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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an 09. 2021

뉴질랜드 기러기, 일 년을 더 연장하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이곳은 아이들의 천국이거든요.


“지금은 거기 있어야 돼. 한국에 오면 안 돼.”

남편과 떨어진 지 11개월. 벌써 일 년이라는 시간이 바람처럼 스쳐 지나가버렸다. 그가 없는 일상에 어느 정도 무던해졌다고 생각했지만 가슴 한편에서 울컥하고 솟아오르는 감정을 가끔씩 마주할 때마다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이성의 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만다. 무너지고 다시 일어서는 일련의 반복되는 주기를 우리는 지난 일 년 간 여러 번 겪었다. 그러나 다행히 겹치지는 않았다. 남편이 무너져 버렸을 땐 내가 그를 일으켜 주었고, 내가 무너져 버렸을 땐 그가 나를 잡아 주었다. 끝이 존재해야 고통이라는 것도 무던해지기 마련인데 뉴질랜드 국경은 아직도 언제 열리게 될지 가늠할 수가 없다. 도대체 언제까지 사랑하는 가족을 만날 수 없는 이 끝이 없는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그 불투명한 안갯속을 계속 걸어가기로 했다. 계속 걷는 것만이 우리가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라는 것을 잘 알기에.     




남편을 만날 수 없는 상황에서 이곳에 남기로 결정한 건, 다름 아닌 아이들 때문이었다. 지금 한국에 돌아간다고 해도 삶의 질이 나아지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코로나는 3차 파동을 겪으며 매번 최대치를 경신하고 있고 변종 바이러스까지 출현해 전파력이 더욱 증가되고 있는 상황이다. 한국에 돌아가면 아이들은 학교/유치원에 정상적으로 다닐 수 없을 것이고,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최소화해야 할 것이다. 다닥다닥 붙어있는 아파트에서는 층간소음 때문에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시작될 것이고, 아이들이 뛰기라도 하면 나는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아이들에게 뛰지 말라고 소리를 지르거나 도끼눈을 뜨고 아이들을 다그치게 될 것이다.      




트랩에 걸린 기분.

지난 1월 말, 뉴질랜드에 도착하고 나서 거짓말처럼 코로나가 시작되었다. 지금도 선명히 기억난다. 비행기에 오르기 전날 밤, 우한에서 정체불명의 바이러스가 출현했다는 기사를 읽었다. 별일 아닐 거라 생각했다. 이렇게 남편과 오랜 이별을 하게 될 줄 몰랐다. 불투명한 미래에 내 인생을 던질 줄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내게 주어진 삶은 늘 그래 왔듯 나에게 결정권을 주지 않는 것 같다. 세 쌍둥이를 임신한 그날도, 멀쩡했던 대기업이 하루아침에 파산한 그날도, 나는 내게 주어진 삶 안에서 그저 묵묵히 걸어야만 했다. 내게 인생은 바다 같은 것이었다. 망망대해에 표류한 나약한 인간처럼 한순간도 인생은 원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도, 애쓴다고 바뀌어 지지도 않았다. 그저 파도에 몸을 맡기는 것만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느 곳으로 향할지 모를 그 물결을 따라 가보려 한다.      






뉴질랜드가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사실 남편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뉴질랜드 삶에 꽤나 만족하는 편이다. 일 년을 살아보니 왜 뉴질랜드를 아이들의 천국이라고 부르는지 이해가 된다. 특히 에너지를 발산해야만 하는 남자아이들에게 이곳은 더욱 좋은 환경이다. 뉴질랜드의 대부분의 시설/정책은 아이들에게 프렌들리하다.      




첫 번째뉴질랜드에는 유치원 정부 보조금 제도가 있다.

내가 뉴질랜드라는 나라를 선택하게 된 건 바로 외국인에게도 지원이 되는 유치원 정부 보조금 때문이었다. 뉴질랜드는 자국 내 만 3세~만 5세의 모든 아이들에게 ECE (Early Childhood Education) 정부 보조금을 지원하고 있는데, 비지터 비자로 임시 체류하고 있는 나 같은 외국인에게도 차별 없이 지원된다. 보조금은 주당 20시간 정부기관에서 지원되는데 유치원에 따라서 10시간을 선택적으로 지원해주는 곳이 더러 있다. 세 쌍둥이가 처음 다녔던 유치원도 10시간 프로모션을 하는 곳이었는데, 점심비용을 제외하고 세 쌍둥이를 공짜로 보낼 수 있었다. 10시간 프로모션을 진행하지 않는 유치원 또한 주당 50~100불 내외로 비용이 저렴한 편이다. 한국 사설 유치원보다 저렴한 비용으로 영어 유치원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유치원에서 삼둥이 :)



뉴질랜드의 공공시설은 대부분 아이에게 공짜다.

대표적인 공공시설로 수영장을 예로 들자면, 만 16세 미만의 아이는 뉴질랜드에 있는 대부분의 수영장을 공짜로 이용할 수 있다. 각 지역에는 정부에서 관할하는 수영장이 곳곳에 있는데 시설 퀄리티가 꽤나 좋은 편이다. 대부분의 수영장이 아이들을 위한 물 놀이터(Splash zone)와 영유아를 위한 토들러 풀을 보유하고 있다. 만 5세 미만의 아이와 동반하는 부모의 비용은 무료이고 만 5세 이상의 아이와 동반하는 어른의 입장료는 지불해야 하지만 이 비용 또한 5~6불로 저렴한 편이다. 아이들은 수영장에 가는 것을 정말 좋아한다. 아들 넷을 데리고 입히고 씻기고 하는 일련의 과정은 분명 쉽지 않은 시간이지만, 아이들의 해맑은 웃음을 바라볼 때마다 이곳에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을 한다.     


아들 넷을 데리고 수영장은 육아 고난이도 코스다. 체력이...후덜덜...



뉴질랜드의 도서관은 정말 좋은 시스템을 가지고 있다. 

한국에 있을 때도 나는 주기적으로 도서관에 가서 아이들의 책을 빌려오고는 했다. 매번 새로운 책을 빌려오고 아이들이 어린이집에서 오기 전에 거실에 나란히 북 컬렉션을 만들어 놓으면 집에 도착한 아이들이 신이 나서 책을 보고 있는 그 모습이, 나는 참 좋았다. 뉴질랜드에는 지역마다 도서관이 있는데 오클랜드 안의 모든 도서관은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 운영되고 있어, 어느 지점에나 교차 반납이 가능하다. 그리고 한 번에 하나의 계정 당 30권 이상의 책을 빌릴 수 있어, 나는 매번 도서관에 갈 때마다 마트에 갈 때 필요한 빅백을 가지고 간다. 도서관 내에는 마트에서 볼 법한 트롤리(카트)가 있어 천천히 시간을 두고 책을 고르고는 한다. 또한, 책 이외에 CD, DVD, 아이들을 위한 교구 등도 빌릴 수 있어서 아이들과 정말 자주 도서관에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도서관에서 삼둥이^^




뉴질랜드에는 키즈 프로그램이 다양하게 있다.

도서관에도 주말마다 아이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있고, 지역마다 설립되어 있는 레저센터 (Leisure centre)에도 방과 후 과정 및 방학 프로그램 등을 활발히 운영하고 있다. 비용도 정말 저렴한데 큰애가 지금 다니고 있는 레저센터의 방학 프로그램은 하루 기준 오전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평균 20~30불의 비용으로 참가할 수 있다. 며칠 전 큰애는 방학 프로그램으로 해양 스포츠를 체험하고 왔는데 바다에서 카누, 요트도 타고 직접 뗏목도 만들어 탔다고 이야기하며 잔뜩 신이 난 표정으로 집으로 왔다. 열 살인 큰애에게 오늘 하루하루는 평생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이 될 것이다. 그 밖에도 Auckland for kids라는 사이트에 들어가면 지역에서 매주 진행하고 있는 다양한 이벤트 및 체험들을 한눈에 볼 수 있고, 아이들과 함께 가면 좋은 장소 및 놀이터에 대한 정보도 잘 정리되어 있어, 아이를 데리고 뉴질랜드에 갈 계획을 하고 있을 누군가에게 적극 추천하는 사이트다.     



버블 페스티벌에 참여한 삼둥이^^




여기 놀이공원 아니에요뉴질랜드 놀이터예요. 

뉴질랜드에는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가 정말 잘 되어있다. 시설도 그렇지만 놀이터 내에 화장실과 수돗가, 그리고 안전을 위한 펜스까지 설치가 되어있는 곳이 상당히 많다. 큰아이들을 위한 스펙터클한 놀이터도 있어 이런 곳에 가면 나이 차이가 나는 삼둥이와 큰애 모두 만족하며 재미있게 시간을 보내고는 한다. 뉴질랜드에 오기 직전,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큰애는 이제 막 게임의 세계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핸드폰이 없던 큰애는 친구들이 매일 같은 시간 온라인에서 모여 게임을 한다며 나에게 핸드폰을 사달라고 조르기도 했다. 물론, 이곳도 게임을 하는 아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아이들이 깨끗한 자연에서 마음껏 땀을 흘리고 에너지를 발산하는 것을 볼 때마다 이곳이 아이들을 위한 천국이라는 생각을 하고는 한다.     



집 앞 5분 거리에 있는 산책을 할 수 있는 숲에서. 아이들은 숲에 가길 참 좋아한다.








인생은 마음대로 되지 않는다. 원하는 것을 모두 주지 않는다. 가장 사랑하는 누군가를 멀리 떨어뜨려 놓고, 동시에 가장 사랑하는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든다. 이 잔인한 상황에 가끔씩은 진저리가 나기도 하지만, 아이들의 미소를 바라볼 때마다 지난 일 년 간 버텨왔던 하루하루가 부모로서 옳은 결정이었다고 생각하게 한다. 혹자는 그래도 아이와 부모는 떨어지면 좋지 않다며 나에게 충고하기도 한다. 아빠의 부재 아래 자랄 아이의 정서를 걱정한다. 그러나 나와 남편만큼 아이들을 걱정하는 사람들이 있겠는가. 서로를 향한 그리움에, 그 그리움이라는 감정마저 외면하려고 노력하며 하루를 버텨왔던 사람이 있겠는가. 인간의 모든 결정은 불완전하다. 우리는 지금의 결정이 아이들을 위한 더 나은 방향이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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