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하는 길, 저 앞에 두 남자가 대화를 나누고 있다. 한잔 걸친 상태로 보인다. 나이가 더 많아 보이는 쪽이 후배 같아 보이는 상대에게 말한다. "나는 너에게 너무 실망했어. 지금 네가 하는 모든 말들이 진짜 실망스러워."
실망스럽다는 말을 상대에게 저렇게 정면으로 뱉어도 되나. 그 말을 듣고 있는 저 후배는 지금 기분이 어떨까. 선배가 술 취해하는 말이니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까. 저 선배는 정말 술이 취해 실수를 하고 있는 것일까, 술기운을 빌어 작심하고 평소 담아두었던 말을 꺼내고 있는 것일까.
실망: 희망이나 명망을 잃음. 또는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아니하여 마음이 몹시 상함.
실망의 말 뜻에서 볼 수 있듯 내가 '바라던 일'이 그대로 되지 않아서 생기는 마음. 즉 뭔가 나의 기대와 어긋 났을 때 내가 느끼는 심정이다. 그러므로 실망의 주체는 본인이다. 실망은 내가 하는 것이지 누군가 나를 실망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은연중 나도 모르게 무수한 기대를 하게 된다. 나만큼 해주었으면, 내 생각에 따라주었으면, 내 방식대로 해주었으면, 하고 있는 일이 잘 되었으면, 마음먹은 대로 실행했으면 등등. 그러나 모두 나로부터 나오는 기대와 바람일 뿐이다. 아무리 가까운 사람도 결국 나와는 다른 사람이다. 각자만의 상황과 입장 속에 살고 있기 때문에 내가 바라는 대로 해주면 정말 고마운 거고 그렇지 않더라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내 뜻대로 안 되어 상심한 내 마음을 '왜 나를 실망시키나'로 반응하는 건 서로에게 상처만 남는 것 같다. 말하는 본인도 듣는 상대도 그 말로 인해 또 실망하게 되는 감정의 굴레로 들어가는 셈이다.
실망감이 들 때면 무엇을 바랐기에 그런 감정이 드는지 내 마음을 먼저 들여다보면 좋겠다. 당연하지 않은 걸 너무 당연하게 여기고 있던 건 아닌지, 너무 높은 잣대를 가지고 있던 것은 아닌지, 혹시 준 만큼 돌려받아야 한다는 강박이 있지는 않았는지. 상대에게 그것에 대해 꼭 표현해야겠다면 내 마음을 충분히 스캔해 본 다음, 정제해서 간결하게 전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렇게 내 실망감에 대해 생각하고-정제하고-간결화하다 보면 내 안에 생겼던 좋지 않은 감정은 대부분 휘발되고 앞으로를 위해 꼭 필요한 핵심만 전하게 되어 애초 마음과 달리 진정성과 배려, 쿨함까지 엮어내게 될지도 모른다.
오래전에 양희은 님이 하는 말 '그럴 수 있어'와 '그러라 그래'에 대해 짧은 글을 쓴 적이 있었다. 다름을 인정하고 이해하고자 한다면 '그럴 수 있지'에서 벗어날 만한 상황은 거의 없는 것 같다. 내 주위 사람들, 가족, 아이들, 심지어 나 자신까지 누구를 상대로 하든 내 마음이 너그러워지는 마법 같은 말. 실망에서 벗어날 수 있는 마음 자세로추천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