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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Mar 27. 2019

혈액형이 뭐길래.

세쌍둥이 아니랄까봐. A+++



혈액형이 뭐길래.

나와 남편은 세쌍둥이의 혈액형이 몹시 궁금했다.

남편은 A형, 나와 큰애는 O형, 1:2로 아직까지 우리 O형이 우세했다.



우리집에 왜왔니. 왜왔니. 왜왔니.

초딩처럼 편가르기를 하고,

“여보는 A형이라 소심해.”

“칫, 여보는 O형이라 덤벙대기나 하지.”
혈액형 때문에 서로의 성격을 물고 뜯고 할퀴고.



우리에게 혈액형은 집안 내에서 내 편. 네 편을 판가름하는 주무기이자,

상대방의 성격을 평가하는 절대기준이었다.



그래서 세쌍둥이의 혈액형이 중요했다.

세쌍둥이 혈액형은 아군을 증대시킬 좋은 기회이자, 

서로를 한번 더 놀릴수 있는 좋은 구실거리가 될 것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난 혈액형을 맹신해왔다.

세심한 A형은 연애하기 재미없어. 남자답고 친구같은 O형이 끌리지.

연애를 할때도 혈액형은 내게 상대방을 파악할수 있는 중요한 요소였다.

그래서인지 나는 주로 O형과 연애를 했었다.



내게 A형은 연애로는 빵점이야.

사실 내게 이런 얼토당토않은 편견을 가지게해준 한 남자가 있었다.

대학입학 후 처음 사귄 K였다.





대학을 갓입학한 스무살.

대학가 공기마저 설레이고 가슴 떨렸던 스무살.

사랑이든 뭐든 집어삼키고 싶었던 스무살.

스무살의 나는 설레였고 뜨거웠다. 


《얘들아! 4:4 미팅하자. 미팅!》

《미팅?》


듣기만해도 설레이는 두 글자, 미팅!

그렇게 나는 생애 첫 미팅을 하게 되었다.


신촌역 만남의 광장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근처 호프집으로 이동했다.


첫미팅이라 그랬을까.

모든 것이 수줍기만 했던 나는, 걷는 내내 쭈뼛쭈뼛, 힐끔힐끔 그들을 스캔했다.


《1번 탈락》 

《2번 탈락》

《3번은 음 조금 귀엽고》

《4번, 그래. 4번이 제일 마음에 든다!》


본격적인 미팅을 시작하기도 전에, 이미 1차평가를 마친 나의 심장은 더욱 쿵쾅쿵쾅 요동쳤다.

드디어 남자 넷, 여자 넷이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첫 미팅이어서일까. 

우리는 제법 고전적인 방법으로 미팅을 이어나갔다.


빙 둘러앉아 자기소개를 하고,

MT에서 할 법한 재미난 게임을 하고,

소지품으로 그 날의 커플을 정하기로 했다.


남자 넷이 뒤돌고 있는 사이,

나는 가방 깊숙히에서 핸드폰에 달린 작은 악세사리를 재빠르게 분리했다.

그리곤 테이블에 슬며시 올렸다.


드디어 그 애의 손이 움직였다.

다른 아이의 소지품 위를 잠시 빙빙 맴돌더니,

이윽고 나의 핸드폰 악세사리를 낚아챘다.


악. 


나의 두 볼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주책맞은 콧구멍은 실룩실룩 가만있지를 못했다.

그렇게 우리는 그 날의 미팅 커플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후 진짜 커플이 되었다.


A형인 그 애는 세심했고 다정했고 조심스러웠다.

자기 전에는 휴대폰 너머로 달달한 노래를 불러주었고, 

시험기간 공부하는 나를 찾아와 직접 만든 토스트와 보온병에 담긴 코코아를 건넸다.


그러나, 그 애는 연애에 있어서는 조금 답답하기도 했다.


《지금 키스해도 될까?》


키스 전에는 먼저 내게 허락을 구했고,

애정표현이 별로 없는 내게 섭섭함하다며 삐치기도 했고,

겨울방학 한 달간 배낭여행을 떠난 내가 기대보다 연락이 뜸했다는 이유로,

내게 먼저 이별을 고했다.


그렇게 우리는 함께했던 7개월간의 기억을 지워나갔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어느날,

신촌에서 우연히 그 애를 다시 만났다.


《어?》 

《어!?》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우리는 술기운 때문이었는지

거리낌없이 웃으며 서로에게 인사했다.


《다시 연락하고 지내도 될까?》


이후 그 애의 문자에 잠시 설레기도 했지만,

우리는 친구도 연인도 아닌,

마치 김빠진 콜라같은 관계를 이어나갔다.


분명 하루걸러 하루씩은 만나는데,

마치 연인처럼 매일같이 연락하는데,

여전히 집앞까지 데려다주고, 

벤치에 앉아 한시간씩 이야기 나누는데,

그 애와 나는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미지근한 맹물같은 관계였다.


그렇게 A형과의 짧은 만남은 내게, 

형용할수 없는 찝찝함과 허무맹랑한 편견만을 남겨주었다.


《역시 A형과의 연애는 답답해.》





뚝뚝.

아이들의 손가락 끝에서 붉은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태어나자마자 혈액형 검사를 진행해준 큰애를 낳은 병원과는 달리, 

세쌍둥이를 출산한 병원에서는 별도의 혈액형 검사를 진행해주지 않았다. 

결국 우리는 아이들이 6개월이 되어 혈액형 검사를 할수 있을 때까지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A형 1명에 O형 5명이 될까?》

《아님, A형 2명에 O형 4명이 될까?》

《A형 3명에 O형 3명이 될수도 있어!》


그동안 머릿속에 수없이 그려왔던,

그 의미없는 시나리오들이 내 머릿속을 훑고 지나갔다.


혈액형이 뭐길래.

나는 잔득 긴장한 표정으로 시약을 만지작거리는,

간호사의 입모양에 집중했다.


《1호는 A형입니다.》

《2호도 A형이네요.》

《어! 3호도 A형이에요.》


세쌍둥이 아니랄까봐. A+++

남편과 나의 예상 시나리오가 모두 빗나갔다. 

세쌍둥이는 모두 A형이었다.


큰애가 O형인것으로 보아 
남편은 분명 AO형인데 세쌍둥이가 모두 AO형이 되다니, 
정말 뜻밖이었다.

이렇게 우리집의 전세는 단 하루 아침에 대역전되었다. 


4 : 2


분명 아군이 생기기를 바랬는데,

생각치도 못했던 세쌍둥이가 모두 같은 혈액형이라는 이 놀라운 시나리오가 

오히려 신선하게 다가왔다.


세쌍둥이 모두 A형이라니...

언젠가 아이들이 커서 삐치고 토라지면, 

그때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싶다.


너네는 트리플 A형이라 그래!








(덧글) 살아보니 A형 남자가 모두 답답한 것만은 아니다. 

당시의 선입견은 혈액형보다는 개인의 성향이었던 걸로. 

그러고보니 이번 생은 A형과 징그럽게 인연이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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