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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Feb 01. 2019

신이시여. 저에게서 식욕을 앗아가소서.

어차피 다 아는 맛이잖아. 치킨도, 피자도, 보쌈도, 그게 그 맛이잖아


야심한 새벽이었다. K양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슬금슬금 걸음을 옮겼다. 불이 꺼져있는 집안, 그녀는 부엌에 있는 식기건조기 불빛에 의존하여 가까스로 앞으로 나아갔다.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곳은 바로 냉장고.  

   

‘잡았다!’     


K양은 누가 들을까 아주 조용히 냉장고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낮에 언니가 먹다 남긴 치즈 케이크를 슬며시 들었다. 냉장고 불빛에 비친 연노란 치즈 케이크가 더욱 먹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녀의 눈동자가 가느다랗게 흔들린다. 내일 아침 치즈 케이크에 대한 행방을 가지고 가족들은 늘 그랬듯 유력한 용의자로 그녀를 지목할 것이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케이크를 입에 넣지 않고서는 잠에 들지 못할 것 같다. 잠을 자려고 머릿속에 수백 마리의 양을 울타리에 넣었지만 결국 이까짓 케이크 한 조각 때문에 여기로 오지 않았던가.


케이크에 혀를 대보았다. 혀끝에서 시작된 케이크의 단맛이 순식간에 혀 전체로 퍼져나간다. 잠들어있던 미각이 깨어나는 것만 같다. 그녀는 게걸스럽게 케이크 한 조각을 해치운다.       

     

“또 너지? 이 돼지야.”


아침부터 냉장고에서 케이크의 부재를 확인한 언니가 찌릿하게 노려보며 한 마디를 꺼냈다.

여기서 살이 더 찌면 어떻게 할 건데.

옆에 있던 엄마도 한 마디를 보탠다. 비쩍 마른 동생은 묵묵히 밥을 먹고 있다.     

 

세 딸 중 그녀는 가장 뚱뚱했다. 동생은 체질적으로 마른 몸매를 타고났고 얼굴도 꽤 예뻤다. 고등학교 때는 <OO고등학교 김하늘>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을 정도로 청순한 외모에 늘씬한 몸매를 타고났다. 반면, 언니는 자칭 패셔니스타였다. 엄마에게 물려받은 뛰어난 패션 감각으로 늘 화려하고 유행을 선도하는 옷을 구매했다. 꾸준히 몸매를 관리했고 항상 55사이즈를 유지했다. 다리도 늘씬해서 늘 짧은 미니스커트를 입었다.


늘씬늘씬한 딸들의 이력은 엄마의 유전자에 있었다. 엄마는 딸과 옷을 함께 입을 정도로 젊은 감각을 유지했는데 엄마가 사십대 중반이었을 때 길거리에서 헌팅을 받은 일이 있었으니, 얼마나 자기 관리를 하는 분인지 가늠이 될 것이다.


어려서부터 지금까지, K양은 네 명의 여자 중 제일 뚱뚱한 여자였다. 조금만 먹어도 살이 붙는 체질 때문에 마음 놓고 먹을 수가 없었고, 그래서 엄마는 늘 그녀의 공깃밥의 양까지 정해주었다.     


“오늘 수업 일찍 끝나지? 저녁은 집에서 먹고 꼭 안양천 걷자.”


저녁밥을 먹고 늘어지게 소파에 눕고 싶은 마음이 간절할 때도 있건만 엄마는 항상 운동을 나가자고 닦달이었다. 우리는 늘 운동도 함께했다. 여자 넷이 철교부터 목동 부근까지 매일 밤을 걸었다. 엄마의 철저한 통제 때문인지 다행히 그녀도 그때는 보통의 체중을 유지할 수 있었다.   




  


K양은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면 남자가 살이 찐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이상하게 그 논리는 우리 집에만 예외적으로 적용되었다.


처음으로 일탈을 경험했다. 무엇을, 얼마든지 먹어도 아무도 돼지라고 부르지 않았고 밥을 먹은 후에는 늘어지게 누울 수 있었다. 하루건너 하루 배달음식을 주기적으로 시켜먹고, 늘 맥주를 마셨다. 외식도 잦아졌다. 외식은 아이들 때문에 가성비가 좋은 무한리필 뷔페만 찾았다. 그녀는 항상 본전을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몇 접시를 먹어야 본전을 찾을 수 있는지 계산하며 음식을 흡입했다. 배가 터질 때까지 밥을 먹어야만 포만감을 느꼈다.     


그런데 함정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남편은 그녀의 동생처럼 타고난 살이 찌지 않는 체질이었다는 것, 지난 십년간 남편의 몸무게는 그대로였지만 그녀몸무게만 증가했다. 세쌍둥이를 출산한 후 몸무게는 아무리 노력해도 회복되지 않았다. 결혼하기 전 십 킬로그램이 증가한 상태로 머물러 있었다. 관성의 법칙은 그녀의 몸무게에만 더욱 가혹하게 작용하는 것 같았다.     





“어? 5킬로그램이 더 쪘잖아?”


지난겨울 내내 체중계에 오르지 않아서였을까. 지난주 몸무게를 재고 나는 커다란 충격에 휩싸였다. 갑자기 화가 솟구쳤다.

아니. 도대체. 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았다. 먹는 것은 마음대로 먹었지만 그렇다고 삼시세끼를 모두 다 많이 먹지는 않았다. 아이들을 어린이집/학교로 각각 보낸 뒤 매일 오전은 항상 운동을 했다. 그리고 아들 넷을 육아하며 얼마나 힘들고 지치고 맥이 빠지는데 오히려 살이 찌다니.


“살이 좀 빠진 것 같은데?”


매일 운동을 한다는 소식을 들은 엄마, 언니, 동생은 만날 때마다 하나같이 지난번보다 살이 빠졌다고 치하해주었다. 그래서 실은 나도 그런 착각에 빠져 있었던 것 같다. 어쩌면 혼자만의 착각에 도취되어 체중계를 노룩 패스했을지도 모른다. 곰곰이 살이 찐 원인을 생각해보았다.

문제가 두 가지로 추려진다.     



첫 번째는 식욕이다. 아침마다 아이들을 챙겨야하기에 아침밥을 먹을 수가 없는데, 결혼하기 전까지 늘 아침밥을 먹은 습관 때문인지 아침에는 더욱 배가 고프다. 결국 배고픔을 이기지 못하고 과자를 입에 구겨 넣고 운동을 간다. 운동을 다녀와서 식욕은 최상치에 도달하게 되는데, 점심밥은 저녁까지 소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많이 먹는다. 아이들에게 간식을 줄 때 항상 같이 먹는 것도 문제였다. 아이들이 어린이집/학교에서 각각 집에 들어오면 하루에 한번 간식시간을 갖는데 나도 모르게 입에 집어넣었다. 아이들을 재운 후에는 거의 매일 밤 맥주를 마셨다. 맥주는 어느덧 습관이 되었다.     


두 번째는 활동량이다. 매일 운동을 한 시간씩 한다고 자부했지만 운동을 하는 한 시간 이외에는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 하루는 단촐하다. 운동하러 잠시 외출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늘 집에 머무른다. 정해진 시간 글을 쓰고 책을 읽는다. 회사에 다닐 적에는 매일 지하철을 타고 회사까지 이동하며 짧은 거리라도 꾸준히 걸었는데, 요즘에는 걸을 일이 없다. 활동량이 현저히 낮아졌다.     


패턴을 바꿔야 했다. 바꾸지 않으면 이대로 머물게 될 것이었다. 우선 대학교 때 자주했던 18시 이후 금식을 시작했다. 그 전에는 하루 한 끼를 적당한 양으로 먹기로 했다. 역시나 식욕이 문제다. 18시가 땡하기 전에 분명히 저녁으로 두유 한잔을 마셨는데 요동치는 배 때문에 괴롭다. 텔레비전을 보니 왜 이렇게 먹방들이 많은지 채널을 돌리다가 결국 리모콘을 끄고야 다.


화장실로 건너가 칫솔질을 한다. 대학교 때 살을 왕창 뺀 어느 선배의 비법이었다. 선배는 방학기간 동안에 약 삼십 킬로그램 정도를 감량하고 새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우연히 선배와 둘이 맥주를 한잔 하게 될 일이 생겼는데 선배는 나에게 다이어트 비법으로 칫솔질을 귀띰했다.


“밤마다 식욕이 올라올 때마다 화장실에 가서 이빨을 닦았어. 그럼 훨씬 나아져. 그렇게 견뎠어.”    

 

벌써 세 번째 칫솔질을 했지만 나의 식욕은 쉽사리 꺼지지가 않는다. 뱃속에 괴물이 있는 것만 같다. 왜 평소만큼 넣어주지 않느냐고 발악하는가보다.


“어차피 다 아는 맛이잖아. 치킨도, 피자도, 보쌈도, 그게 그 맛이잖아.”


평정을 찾으려고 노력해보지만 쉽지가 않다. 아니, 오히려 방금 그 생각이 나를 분노하게 만든다. 어차피 다 아는 맛이다. 그러나 그 맛을 알기에 더욱 참을 수가 없다. 단짠단짠 간장 치킨의 맛, 고구마 엣지로 만든 M피자의 맛, 마늘보쌈의 김장김치도 떠오른다. 금세 입안에 가득 침이 고인다. 결국 잠을 청한다. 요동치는 배를 잠재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잠을 자는 것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양을 세어본다. 십여 년 전 그때처럼.     

    

“비행 없는 날, 일주일에 하루라도 같이 등산 다니면 안 될까?”    


싫어. 남편의 대답은 단칼처럼 냉정했다. 결혼하기 전 매서운 겨울바람을 뚫고 손을 잡아주며 북한산을 올랐던 한없이 다정했던 그는 온데 간데 없다. 갑자기 화가 난다. 지난 십년동안 내가 살이 찐 데에는 당신의 책임도 있다고. 살이 찌지 않는 남편의 체질이 얄밉다.

결국 남편에게 퍼붓고야 만다.


“요즘 주중에 여자 혼자 등산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알아?”


여성 등산객을 노리는 범죄가 흉흉하게 일어나고 있는 세상이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우연히 본 글에서는 어느 동네 뒷산에 여성이 혼자 등산하면 위험하다는 공지문이 붙여있었다고도 한다. 글을 보고는 혼자 등산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서 남편에게 은근히 의중을 물어본 것이지만 이렇게 매몰차게 대답할 줄은 몰랐다.    





  

과연 살을 뺄 수 있을까.

다시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다음 주가 설인데 안 먹고 견딜 수 있을까.


다이어트를 시작한 이후로도 끊임없이 옆에서 먹어대는 남편이 얄밉다. 조금만 먹어도 살이 붙는 체질이 원망스럽다. 평생 비키니를 입어본 적이 없다. 평생 허벅지 안쪽 살이 붙어본 적도 없다. 가끔은 그 느낌이 어떨까 궁금한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것까지 바라지도 않는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 단지 몸무게 앞자리만 바뀌었으면 좋겠다.     


신이여, 나에게서 식욕을 앗아가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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