받기는 힘들 거야. 하지만 이상하게 심장이 계속 요동쳤다. 자꾸만 기대가 되고 욕심이 생겼다. 시험 후 결과를 알게 되었을 때는 기쁨도 잠시 머릿속이 오히려 복잡해져 왔다. 이 점수를 앞으로 어떻게 활용해야 할 것인가 하는 마음이 들었다. 사실 가디언 비자로 뉴질랜드에 체류하고 있는 나는 법적으로 학생비자를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지 않았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 영어점수를 받게 되었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막막함이 밀려왔다.



      

“가디언 비자 소지자가 학생비자를 받기 위해서는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 신청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가디언 비자는 학생비자로 공부하고 있는 학생의 부모 중 한 명에게 아이를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부여되는 비자이다. 따라서 가디언 비자 소지자가 학생비자 혹은 워크 비자로 바꾸는 것은 뉴질랜드 이민법상 엄격히 제한되고 있다. 유일한 방법은 현재 비자를 만료시킨 후 뉴질랜드 국경 밖에서 다시 신청하는 것이다. 본래 나의 계획도 이번 겨울을 이용해 한국으로 잠시 돌아가 비자를 재신청하는 것이었지만 코로나로 인한 국경 폐쇄로 언제 하늘길이 열릴지, 얼마나 더 기다려야 할지 불투명한 상황이다. 그동안 수많은 법무사, 변호사에게 자문을 구해보았지만 선뜻 누구도 내 케이스를 맡고자 하는 사람은 없었다.      




K. 

그녀를 알게 된 건 현지 법무사 Z를 통해서였다. Z는 남편의 예외 입국 신청을 무료로 도와준 법무사였는데 비록 입국 신청은 거절되었지만 이후로도 수차례 법률자문을 해주었다. 나의 케이스는 생각보다 더 복잡했다. 가디언 비자에서 학생비자로 전환은 원칙상 불가한 데다 나에게는 어린 네 명의 아이들이 있다. 학생비자로 전환하게 되면 아이들의 유일한 보호자인 내가 공부와 육아를 어떻게 병행할지 충분히 소명을 해야 한다. Z는 나에게 좀 더 전문적인 법무사가 필요할 것 같다며 K를 소개해주었다. K는 뉴질랜드 뉴스에도 나올 정도로 유명한 법무사였다. 특히 이번 국경 폐쇄로 수많은 사람들이 어려움을 겪자 입국 예외 신청을 무료로 도와주어 화제가 되었다. 그녀는 가족이 떨어지게 되었다는 단순한 이유로는 남편의 예외 입국 신청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학생비자로의 전환은 확신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시도는 해볼 수 있다고 했다. K와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원서 제출, 인터뷰, 리딩, 라이팅, 수학 시험 준비

내가 공부하고자 하는 과정은 유치원부터 초등학교 3학년까지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는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는 코스다. 4년짜리 학사학위가 이미 있는 사람만 공부할 수 있는 코스여서 처음에는 석사과정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4년간의 학사학위를 1년 만에 끝낼 수 있는 학사 코스였다. 석사가 아닌 이 학사 코스를 졸업해야만 교사협회에 등록할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지고 교사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다. 비자 전환이 불투명한 내게 A대학은 고맙게도 시험을 치를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처음으로 진행한 건 면접이었다. 인터뷰는 화상으로 진행되었는데 생각보다 까다로웠다. 나를 포함한 세 명의 지원자가 동시에 인터뷰 시험을 보았는데 예상을 벗어나는 질문이 몇몇 있었고 무엇보다 컴퓨터로 전해지는 원어민의 음성이 뚜렷하게 들리지 않아 긴장이 되었다. 리딩 시험은 장애 아동의 발달에 대한 어느 저널을 읽고 그와 연관된 문제를 푸는 것이었는데 토플 지문처럼 꽤나 어려웠고, 라이팅과 수학 시험은 예상보다는 수월하게 느껴졌다. 시험 며칠 후 결과가 나왔다. 운이 좋게도 올 패스. 나는 A대학을 입학하기 위한 시험을 모두 통과하였다.     



     

내게 남은 건, 정말 비자뿐.

시험에 합격하자 비자에 대한 간절함은 더욱 커졌다. 영어시험을 비롯해 지난 몇 개월간 인터뷰와 시험에 투자했던 노력이 허무하게 사라져 버린다면 정말 아쉬울 것 같았다. 하지만, 쉽지 않아 보였다. 왜냐하면 뉴질랜드의 이민법은 예외에 매우 엄격한 편이기에 작은 실수라도 무언가가 의심되면 가차 없이 비자를 거절하기 때문이다. 큰애의 학교 친구인 중국인 아이는 지난 4개월 동안 학생비자가 거절되어 학교에 나가지 못했다. 그 아이 엄마, D와 나는 친한 친구가 되었는데 그녀는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다 작은 실수를 했다고 한다. 입국 목적을 교육이 아닌 관광이라고 잘못 표기한 것이었다. 사실 그녀는 입국 전 아이의 학교를 일 년간 등록했다가 한 학기로 변경했는데 아이가 학교에 잘 적응할지를 지켜보고 나서 학생비자를 신청하려고 했단다. 그러나 이민성에서는 이 점을 의심했다. 교육에 대한 의도를 가지고 있던 사람이 입국신고서를 거짓으로 신고를 했다는 점이었다. 아이들의 학생비자는 단순히 그 실수 때문에 거절되었다. 단순히 그 이유였다.     




이민성에서 보내온 비자 거절 레터에는 아래의 표현이 자주 나왔다.

‘Genuine purpose of your visit’

직역하면 뉴질랜드 방문의 진실된 목적이다. 그녀는 그저 두 아이를 위해 뉴질랜드행을 선택한 평범한 엄마였다. 비자가 거절되고 힘든 시기를 보냈던 그녀는 자신의 genuine purpose가 무엇이겠냐며 내 앞에서 눈물을 흘리고는 했다. 그녀가 하염없이 울 때마다 나의 마음도 찢어지는 듯 아팠다. 이방인이라는 자리.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위태롭고도 무력한 이방인이라는 자리. 나는 그녀의 눈물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곳에서 언제든 쫓겨날 수 있는 이방인이라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불현듯 불안감이 밀려왔다. 어느 삶에도 안정적으로 융화될 수 없는 경계인의 삶, 그 불안과 모험의 경계에서 나는 도대체 왜 더 큰 모험을 벌이려고 하는지 스스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어둡고 긴 터널.

또다시 그곳에 제 발로 발을 디뎠다. 지난 몇 년간 겪어왔던 삶의 굴곡들이 사방에서 튀어나와 나의 몸을 옥죄는 기분이 들었다. 선택의 기로에서 나의 온몸을 찔러댔던 가시 돋친 말들, 그것들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린다. 그리고 한 인간의 나약한 마음에 눌어붙는다.


‘낳을 수 있겠어? 건강한 아이들을 출산할 수 있다는 확신 있어? 넌 너만 사랑해도 모자랄 사람이잖아. 아들 넷 엄마가 될 자신 있어? 키울 수 있겠어? 너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겠냐고. 엄마가 된다는 것은 그런 거잖아. 그것도 아들 넷의 엄마야. 너의 꿈도 직장도 모든 것을 포기해야 돼. 새로운 꿈? 너에게 꿈이란 게 남아있을 것 같아? 제정신이야? 아들 넷을 데리고 뉴질랜드에 가겠다니...’


그랬다. 나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제정신이었다면 나는 아들 넷의 엄마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누구보다 나를 사랑했고 내 일을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모든 것을 포기한다는 것. 내가 쌓아온 모든 것들을 내려놓아야 한다는 것. 아마도 제정신이었다면 난 내려놓지 못했을 것이다.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배 속에 아기들, 그 작고 여린 생명에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사랑과 책임, 연민의 감정을 느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포기했다. 무모하고 즉흥적인 결정이었지만 삶의 선택은 이성적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걸 그때 나는 깨달았다. 그리고 그때부터 머리가 아닌 가슴을 움직이는 것에 삶을 던졌다. 때로는 가시밭길인 줄 알면서도, 넘어지고 아플지라도, 나는 아파도 걸어야만 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결과를 떠나 매 순간 삶을 후회하지 않게 그저 살아내고 싶었다.     



  

울고 있는 D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유난히도 작은 그녀의 어깨가 예전보다 더 야윈 것 같다. 뺨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에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젖어 얼굴 이곳저곳에 얼룩덜룩 붙어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아이 같다. 나는 애처로운 그녀의 작은 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려주었다. 마흔이 훌쩍 넘은 그녀가 나를 올려다보며 아이처럼 따스하게 웃고 있다. 그녀의 눈동자에 불안한 나의 눈동자가 비쳐있다. 그녀를 바라보며 나도 미소 짓는다. 어느덧 불안함은 사라지고 왠지 모를 따스함이 가슴을 적신다.





   

매거진의 이전글 층간소음, 일 년 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