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딱 네 몫만큼만
2016년 12월 첫째를 만났다. 임신 예정 기간인 40주를 꼬박 채우고서야 아이는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산모님, 아기 나왔어요! 어휴, 고생했어요."
두 귀에 또렷이 꽂혀오는 한마디. 힘을 줄 때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다가 힘을 빼고 나니 모든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딱 하나만 빼고. 아기가 울지 않았다. 힘차게 울려 퍼졌어야 할 아기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때마침 들려오는 옆방 아기 울음소리. 스멀스멀 올라오는 걱정들이 내 몸을 일으켜 세웠다. 팔꿈치로 몸을 지탱하여 45도 정도 상체를 들어 올렸다. 아기는 간호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애가 왜 울지 않는 거냐고 물어보려 입을 떼려는 순간 "응애."하고 작고 가냘픈 울음이 들려왔다. 그제서야 긴장이 풀렸다. 베드 위로 철퍼덕 몸을 뉘었다. 휴. 마침내 해냈다. 엄마가 되기 위한 첫 번째 관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아기를 키우는 일은 그야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언제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몰랐고 그 일을 해결하는 데는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그야말로 초보 엄마와 신참 아기의 환장의 컬래버레이션이었다. 서투른 엄마에게 신뢰가 쌓일리는 없었다. 아기는 쉽게 마음을 내어주지 않았다. 좋은 엄마가 되어주겠다며 매일같이 귀에 대고 속삭였지만 난 그저 노력하는 엄마였을 뿐이었다. 좋은 엄마는 나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수식어인 것만 같았다.
가족들이 울고 있다. "어떡해. 어떡하나, 저거 불쌍해서."를 반복하며 다들 서로를 부둥켜안고 큰 소리로 흐느낀다. 무슨 일인가 싶어 그들에게 다가가 어깨를 흔들어 보고 얼굴을 마주한 채 묻기도 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는다. 하늘이라도 무너져 내린 듯한 묵직한 분위기 속에 아기 혼자만 방긋방긋 웃고 있다. 그녀의 순진무구한 얼굴은 어른들 사이 혼자만 찬란하게 빛을 내고 있다. 그래, 백합. 백합을 똑 닮았다. 순백의 꽃잎이 나를 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가슴 떨리게도. 반면 숨도 제대로 못 쉰 채 꺽꺽거리며 울고 있는 남편이 계속 눈에 밟혔다. 그에게로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고 품에 넣었다. 울지 말라고, 대체 무슨 일이냐며 묻고 또 묻지만 여전히 답은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너 없이 어떻게 살라고. 저거 엄마 없이 어떻게 키우라고. 왜 그리도 빨리 간 거야."
주변을 휘둘러보았다. 거실 전체를 빠르게 스캔했다. 하얀 원형 테이블 위에 올려진 사진 하나. 젊은 시절의 내가 거기에 있었다. 남편과 연애하던 시절에 찍었던 사진이 분명했다. 왕돈가스를 먹은 뒤 올라간 그곳에서 케이블카를 발견할 수 있었고 그걸 탈지 말지를 고민했다. 작은 돈부터 아껴 결혼할 때 쓰자는 나의 제안에 세차게 고개를 주억거렸던 남편. 그의 얼굴엔 애정이 하나 가득 깃들어 있었더라지. 서로의 땀방울을 닦아주며 한여름의 남산을 오르던 우리. 좋았던 기억들은 일순 사라지고 남편 없이 나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만 액자 속에 멀끔하니 잘 끼워져 있었다.
시근덕시근덕 가쁜 숨을 몰아쉬며 크게 소리를 질렀다. 믿을 수 없는 상황에 어쩔 도리가 없어 소리라도 내질러야 했다. 부디 꿈이라면 깨어나야 했다. 번쩍 눈이 뜨였다. 남편의 코 고는 소리가 요란하게도 들려왔다. 익숙한 습도, 낯익은 냄새, 매일 보던 천장. 내가 깨어난 곳은 안방 침대였다. 몸을 벌떡 일으켜 아기가 있는지부터 확인했다. 있어야 할 그 자리에 아기도 남편도 그리고 나도 있었다. 가슴을 부여잡고 울었다. 소리 없이 숨죽여 밤새 울었다. 소름 끼치게 무서웠던 꿈에서의 기억 탓에 가슴이 뻐근히도 미어졌고, 사랑하는 사람들 곁에 있을 수 있음에 진정으로 감사했다. 매일 주어졌던 그 시간들은 결코 당연하지 않았고, 그저 대충 흘려보내서는 절대로 안 되는 것이었다.
욕심내지 말아야지. 오늘도 딱 내 몫만큼만 바라고 누리며 살아가야지. 더한 것을 욕심내고 탐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절대로 하지 않아야지. 주어진 것들을 더 많이 만지고 느끼며 애정을 가득 쏟아줘야지. 뒤돌아서서 후회하는 일 없도록. 시간을 다시 되돌리고 싶은 마음 하나 들지 않도록. 오늘도 발맘발맘 걸어가야지.
그걸로 충분하니까. 그것만으로도 넉넉하게 행복해질 수 있으니까. 그런 삶을 살아가야지. 오늘도 너끈하게 행복을 맛보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