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거리 출퇴근자의
어느 월요일 하루
맥주 한 모금
월요일 아침 장거리 출근자는 새벽부터 바쁘다. 11월의 첫 번째 월요일. 월례조회가 있는 날.
새벽 4시 40분에 몸을 일으켜 가벼운 스트레칭을 하고 출근 준비를 했다.
아이들에게 짤막한 편지를 남기고, 차 밀리는 시간을 피하기 위해 5시 45분 집을 나섰다.
내비게이션의 도착 예정시간이 계속 늘어난다. 최초 45분 걸린다던 목적지에 1시간 20분 만에 도착했다. 월요일은 늘 이렇기에 새벽같이 나올 수밖에. 그러고 보니 물 한 모금도 안 마시고 나왔다. 갑자기 허기가 밀려와 회사 근처 일찍 문을 연 커피숍에 들러 샌드위치&아메리카노 세트를 샀다. 사무실 자리에 앉아 대충 정리하니 조회가 시작되었다. TV 화면을 통해 진행되는 월례조회를 귀로 들으면서 입으로는 샌드위치와 커피를 열심히 삼켰다.
조회가 끝나고 업무가 시작되었다. 그때 큰아이한테서 전화가 왔다. 배가 아프다며 울먹거렸다. 지난주에도 배가 아팠다 안 아팠다 한다고 해서 병원 진료받고 가벼운 장염으로 약을 받아먹었는데, 3일 치 받아서 하루 반만큼의 약만 먹었길래 물어보니 배가 안 아플 땐 안 먹었단다. 입맛에 맞는 음식을 해 줄 준비가 언제든 되어있는 할머니가 있지만 얘기하는 메뉴마다 먹고 싶지 않다고 할 땐 도리가 없다. 그러고는 군것질하고 음료수 먹고 사발면 먹고... 밥만 먹으라 했거늘 음식 주의를 하지 않고 약도 제대로 먹지 않았으니 나아질 리가 없었다. 아이가 아프다고 할 때 제일 마음이 힘들다. 내가 집에 있었더라면 밥과 약을 챙겨 먹이고, 군것질도 통제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럴 때마다 일하는 엄마여서 아이들 곁을 비우는 것이 미안하고 자괴감이 든다.
하지만 나는 일을 해야 하고 거기에 맞게 아이들을 훈련시켜야 한다. 이제 컸으므로 조금만 신경 쓰면 혼자서 다 할 수 있다. 본인의 몸에 무신경하지 않도록 교육을 더 해야겠다. 매일 가던 학교를 거의 1년간 제대로 안 가고 거리두기 하느라 집에만 많이 있다 보니 아이들이 몸도 정신도 더 약해지는 것 같다. 쉽게 스트레스받고 지치는지 툭하면 머리 아프다 배 아프다 한다. 아프다는 아이를 학교에 억지로 보낼 수도 없다. 오늘 하루 집에서 쉬게 하겠다고 담임선생님과 통화하고, 다행히 오후 출근하는 남편에게 아이 병원 진료를 맡기면서 도마뱀이 꼬리 자르듯 스멀거리는 자괴감을 잘라내고 업무로 돌아왔다.
지난주 바보같이 입을 잘못 놀려서 전혀 급할 것 없는 일에 쫓기게 된 나였다. 이미 내 발등을 내가 찍었으니 후회도 소용없었다. 말하지 않았더라면 하지 않고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일이 오늘도 내 발목을 잡고 있다. 이럴 땐 생각을 바꿔야 한다. 내가 말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하게 되었을 일이라고. 미리 해서 나쁠 건 없다고.
자고로 하기 싫은 일부터 해야 속이 시원한 법이다. 샌드위치 구겨삼킨 힘으로 정말 통화하고 싶지 않은 뻣뻣한 공무원들과 통화를 시도했다. 수차례 시도 끝에 다행히 오늘은 연결되었다. 그 일이 내 발목을 잡고 있는 동안 머릿속에서 여러 번 시뮬레이션되었던 상황이 그대로 연출되었고 별 소득은 없는 대신 어떻게 처리하면 좋을지 머릿속에서 교통정리가 되었다. 어떤 일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다 보면 나도 모르게 일어나지 않은 일까지 끌어안고 끙끙거리게 될 때가 있다. 일에서만큼은 상상을 과하게 하지 않는 것이 정신건강에 좋다.
이메일 체크하고 새 팀장님께서 궁금해하시는 일들 말씀드리고, 몇 가지 지시사항을 수행하니 점심시간이 되었다. 시어머니의 정성이 듬뿍 담긴 도시락을 감사히 먹은 후(코로나 터지고 8개월째 한결같이 싸주고 계신다) 남은 시간을 활용해 주유하고, 근처 상점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사서 사무실로 돌아왔다.
오후에도 틈틈이 팀장님이 문의하시는 사항들을 말씀드리며 데일리 업무를 처리했다. 그리고 담당 임원께서 주재하는 부서 미팅에 참석했다. 새로운 팀장을 맞이한 이 변화가 그분에게 의욕을 불러오는가 보다. 멀쩡히 일하던 사람을 정리했으니 새로 온 사람을 통해 우리 팀을 업그레이드시켜야 이 선택이 옳은 선택이었음을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업무에서의 의욕은 실무자가 담당해야 할 분야라고 나는 생각한다. 위에서 불태우는 의욕은 직원들을 마른 장작 타듯 태워버리기 일쑤다. 거기에 신임 팀장을 기선 제압하려는 의도도 보였다. 우리는 자칫하면 화상을 입거나 재가 될지도 모르는 상황에 놓여있음을 느꼈다. 어쩔 수 없다. 피하지 못할 바엔, 즐길 수도 없을 바엔 긴밀한 협동체제로 최대한 '자칫'하는 일만 피하자. 결코 쉽지 않겠지만.
퇴근할 시간이 다가오니 팀장님이 나에게 집에 가서 애들 챙기고 정리하려면 힘들겠다고 하신다. 잠도 늘 부족하겠다며 내 상황을 헤아려주신다. 세상이 좋아진 것인가.. 아니면 내가 인복이 있는 것인가.. 이전 팀장님도 그렇게 고맙더니 이번 팀장님도 초반부터 감사한 마음이 든다.
업무를 정리하고 6시 15분경 퇴근했다. 올해는 야근한 날을 한 손에 꼽을 정도다. 일찍 끝나서 좋지만 장거리 퇴근자는 그때부터 다시 힘든 시간을 맞는다. 회사에서 집까지 엑셀과 브레이크의 반복 조작을 2시간가량 하면 도착할 때쯤 몸살이 오는 듯한 컨디션이 된다.
저녁 8시. 따뜻한 내 집으로 돌아왔다. 팔순의 시어머니가 고생했다며 간단히 저녁을 차려 주신다. 혼자 샤워하고 가방까지 챙겨놓은 딸이 고마워 위로받는다. 아프다는 아들이 걱정되었는데 웃으며 나와 맞아주니 안도감이 든다. 토끼라고 하기엔 많이 컸지만 내 마음의 토끼들 덕분에, 이 토끼들을 다시 토끼처럼 약해지고 있는 어머니께서 성심을 다해 챙겨주고 있고, 언제나 내편인 남편도 매일을 열심히 살아내고 있으니... 나도 하루를 이기고 오늘보다 내일 더 나은 내가 되고 싶어 진다.
저녁 9시 30분. 제목으로 쓴 맥주 한 모금을 이제야 마신다.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는 나의 의식. 별생각 없을 땐 굳이 먹지 않지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자연스레 떠오른다. 이 한잔에 소소. 복잡. 피곤했던 오늘의 일과를 담아 천천히 마신다. 유난히도 시원하고 따끔따끔하다. 나는 다시 리프레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