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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빛의 변주 2

by 안지안


<레드 앤 블루>로 가는 택시 안은 조용했다. 조용했지만, 단어로 쉬이 조합되지 않는 감정들이 차 안의 공기 중에 진하게 섞여 있었다. 유정과 주원은 그 밀도 높은 공기를 들이마시며 각자의 창밖을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유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창문은 겨울 특유의 차갑고 청아한 냄새로 꽁꽁 얼어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 창밖으로 도로의 주황색 가로등 불빛들이 휙휙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유정은 그 불빛들을 따라 시선을 움직이며 조용히 생각에 잠겼다. 조용히 생각에 잠겨, 도저히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다는 생각을 했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머릿속은 새하얬다.

가슴은 또 너무 세게 뛰는 탓에, 그 소리가 주원에게 혹여 들리지는 않을까 염려가 될 정도였다.


그는 아무 말을 않고 있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한 눈으로, 그렇지만 입은 꾹 닫은 채로 자신의 창밖의 지나가는 풍경을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녀는 알 수 있었다. 조금 전 <아트레베리>에서 둘이 손을 잡았던 그 순간, 그의 내면에도 무언가가 변했다는 것을, 혹은 무언가가 결정지어졌다는 것을.


그렇기에 그들의 침묵 속엔 설명할 수 없는 안도가 있었다.

그 고요는 불안이 아닌 위안, 의심이 아닌 확신이었다.

그들은 택시의 뒷좌석에서 여전히 서로의 손을 꼭 잡은채로였으니까.


#


택시에서 내리자 여전한 보라색 네온빛이 어두운 골목을 물들이고 있었다.


묵직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바의 익숙한 향이 훅 들어왔다. 조도는 낮고, 공기는 따뜻했다. 바의 오른편 안쪽엔 언제나처럼 사장이자 바텐더인 남자가 서있었다. 가게 안엔 그 외에 아무도 없었다.


Chet Baker의 <Almost Blue>가 진공관 스피커를 타고 조용히 바닥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트럼펫 소리와 함께 바의 공기를 타고 서서히 퍼져나갔다. 그 소리가 너무나도 차분해서 오히려 더 짙게 느껴졌다. 낮은 음계는 얼어붙은 유리창 너머의 밤처럼 서늘했고, 그 안에 실린 부드러운 Chet Baker의 숨결은 마치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꺼내는 한 마디의 고백 같았다. 그의 목소리는 흐느끼는 듯하면서도 단정했고, 지나치게 감정을 내보이지 않으려 애쓰는 사람처럼 담백했다. 그 애쓰는 담백함이, 그 틈새로 새어 나오는 외로움과 연약함이, 오히려 듣는이를 더 쓸쓸하게 만들었다. 천천히 피어올랐던 공기 중의 파란이 가벼운 기타 줄 소리와 함께 조용히 스러졌다.


바의 주인은 말없이 컵을 닦고 있다가, 주원이 문을 열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특유의 조용하면서도 또렷한 목소리로 인사했다. 그는 어째서인지 두 사람이 손을 잡고 있는 것에 전혀 놀라는 기색이 없었다.


원래부터 좀 능구렁이 같은 구석이 있는 사람이었다. 기분이 나쁜 쪽으로는 아녔다. 다만, 평소에도 말이나 오지랖이 별로 없는 편이라 속을 좀처럼 알 수 없는 류의 사람이었다. 물론 그녀와 주원 둘 다 쉽게 타인과 말을 섞는 타입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의 그런 점이 이곳을 편하게 만드는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둘은 점차적으로 그와 대화를 트게 되었다. 그만큼 <레드 앤 블루>에 자주 오기도 했고, 그곳의 주인도 묘하게 선을 잘 지켜주었다. 둘만 이서 대화가 깊어지는 것 같으면 그는 눈치 빠르게 스윽 빠졌다가, 다시 흥미로운 주제가 나오면 또 요령 좋게 스윽 참견할 줄 알았다. 둘만 이서 대화할 때 그는 전혀 듣고 있지 않은 표정을 하고 있어서, 그가 불쑥 대화에 참여하면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다.


“두 분 오늘 멋지게 차려입으셨네요.” 바 카운터 위에 메뉴판을 올려놓으며 사장이 말했다.


“오늘 화가님의 연말 전시회가 있어서요.” 주원이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 진짜.” 유정이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반응했다.


“그러면-” 사장이 큰 각오라도 한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가 두 분께 칵테일을 한 잔씩 대접하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일」도 있으신 것 같고.”


「좋은 일」이란 아마도, 둘이 손을 잡고 있는 광경을 말하는 것일 테다.


“원래 이곳에서 칵테일은 절대 안 만든다는 주의 아니셨어요?” 유정이 그에게 물었다.


“맞아요. 거의 저희 가게의 「원칙」이라고도 할 수 있죠. 그래도 만들 줄 몰라서 안 만드는 건 아니니까, 기대하세요.”


바의 주인이 어디에선가 롱틴(전용 셰이커)을 꺼내와 그 안에 얼음 조각 몇 개와 도수 높은 드라이 진을 계량해 부었다. 그리고 시럽을 조금, ‘크렘 드 바이올렛’이라고 쓰여있는 병에서 같은 양을 순서대로 넣었다. 액체들이 마치 계곡의 바위처럼 차례로 컵 안의 얼음 사이를 따라 천천히 가라앉았다.


어쩌면 별게 아닌 그 광경엔 묘하게 집중시키는 힘이 있었다. 그것을 유정과 주원은 조용히 지켜보았다.


그는 틴의 뚜껑을 닫고 손목 스냅으로 빠르게 흔들었다. 속에서 짤깍짤깍 경쾌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얄쌍한 스템의 쿠페 글라스 두 개를 또 어디에선가 불쑥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렸다. 그 둥근 볼 형태의 얕은 잔에 스트레이너(칵테일을 만들 때 쓰이는 거름망)를 얹고 칵테일을 천천히 따라 내렸다. 깊은 바이올렛 색의 액체가 잔에 묵직하게 차올랐다. 계곡이 바다가 되는 순간이었다.


순간적으로 유정은 「그날 밤」, 무한히 차던 자신의 와인잔을 떠올렸다.

꽤나 긴 시간 동안 잊고 있었던 이미지였다.


가게 주인이 절도 있게 그녀와 주원 앞에 그가 만든 칵테일을 한 잔씩 차례로 놓아주었다.


“이름은 ‘옵시디언 플립’입니다. 진 베이스에 라벤더 시럽, 바이올렛 리큐르를 넣고 셰이킹 했습니다. 레몬이 아직 들어가지 않았는데, 먼저 한 번 맛보신 다음에 넣는 것을 추천드릴게요.”

남자는 평소보다 짐짓 프로페셔널한 어투로 말했다. 칵테일을 만들면 말투가 자동으로 그렇게 되는 모양이었다.


둘은 물끄러미 각자의 앞에 놓인 ‘옵시디언 플립’을 바라보았다. ‘옵시디언’ - '흑요석', 웬일인지 사람들은 짙은 보라색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화산암이다. 엄연히 이름에도 ‘흑’이라고 쓰여있는데도 말이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칵테일 역시 짙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마치 별이 가득한 우주 한 편이 잔에 깃들어 있는 듯했다.


물론 그것을 따져 물을 생각은 없었다. 유정은 잠자코 그것을 한 모금 들이켰다.


라벤더 시럽 때문인지 꽃향기 중심의 절제된 달콤한 맛이 났다. 어쩌면 진의 풀내음이 이유였을지도 모른다. 어쨌든 단맛은 있어도 끈적하지 않고 맑고 가벼운 질감이었다. 그것은 확실히 묵직해 보이는 표면적인 색깔에 비해 의외의 맛이었다.


“오, 깔끔하게 맛있는데요?” 옆에서 주원이 먼저 말했다.


“괜찮나요?” 주인이 되물었다.


“네, 제가 딱 좋아하는 맛이에요” 유정도 말했다.


“자, 그럼 이제...” 주인이 옆에 놓인 작은 촛대에 불을 켜며 말했다. 가게 안이 조금 환해졌다.

“레몬을 넣겠습니다.”


그는 미리 조각내놓은 레몬을 작은 비커 안에 꽉 짜냈다. 그리고 스포이드를 (자꾸만 어딘가에서 물건들을 휙휙 꺼내는 게 마치 마술 같았다) 그 안에 넣고 레몬즙을 빨아들였다.


“잘 보세요.” 남자가 말했다.


그가 스포이드로 레몬즙을 정확히 두 방울 떨어뜨리자, ‘옵시디언 플립’의 색이 일렁이며 순식간에 연한 루비빛으로 밝아졌다.


유정과 주원은 동시에 “우와”하며 그것을 신기하게 쳐다봤다. 마치 화학시간에 과학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재밌는 실험을 보여주는 듯한 풍경이었다. 물론 가게의 주인은 하얀 가운이 아닌 짙은 갈색의 가죽으로 된 앞치마를 입고 있었지만.


“레몬즙의 산성 반응 때문에 그렇습니다.” 주인이 설명했다.


그래서 ‘플립’이라고 이름이 붙었구나.


“산미가 올라오면서 단맛은 조금 뒤로 물러나고, 레몬의 생동감이 앞쪽으로 나올 거예요. 다시 한번 맛보세요.”


확실히, 밝아진 색만큼이나 맛에서도 밝은 전환이 일어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더 잡힌 맛이었다. 특히, 피니시가 훨씬 더 드라이한 느낌이었다.


“너무 맛있어요 사장님.” 주원이 감사의 인사를 했다.


“색이 너무 이뻐요.” 유정이 말했다.


“다행이에요.” 주인이 바 테이블 위를 행주로 닦으며 짧게 대답했다. 비커와 촛대는 그새 어딘가로 이미 치워져 있었다. 가게가 다시 조금 어두워졌다.


“그럼, 두 분 말씀 나누세요.” 남자는 그 말을 하고 긴 바 테이블의 다른 쪽 끝으로 스윽 빠졌다. 그리고 다시 무심한 표정으로 이미 깨끗한 잔을 하나 집어 들고 헝겊으로 닦기 시작했다.


둘은 서로의 두 눈을 마주 보며 칵테일을 한 모금 더 마셨다. 확실히 레몬즙이 들어간 쪽이 유정의 입맛에는 더 맞았다.


“부모님이 인상이 너무 좋으시던데요.” 주원이 먼저 말을 꺼냈다.
“사이도 좋아 보이시고.”


“아, 감사합니다. 저희 집은 아빠가 좀 주책이라 오늘 살짝 걱정했었어요. 혹시나 들떠서 오바하거나 하실까 봐.......”


“정말요? 되게 점잖아 보이시던데?”


“아빠가 원래 좀 그런 ‘척’을 잘하세요. 동네 사람들은 다 아빠가 과묵한 사람인 줄 안다니까요. 진짜 웃겨... 집에서는 엄마한테 애교도 많고 그러면서.” 유정이 웃으며 말했다.


“근데, 그게 좋은 거 같긴 해요. 밖에서 과묵하고 안에서 말 많은 게 더 낫겠죠, 그 반대보다.”


“그건 확실히 그래요.”


유정은 칵테일을 또 한 모금하며 자연스럽게 창밖의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믐달이 떠있었다.


잔을 내려놓으며 무심코 간 유정의 시선 끝에 ‘옵시디언 플립’은 다시금 농도 짙은 보라색을 띠고 있었다. 분명히 방금 전에 루비빛으로 변했던 것이, 어느샌가 다시 리셋되어 버린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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