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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Dec 15. 2020

떨어질 꽃잎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어느 날 문득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당신들이 우리 엄마를 보살피니까요.”

굳이 언어가 필요 없는 순간. 지구 반대편 어느 작은 마을의 호스피스 샵에서 나는 생전 처음 보는 한 여자로부터 그 순간을 느꼈다. 짧은 말 한마디를 끝내기도 전에 그녀의 가슴과 콧등, 눈시울이 빠르게 붉게 번져왔다. 마치 누군가가 그녀의 얼굴에 붉은 잉크를 톡 하고 떨어뜨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동안 꾹꾹 참아왔던 감정들이 터져 나와 한순간 흘러넘친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나의 눈가도 촉촉해졌다. 그녀의 감정을 온몸으로 받아들인 것 같았다. 굳이 언어가 필요 없는 그런 감정을.     




Totara Hospice

내가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한 지도 벌써 9개월이 지났다. 지난 4월 Totara Hospice 재단의 매니저와 면접을 보고 그다음 주부터 바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이곳을 알게 된 건 이웃 JJ를 통해서였다. JJ는 이 재단에서 벌써 수년간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데 워킹맘인 그녀는 일주일에 하루는 꼭 이곳에서 봉사활동을 한다. 뉴질랜드에서는 지역사회의 많은 부분이 봉사자들에 의해 돌아가고 있다. 그리고 나의 착한 이웃 JJ처럼 본업만큼이나 봉사활동을 중요하게 여기며 살아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이 있다. 가끔 JJ는 아침에 홀로 나가 길거리 쓰레기를 홀로 줍고는 하는데, 그런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보이는 것에만 충실했던 지난 나의 삶이 떠오른다.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닌 삶. 그것의 가치를 나는 글을 쓰며 깨달았고 그것들을 실현하고자 이 먼 곳 뉴질랜드에 아이들을 데리고 왔다. 숫자로만 가득 찼던 지난 나의 삶에서 숫자를 지우고 싶었다. 누군가의 시선, 기준, 평가에서 자유롭고 싶었다. 오클랜드에서도 대부분의 한국인 유학생이 선택하는 북부지역을 떠나 상대적으로 조용한 동부지역을 선택한 이유도 그러했다.      




Maureen, Karen, Ann

나에게는 세 명의 동료가 있다. 처음 봉사활동을 했던 파쿠랑가 쪽의 호스피스 샵과는 달리 하윅 호스피스 샵은 대부분 할머니 봉사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일주일에 두 번, 나는 이곳에서 그녀들과 함께 일한다. 호스피스는 말 그대로 죽음을 앞둔 환자가 평안한 임종을 맞을 수 있도록 마련된 병원이다. Totara Hospice 재단은 오클랜드에서 제일 큰 규모의 호스피스 재단으로 호스피스 샵, 호스피스 카페 등을 운영하며 벌어들인 모든 수익금을 호스피스를 지원하는 데 사용한다. 내가 일하고 있는 호스피스 샵 또한 순수하게 봉사자들의 인력으로 운영되고 있으며, 이곳의 모든 물품들은 사람들의 기부로 채워지고 다시 사회에 환원된다. Maureen과 Karen은 20년 동안 봉사활동을 해온 장기 봉사자다. 그리고 Ann은 여든일곱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아직도 호스피스 샵과 공항에서 활발히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최고령 봉사자다.      




여든일곱.

여든일곱이라는 나이는 나에게 일종의 징크스가 된 숫자였다. 양가의 할머니, 할아버지는 차례대로 모두 여든일곱이라는 나이게 세상을 등졌다. 2년 전 돌아가신 사랑하는 나의 외할머니도 바로 여든일곱이라는 숫자의 벽을 넘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Ann의 따뜻한 말투는 돌아가신 외할머니를 떠올리게 한다. 그녀의 작은 체구에서는 부드럽고도 푸근한 그녀의 냄새가 난다.




“누군가를 위해 아직도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참 기뻐. 난 매일 기도해. 잘 죽었으면 하고 말이야.”

Ann이 이렇게 이야기할 때면 나는 가만히 그녀의 파란 눈동자를 바라본다. 그녀의 눈동자를 바라보다 그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만큼이나 투명하고 새하얀 그녀의 피부로 시선을 천천히 옮길 때면, 그녀의 모습이 청명하고 푸른 날의 동해 바다 같다는 생각이 든다. 광활한 지평선 아래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있던 깊고 푸른 동해바다. 그녀의 푸른 눈은 동해 바다만큼이나 선명했고 그녀의 하얀 피부는 바닷가의 고운 모래처럼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녀의 마음은 깊이를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넓고 깊어 보였다.  



    

Ann을 바라보다 그녀가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여든일곱의 나이에도 누군가를 위해 일을 하며 자신의 존재가 사회 안에서 소멸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있다는 것. 어쩌면 그게 나는 가장 부러웠던 것 같다. 사람의 쓰임은 지향하고자 하는 나름의 가치를 토대로 정해지는 거라고,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며 자기 위안했지만 여전히 나는 숫자에 집착했고 불안했던 나약한 인간이었다. 기대했던 아웃풋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는 여전히 내가 한심하고 형편없게 느껴졌고, 시험에 합격하고 학교로부터 입학허가를 받았지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 답답한 상황에 숨이 막힐 듯이 힘겹기도 했다. 아이가 한둘인 부부가 쉽게 비자를 받고 앞으로 나아가는 케이스를 지켜볼 때마다, 결코 깨트릴 수 없는 유리구슬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기분이 들었다. 숨을 쉴 수 없을 것처럼 꽉 막힌 어느 한 지점에서 하루아침에 소멸해버릴 것 같았다. 나라는 존재는 언제든 소멸해도 괜찮아 보였다.     




여든일곱의 나의 모습은 어떠할까. 그녀를 바라보다 문득 잘 살고 싶다는 생각보다, 잘 죽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었다. 동시에 젊은 시절 오랜 기간 대학병원에서 간호사로 일했다는 사라 님의 말이 기억났다. 그녀는 간호사로 일하며 수많은 죽음을 지켜보았는데, 사람의 마지막 얼굴에는 그 사람의 삶이 담겨있는 것 같다는 말을 했다. 죽는 순간 잔뜩 인상을 찌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삶에 대한 일말의 후회도 느껴지지 않는 것처럼 정말 편안해 보이는 사람도 있다고 했다. 화사한 햇볕이 창을 통해 내려앉은 어느 화창한 날, Ann은 그녀가 살아온 것처럼 부드럽고 푸근한 미소로 특별할 것 없는 편안한 이별을 맞이하게 될 것 같다. 삶에 대한 회한과 후회가 없는 그런 담담한 이별, 삶과 죽음의 경계가 분리된 것이 아니라 삶이 어제였고 죽음이 오늘인 것처럼 자연스럽게 연결되는 일상적인 죽음 말이다.      




나는 Ann의 새하얗고 투명한 얼굴을 바라보며 언젠가 떨어질 그녀의 꽃잎을 상상했다. 그리고 언젠가 떨어질 나의 꽃잎도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여든일곱의 나이에도 누군가에게 여전히 아름다울 수 있는 그런 삶을 살 수 있기를, 무엇을 하든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지 않았다는 자신감을 갖고 살기를, 회한과 후회가 없는 그런 담담한 이별이기를. 그러다 문득 생각했다. 나의 죽음이 동해바다를 닮았으면 좋겠다고.  










호스피스 샵 동료들과 크리스마스 런천에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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