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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Dec 13. 2018

스물둘, 무작정 향한 캐나다

한때 나에게도 (2) 거침없이 뛰어든 청춘의 기억이 있다.


불안하니까 청춘이다. 막막하니까 청춘이다. 흔들리니까 청춘이다.

외로우니까 청춘이다. 두근거리니까 청춘이다. 그러니까 청춘이다.

- 아프니까 청춘이다 중에서






들썩들썩 그녀의 어깨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비행기가 이륙하자 그녀는 참았던 눈물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지난 일 년이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불안했던, 막막했던, 흔들렸던, 외로웠던 그러나 매순간 두근거렸던 지난 일 년의 시간들이 그녀의 머릿속을 헤집어 놓았다. 주체할 수 없는 뜨거운 감정이 그녀를 지배했다. 마치 비행기에 오르기 전 누군가에게 결별선고를 받은 사람처럼 그녀는 벌렁대는 가슴을 추스르며 흐느꼈다.

“고마워. 잘했어. 잘 버텼어. 고마워. 고마워.”





정확히 일 년 전, 그녀는 벤쿠버 행 비행기에 올랐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휴학기간동안 어학연수를 가는 것이 마치 필수코스처럼 여겨졌던 문과생이었지만 그녀에게 어학연수는 그림의 떡이었다. 갑작스러운  아빠회사의 부도로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져 살아야했고, 채권단은 종적을 감춘 그녀의 부모를 찾기 위해 남아있는 세 딸들을 미행하기도 했다. 6개월 동안 부모님의 얼굴을 보지 못한 적도 있다. 부모님과 유일하게 연락했던 언니를 졸졸 따라 어느 호프집에 들어서면 남루한 행색에 등산복을 입고 있는 부모님의 얼굴이 보였다. 수개월 만에 마주한 엄마, 아빠의 얼굴에는 주름이 깊게 패여 있었다. 지난 시간동안 그들에게 삶이 얼마나 고단했는지 깊게 패인 주름은 고스란히 그 힘듦을 담고 있었다.





강해지자. 단단해지자.

그녀는 항상 가슴 속에 이 말을 주문처럼 되뇌곤 했다. 수개월 만에 마주한 부모님에게 차마 어학연수 이야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당분간 어학연수는 마음에 접고 국내의 한 외국계 회사에서 인턴으로 근무하기로 했다. 그리고는 6개월간 인턴으로 근무하며 받았던 월급과 텔레마케터, 전단지, 서빙, 과외 등 온갖 아르바이트로 모은 돈으로 드디어 어학연수를 떠나기로 했다.



 





어려운 결정을 한만큼 독해져야 했다. 우선, 무엇보다 돈을 아껴야 했다. 그러기 위해선 지출되는 비용을 최소화하기 위해 모든 준비를 직접 해야 했다.




벤쿠버 살이 한 달이 지나자 나는 돈을 절약하기 위해 집을 옮겼다. 친구를 통해 소개 받았던 홈스테이는 한 달에 700불이었는데 다운타운에 위치한 쉐어하우스로 옮기면 반값의 비용에 교통비도 들지 않을 터였다. 그렇게 나는 20대 후반의 멕시코 남자, 20대 초반의 영국 여자와 함께 집을 쉐어하기로 했다.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기로 했다.





 사실, 내가 갖고 있는 캐나다 학생비자로는 취업이 불가능했지만 나에게는 돈이 절실했다. 무작정 이력서를 작성하고 수십 장을 인쇄했다. 그리고는 집 근처에 있는 가게들을 방문해서 이력서를 돌리며 일자리를 구했다. 취업비자도 없는 어느 동양인 여자아이의 행보는 거침없기 짝이 없었다. 취업비자도 없이 이력서를 내미는 탓에 황당한 표정의 사장도 더러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당했다. 수십 장을 뿌렸으니 뭐 하나쯤은 연락이 오겠지. 베짱도 두둑했다.




“No working visa?”

어느 중식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여사장은 기가 차다는 듯 한참동안이나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호탕하게 웃어재꼈다. 하지만, 나의 얼굴에는 미소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나의 눈은 간절했다. 웃음기 없는 내 얼굴을 바라보는 그녀의 얼굴도 진지해졌다.

우리는 아무 말도 없이 한참동안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마 그 찰나의 순간에 그녀는 나의 눈빛 안에 깊게 자리 잡은 간절함을 보았을 것이다.

“Okay. you can work at my restaurant from next week.”

여사장은 무언가 결심한 듯 나를 바라보며 한마디를 뱉었다.

“Thank you so much! Thank you! Thank you!”

나는 그녀의 손을 꼭 부여잡았다. 그 순간 우리에게 언어는 필요하지 않았다.








이 레스토랑은 집에서 불과 두 블록 너머에 위치한 곳이었다. 학교에서 하루 종일 수업을 받고 도서관에서 남은 숙제를 마치고 나면 오후 다섯 시, 나는 여섯시부터 열두시까지의 클로징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레스토랑으로 향했다. 나의 일은 카운터에서 손님들을 직접 응대하며 주문을 받고 그 자리에서 음식을 담아 포장까지 해주는 업무였다. 주로 테이크아웃 도시락을 판매하는 이 레스토랑은 손님의 취향에 따라 라이스 또는 누들을 선택하고 그 위에 여러 가지 음식을 토핑처럼 얹어 스티로폼 도시락에 싸주었다.





 캐나다에 온지 불과 몇 달밖에 되지 않은 외국인 유학생이 캐나다인들의 주문을 받고 처리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매번 손님을 받는 건 가슴 떨리게 긴장되는 일이었고 주문을 잘못 받거나 계산이 잘못되거나, 손님에게 음식을 쏟거나 포장이 제대로 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캐나다인들은 나의 실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고 열심히 하라며 격려도 건넸다. 무엇보다 넉넉한 팁도 잊지 않았다. 주급으로 정산되었던 돈에 팁까지 더하면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금액이 되었기 때문이다.





숙제를 마치고 도서관에서 레스토랑에 도착하면 오후 다섯시 반,  일을 시작하기 전에 매일 레스토랑 음식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그리고 열두시 클로징을 마치면 남은 음식을 집으로 싸서 남은 음식으로 다음날 점심을 해결했다. 매일 같은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기름진 중식이었지만 전혀 질리지 않았다. 오히려 감사했다. 이렇게 공부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잘 지내니?”

오랜만에 엄마로부터 전화가 왔다. 언제나 가족이라는 존재는 나를 단단하게 일어서게 하는 원동력이자 동시에 강하다고 자신했던 나라는 존재를 무장해제 시키고 여전히 유약하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존재다. 가끔씩 엄마에게서 전화가 올 때면 가슴에 무언가 묵직한 것이 내려앉은 것처럼 외롭고 허전했다. 캐나다 생활에 지칠 때면 나는 쓸쓸히 태평양이 보이는 항구를 찾았다. 항구에는 언제나 커다란 선박이 정박해있고 분주하게 사람들이 짐을 실어 나르고 있었다. 나는 이제 곧 이곳을 떠날 그 배를 향해 거침없이 소리를 질렀다.





괜찮아! 잘 하고 있어! 지금 이 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거야!”

불안했던, 막막했던, 흔들렸던, 외로웠던 그러나 매순간 두근거렸던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행복했다. 거침없이 후회없이 살았으니까.









내가 벤쿠버를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8년 후였다. 둘째(세쌍둥이)를 임신하기 전 남편과 큰애와 함께 알래스카 여행을 떠났는데 일부러 벤쿠버를 들려 내가 살았던 동네와 일했던 레스토랑을 찾았다. 하나도 변한 게 없었다. 벤쿠버는 마치 8년 전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그 시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레스토랑에 들어서자 백인 남성이 낯익은 메뉴들을 나에게 소개하기 시작한다. 얼떨결에 몇 가지 음식을 주문하여 자리에 앉는다. 레몬치킨, 비프 브로콜리 볶음, 원탕수프. 이 중에서 비프 브로콜리 볶음은 아직도 내가 캐나다를 추억하며 집에서 만들어 먹는 요리기도 하다. 하지만, 그동안 그 맛을 절대 흉내 낼 수 없었다. 비프 브로콜리 볶음을 천천히 입에 넣는다. 목구멍에 차올랐던 뜨거운 것이 결국 터지고야 만다.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다.



      

그때가 항상 그리웠다. 캐나다 일 년은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힘들었던 시간이었지만 동시에 가장 자유로웠던 시간이기도 했다. 아이를 갖고 난 후 나의 생활은 안정되었지만 나에게는 자유가 없었다. 처절하게 세상 밖으로 뛰어나갈 열정도 없었다. 꿈도 없었다. 그러나 비프 브로콜리 볶음을 입에 넣는 순간 깨닫는다.

아마 내가 그리웠던 건 캐나다에서의 시간이 아니라, 목표가 있던 그때의 나였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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