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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an 08. 2019

부부는 무성(無性)이 아닙니다.

이렇게 살기로 했다 (3) 욕구의 발견

하룻밤? 마리아, 과장을 해도 정도껏 해야지. 그건 사십오 분 정도에 불과해. 아니, 옷 벗고, 예의상 애정 어린 몸짓을 하고, 하나마나한 대화 몇 마디 나누고, 다시 옷 입는 시간을 빼면, 섹스를 하는 시간은 고작 십일 분 밖에 안 되잖아.
11분. 겨우 11분을 축으로 세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 파울로 코엘료의 <11분> 중에서     




“느낌이 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머리칼이 쭈뼛쭈뼛 서는 것처럼 짜릿한 전율이 온몸을 휘감았다. 몸속 깊숙이에서 시작된 전율은 남편의 등을 두 손으로 감쌌던 손가락 끝까지, 허공을 향해 뻗어있던 발가락 끝까지 전달되었다.

오르가즘이었다.     





사실 나에게 오르가즘은 그리 익숙한 단어는 아니었다. 신혼 때는 가식적인 신음소리를 뱉어보기도 했어떤 것이 절정인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그저 남편과 하나가 되었음에 도취되어 순진한 행복감을 느낀적도 있다. 나에게 섹스란 오롯이 그의 절정을 위해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내 몸이 어떻게 생겼는지, 내 몸 구석구석에 어떤 감각들이 숨어있는지 생각해 볼 기회도 많지 않았다. 내 몸에 대한 사용설명서를 충분히 읽어보지도 못한 채 나는 오르가즘을 느끼는 것이 그저 창피하고 쑥쓰러운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당당히 요구할 수 없는 그 어떤 것,

요구하는 내가 오히려 창피하고,

무언가 아는 여자는 까진 여자처럼 비춰지는 것,

것이 나에게 오르가즘이라는 단어였다.     




남편과 결혼한 지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우리의 섹스는 꽤나 수동적인 형태로 지속되었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이야기하지 못했고, 더구나 큰애를 낳고 모유수유를 일 년 동안 이어가게 되면서 성욕을 점점 잃어갔다. 남편과의 잠자리가 귀찮고 힘이 들었다. 똑똑. 내 등을 살며시 두드리는 남편의 노크를 대놓고 무시한 적도 다. 서로에게 불타올라 만리장성을 쌓고 큰애를 임신했던 그날 밤에 대한 기억은 이미 희미해진지 오래였다.




전환점은 다름 아닌 남편의 유학이었다. 일 년 동안 미국에서 유학을 하게 된 남편과 나는 마치 견우와 직녀처럼 애틋해졌는데, 서로에 대한 애틋함은 남편이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귀국한 후에도 지속되었다. 그 무렵 우리는 둘째를 계획했는데, 둘째는 기대만큼 호락호락하게 찾아오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둘째를 갖기위해 일주일에 한 번 의무적으로 관계를 하기로 했다. 생각해보면 남편과 나는 만난 지 단 두 달 만에 그것도 첫 날 밤에 아이를 가졌고 갑자기 부모가 되어 힘겨운 육아를 해야 했다. 그동안 우리는 서로의 몸에 대한 사용설명서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채 그저 기능에만 충실한 섹스를 해왔다.


그러나 일주일에 한 번 의무적으로 가졌던 섹스는 우리의 관계에 새로운 전환점이 되어주었다. 살을 부비는 시간이 늘어나면서 부부관계도 더욱 친밀해졌고,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며 내 몸에 분포되어 있는 핫스팟을 찾게 되었으며, 무엇보다 그분을 만나기도 했다. 이제 더 이상 섹스는 그의 것만이 아니었다. 너와 내가 즐거운 공동의 영역이 되었다.    




 


오래 전 육아 커뮤니티에 ‘부부의 키스’라는 주제로 에세이를 올린 적이 있었는데 반응은 뜨거웠지만 엄마들의 댓글이 꽤나 우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우리 집은 연례행사입니다...”

“남편이 귀찮아요. 살이 닿는 것도 끔찍해요...

“부부끼리는 남매 아닌가요?”


대부분의 댓글이 공통적이었다. 후끈 달아올라 서로가 서로에게 몸을 맡겼던 청춘남녀는 온데간데없고 의리로 뭉쳐진 남매만이 그 자리에 남아있었다. 키스는 물론이고 부부관계도 연례행사라고 했다. 자신의 스팟을 아는 사람도, 알려고 노력하는 사람도, 오르가즘을 경험한 사람도 드물었다. 어떤 엄마가 절정스터디를 만들자고 제안했다. 이 스터디가 만들어진다면 과연 어떤 그림이 될까 잠시 상상을 해보았지만 절정이란 자신에 대한 이해 끝에 비로소 찾게 되는 만의 그 무엇일 것이다. 댓글을 읽어 내리면서 우울감이 밀려왔다. 섹스라는 행위에 여성의 욕구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추행, 성폭행, 미투, 하루에도 몇 번씩 우리 사회는 성(性)에 대한 여러 뉴스로 시끄럽다. 학창시절 여중, 여고를 거침없이 활보했던 바바리맨에 대한 기억이나 길거리를 걷고 있는 여성에게 대뜸 자신의 성기를 짜잔 하고 내밀었던 변태에 대한 추억은, 대한민국 여성이라면 너도나도 하나쯤은 가지고 있는 아주 사소한 무용담이 되어버렸다. 양기는 활기차게 솟아나고 있는데 음기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 한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다. 여성에게 성(性)이란 언제나 쉬쉬하면서 숨겨야만 하는, 일방적인 그의 꼴림에 의해 시작되고 끝나야 되는, 그런 잔인한 족쇄가 되었다.      




예전 어느 섹스 컬럼리스트의 충격적인 글을 본 적이 있다. 흔히 어른들이 남자아이에게는 “이놈, 고추 달렸네.”라고 하는데 여자아이에게는 “이년, 조개 달렸네.”라고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글을 읽어 내리며 다소 저렴한 표현에 미간이 덩달아 찌푸려졌다. 그러나 생각을 거듭할수록 이것이 우리 사회의 성(性)을 보여주는 하나의 단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여성의 성기는 태어나면서부터 쉬쉬해야만 하는 대상으로 치부해왔다. 여자아이의 성기는 부를만한 적당한 단어조차 없다.




한쪽으로만 치우쳐진 왜곡된 성에 대한 인식은 성인이 된 여성에게도 여전히 한쪽으로만 치우쳐져 있다. 여성의 성(性)은 여전히 외면되고 있고, 남성의 성(性)을 기준으로 억압되고 있다. 부모가 되어서도 그렇다. 자녀 앞에서는 신체적인 접촉을 하거나 애정 표현을 삼가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부모들은 자녀들 앞에서 이성이 아니라 성이 없는 ‘무성(無性)’인 것처럼 행동한다. 활기치는 양기, 외면되는 음기, 가부장 문화의 잔재가 아직도 씻기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여성의 성은 여전히 억압당하고, 가정 내에서 해소되지 못한 남성의 성은 자꾸만 바깥으로 겉돌고 있다.         


섹스리스(sexless)는 최근 1년간 성관계 횟수가 월 1회 이하인 상태를 말한다. 해외 논문에 발표된 연구 결과에 의하면, 세계 섹스리스 부부 비율은 평균 20% 수준임에 비해 한국(36%)은 일본(45%)에 이어 두 번째로 섹스리스 부부가 많은 나라로 드러났다. 더구나 50대 이상 부부는 43.9%가 섹스리스인 것으로 파악됐다.
반면, 2016년 여성가족부 통계에 따르면 성매매를 경험한 남성의 비율은 50.7%로 두 명 중 하나 꼴로 나타났다.  

   




성욕은 식욕과 함께 가장 강한 본능이라고 알려져 있다. 우리는 맛있는 음식을 먹었을 때 크나큰 만족감을 느낀다. 이제 여성의 성(性)도 구석에 처박혀 외면되지 않고 건강하고 당당하게 표출되었으면 좋겠다. 무엇보다, 남성, 여성을 망라한 우리 사회의 성(性)에 대한 전반적인 인식이 시대 흐름에 맞게 건강하게 전환되기를 바란다.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여성이다.

부부도 부부이기 전에, 사랑하는 연인이다. 

여성도 몸을 사랑할 권리가 있다. 


많은 엄마들이 자신의 욕구를 바로 알고,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자신의 몸을 정면으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그렇게 내 몸이 요구하는 작은 목소리에 귀 기울였으면 좋겠다. 삶을 살면서 자신의 욕구를 바로 알고, 건강히 해소했으면 좋겠다.


비록 울룩불룩 남루한 몸뚱이지만,

나는 그 무엇보다 내 몸을 사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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