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의 변주 1
<아트 레베리>는 번화가와는 거리를 두고 있었다. 주변은 빛바랜 오랜 사진 같은 느낌이 드는 동네였다. 작은 개인 카페와 골동품 상점, 오래된 사진관과 미용실, 그리고 가정집이 뒤섞인, 오래되었지만 차분하고 정갈한 골목의 끝에 <아트 레베리>는 위치하고 있었다.
그렇게 이 갤러리는, 언제나 ‘이미 거기 있었던’ 존재처럼 느껴졌다. 마치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하며 숨어 있는 것처럼. 누군가 자신을 발견하더라도, 딱히 숨어있었던 건 아니라며 시치미를 뗄 것 같이 말이다.
간판도 따로 없었다. 묵직한 콘크리트 외벽 위에, 아주 작은 세리프체 글씨로 새겨진 ‘Art Reverie’라는 이름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낮에는 그림자에 묻혀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곳은 쉽게 발견되지 않기에 그곳을 목적으로 찾아온 사람만이 도달할 수 있는 그런 장소였다. 점잖으면서도 조금은 새침하달까. 그런 특유의 단단한 고요가 있었다. 그냥 지나가다가 한 번 들어가 볼 만한 곳이 전혀 아녔다.
건물은 건축적으로 눈에 띄는 어떤 특이점도 없었다. 그러나 그 눈에 띄지 않는 정갈함이 곧 그것의 아이덴티티였다. “아트”가 돋보여야 하는 “갤러리” 빌딩으로서 어쩌면 아주 적절한 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콘크리트와 유리, 목재로 단정히 이루어진 사각형의 구조. 그러나 그 ‘단정함’이 깊은 존재감을 발산하고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평평한 입면, 일정한 간격으로 정돈된 틈, 창을 따라 흐르는 실루엣의 균형 - 하나하나의 요소는 개인적이고 무심한 듯 존재했지만, 모두가 모여서 꽉 짜여진 하나의 일체가 되었다.
주원이 그곳에 도착한 것은 오후 다섯 시쯤이었다. 낮 동안 차가운 콘크리트였던 외벽은 저녁 햇빛을 받아 진한 회갈색으로 물들었고, 창문 안쪽에서 은은하게 퍼지는 조명은 거리의 어둠과 부드럽게 맞닿았다. 그는 밖에 세워진 유정의 민트색 웨건을 눈으로 확인한 뒤 갤러리 안으로 들어갔다.
<아트 레베리>의 실내는 누구라도 이곳에 들어오면 허리를 갖추 세우고 자세를 바로 잡게 될만한 그런 곳이었다. (실제로 주원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굽은 허리와 어깨를 쫙 펴는 자신을 발견했다.) 안에서는 은은하게 나무 향이 섞인 비누 냄새가 났다. 실내는 바깥에서 보기보다 안 쪽으로 훨씬 깊었다. 공간은 넓고 천장은 높았다. 벽은 무광의 밝은 톤이었지만, 병원에서 흔히 보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청명한 새하얀 색과는 달랐다. 아주 연한 베이지와 아이보리 사이 어딘가에 머무는, 차분하고 부드러운 톤이었다. 그럼에도 누군가 이 벽의 색깔이 무엇이냐 묻는다면 하얀색이라고 할 수밖에 없을만한, 묘한 색이었다. 그리고 곳곳에 걸린 그림들이 그 여백을 차분하게 채우고 있었다.
벽을 따라 흐르는 간접조명은 하얀 벽면에 부드러운 경계를 만들었고, 바닥의 결이 살아있는 어두운 원목과 만나 차분한 대비를 이루었다. 조명은 철저히 계산된 듯했지만, 결코 인위적으로 느껴지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들이 각 작품을 따라 정확하게 떨어졌다. 전체적으로 갤러리 안이 결코 밝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혹은 딱 알맞게, 모든 작품을 또렷하게 보이게 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시즌답게, 구석에는 유칼립투스 가지와 겨우살이로 장식된 리스가 걸려 있었고, 여기저기에 비치된 테이블 위에는 금빛의 대형 촛대와 (불은 당연히 켜져있지 않았다) 투명한 유리 공 오브제가 놓여 있었다.
안을 채우는 모든 것들이 아주 세심하게 튜닝된 피아노처럼 조화로웠다. 애쓴 티를 내지 않으면서도 부티가 났다. 안에 있는 사람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대부분 검은색과 짙은 베이지 계열의 옷을 입고 있었고, 누구도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았다. 다들 한 손에 와인잔이나 샴페인잔을 든 채, 천천히 걷거나 조용히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어딘가에서 은은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며, 마치 여름날의 습기처럼 빈틈없이 영역을 메우고 있었다. 곡은 <죽은 공주를 위한 파반느>였다. 그것의 출처는 한쪽 벽에 나란히 서있는, 거의 냉장고만한 크기의 스피커 두대였다. 묵직하면서도 곡선이 아름다운, 존재감이 굉장한 물건이었다. 아마도 몇백, 어쩌면 몇천만 원 정도 하는 장비일 것이라고 주원은 예상했다. 비슷한 제품을 자신의 사무실에 들여놓으며 김대표가 이게 성능이 어떻고 가격이 어떻고 하며 자랑을 했던 것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몇천만 원이라고 했었다.
주원은 이곳의 대표는 아마도 뛰어난 미적 감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아트 갤러리의 대표이니 당연히 그렇지 않겠느냐고 주원은 머릿속으로 혼자 자학을 했다.) 그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물론 이게 영화라면, 주인공은 유정이었다. 적어도 주원에겐 그랬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 앞에서 몇몇의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녀의 원래도 하얀 피부가 그림 조명 아래서 평소보다도 더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주원은 아직 그 인파 속에 들어가지 않은 채로 우두커니 서서, 입장할 때 직원에게 건네받은 전시 가이드에서 유정의 이름을 찾았다.
「빛과 어둠은 서로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는 그 오래되고 단순한 명제를,
작가는 일말의 여지없이 부정한다.
“빛은 끌 수 있어도, 어둠은 꺼지지 않는다.”
신인 작가 지유정의 세계관은 그것을 전제로 한다. 그녀는 작품을 통해서
어둠이 단지 빛의 부재가 아닌 독립적인 실체임을, 나아가 그것이 이 세상의
“기본값”임을 선언하고 있다.
빛이 아닌 어둠을 표현한다는 데에서, 지은정의 세계는 타 작가들과 시작점
부터가 다르다. 그리고 그녀의 어둠은, 단지 외부의 세계를 묘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기억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그녀의 작업은 ‘무엇을 보았는가’보다 ‘어떻게 인식했는가’, 그리고 ‘그 기억을
어디까지 믿는가’를 묻는다.
천 명의 사람이 있다면, 천 개의 태양, 천 개의 세상이 있다.
그리고 작가는 그중의 한 명으로서, 단 하나의 자신만의 세상을 그려냈다.
그녀는 눈앞의 사물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고 있는 형상을 복원한다.
그렇기에 그 사실성은 더욱 개인적이며, 때로는 현실보다도 더 뚜렷하다.
자신의 기억이 틀릴 수도 있다는 걱정은 전혀 되지 않는다는 듯, 오히려
기억하는 대로의 장면을 뻔뻔하리만치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집중한다.
그렇게 재현된 이 회상 기반의 세상은 언제나 아주 미세한 어긋남을 동반한다.
그 어긋남은 단순한 왜곡이 아니다. 이 어긋남은 초현실감을 자아내는 주요한
감각적 장치로 작용하며, 관람자는 자신이 알고 있던 세계의 틈을 마주하게
된다. 그것이 화자와 관람자의 인식의 거리이다.
그리고 어둠은 바로 그 균열을, 꺼지지 않은 채로 말없이 채우고 있다.」
자신이 직접 쓴 유정의 전시 가이드 글을 주원은 두 번 완독 하였다. 조금 더 잘 쓸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좀 더 읽기 쉽도록 쓸 수 있지 않았을까. 그래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한 번쯤은 고쳐쓸 기회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지만, 그의 글을 받아 본 박시현 대표라는 사람은 그가 쓴 글을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다. 그리고 그에게 그녀의 갤러리의 모든 나머지 작가들의 가이드도 요청하였다. 다른 작가들 소개글에 비해서 너무 혼자만 돋보이니까, 그냥 아예 전체를 다 맡겨야겠다는 게 이유였다. 처음엔 거절을 할 생각이었으나, 박대표의 (유정을 통한) 간곡한 요청을 (그리고 꽤 괜찮은 보수를) 그는 끝내 거절할 수가 없었다.
유정은 여전히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 주변엔 작가들, 평론가들, 그리고 마치 이 세계에 늘 속해온 듯이 이 공간에 자연스럽게 녹아든 사람들이 있었다. 그 흐름과 질서 속에서, 유정은 묘하게 중심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녀는 잔을 든 채 고개를 끄덕이고, 짧게 웃거나 다시 시선을 돌렸다. 말수가 많아 보이진 않았지만, 대화의 중심은 분명히 그녀였다. 그리고 이곳의 중심은 그녀의 그림일 것이라고 그는 확신할 수 있었다. 다른 작가들의 그림들도 물론 훌륭했지만, 그녀의 어둠과 빛의 그림들은 그곳의 주목을 블랙홀처럼 빨아들이고 있었다.
유정은 주인공답게 오늘 밤에 어울리는 옷을 입고 있었다. 짙은 잉크색의 새틴 셔츠 드레스, 단정하게 묶은 낮은 번, 그리고 어깨에 걸친 얇은 코트가 그녀의 허리를 따라 흐르듯 가볍게 떨어졌다. 눈에 띄게 번쩍이는 액세서리는 없었다. 대신 그보다 빛나는 그녀의 목선과 손목, 그리고 그녀를 맴도는 그녀만의 아우라가 있었다. 원하면 언제든지, 얼마든지 저렇게 꾸밀 수 있는 사람인지, 그만큼 그녀가 평소엔 얼마나 소탈한 차림새를 하는지를 주원은 새삼 깨달았다. 그러자 저기서 인파 속에 있는 유정은 같은 사람이지만, 어딘가 또 다른 존재처럼 느껴졌다. 그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에 약간의 민망함을 느꼈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언제나 이렇게 조금 먼 세상에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때 그녀가 그를 발견했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보는 눈빛.
유정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조용히 인파를 가로질러 걸어왔다.
걸음은 조용했지만 망설임은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가까워졌을 때, 약간 민망한 미소로 자신의 앞머리를 괜스레 만지며 그에게 말을 건넸다.
“언제 오셨어요?”
그 순간, 공간의 모든 소리가 낮아진 듯했다.
그제야 평소 그가 봐오던 그녀였다. 그제야 그녀가 낯설게 보이지 않았다.
주원은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연락 바로 하시지.” 유정이 자꾸만 머리를 만지며 말했다. 한껏 멋 부린 머리가 아무래도 조금 신경 쓰이는 듯했다.
“아니 너무 기자회견하는 스타 같으셔서 제가 도저히 아는 척을 못하겠더라고요.”
주원의 말에 유정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흘겼다. 농담인지 아닌지, 확인하려는 표정이었다. 그리고 잠시 후, 빨개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이런 자리가 익숙지가 않아서 민망해 죽겠어요.”
말은 그렇게 하는 그녀였지만, 누구보다도 이곳이 어울리고, 또 여기서 돋보이는 사람이라고 주원은 생각했다.
그녀는 옆으로 반 발짝 물러나며 그와 나란히 섰다. 둘 사이엔 약간의 낯섦이 있었다. 둘의 거리감이라기보단, 장소의 이질감 때문이었다.
“아, 저쪽에 검은색 드레스에 올백 머리 하신 분이 우리 박대표 님이세요.” 유정이 인파 속에 한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불편해 보일 정도로 딱 붙는 드레스를 입고 굴곡진 몸매를 다 드러내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새카만 머리는 마치 관리가 잘된 말의 꼬리처럼 숱이 많고 결이 굵었으며 윤기가 흐르고 있었다. 인상이 굉장히 세 보이는 사람이었다. 박대표가 어떻게 생겼을지 상상을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여자를 보자마자 박대표라는 사람의 막연했던 이미지와 정말 잘 들어맞는다고 주원은 생각했다.
말을 멈춘 유정이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와주셔서 감사해요. 혹시, 불편하진 않으세요?”
“아닙니다. 초대해 주셔서 영광이에요.”
「영광」이라는 말이 또 농담인가 해서 유정은 주원을 가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물론 그건 농담이 아니었다.
잔잔한 음악과 사람들의 낮은 목소리, 그리고 둘의 묘하고 낯선 긴장감이 공기 중에 흐르고 있었다.
주원은 자신이 조금 늦게 도착했더라면 이 순간을 놓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유정이 갑자기 고개를 돌려 누군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가 시선을 따라가자, 한 쌍의 중년 부부가 전시장 안쪽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단정한 코트를 입고 있었고, 여자는 검은 터틀넥에 연한 회색 머플러를 두르고 있었다. 둘 다 따뜻하고 조용한 인상을 지니고 있었으며, 유정을 보는 표정에는 흐릿한 웃음이 머물러 있었다. 그 둘이 누구인지 주원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엄마, 아빠.”
유정이 가벼운 발걸음으로 그들에게 다가가며 부드럽게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오셨네요.”
그녀는 두 사람을 향해 다정하게 몸을 기울였다.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며 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고, 어머니는 유정의 손을 꼭 잡았다.
그 장면은 왠지 조금 놀라웠다.
주원은 유정이 이렇게 사람을 반기는 모습을, 특히 손을 먼저 내미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몸을 돌렸다.
“이쪽은, 임주원 씨야.”
“안녕하세요, <다소다>라는 잡지사에서 편집자로 일하고 있는 임주원이라고 합니다.” 주원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유정이 아비, 어미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 유정이 잘 부탁드립니다.” 유정의 아버지 역시 인사를 하며 말했다. 그 짧은 한마디로도 인품이 묻어나는 사람이었다.
“잘 부탁드린다”는 게 과연 무슨 의미였을까? 잡지사를 다닌다니 일적으로 잘 부탁한다는 의미였겠지? 설마 유정이 그녀의 부모님에게 자신에 대해서 뭐라고 얘기를 했던 것일까? 그랬다면 뭐라고 했을까? 만나는 사람이 있다고? 우리는 만나는 사이인가?
반발자국 뒤에 선 유정의 어머니는 인자한 미소를 머금은 채로 그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주원은 자신도 모르게 한번 더 상체를 숙여 꾸벅 인사를 했다.
“얘기들 나눠요. 유정아 우리는 그림 좀 둘러보고 올게.” 어머니가 남편의 옷자락을 살짝 끌어당기며 말했다.
“엄마, 내가 안내해 줄게.” 유정이 그녀에게 말했다.
“아니야, 괜찮아, 괜찮아.” 어머니가 손사례를 치며 대답했다. 그리고 빠른 걸음으로 순식간에 그들에게서 멀어져 갔다. 그들의 등에다 대고 주원은 또 한 번 꾸벅 인사를 했다.
“왜 저래, 정말…….” 유정이 말했다. 붉어진 얼굴로.
그녀의 붉어진 얼굴로 그는 비로소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잘 부탁하한다”는 그녀의 아버지의 말의 의미를.
주원과 유정의 눈이 또다시 마주쳤다. 그리고 그 짧은 눈빛 교환 속에 무언가 작게 스쳐 지나갔다.
“저… 잠깐만요. 아무래도 부모님께 여기 분들 좀 소개해드리고 올게요.”
유정이 말했다.
주원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다녀오세요. 저는 그림 좀 더 보고 있을게요.”
유정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작게 고개를 숙이고 사람들 틈으로 사라졌다.
그 자리에 홀로 남겨진 주원은, 조용히 시선을 돌려 그녀의 그림 앞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달빛의 변주>라는 제목이 붙어있었다.
그림은 조용했다. 그리고 밤이었다. 달빛은 미세하게 그림 속 세상에 번져 있었고, 그 속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일상적인 사물들의 형체가 조금씩 어긋나게 놓여 있었다. 창틀, 문 손잡이, 접힌 커튼의 주름, 벽과 벽 사이의 그림자. 모든 것은 아주 현실적으로 묘사되었으나, 어딘가 아주 조금씩 비켜나 있었다. 무엇이 비켜나 있는지를 콕 집어서 말할 수는 없었지만, 모든 것은 확실히 다른 차원에, 지극히 개인적인 세상 속에 있었다.
그 조용한 어둠엔 생동감이 넘쳐흐르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을 내리쬐는 조명의 빛마저 꿀꺽꿀꺽 삼키고 있는 듯한 인상마저 주었다. 밤은 어둠을 주체하지 못한 채 캔버스의 경계를 넘어 벽을 타고 전이되고 있었다. 그녀의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였다. 널찍한 한쪽 벽을 차지한 그녀의 그림들 속 밤들이 각각의 캔버스를 넘어 서로의 밤들과 뒤섞였다. 그리고 이내 하나의 큰 농도 짙은 어둠이 되어 건물 안 전체로 퍼져나갔다.
그 정도의 힘이 그녀의 그림에게는 있었던 것이었다. 그들을 품기엔 이곳은 너무 비좁아 보였다. 그림에서 시작된 밤은 어느새 창문 쪽까지 뻗어가 그믐달의 유약한 달빛이 섞인 현실의 밤과 접촉을 하려 하고 있었다. 그것을 막아서기엔 유리벽은 너무나 위태로워 보였다.
주원은 창문 쪽으로 가있던 고개를 다시 돌려 자신의 앞에 있는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이건 유정이 본 밤이 아니라, 유정이 기억한 밤이라는 걸.
‘보고 그리는 게 아니라, 기억하고 그린다’고 했던 그녀의 말이 다시 떠올랐다. 그녀는 자신의 기억을 누구보다도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만이 내 세상’이라는 듯이.
주원은 가볍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그녀와 함께 둘만의 세계에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날 밤」에 둘만이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그렇게 생각해도 괜찮은 걸까. 어쩌면 그저 각자의 「그날 밤」에서 존재하는 게 아닐까. 그녀의 세상은 이렇게나 홀로 정체성을 가진 채로 뻗어 나고 있었다. 마치 그녀의 그림을 통해 그녀 자신이 완성되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만의 세상을 온전히 받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이제 주원이 그것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 뒤에서 익숙한 기척이 들려왔다.
“오래 서 계시네요. 그 그림 앞에.”
유정이었다.
주원은 뒤를 돌아보며 조용히 대답했다.
“금방 오셨네요.”
유정은 그의 옆에 조용히 섰다.
그리고 둘은 말없이, 같은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굳이 설명하지도 않았고, 무언가를 기대하는 기색도 없었다.
다만, 함께 서 있을 뿐이었다.
떨어뜨린 그녀의 왼손이 그의 오른손에 가까이 있었다. 그의 손이, 손가락 마디들이 그녀의 손 주변에서 몇 번이나 움찔하고 있었다. 마치 찌릿한 전류가 느껴지는 것처럼,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이 감정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더 이상 외면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아예 모른 채 하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녀의 왼쪽 손등이 그의 오른쪽 손등을 살짝 스쳤다.
한 번 더 스쳤다.
그리고 그녀는 이내 살포시 그의 새끼손가락을 잡았다.
둘은 꽉 깍지를 꼈다.
주원은 그 순간 숨을 조금 참았다.
그것은, 말 그대로 '동기화'였다.
그의 두 입술은 말없이 다물어졌고, 그의 두 귀는 온 세상이 잠깐 정지한 것처럼 먹먹해졌다.
그녀 역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둘 사이의 정적을 흐트러뜨리지 않은 채로, 조용히 그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듯이.
자신의 세계엔, 당신이, 그리고 당신밖에, 없다는 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