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동의 종착 3
밤은 점점 추워지고 있었지만, 길라는 아랑곳 않고 점점 자신의 활동반경을 넓혀가고 있었다. 유정의 화실로 거처를 옮긴 지 어느덧 한 달,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마실을 나온 그의 눈에 보인 것은 보라색의 불빛이 걸려있는 어느 한 건물이었다.
사람들이 거주하는 주택가라서 그런지, 골목 안은 매우 조용했고 꽤 어두운 편이었다. 확실히 성수동의 여느 골목들과는 많이 다른 분위기였다. 그리고 그곳의 깊숙한 곳에서 홀로 퍼지고 있는 보라색 조명은 골목 전체의 톤을 몽환적으로 자아내고 있었다.
길라는 홀린 듯이 그 빛을 쫓아 총총걸음으로 골목 안까지 들어왔다. 어떤 한 중년의 남자가 밖에서 담배 연기를 피우고 있었다.
“잘 찾아왔네.” 그 남자가 말했다.
길라는 그것이 자신에게 하는 말인 줄 모르고, 그를 무시한 채 건물 주변의 냄새를 킁킁 맡고 있었다.
“딱 오늘 밤쯤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말이야.” 남자가 말했다.
길라는 남자가 계속해서 혼잣말을 하는 게 이상해서 고개를 슥 돌려 그를 쳐다보았다.
“맞아, 너한테 한 말이야. 딱 좋은 타이밍에 왔어, 길라.”
남자는 길라를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정말로 고양이에게 말하고 있었다.
“당신은 내 말을 알아들어?” 놀라서 동공이 커질 대로 커진 길라가 말했다.
“신기하지? 하지만 너도 내 말을 알아들을 수 있잖아. 나는 그저 너와 같은 걸 할 줄 아는 것뿐이야.”
고양이들은 대부분 사람들의 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반대로 고양이들이 하는 말을 알아듣는 사람은 단 한 번도 본 적 없었다. 동물들이 인간들처럼 언어체계를 따로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지 않나. 길라가 신기해서 남자에게 물었다.
“인간이 어떻게 고양이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지?”
“맞아, 사람은 동물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지. 하지만 난 너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고 있어.”
“그렇다는 건…”
“그래, 그렇다는 건 내가 보통의 인간이 아니라는 거겠지.”
“보통의 인간…? 인간이긴 하다는 건가?”
그가 하는 말에 검증 같은 것은 전혀 필요치 않았다. 사람이 고양이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 데 무엇을 더 증명해야겠는가.
“맞아. 인간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따라 답이 약간 달라질 수도 있겠지만, 네가 생각했을 때 떠올리는 그 인간은 「우선」 맞아.”
“「우선」은 맞다니……. 그리고 내 이름은 또 어떻게 알고 있지?”
“역시… 질문이 많은 고양이라더니, 아주 총명한 아이로구나, 길라.”
남자는 단순히 길라의 이름을 알고 있었을 뿐만이 아니라, 마치 그에 대해서 이미 여러 가지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말했다.
“당신, 정체가 뭐야?”
그때였다. 바로 그때, 길라가 그 기이한 남자의 정체를 물음과 동시에, 길라는 그가 「그날 밤」과 연관된 사람일 것이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의 이름은 신형태야. 하지만 네가 궁금한 건 내 이름 따위가 아닐 거야, 그렇지?”
남자가 담뱃불을 끈 뒤 꽁초를 옆에 둔 깡통에 버리며 말했다.
“맞아, 나는 「그날 밤」과 연관된 사람이야. 아니, 「연관」이 되어있다기 보단, 그것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이지.”
“네가 「그날 밤」 있었던 일에 대해서 설명해 줄 수 있단 말이야?”
“음… 그걸 직접적으로 설명하는 것은 아마도 쉽지 않을 거야… 그것은 내 「역할」이 아니기도 하고.”
“역할…?”
“응, 그것은 내가 너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게 아니야. 그것은 결국 네가 스스로 해야만 하는 일이지. 네가, 너만의 방식대로, 너의 시간에 맞추어서 알아가야 해. 그게 너의 역할이니까.”
길라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건가, 이 남자는. 자신은 자신의 삶을 살 뿐이다. 자신의 삶이 도대체 「무엇의 역할」이란 말인가.
“그래, 너는 너만의 주체적인 삶을 살 뿐인데, 남이 너의 삶에 대해서 역할을 다하고 있다고 말하면 거부감이 들 수 있어. 그건 자연스러운 거야.”
남자는 천천히, 그리고 또박또박 확고한 어투로 고양이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렇지만 너의 역할이란 건 너의 파동 그 자체야. 그러니 그냥 지금처럼, 앞으로도, 그저 너답게 살아가면 돼. 그것만으로 충분하거든. 의식할 필요도 없고, 애쓰지 않아도 돼. 특별히 기분 나빠야 할 일이 아니야.”
“세상의 모든 것은 이어져있다. 「그런 류」의 시시한 얘기잖아?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있어.” 길라 역시 남자의 눈을 보며 말했다.
“그래, 이 똑똑한 고양이야.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파동을 만들어 내지. 나는 그 파동을 감지할 수 있는 인간이야. 「개별적」으로, 그리고 「전체적」으로. 네가 만들어내는 파동을 난 오래전부터 감지하고 있었어, 그리고 네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단 걸 알 수 있었지. 그리고 오늘 이렇게 내 앞에 선 너를 보니 내 능력도 아직 쓸만한 가봐.”
“그래서, 나의 그 파동이든 뭐든, 결국 내가 무엇의 「역할」이라는 거야? 그냥 모든 게 이어져 있는 이 세상에서 내가 살아만 있으면 내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저 그런 추상적인 얘기를 하는 건가?”
남자는 잠시 고민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추우니까 잠시 안으로 들어갈까?”
남자는 묵직한 보라색 문을 당기고 길라를 기다렸다. 길라는 썩 내키진 않았지만 마침 점점 체온이 낮아지고 있어서, 못 이기는 척 기지개를 켠 뒤 그의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가게 안은 생각보다 천장이 높았다. 그리고 문턱을 넘자, 낯선 공기의 결이 느껴졌다.
먼저 코끝에 닿은 건 오래된 물건에만 나는 편안한 냄새였다. 그러나 그 뒤를 이어 풍겨오는 건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향이었다. 숯처럼 은근한 탄 냄새, 오래된 나무 바닥에서 배어 나오는 우드 향, 약간의 술, 누군가의 오래된 코트 주머니 속에서 나온 구겨진 영수증의 향기가 섞여있었다.
공기는 미묘하게 따뜻했다. 천장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히터의 메마른 온기가 아니었다. 바닥에서 위로 천천히 밀려 올라오는, 벽과 벽 사이를 오래 타고 돈 공기였다. 그것이 이곳의 혈액처럼, 이곳저곳을 따뜻하게 맴돌고 있었다.
길라는 천천히 걸어 보았다. 발바닥의 패드에 느껴지는 바닥의 질감이 좋았다. 무겁게 광이 죽은 나무 바닥은 미끄럽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부드러웠다. 구석 어딘가에서 냉장고가 돌아가는 진동이 바닥을 타고 느껴졌다. 그 진동이 공기 속에 퍼져서 길라의 수염 끝을 건드렸다.
가게 안은 말이 무겁고 느리게 울리는 구조였다. 길라는 그 공간에 깃들어 있는 시간의 속도가 바깥과는 다르다는 걸 느꼈다. 실제로 그렇다기 보단, 그런 느낌이 드는 공간이었다. 마치 바깥세상과 완전히 단절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오래전부터 이곳이 있었고, 오랫동안 그 상태로 유지되었으며, 앞으로도 그럴 거란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공간 어디엔가, 어딘가 낯익은 사람의 냄새가 나고 있었다.
길라는 자신의 꼬리를 앞발 앞으로 바짝 말았다. 긴장을 풀지 않았다는 것을 남자에게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남자가 얕은 그릇에 물을 담아 길라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니야, 그런 추상적인 얘기가 아니야. 오히려 반대지. 이건 철저히 계산된, 설계된, 그런 도미노 같은 이야기야.”
“도미노?” 길라가 되물었다.
“아, 미안. 음…” 남자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계곡을 본 적이 있니, 길라?”
“아니, 하지만 설명을 들어본 적은 있어. 산을 타고 내려가는, 물이 흐르는 골짜기라고.”
“그래, 정확해. 유속도 빨랐다 느려졌다 하고, 물길도 나뉘었다 합쳐졌다 하는, 물의 흐름을 예측하는 게 불가능한 그런 곳이지.”
길라는 잠자코 듣고 있었다.
“하지만, 이게 말이야, 사실은 불가능하지 않아. 충분히 시간을 들여 관찰하고 연구한다면, 결국은 그 계곡을, 그 흐름을 완벽하게 파악할 수 있어.”
남자는 길라가 제대로 알아듣고 있는지 잠시 눈치를 살핀 뒤 다시 말을 이었다.
“파악이 끝나고 나면, 예를 들어, 계곡의 모든 너비, 모든 깊이, 경사등, 계곡의 모든 요소, 정말이지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면, 계곡에 대해서 무엇이든 예측할 수 있다는 말이야.
계곡이 시작되는 산의 꼭대기에서 돌멩이 하나를 물속에 퐁당 던졌다고 해보자. 그러면 그 돌멩이가, 계곡이 끝나는 산 밑에서, 정확히 어디에서 발견될지도 알 수 있어.”
“하지만 나는 돌멩이가 아니잖아. 내가 앞으로 어떤 선택을 하면서 살게 될 줄 알고 그저 존재하기만 하면 된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 길라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렇지, 너는 분명히 너만의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어. 앞으로도 그럴 거야. 너의 의지, 성향, 성격, 혹은 외모, 컨디션, 그 모든 것은 너만의 것이야. 그것을 부정하는 게 아니야. 다만 그건, 예컨대 돌멩이로 따지면 그것의 크기, 무게, 혹은 형태와 비슷한 거야.
계곡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알고, 돌멩이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안다면, 그 돌멩이가 계곡을 떠내려 가면서 어떤 식으로 마모되고, 굴러가고, 언제, 어디에서 멈추게 될지 알 수 있어.
마찬가지로,
이 세상을 이루는 모든 요소를 알고, 너에 대해서 모든 것을 알고 있다면, 네가 세상을 살면서 너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너는 그때마다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하고, 또 어떤 선택들을 내리게 될지 알 수 있어. “
“모든 것이 일어나기도 전해 정해져 있단 소린가?”
“맞아. 그렇지만 정해져 있다고 해서 그것이 너의 의지가 아니란 소리도 아니야.
다만 - 그럴 줄 알았다는 거지.”
길라가 듣기에 썩 기분 좋은 말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해져 있다’라는 건, 사실 사소한 표현의 차이일 뿐이야. 세상의 모든 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라는 것을 넌 이미 알고 있지?”
그랬다. 길라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인정했다. 사실이니까.
“그래, 모든 게 정해져 있다는 건, 사실 정밀한 계산일 뿐이야. 계산을 미리 좀 할 수 있었다고 해서 그 무엇도 의미가 달라지는 것은 전혀 없다구.” 남자가 길라를 거의 달래주듯이 말했다.
“그렇다면 너의 「역할」은 뭐지?” 길라가 물었다.
“나는 바위야.”
“바위?”
“그래, 계곡의 흐름을 조율할 수 있는 바위.”
“어째서 조율이 필요하지?”
길라는 엉덩이를 쭉 빼고 상채를 잔뜩 숙인 채로 점점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소리만 해대는 이 남자에 대한 경계를 풀지 못한 바디랭귀지를 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남자가 길라에게 말했다.
“일단 안심해, 길라. 나는 너의 「편」이야.”
그의 눈빛은 묘하게 맹렬했다. 불길하거나 불쾌하진 않은데, 오래 쳐다보고 있자니 머리 뒤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그가 자신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것이 불편한 동시에... 왠지 모르게 안심이 되기도 했다.
“편? 그렇다면 나에게 대척하는 편이 따로 있다는 거야?”
“있지, 있고말고. 「그날 밤」을 만들어낸 장본인. 그가 다른 편에 있다고 할 수 있지.”
“그렇다면 「내 편」에는 누가 또 있는데?”
“오 길라, 너는 이미 알고 있잖아.”
그가 말을 그렇게 하니 길라의 머릿속에 바로 떠오르는 두 사람이 있었다.
“그래, 지유정과 임주원. 그들이 너와 같은 편이지. 그리고 나까지.”
머리가 띵해왔다.
물론, 길라는 유정과 주원, 그리고 자신이 「그날 밤」을 같이 겪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그들에게서 소속감, 혹은 유대감 같은 것을 느낀 것은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그들 셋이서 「같은 편」이라 식의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셋의 반대편에 선 다른 무리가 존재한다니. 도대체 누가, 어째서, 그들을 대척할 이유가 있단 말인가.
“잠깐만, 잠깐만. 나는 「그날 밤」 홀로 남겨진 고양이야. 그리고 그 이유에 대해서, 원인을 찾고 있을 뿐이야. 그런데 어째서 갑자기 「편」이 나뉘어 있는 거지?” 길라가 어느새 앞에 두었던 꼬리를 풀고 남자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길라는 잠시 말을 멈추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날 밤」에 남겨진 이들이 한 편이라면, 그날 사라져 버린 나머지가 다른 편인가? 그건 말이 안 됐다. 온 세상이 한 편을 먹고 그들 셋을 따돌릴 이유가 뭐가 있겠는가. 우리가 홀로 남겨지고 싶어서 남겨진 게 아닌데, 그게 어째서 우리의 잘못이란 말인가.
깊은 생각에 잠긴 길라의 얼굴을 빤히 살피던 남자가 말을 꺼냈다.
“적은 그렇게 구분하는 게 아니야, 길라.
적이란… 누가 「그날 밤」 남겨진 우리로 인해 불이익을 당했는가… 그것으로 판단해야 해. 우리의 파동이 달갑지 않은 자들, 그들이 우리와 다른 편에 있어. 그리고 그들이 우리를 적대시하기 때문에 우리가 한 편이 「되어버린 거야」.”
“내가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날 밤」을 목격했기 때문에 누군가가 불이익을 당했다면, 그렇다면 지금부터 내가 「그날 밤」을 그냥 없었던 일로 하고 살면 안 돼? 더 이상 내가 「그날 밤」에 대해서 캐고 다니지 않으면 되는 거 아냐?” 길라가 억울한 목소리로 남자에게 말했다.
“너도 잘 알고 있잖아, 한 번 확장된 인식은 다시 무를 수 없다는 거.” 남자가 단호하게 말했다.
“길라, 너에게 모든 것을 있는 사실대로 말해줄 수 없는 걸 용서해 줘. 너는 정말로 똑똑한 고양이지만, 「그날 밤」과 그 너머에 있는 본질을 내가 말로 설명해 줄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되는 게 아니라, 도저히 방법이 없는 거야.”
“그래도, 나는 세상의 크기가 인식의 정도에 비례한다는 것도 깨우쳤어. 나는 내가 이 세상에 대해서 이해하지 못할 건 없다고 생각하는데. 비록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그래, 네 말이 맞아. 하지만 이번엔 좀 달라. 너는 이것을 스스로 깨닫고 느껴야만 하는 거야. 네가 예전에 어머니 길라와 함께 경험했었던, 어느 한 골목에 문이 열려있던 그 방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인식이야.”
“차원? 그게 뭐지?” 길라가 남자에게 물었다.
“그래, 벌써 이것부터가 문제인 거야.” 남자가 대답했다. 그리고 계속 말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것처럼, 너는 혼자서 해내야만 해.
너는 이미 잘하고 있어, 그리고 앞으로도 잘 해낼 수 있어.
나는 흐름을 느끼고 조율하는 사람이지, 계산을 하는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그저 나의 예측을 말해주는 게 아니야.
나는 너를 믿고 있어.
너는 스스로 진실에 도달할 거야.
나는 그것을 믿고 있어.”
남자는 연민과 응원이 섞인 진심 어린 눈빛으로 말했다.
“잘 들어, 길라. 앞으로 3일, 정확히 3일 뒤에 그믐달이 뜰 거야.
그리고 「그날 밤」이 다시 반복될 거야.
그때 너는 또 한 번 떠나야 해. 너의 파동의 종착은 아직 멀었으니까.”
“떠나다니 어디로?”
“그것은 오롯이 너에게 달렸어. 그리고 네가 어디로 가던지, 그것은 반드시 올바른 길이 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