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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넷맘 Mar 29. 2019

감정의 시계는 저마다 다르게 흐른다.

내가 건넨 건 화해였을까, 강요였을까.


5.4.3.2.1. 신호등이 빨간색으로 바뀌었다. 삼십분이 흘렀을까. 아님, 한 시간이 지난 걸까. J와 나는 신호등 앞 벤치에 앉아 하염없이 신호등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는 서로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J는 우두커니 앉아 고개를 숙였고, 나는 그런 그 애를 불안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영원한 건 없어. 미래를 약속한다는 건 더욱...”     



J의 입이 잠시 동그랗게 말리더니 한 마디를 뱉었다. 정적을 깬 그 애의 한 마디가 차갑게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침착하게 아주 고요하게 마음을 붙잡고 싶었지만 J의 한 마디는 커다란 돌덩어리가 되어 마음의 바다를 부수었다. 철렁철렁, 파문이 세게 일었다. 뜨거운 눈물이 뺨을 타고 내려왔다.      



“그럼, 나는 더 이상은 못하겠어. 네가 정말 나를 좋아한다는 게 느껴지지 않아...”     



나의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강경한 어조로 이야기했다면 헤어지자는 통보가 되었겠지만, 사실 나는 그애와 헤어질 자신이 없었다. J는 매번 이런 식이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했지만 그 이상에 대한 이야기는 절대 입에 올리지 않았다.

주황색 가로등 불빛이 내려앉은 J의 삭발머리가 유난히 짧아보였다. 군대를 가는 남자, 기다리는 여자, 둘 중 한 사람이 매달려야 한다면 그것은 남자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J는 날 잡지 않았다. 기다려 달라고 애원하지도 않았다. 흔히 연인들은 서로의 미래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지만, J는 책임질 수 있는 것, 명확한 것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는 타입이었다. 사탕처럼 달콤한 말을 속삭일 줄 아는 아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 달콤한 말이 정녕 지금 이 순간 지나가는 찰나의 감정이라 하더라도, 여자라는 존재는 아주 가끔은 그 말을 듣고 싶을 때가 있. 그저 남자의 마음을 확인받고 싶은 것.      



“미안해. 내가 괜한 이야기를 꺼냈어. 난 그냥 네 마음만 듣고 싶었어. 진심. 진심만. 그거면 나는 되는데...”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뱉은 건 나였지만, 결국 나는 J옆에서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두 눈이 퉁퉁 부어오를 정도로.      



“내일 이야기하자. 나도 널 좋아하지 않는 건 아니야. 그런데 지금은... 지금은 더 이상 이야기하고 싶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J의 소매를 힘껏 끌어당겼다. 뭐가 그리도 불안했을까. 나는 J를 놓아주지 못했다. 결국 아무 말도 못할 거면서. J를 놓아주는 건 불안했다. 되돌리고 싶었다. 이 얘기가 나오기 전의 우리 모습으로. 지금 이 자리에서 되돌리고 싶었다. 오늘이 지나면 안 될 것 같았다.

깜빡깜빡. 신호등이 차례대로 바뀌기를 수십 번을 반복했다. 신호등 앞 벤치의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여자는 그의 소매를 붙잡은 채, 끝날 듯 끝나지 않는 싸움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만 얘기하자.”     



온 집 안이 냉랭한 공기로 가득 메워졌다. 숨을 쉬는 것조차 버겁고 답답한 것만 같은 기분, 부부싸움이다. 남편과는 고작 2개월을 만나고 아이를 가졌기에 결혼하고 큰애를 출산하기 전까지 우리는 단 한 번도 싸워본 적이 없다. 서로의 합을 맞춰보지도 못한 채 부부가 된 것이다. 그런데 결혼 2~3년차가 되자 부부싸움이 부쩍 늘었다. 돌이켜보면 별거 아닌 일이었는데 그때는 뭐가 그렇게 화가 났는지 서로 으르렁댔다. 육아를 하면서 바닥난 체력은 서로에 대한 인내심을 쉽게 무너뜨렸다. 싸우고 또 싸웠다. 아마도 그 시기에 우리는 서로에 대한 합을 이리저리 맞춰보았던 것 같다.      



대화에도 기술이 필요하듯 부부싸움에도 숙련이 필요했다. 결혼 십년 차인 지금은 상대방이 어느 정도 되었을 때 화가 날지 가늠이 되기에 언성을 높이는 일은 거의 없다. 아슬아슬하게 경계를 넘나들며, 우리는 그동안 합을 통해 맞춰보았던 서로에 대한 게이지를 기준으로 그 이상은 서로를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초반에는 부부싸움을 하고 화해를 하는 과정도 힘이 들었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으니까 화 풀어.”



남편과 다툴 때마다 나는 하루를 넘기지 못하고 그에게 사과를 건넸다. 나는 순간의 감정에 충실한 단순한 성격이다. 그래서 지금 당장 화가 머리 까지 치밀어 오르더라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풀리는 경우가 많다. 화가 나더라도 돌아서면, 무엇 때문에 싸웠는지조차 기억이 나지 않는 금붕어같은 유형이다. 또한, 어색하고 불편한 집안의 공기를 조금이라도 참지 못한다. 그래서 하루를 못 넘기고 남편에게 사과한 적이 많다.



“나처럼 성격 좋은 와이프 만난 거 행운이라고 생각해.”



멋쩍은 웃음을 지으며 남편에게 이런 얘기를 건넨 적이 있다. 매번 먼저 사과를 해왔던 나는 내가 좋은 성격이라고 착각했다. 사실 한 지붕 아래서 상대방을 모른 척 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더욱이 우리는 부부이기 전에 부모이기 때문에, 부부싸움으로 인한 아이들의 영향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아주 어린 아이라도, 아이는 부모가 싸웠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차린다.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눈빛, 시선, 표정만으로 아이들은 평소와는 다르게 눈치를 살핀다. 그런 아이들의 표정을 볼 때면 안쓰럽고 미안하다.



여보, 그건 착각이야. 여보는 성격이 좋은 게 아니라 오히려 이기적인 거야. 사람마다 화가 풀리는 시간은 달라. 화를 풀라고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상대방에게 부담만 주는 거야. 상대를 이해하고 기다려주는 것, 그게 더 중요해.



농담으로 건넨 말에 사뭇 진지한 대답이 돌아왔다.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나의 입가에 미소가 사라졌다. 충격이었다.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먼저 사과를 한 사람에게 오히려 이기적이라는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는 남편의 대답이 너무나도 섭섭했다. 하지만 이내 곧 생각에 잠겼다.



과연 나는 남편의 말대로 이기적인 사람이었을까.

부부싸움, 연인과의 싸움, 친구와의 다툼.

지금까지 내가 갈등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결하려고 했었는지 떠올려 보았다.      






생각해보니 남편의 말대로 난, 단 한 번도 기다려주지 않은 것 같다. 매순간 나는 불편한 공기를 참지 못하고 먼저 말을 걸고 사과를 건넸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에 그것은 서로간에 오해를 풀고 화해를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지만, 어떤 때는- 특히 연인과의 갈등을 풀어가야 했을 때- 그것은 오히려 독이 되기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갈등이 있을 때, 나는 더욱 조급하게 행동했다. 오늘 우리 사이를 맴도는 이 불편한 공기를 완벽하게 사라지게 만들고 다시 예전처럼 우리를 되돌려 놓고 싶었다. 그래서 상대방은 원하지 않는대도 화해를 할 때까지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고 서로가 지치고 지쳐 다시 마음을 풀게 되는 그 시간까지, 다시 그의 품에 안겨 작은 미소를 확인할 때까지, 나는 화해를 강요했다.



돌이켜보니 나는 철저히 이기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내가 감정을 빠르게 소화시키는 사람이었기에, 상대방도 그럴 거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상대에게 그 시간은 꽤나 부담스러웠던 시간이었으리라.     






사람의 감정 시계는 저마다 다르게 흐른다.

사람마다 감정을 소화하는 시간은 제각기 다르다. 

화해를 한다고 갈등이 해소되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상대방이 감정을 천천히 소화시키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의 속도에 맞게 기다려주는 것도 필요하다. 남편의 한 마디는 그동안 내가 갈등을 어떻게 마주해왔었는지에 대해 많은 질문들을 던졌다. 그리고 때로는 화해하는 것보다 서로 생각을 정리할 나름의 시간을 갖는 것이 더욱 현명하다는 대답을 안겨주었다. 



얼마 전, 집 앞 벤치에 한 젊은 남녀가 앉아있는 것을 우연히 보았다. 찰나의 순간에도, 아주 작은 불편한 공기만으로도, 나는 그들이 다투는 중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멀리 떨어져 슬며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모습은 십여 년전 벤치에 앉아 말이 없었던, J와 나의 모습과 닮아있었다.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사랑이 서툴렀던 시기, 미래가 막막했던 시기, 불안했던 청춘의 기억들이 빙빙 돌며 나를 어지럽혔다.



젊은 남녀의 불안한 눈빛이 가느다랗게 흔들렸다.

이들의 다툼은 언제야 끝날까.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이 후회없이 싸우고, 사랑하고, 헤어지고, 화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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