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가 많이 아프대. 저녁에 할머니한테 다녀와야겠어. 늦지 않게 집에 올 수 있지?"
외할머니 건강이 갑자기 나빠졌다고 했다. 아흔을 훌쩍 넘겨버린 연세에 어쩌면 아픈 게 당연했다. 온몸 구석구석 고장이 나고 망가져버리는 게 그리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흔한 상식과 이론은 내 가족에게는 오롯이 적용되지 않았다.
"그럼 반차 쓰고 올까? 같이 다녀오자."
"괜찮으실 거야. 반차까지 쓰지는 말고 정시 퇴근만 해줘."
회사에 있는 내내 걱정이 한가득.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입버릇처럼 외치던 할머니의 말이 자꾸만 귓가에 맴돌았다. "내가 빨리 죽어야지. 더 살아봤자 자식들한테 짐 밖에 더 돼." 그 말을 내뱉은 지도 15년이 훌쩍 지났다. 할머니는 자주 많은 곳들이 아파왔다. 위암으로 위의 70% 이상을 절제하기도 했고, 허리가 구부러져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상태가 되자 수 차례 수술을 받기도 했다. 어쩌면 할머니는 매일같이 죽음의 공포와 싸워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할머니를 떠올리니 두 눈이 아려왔다.
어느덧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날씨가 좋아 회사 동료 언니와 함께 산책을 나섰다. 하루 온종일 머릿속에서 맴돌던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그동안 딱히 떠올려보지 못했지만 요양원에 있는 할머니가 적잖이 외로웠을 것 같았다. 우리처럼 넷플릭스를 보거나 밀리의 서재를 들을 수도 없으니 적막하고 쓸쓸하지 않았을까. 나에게는 더없이 짧고 아쉬운 하루 24시간이 할머니에게는 무척이나 길었겠다 싶었다.
"아흔 살이 넘어가면 삶의 낙이 없을 테지요? 시간이 흐르는 게 참으로 더디고 지루할 것 같아요. 그 어떤 즐거움이나 기쁨도 없이 오늘과 내일을 보내야 한다니. 너무 가혹해요."
내 말을 들은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실은 나 사회복지사 자격증이 있어요. 실습을 다녀와야 해서 요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어요. 그때 할머니, 할아버지들을 많이 만났죠."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나보다 많은 나이만큼이나 경험이 다분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일은 언제나 유익했고 즐거움이 가득했다.
"생각하는 것만큼 요양원에서의 삶이 그렇게 지루하지만은 않을 거예요. 어린이집과 유치원에서처럼 정해진 커리큘럼이 있어 다양한 활동을 하거든요. 가끔은 외부강사를 초빙해 특별한 수업을 마련하기도 하고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게 있어요."
나는 두 귀를 활짝 열었다.
"그분들에게는 두고두고 꺼내볼 추억이 있어요. 젊었던 시절의 자신이 얼마나 잘 나갔었는지. 이뤄낸 성과가, 업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자식들을 잘 키워냈고 그들이 어떤 삶을 살아가고 있는지를 자랑하듯 말해요. 그럼 우린 듣고 또 들었던 말이지만 처음처럼 들어 드려요. 맞장구를 치고 감탄사를 섞어가며 리액션을 해드리는 거죠."
가끔은 억지웃음을 지어야 했지만 대부분은 이야기가 재미있었다고 했다. 게다가 그들의 대화 속에는 대단한 경험들이 곁들여져 있었기에 배울 점이 차고 넘쳤다고. 조상의 지혜를 엿보는 마음으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고 했다.
할머니에게도 분명 그런 경험담이 충만할 테지. 병원 하나 없는 그 깡촌에서도 자식 여섯을 훌륭하게 키워냈으니. 나의 할머니도 기억들을 하나둘 천천히 꺼내고 되새기며 추억을 곱씹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소녀 시절의 당신이 얼마나 꾸밈없이 아름다웠는지. 누구보다 빛나던 그때 어떤 경로로 남편을 만나 사랑에 빠졌고 얼마 만에 결혼에 골인할 수 있었는지. 첫 아이를 출산하고 흘렸던 기쁨의 눈물과 뜨거웠던 심장의 온도를. 여섯째 막둥이까지 결혼을 시키며 느꼈을 홀가분하면서도 적요했던 그때의 마음을.
다가오는 마지막 순간을 두려워하기보다 과거의 영광과 기쁨의 순간들을 떠올리며 행복해지는 그런 삶을 살아갔으면. 암흑 속에서도 작은 불빛 하나가 세상을 환히 밝힐 수 있으니까. 그 빛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분명하게 알려줄 테니까. 지난한 그녀의 시간들이 더는 어둡고 컴컴하지만은 않았으면. 안온하고 평안한 여생을 살다 가셨으면. 부디 그랬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