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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Mar 21. 2019

열 살, 내 아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지노선.

오늘도 난 아직도 엄마가 되어가는 중입니다.


“엄마, 나 회장으로 뽑혔어!”

큰애의 검고 커다란 눈망울이 유난히도 반짝반짝 빛났다. 오늘은 3학년이 된 큰애의 첫 학급 임원 선거가 있는 날이었다. 1,2학년에는 학급 임원을 뽑지 않기에 아이는 이날을 위해 꼬박 2년을 기다렸다. 어젯밤 아이는 연설 대본을 만들어 큰 소리로 발표 연습을 했다. 또랑또랑한 아이의 음성이 가녀리게 떨렸다. 아이의 목소리에 아릿한 설레임이 스며져 있었다. 그런 아이를 보며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언제 이렇게 컸단 말인가.    


  

훌쩍 커버린 아이의 모습을 보며 사라져버린 아이의 유년이 기억나지 않아 가슴이 미어졌다. 세쌍둥이를 낳은 그 해부터 큰애에 대한 기억은 머릿속을 뒤져도 도통 찾을 수가 없다. 아이의 일곱 살, 여덟 살, 아홉 살, 삼 년이라는 시간이 송두리째 사라져 버린 느낌이다. 아들 넷을 홀로 키워왔던 지난 시간들, 미칠 것 같이 힘들어 시작한 글쓰기, 그리고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온 시간들, 그 시간 안에 큰애를 위한 작은 시간의 조각은 없었다. 갑자기 커버린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도 가슴 아프다.     



‘다음 주가 학부모 총회인데...’

해맑게 웃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바라보며 불현 듯 머릿속에 걱정이 차오른다. 나는 아이를 순수하게 축하해 줄 수 없는 나쁜 엄마다. 아이에 대한 축하보다는 앞으로 아이를 위해 서포트 해야 할 의무들이 떠올라 삶이 더욱 힘겨워질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마음이 무거워진다. 새 학기 학부모 총회에서는 일 년 간 학급을 위해 봉사할 반대표 엄마를 선출하는데 보통 회장의 엄마가 대표를 한다. 하지만, 나는 아직 세쌍둥이 동생들이 어려 자유롭게 시간을 쓸 수가 없다. 한 달에 절반은 비행 때문에 집에 있지 않은 남편 때문에 아이 넷을 책임져야 하는 건 오롯이 엄마의 몫이다. 아이들이 어린이집에 간 뒤 하루 잠시 주어지는 자유 시간을 온전히 나를 위해 쓰기에도 모자라다. 다음 주가 총회인데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반복하다 담임 선생님에게 전화를 했다.    





 

“보통 회장 엄마가 반 대표를 하는 걸로 알고 있어요. 정말 죄송합니다만 제가 시영이 동생들 때문에 시간적인 여유가 없는 상황이에요...”

뜻밖의 전화일 텐데 선생님은 따뜻하게 답변해주셨다. 반대표라고 해서 특히 더 해야 할 일이 있는 건 아니라고도 했다. 일 년에 세 번 정도만 학교 준비물 실에서 봉사활동을 하면 된다고 덧붙였다. 고민을 거듭한 끝에 반 대표를 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요. 어머니. 시영이가 정말 똑똑하고 활발한 아이인데요. 가끔씩 보면 눈치를 보고 아주 가벼운 잘못에 대한 지적도 회피하려고 하는 게 있어요. 사실 이런 행동들은 많이 혼나는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전형적인 특징이에요.”

순간 가슴이 탁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사실 학교 상담을 할 때마다 큰애에 대해서는 지금까지 좋은 이야기들만 들어왔다. 아이는 똑똑하고 발표도 잘하며 항상 모범적이었다. 그래서 선생님들을 비롯하여 주변의 엄마들은 어떻게 남자 아이가 이렇게 말을 잘하고 똑부러지냐며 내게 묻고는 했다. 칭찬만 들어왔던 것이다.     



그러나 사실 나는 큰애가 아주 어렸을 때부터 아이의 작은 행동이 마음이 쓰였다. 맞벌이를 했던 우리 부부는 여러 일들로 인해 이곳저곳으로 이사를 다녔고, 아이는 필연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손을 거치게 되었다. 아이가 돌 즈음 되었을 때는 시어머니가 아침에 큰애를 케어해주시며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었고, 세 돌 정도 때는 친정에 들어가 살면서 일 년 간 아이 케어를 도와주었다. 어린이집도 3~4번 바꿔야 했다. 그 결과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빨리 적응하고 주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기위해 노력했다. 아이의 주 양육자는 엄마인 나였지만 나는 회사 일로 고작 아침, 저녁에 아이를 보았을 뿐, 아이는 하루 종일 이 사람 저 사람과 부딪히며 하루를 보내야 했다.      



나는 아이가 아주 어릴 적부터 어른들의 눈치를 본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사랑을 받기 위한 아이만의 생존 방법이었다. 아이는 항상 눈치가 빨랐고 어떤 행동을 해야 이 집단에서 사랑을 받는지 잘 알고 있었다. 아이가 눈치를 볼 때마다 가슴이 너무 아팠다. 아이가 사랑을 갈구하는 행동을 보일 때마다 엄마인 내가 아이를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해 아이의 애정욕구가 채워지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누구보다 아이를 사랑했고, 나의 모든 시간을 아이와 함께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아이에게 온전한 사랑을 주지 못한 미숙한 엄마였다.      



세쌍둥이 동생들이 태어나고 남편과 나는 아이가 모든 것을 스스로 하길 바랐고, 조금이라도 충족되지 않으면 거세게 아이를 몰아 세웠다. 아이를 많이 혼냈다. 어린 시절 무서웠던 아빠의 얼굴을 하고 아이에게 소리 질렀다. 아이에게 모든 힘듦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아이는 더욱 어른들의 눈치를 보았다. 특히 아이는 자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쉽게 무너졌다. 아이는 아마 사랑받지 못해서 두려웠던 것 같다.     



세쌍둥이가 태어난 뒤 몇 개월 후부터 아이에게 야경증이라는 병이 찾아왔다. 밤마다 구토와 비명을 지르는 병이었는데 몽유병처럼 아이는 전날 밤의 기억을 떠올리지 못했다.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라고 했다. 이혼한 부모나, 갑자기 동생이 생긴 경우 등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경우 보이는 질환이라고 했다. 모든 것이 무너져 내리는 것처럼 힘들었다. 큰애를 위해 계획한 임신이었지만 세쌍둥이 동생들을 가지게 된 것이 아이에게 이렇게까지 커다란 짐을 지우게 될 줄은 몰랐다. 막막했다. 아이에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결국 몇 달 동안 아이를 더욱 신경써주려고 노력했다. 세쌍둥이 수면교육을 시작했고 매일 밤 아이와 오붓한 시간을 가졌다. 아이의 증상은 차츰 나아졌다. 언제인지조차 떠올리기 힘든 어느 날에 정말 감쪽같이 아이의 증상이 사라져 버렸으니까.     






“작년에 5학년 담임이었어요. 작년 학부모님께는 열두 살도 늦지 않았다고 말씀드렸지만 사실 열두 살은 늦었어요. 부모보다 선생님보다 친구가 더 좋은 나이거든요. 그러나 열 살은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아이와의 애착형성 아직 늦지 않았습니다.”

학부모 총회 날, 담임 선생님은 학부모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했다. 선생님은 대학원에서 상담심리를 공부하고 있다고 했다. 부모와 아이의 안정된 애착형성이 아이의 인격형성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끼칠 거라 했다. 매달 부모교육에 관련된 한 권의 책을 함께 읽고 선생님과 학부모가 한 자리에 모여 함께 이야기하는 시간을 갖자고 했다. 퇴근 후 자신의 시간을 투자해 학부모들과 매달 부모교육 시간을 갖는 것은 보통 선생님들에게는 쉽지 않은 결정일 것이다. 선생님의 열정이 느껴졌다.     



“부모님의 사랑과 가정교육은 아이에게 정말 중요합니다. 이제 2~3년 후면 아이들은 사춘기를 맞이하게 될 거예요. 그때는 정말 늦게되요. 물론 강제사항은 아닙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을 위해 조금만 시간을 내어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나이 50을 바라보는 남자 선생님은 학부모들에게 한 권의 동화책을 읽어주었다. 어린 아이들에게 하는 구연동화처럼 걸죽한 목소리를 최대한 앙증맞게 내려고 노력하는 그의 모습이 사랑스럽게 느껴졌다. 동화에서 아기 토끼는 구르고 넘어지고 떨어지며 실수한다. 그러나 엄마 토끼는 묵묵히 아기 토끼를 응원한다. 괜찮아. 엄마 토끼의 한 마디는 아기 토끼에게 커다란 힘이 된다. 엄마 토끼의 응원으로 아기 토끼는 힘을 얻고 결국 점프에 성공한다. 이상하게도 동화를 듣는 내내 두 눈에 가득 눈물이 차올랐다. 나는 아이를 무조건적으로 지지해주었던 엄마였을까. 아이는 언제나 내 주위를 맴돌았지만 나는 항상 바빴다. 아이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흘려들었고 칭찬 한 마디를 건넬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다. 터져나오는 눈물을 겨우 참고 또 참았다.



선생님은 마지막으로 한 마디를 건넸다.

“아이에게는 그저 묵묵히 감정을 공감해주는 것,

그거 하나면 되요.”     






어쩌면 이렇게 좋은 선생님을 만난 건 사춘기를 앞둔 큰애에게,

그리고 아직도 실수투성이지만 아이들을 위해 노력하고 싶은 엄마인 나에게, 정말 좋은 기회인 것 같다.

일 년 동안 선생님을 따라 열심히 노력해보기로 했다.

매일 하루 십분 아이의 이야기를 무조건 들어주고,

매주 아이에게 사랑의 글쓰기를 하고,

매달 부모교육에 대한 책 한권을 읽고 토론을 하기로 했다.   




어릴 적 상처는 쉽사리 지워지지 않는다. 특히나 애정에 대한 욕구가 높았던 나에게 부모는 항상 채워지지 않는 존재였다. 엄마라는 무게가 가끔은 숨 막힐 듯이 갑갑할 때도 있다. 나의 말 한 마디, 행동, 시선, 이 작은 움직임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절대적인 표본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부모라는 존재가 소름 끼치토록 무겁고 무섭다. 그러나 아이들이 드넓은 세상을 깨닫기 전까지, 아이들에게 세상은 오롯이 부모라는 존재일 것이다. 

그렇기에 내 아이들에게 기억될 부모라는 세상이

푸릇한 대지에 따뜻하고 포근한 봄날이 되었음 한다.




...오늘도 나는 아직도 엄마가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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