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날은 7월 13일이었다. 며칠째 연달아 꾸던 꿈은, 상대만 바꿔가면서 내리 Flirting하는 꿈이었다. 꼭 썸타는 꿈이 아니더라도 강렬한 나신, 빨간 옷 등 유난히 육체적인 이미지가 많이 등장하던 시기였다. 대체 이게 무슨 꿈인 걸까? 꿈이 나에게 말해주는 게 무얼까?
침대에 앉아 꿈에 생각하던 오후의 한나절. 아이의 부름에 퍼뜩 침대에서 기어나와 힐끗 거울을 본 순간. 거울 속 나를 보고 흠칫 놀랐다. 아니, 흠칫이라는 단어로는 표현할 수 없을만큼, 자리에서 펄쩍 뛰고 싶을만큼 놀랐다. 이게 나야? 이게 정말, 나라고?
여드름 투성이로 울긋불긋해진 얼굴, 투실해진 턱선, 둥실둥실 살오른 몸매. 단순히 살이 찌고 여드름이 나서 못생겨졌구나, 이런 차원의 놀람이 아니었다. 그건 나에 대한 미안함과 죄책감과 분노와 좌절이 한 덩어리로 뒤섞인 감정이었다.
내가 나를 너무 버려뒀구나. 버렸구나.
당시 나는 "신화로 읽는 여성성 He/She" 수업을 듣고 있던 터였다. 수업 중후반부까지만 해도 꽤 복잡한 감정에 많이 얽매여 있었는데, 마지막으로 갈 수록 틀이나 감정에 얽매이기보다는 '나'에게 집중하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나에게 더 필요한 삶은 무엇인지, 무엇을 하면 그 삶을 살고 다음 단계로 도약하는 데 도움이 될지. 이런 것들이 수업과, 수업에서 들은 질문과 참석자들의 이야기와, 당시 읽고 있던 관련 책, 꾸준히 꾸던 꿈들과 겹쳐 조금씩 명확해졌다.
신화 수업과 일련의 꿈이 거울 속 내 모습과 겹치던 바로 그 순간, 몇 주간의 꿈이 나에게 이야기해주려던 것은 아마 ‘관능’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내가 살지 못한, 그러나 동경해마지 않는 관능적인 삶. 육체의 에너지를 사랑하고, 구애받지 않고 내 마음껏 매력을 발산하는 삶. 본래 20대 때 '안개향'이라는 필명 뒤에 '불길한 매혹 혹은 치명적 상처'라는 부제가 남몰래 붙어 있었던 걸 보면, 그건 내가 살고 싶었던 삶의 일부였던 것이 틀림없다.
사실 좋아했다. 무대에서 자기 안의 에너지를 다 꺼내보여주는 여자 가수들이 미치도록 좋았다. 레이스도, 미니스커트도, 홀터넥도, 오프숄더 같이 '야시시한' 의상도 좋아했다. 대학생 때는 개의치 않고 입고 다니는 걸로 내 마음을 간접적으로 표현하며 살았다. 회사에 들어가고 아이들에 치이고 여유를 잃고 살이 불고 피부가 더 나빠지면서, 그런 삶에 가까운 모든 것을 포기하며 살았던 것 같다. 여전히 아름답고 싶었지만 더이상 '관능'이란 단어는 나와 어울리지 않아 보였다. 그러니, 그런 욕망은 아예 마음 저편에 눌러 묻어두고 없는 척 살았다.
그런데 거울 속에 서 있는 둥그런 여자를 보는 순간, 깊숙이 묻어 두었던 그 단어가 화살촉처럼 심장을 겨눠왔다. 나도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내 스스로 느끼고 싶었다.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내가 내 자신의 몸을 돌보는 과정 속에서 아름다워지고 싶었다. 머리와 펜이 아니라 몸으로도 노래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욕망, 그 자체로도 감각적인 아름다움을 취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
살이 너무 쪄서, 혹은 운동 부족이라서 이런 생각이 든 게 아니다. 아름답고 관능적인 삶은 내가 살고 싶던 삶 중 하나이지만 거의 챙기지 못하고 있던 삶이다. 그리고 살지 못한 삶은 반드시 그림자가 되어 나를 괴롭힌다.
문제는 내가 운동을 정말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남편을 따라 뛰어도 보고 계단 오르내리기도 하고 맘 먹고 홈트나 스퀏을 해본 적도 있지만, 몇 주 이상 간 적이 거의 없었다. 오직 몸의 변화와 건강을 위하여 이 고통을 견뎌내어야 한다는 것 자체가 고통스럽고 재미없었다.
재미가 없으니 지속될 리가 없었다. 살을 빼야 해, 피부가 좋아지고 싶어, 튼튼해지고 싶어, 같은 당위는 나를 움직이는 동기가 되지 못했다. 나에게는 몸을 움직일 다른 동기와 방법이 필요했다.
갑작스레 오래 전부터 배우고 싶던 밸리댄스 생각이 떠올랐다. 검색해보니 근처에 배울 곳은 있지만, 코로나가 창궐하고 애들과 붙어 있는 이 상황에서는 도저히 배울 엄두를 낼 수 없었다.
그럼 집 근처에 있는 발레? 유연성 제로에 음악도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아름다운 선에 대한 동경은 있었으니까.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발레는 내 스타일은 아닌 것 같았다. 다리를 찢고 골반을 여는 고통만 느끼다 돌아올 듯한 예감이었다.
출처: unsplash
그럼 살사는? 20대 초반에 친구와 함께 홍대 바에서 살사를 배운 적이 있었다. 1년도 못 채웠지만, 초급자 과정은 떼고 공연도 했었다. 중급자 과정 듣다가 취업 시즌과 겹치면서 서서히 수업에서 멀어졌다. 살사, 차차, 메렝게, 바차타 음악은 좋아해서, 춤과 멀어진 이후에도 가끔 찾아 듣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 가서 파트너와 춤추는 건 이제 싫은데....... 방법이 없을까?
유투브를 찾아보니 살사 음악에 맞춰 '혼자' 출 수 있는 라인댄스가 많이 있었다. 이거다! 스파크가 일었다. 지금 당장 학원이나 스튜디오에 가서 춤을 배울 수는 없지만, 집에서 매일 듣고 출 수는 있으니까. 잘 추고 못 추고는 지금 당장 중요한 게 아니었다. 내가 춘다는 것, 출 수 있다는 것, 거기에서 기쁨을 느낀다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일주일에 4-5일 30분 이상 라인댄스를 추기 시작한 것이 이제 6주쯤 되었다. 내 몸에 드라마틱한 변화는 당연히 없다. 코로나로 급하게 쪘던 1.5킬로그램이 도로 빠졌을 뿐, 여전히 동실동실하고 피부도 울긋불긋하다. 게다가 15년 전에 짧게 배웠던 게 전부이니 당연히 잘 못 춘다!!! 방이 좁고 애들도 있어 마음 놓고 출 수 없지만 그래도 좋다. 살이 찌고 나서 입지 않던 꼭 붙는 옷을 입고, 세상 잘 춘다는 최면을 걸고 춘다. 무기력하게 눕지 않고 활기를 찾은 내가 좋고, 땀 뺀 덕에 밤에 쿨쿨 잠드는 내가 좋다.
이번 여름에 신화 수업을 들으며 가장 마음에 새긴 말은 “내 안의 조정자가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라는 말이었다. 나의 욕망을 똑바로 들여다보지 못하게 하는 이, 욕망을 발현하지 못하게 하는 이.
“어차피 그래봐야 안 예뻐져. 그냥 너 잘 하는 거 더 해. 책 읽고 글 쓰고 이런 건 네가 하면 할 수 있지만, 춤춘다고 네가 관능적이 되냐? 네 피부나 몸 좀 봐봐, 얼마나 망가졌는지.”
이런 마음의 말에 오래 수긍한 채로 살았던 것 같다. 그 말을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게 이번 수업과 꿈 분석과 직면의 가장 큰 성과이다. 앞으로도 마음 속에서 이런 목소리는 계속 들려오겠지. 그냥 너 하던 거나 해. 그래서 또 헤매고 상처받거나 억눌러 놓겠지.
그래도 다시 한 번 그 목소리에 똑바로 귀기울여볼 용기는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 지금은 굴하지 않고 내 안의 관능을 꺼내어보기 위한 노력을 지속해보려 한다. 그리고 '글 쓰는 사람의 춤 추는 이야기'에서 뻗어나간 여러 화두들도(융 심리학, 그림책 등) 간간히 다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