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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Jan 23. 2019

키스궁합

오래된 부부에게도 키스만 할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올까.


침을 꼴깍 삼켜보았다. 초점없던 눈의 동공은 커다랗게 확장되었고 순식간에 다리는 베베 꼬였다. 나는 마치 얼음처럼 굳은 얼굴로 텔레비전 화면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테이블 키스라 했다. 드라마 속 여주인공은 테이블 위에 앉아 있었고 남주인공은 선채로 그녀의 가녀린 턱선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키스를 했다.


살포시 포개진 남녀의 부드러운 입술.

커다란 어깨에 폭 안긴 여자의 가느다란 어깨.

여자의 뺨과 머릿결을 부드럽게 쓰다듬는 남자의 손.


남녀의 몸짓 하나 하나에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또 한번 침을 꼴깍 삼켰다. 동시에 생각에 잠겼다.


도대체 언제였더라.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가장 최근의 키스가 언제였는지 조차 희미할 정도로 키스에 대한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느새 키스에는 다양한 조건들이 붙었다. 오늘은 마늘을 먹었다고, 아직은 양치를 안했다고, 지금은 시간이 없다고,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과감히 키스를 생략하고 부부관계를 하기도 하는 능청스러운 부부가 되어 버린 것에 가끔은 우울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키스를 좋아했다. 살포시 포개진 남녀의 부드러운 입술 사이로 때론 사르르 녹는 사탕처럼, 때론 화려한 폭죽처럼 오가는 키스가 나에게는 꽤나 설레이고 흥분되었던 시절도 있었다. 손만 잡고 몇시간 동안 키스한 적도 있었다. (키스의 끝의 맛을 알아버린 지금은 따분하겠지만... 그때는 그랬다.) 풋풋했던 그리고 순수했던 청춘에게 키스란 사랑을 가장 잘 속삭일  있는 단 하나의 언어였다.


우리에게도 풋사과 내음 만큼이나 달콤했던 키스가 있었다. 크리스마스 이브, 에버랜드 대관람차 정상에서 하늘을 수놓고 있는 폭죽을 바라보며, 손가락의 가느다란 스침에도 짜릿한 전류를 느끼며, 우리는 키스를 나누었다. 대관람차가 정상에서 내려올 때까지 단 몇 십초로 이어진 아주 짧은 키스였지만, 그 순간 우리는 서로에 도취되어 마치 도화선에 불이 붙듯 서로에게 휘감겨버렸다. 키스에 흠뻑 빠져 내릴 타이밍 조차 깜빡 잊고 말았다. 탁탁탁. 대관람차 직원이 시니컬한 표정으로 막대기로 창을 두드려 후다닥 대관람차에서 뛰어나갔그때를 떠올리면 부끄럽다가도 웃음이 새어나온다.


남편과의 키스가 정말 좋았다. 결혼을 하고 큰애가 태어나기까지 5개월 동안 우리는 여느 연인처럼 소파에 나란히 누워 서로의 발에 발을 포갠 채 달콤한 키스를 나누었다. 그 신혼이, 키스만으로도 서로에게 집중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가끔은 그립기도 하다. 드라마 속 남녀의 테이블 키스를 바라보며 지난 나의 키스를 떠올려 보았다. 치아교정을 했던 그애와의 로보트 키스도 떠올랐고, 담배를 피웠던 아무개 씨와의 거친 키스도 스쳐지나갔다. 장소, 향기, 감각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키스 자체는 평타 이상이었다. 그래서 난 살면서 결코 키스에는 궁합이 있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불현듯 잊고있던 그날의 키스가 떠오른다.

내게 키스에는 궁합이 존재한다는 것을 깨우쳐준 강렬한 기억, 그날 밤이 불현듯 뇌리를 스친다.






2008년 여름, 나는 수많은 취준생 중 하나였다. 최종면접에서만 연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신 나는 설상가상으로 4년 사귄 남자친구로부터 이별 통보를 받았다. 꼬박 2년간 고무신 노릇을 했던 나였다. 그래서 이제는 사랑이 아닌 것 같다는 그애의 냉정했던 말이 가슴 시리도록 차가웠다. 수개월이 지나도 괴로웠다. 매일같이 술을 마셔댔다. 당시 나의 하루는 우울해보일 정도로 단촐했다.


09:00 ~ 12:00 취업 스터디

13:00 ~ 18:00 취업 원서 제출하기

18:00 ~ 20:00 껍데기집에서 소주

20:00 ~ 21:00 실내 야구장 마무리


유일한 낙이었다. 단돈 5천원하는 돼지 껍데기꼬치와 콩나물 해장국에 소주를 마시고 실내 야구장에서 취중야구를 때리는 게. 하루종일 지쳐있는 나의 심신을 달래줄 유일한 낙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얼큰하게 한 잔을 걸치고 친구와 나는 나란히 야구를 하고 있었다. 갑자기 수트를 입은 30대 초반의 직장인 무리들이 실내 야구장으로 들어섰다. 얼핏 보아도 그들은 사회초년생들이었다. 그들도 얼큰하게 한 잔을 걸쳤는지 한층 업되어 보였다.


"후우. 야구 잘하는데요? 저기, 몇살이세요?"

"..............."

"저희랑 한잔 하실래요?"

"..............."


대답을 하지않고 그냥 야구장 팬스 밖을 나서려는데 그들이 짖꿏게도 문 앞을 막아섰다.

그들을 쏘아보며 나는 한마디를 던졌다.


"저기요! 저희한테 왜이러시나요! 전 그쪽 초면이거든요?"

"불쾌하셨다면 미안요. 한판만 야구내기 어때요? 네? 여자 2 : 남자 2. 그쪽이 이기면 나가시면 되고 지면 저희가 맥주 쏠게요!"

"싫은데요?"

"아이. 한번만요. 응? 응?"


팬스를 부여잡고 실실 웃어대는 그의 애교에 흔들렸다. 사실, 우리도 이미 얼큰히 취해 있었다.


"그럼 딱 한판만 해요."


그렇게 여자 2 : 남자 2의 실내 야구장 내기가 시작되었다. 총합계에서 남자는 5의 패널티를 받기로 했다. 첫번째 주자는 나와 K군이었다. 실내 야구장만 몇 년 경력인 나였던가! 나는 가볍게 K군을 앞질렀다. 훗. 이게 뭐라고 기분이 날아갈듯 좋았다. 나는 보란듯이 웃으며 그를 당당히 쳐다보았다. 그러나, 문제는 다음 주자들이었다. 내 친구의 연속된 헛방질에 우리는 결국 2점차로 지고 말았다.


"약속대로 맥주 한잔 하러가요."


그렇게 처음보는 남정네들과의 뜻하지 않은 번개팅이 시작되었다. 그들은 모 대기업 해외 투자팀 소속이었다. 별거없는 나같은 취준생에겐 능력있는 오빠들이었다. 그 중 스마트한 인상에 안경을 쓴 한 남자가 있었다. S대 출신에 말수도 없는 그가 묘하게 끌렸다. 그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듯 계속해서 나와 눈이 마주쳤다. 그렇게 그와 나란히 앉게 되었고 즉석 만남에 꽤나 진지한 대화를 이어갔다.


"즐거웠어요. 시간이 늦어져서 집에 가봐야 겠어요."


그렇게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누군가가 내 옆을 따라 나왔다. 그였다.


"우리 잠깐 같이 걸어요. 어짜피 차도 끊겼잖아요."


싫지 않았다. 사실 가끔은 이런 일탈을 꿈꾸기도 했다. 난생 처음 보는 남자와 으슥해진 밤거리를 걷는 것, 차가운 밤공기를 나누어 마시고, 굳이 아무 말을 하지않고도 무턱대고 누군가와 걷고 싶은 날이 있기도 다.

우리는 S대 캠퍼스를 걸었다. 시간은 밤 12시를 넘어서고 있었지만 드문드문 학생들이 보였다. 교정을 한 바퀴 돌아, 나뭇잎이 흐드러지는 어느 큰 나무 아래의 벤치에 앉았다. 가로등 불빛에 비친 나뭇잎들이 살랑살랑 춤을 추고 있었다.


벤치에 앉아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뚫어져라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지금이 그 순간이란걸 직감적으로 느끼게 하였다. 그의 입술이 나를 향해 다가왔다. 4년 동안 한 남자만 바라봤던 해바라기에게 이 순간은 마치 일탈같았다.


'처음 만난 날 키스하면 뭐 어때. 이런 키스도 짜릿한 걸.'


간만의 키스에 나는 벌써 흥분이 되었다. 흐드러지는 나무 아래, 가로등 불빛, 수트를 입은 남자. 뭐, 나쁘지 않은 조합이었다. 그렇게 나는 나의 입을 열어 주었다.


..............................

!!!!!!!!!!!!!!!!!!!

?????????????

???$%#@&!&◎※?


머릿속이 갑자기 복잡해져왔다.

이게 키스인가? 아닐거야. 조금만 더 해보자.

키스를 하면서 키스에 집중을 하지 못하긴 처음이다.

이건 키스가 아닌것 같은데? 이 느낌은 도대체 뭐지?     

이런 키스는 생전 처음이었다. 이건 키스가 아니었다. (적어도 내 기준엔.)

분명 우리의 입 속에서는 거사가 치뤄지고 있었지만, 전혀 달콤하지도, 짜릿하지도 않은 느낌이었다.

이 키스는 마치 혀로 메롱메롱 약 올리는 느낌이었다.
 

내 인생의 최악의 키스였다.     



 

드라마 속 테이블 키스로 시작된 나의 은밀한 추억 여행은 잊고있던 최악의 키스를 상기시켜 주었다. 쇼파에 걸터앉아 텔레비전 화면을 보며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나에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지.

이런 일탈도 없었다면 어쩌면 삶이란 것이 참 무료할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스친다.


여자에게 키스란 무엇일까? 적어도 나에게 그리고 누군가에게, 키스는 단지 육체적 스킨쉽을 넘어 사랑을 전달하는 중요한 언어였다. 그 소중한 속삭임이 나에게는 단지 관계로 가기위해 거쳐가야 하는 정거장. 그 훨씬 이상의 의미로 남아있었다. 그래서 오늘은 마늘을 먹었다고, 오늘은 양치질을 안했다고, 밑도 끝도 없이 들이대는 키스없는 부부관계가 가끔은 싫다. 도대체 왜 오래된 부부끼린 관계 없는 키스가 불가능한걸까. 키스 없는 과감한 관계는 가능하면서.


키스에도 분명히 궁합은 있었다. 그래서 남편과의 짜릿한 키스가, 완벽한 궁합이, 나에게는 매번 소중하고 행복하다. 하지만, 언젠가는 우리 부부에게도, 서로에게 포개어 키스만 할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찾아왔으면 좋겠다.

오래된 부부에게도 키스만 할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올까.

오래된 부부에게도 키스만 할 수 있는 순간이 다시 올까. 






박화요비 - 당신과의 키스를 세어보아요.

https://youtu.be/vOHNHm9Ix8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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