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방보조일기

남편은 요리사. 나는 설거지옥의 주방보조...

by 눈썹달


나는 두뇌회전이 빠르지 못하고 손도 느리다. 살아오면서 많이 개선되긴 했지만 태생적으로 빠릿빠릿하지 않은 사람이다. 내가 다소 답답한 구석이 있던지라 엄마는 제사 때나 명절 때 일손이 필요하면 여동생에게 주로 의지하셨다. 내 동생은 나보다 훨씬 머리가 빠르고 손도 야무진 데다 센스까지 있었다. 여러 말 하지 않아도 알아서 착착했기 때문에 결론적으로 크는 동안 나는 본의 아니게 답답함을 무기로 몸이 편했고 내 동생은 야무진 구석 때문에 집안일을 많이 했다.


그런 내가 음식을 잘 할리 만무했다. 우리네 엄마들이 늘 하시는 음식 만들기는 쉬워 보이지만 절대 쉽지 않은, 정확한 순서와 신속함, 생각이 많이 필요한 활동이었다. 나는 엄마가 되었지만 음식을 잘하는 엄마는 아직 되지 못했다. 다행히 음식 하는 걸 좋아하는 남자를 만나 잘 먹으며 살고 있고, 염치라는 게 있어서 음식을 하지 않는 대신 늘 주방 정리를 담당한다. 주방에서 보조의 역할에 있다 보니, TV 쿡방을 보거나 요리하는 유투버 영상을 보면 저 많은 식기와 집기들을 다 누가 닦고 정리할까? 저것들을 언제 다 정리해? 저 집기는 진짜 닦기 힘들겠다.. 하며, 자꾸 보조의 관점에서만 보게 된다. 보기만 해도 장황한 음식 만들기 잔치를 보고 있으면 금세 지치는 것 같다. 맛있고 보기 좋은 음식이라는 결과물보다 그 결과물을 위한 보이지 않는 노고에 나는 더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음식을 하는 사람들은 만들고자 하는 음식이 잘 나와야 하기 때문에 결과물을 위한 각종 도구들을 마음껏 동원한다. 물론 음식 하는 이가 정리까지 다 한다면 그건 관계없다. 하지만 보통은 음식을 하는 사람이 있으면 함께 잘 먹은 사람이 예의 상 나머지 역할을 하게 되지 않나. 우리 집처럼. 게다가 설거지는 남편이 싫어하는 일 중 하니다. 안 하는 건 아니지만 가능하다면 다른 걸 선택하고 싶어 한다.




평일은 어머님께서 음식을 하시지만 쉬는 날이면 남편이 전담한다. 남편의 음식은 맛있다. 자격증은 없지만 한식 양식 중식 분야별 여러 루트로 접한 방법들을 사용하고 응용하며 참 보기 좋고 맛있게 내어준다. 아이들은 엄지 척하며 잘 먹고 어머님도 나도 잘 먹는다. 하지만 나는 먹기 전까지 남편이 튀김을 하면 튀긴 후의 저 기름은 어떻게 해야 하지. 고기를 구우면 주변에 튀는 기름을 닦아야겠구나. 가스레인지를 또 닦아야겠네. 프라이팬이 몇 개씩 나올 때는 싱크대에 산같이 쌓이는 설거지를 견디지 못하고 옆에서 중간중간 씻어 정리한다. 그럼 그걸 가져다 또 쓴다. (예... 쉪... 쓰십시오.)

나는 요리에 쓸 에너지가 별로 없는 사람이다. 음식에 대한 지식이 없고 말했듯이 손도 느려서 남들에게는 간단한 것도 나에겐 두배의 시간이 걸리는 노동이다. 그러니 보조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데, 치우는 것도 느려서 힘든 운명이다. 종종 남편 대신 애들 먹거리를 해야 할 때면 최대한 간단하게. 사실 어머님이 해 놓으시는 음식만으로도 나는 문제없다. 밑반찬과 김치 혹은 찌개와 김 정도만 있어도 그냥 맛있게 먹는다. 나와 비슷한 딸은 며칠간 김치찌개만 먹기도 하는데 남편과 아들은 늘 새로운 메인이 있는 걸 좋아한다. 아들은 아빠의 음식을 기대하며 기다린다. 먹고 싶은 음식을 얘기하면 정말 요리사처럼 뚝딱뚝딱 금세 만들어주니, 덕분에 대충 먹을 수도 있는 모녀까지 같이 잘 먹게 된다. 음식 만들기가 그렇게 쉬울 수 있다니 나로선 신기하기만 하다.


설거지의 홍수에 빠질지언정, 주말에 아빠표 음식으로 온 식구가 즐겁고 화목하게 식사할 때면 따뜻하고 행복하다. 아무리 좋아서 한다지만 쉬는 날마다 항상 식사를 도맡아주는 남편의 노고가 감사하다.


나는 아직도 음식을 잘할 욕심은 없으므로 한동안은 주방보조가 내 길일 것 같다. 묵묵히 내 길을 가겠다.




이전 04화장거리 출퇴근자의 어느 월요일 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