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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개향 Apr 02. 2018

<오리건의 여행>, 라스칼 / 루이 조스

여행을 꿈꾸는 당신에게 선물하고픈 그림책 

한성옥 선생님 강의에서 한참을 울게 만들었던 그 책, 알라딘 중고 서점을 훑게 만든 그 책, 글 작가 라스칼의 책을 모두 사게 만든 바로 그 책 <오리건의 여행>이 작년 가을 재출간되었다. 그림책으로 알게 된 소중한 친구가, 재출간되자마자 책을 선물해주었다. 나에게는 2017년의 책이자, 인생 그림책이 되었다.


 

 나는 '설명'을 찾는 사람이다. 이 영화가 무슨 얘기를 하려는 건지, 내가 왜 이 책에 감동받았는지, 그림의 어떤 부분이 내 마음을 울렸는지. 그런데 간혹 그런 설명이 잘 안 되는 작품이 있다. 마크 로스코의 그림 앞에 설 때, 자우림의 <스물 다섯 스물 하나>나 패닉의 <미안해>, 아델의 <Someone Like You>가 흘러나올 때. 무장해제 된다고 해야 할까. 몇 초 되지도 않아 울컥하면서 눈물이 줄줄 흐른다. 그런 이유, 그런 감정들은 말로 잘 설명이 되지 않는다. 항상 머리를 쓰느라 바쁜 나에게는 흔치 않은, 텅 비는 경험이다. <오리건의 여행> 역시 내게 그런 작품이다. 한성옥 선생님 강연에서 엉엉 울며 돌아온 날, 도대체 어느 포인트가 내 마음을 휘저어 놓은 걸까 묻고 또 물었지만 설명이 되지 않았다. 




살에 붙어 버려서요. 난쟁이로 사는 게 쉽지 않아요...


 처음 내 눈물을 쏟게 만들었던 부분은 바로 여기였다. 살에 붙어 버려서요. 살에 붙어 버려서요, 살에 붙어 버려서요....... 난쟁이인 듀크가 살기 위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선택했을 광대의 삶. 그 삶에서 이렇게나 멀어져 왔는데도, 듀크는 아직 광대의 가면을 벗고 온전한 자신의 얼굴로 세상과 마주하기를 두려워한다. 듀크가 오리건 여행을 온전히 선택했다기보다는 곰 오리건의 부탁을 들어주고픈 마음에 떠밀리듯 시작된 것이기에 아직은 그럴 용기가 나지 않은 것이겠지. 겁이 나겠지. 주저되었겠지. 그 두려운 마음이 '살에 붙어 버려서요.'라는 한 문장에 담겨 나를 찔렀던 것이 아니었을까. 그 날의 그 눈물. 



나는 반 고흐의 그림 같은 들판을 헤치고 나아갔습니다.


 몇 번을 읽을 때는 듀크의 빨강코 부분에 참 오래 머물렀다. 그 다음 읽을 때는 이 장면에서 눈물을 쏟았다. 이 작품이 왜 판형이 커야 하는지 여실히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생각한다. 오직 하늘, 밀밭, 그리고 서로에게 기댄 두 사람. 끝없는 수평선 위, 두 사람이 만들어낸 작지만 단단한 수직선. 그 수직선이라면 이 막막한 수평선을 헤치고 어디든지 갈 수 있을 것만 같다.



새소리는 잠을 깨우는 시계였고, 강물은 우리의 커다란 욕조였습니다.
온 세상이 우리 것이었습니다.


 또 한 번은 아이들에게 이 책을 읽어주다 이 부분에서 눈물이 그렁그렁해졌다. 별 것 아닌 듯한 평범한 문장처럼 보이지만, 그 문장 하나하나를 그림으로 머릿속에 그려보면 더없이 황홀한 풍경이 펼쳐진다. 난쟁이로 언제나 낮게 몸을 숙여야 했을 듀크, 서커스단이라는 좁디 좁은 공간에서 갇혀 살아야했을 듀크와 오리건. 그렇게 항상 낮고 좁은 방식으로만 살아오던 두 친구가, 처음으로 만난 높고 넓은 세상은 얼마나 신비로웠을까. 광활한 세상 속 작디 작은 두 친구이지만, 이 순간만큼은 온 세상이 자신의 것처럼 느껴졌으리라. 스스로의 존재가 이때보다 더 크게 느껴진 순간이 이전까지는 없었으리라.




 면지에 그려진 이 마지막 장면에서는 오히려 눈물이 나지 않는다. 홀가분하고 후련하다. 살에 붙어버렸다던 빨강코가 드디어 떨어졌다. 자연스레 떨어진 걸까, 듀크가 스스로 떼낸 걸까? 아니, 이 질문은 중요한가? 잘 모르겠다. 사박사박, 눈 내리는 소리와 눈 밟는 소리가 함께 들린다. 듀크는 이제 어디로 가게 될까. 라스칼의 책은 항상 마지막 장면이 질문으로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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