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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안 Nov 14.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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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반대편 4

<쥬니방가이> 안에 들어서니 실내가 어두침침하고 인테리어 대부분이 블랙우드와 대리석으로 되어있는 것이, 딱 봐도 박시현 대표 취향의 가게임을 유정은 잘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소주는 메뉴에 없는 그런 타입의 가게일 것이다. 이수현 매니저는 매우 신난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홀의 매니저는 박시현 대표를 보고 반갑고 정중하게 인사를 한 뒤 자연스럽게 셋을 안내했다. 가게의 양옆으로는 공간이 꽤 널찍했는데, 왼쪽과 오른쪽은 테이블들의 위치나 꽃병 같은 모든 것이 정확히 대칭인 것처럼 보였고, 그 정가운데에는 마치 모세의 기적처럼 일직선으로 길이 트여있었다. 그 길의 가장 끝에는 스시바가 자리하고 있었으며, 매니저는 그 바로 앞의 카운터 자리로 셋을 앉혔다. 박대표가 자리 앞으로 가자 손님이 편하게 착석할 수 있도록 의자를 뒤로 빼주는 그런 곳이었다. 물론 유정은 자신의 차례가 올 때까지 매니저가 앞에 두 사람의 의자를 빼주는 것을 태연하게 기다릴 수 있는 그런 성격은 아니었다. 메뉴에는 예상외로 소주가 있긴 했지만 문제는 그것의 가격이었다. 한 병에 8000원, 그 정도면 소주는 없다고 생각해 달라는 가게 사장의 완곡한 표현이 아닐까 유정은 생각했다.


항상 주문하는 메뉴는 따로 정해져 있는 듯, 수현은 박대표에게 “저번과 같은 주문”이 괜찮은지 물어본 뒤 바로 검은색 셔츠와 트라우저를 맞춰 입은 매니저에게 전달했다. 매니저가 주문을 가지고 물러나자 잠시 뒤 역시나 검은색의 셰프 유니폼을 입은 남자가 주방 커튼을 젖히면서 스시바로 나왔다. 그 사람의 얼굴을 보자마자 유정은 왜 박대표가 이곳을 왔는지 알 수 있었다. 물론 음식이 정말 훌륭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이유이기엔, 박대표는 평소에도 이런 느낌의 남자들에게 잘생겼단 소리를 자주 했다. 눈빛이 강렬하고 코와 입이 오밀조밀하면서 입술은 얇은, 진하면서도 얄쌍하게, 잘 생긴건 맞지만 좀 얄팍하게 생긴 스타일이었다. 스시바 뒤에 서있어서 키가 큰지 어떤지는 알 수 없었지만, 대표의 취향상 아마도 그럴 것이라고 유정은 생각했다. 박대표는 아마도 이 젊은 남자에게 꽂혀있는 것이다. 그리고 접대든 뭐든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 자리에 앉아 터무니없는 가격의 와인을 시키며 이 잘생긴 남자에게 (확실히 유정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매주 몇십 어쩌면 몇 백씩 돈을 쏟아 붙고 있을 것이다.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는 박대표의 목소리는 갑자기 하이톤이 되었다. 그녀의 매력적인 광대가 한껏 더 치켜 올라가면서 검은 두 눈이 반짝였다. 수현 매니저는 이미 이런 상황이 익숙한 듯 별다른 표정을 내비치지 않았고 그저 나올 음식에 신나 보였다. 갤러리 안에서의 수현은 워낙에 똑 부러져서 나이를 가늠하기가 어려웠지만, 이럴 때 보면 확실히 어리긴 어린 사람이었다.


그런 그들의 모습에 유정이 냉소적인 건 아녔다. 각자의 상황이 있고 각자의 니즈가 있는 것일 뿐이다. 사회생활이 처음인 어린 여자는 고급스러운 장소와 값비싼 음식과 와인이 좋다. 돈은 많지만 눈이 높고 외로운 여자는 잘생긴 남자가 좋다. 그냥 자연스러운 모습일 뿐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자신은 이 나이 때 그러지 않았고 저 나 이땐 저러지 않으리라는 생각을 하긴 했다. ‘아, 이런 생각을 바로 냉소적이라고 하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시현이 멍하니 있는 유정의 이름을 불렀다. 유정은 마치 속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흠칫 놀라 대답했다.


“네 대표님.”


“뭘 그렇게 놀라 자기. 여기 이분이 이곳에 셰프이자 사장님이셔.” 박대표가 오른손 손바닥을 남자 쪽으로 펼치며 말했다.

“그리고 이쪽은 지유정씨. 우리 갤러리의 최고 기대주.”


유정은 박대표가 자신의 풀네임을 덥석 그 남자에게 밝힌 것에 조금 언짢은 기분이 들었다. 그저 이름일 뿐인데, 유정은 어지간히도 그 젊고 얄쌍한 얼굴의 셰프이자 사장인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았나 보다. 그 남자가 맘에 들지 않았다기 보단, 대표의 연애인지 뭔지 모를 이 상황에 자신이 이용당하는 느낌이 싫었는지도 모른다.


“어때요 상민씨, 우리 유정씨 진짜 이쁘죠?” 박대표가 유정의 등에 왼쪽 손바닥을 대며 남자에게 물었다.


“대표님 갤러리는 사람들을 다 얼굴 보고 뽑으시나 봐요.” 사장이 살살 눈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어떻게, 내가 두 사람 잘되게 좀 밀어줄까? 상민씨 여자친구 없잖아.” 그건 과연 질문이었을까.


“아, 아쉽지만 저는 연상을 좋아하는 스타일이라서요.”


정답, 정답이었다. 보통이 아닌 남자였다. 물주가 누구인지, 물주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남자였다. 괜히 저 나이에 사장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박대표가 광대를 한층 더 올리며 아주 만족스러운 얼굴로 깔깔 웃으며 말했다.

“어머, 사장님 그런 타입이었어요?”


아주 가관이었다. 유정은 평소 박대표를 싫어하지 않았다. 인류애가 없는 편인 유정으로서는 박대표 정도면 오히려 꽤나 좋아하는 축에 속한다고 할 수도 있다. 박시현 대표는 자신의 잠재력을 믿어준 사람이고 추진력과 수완을 갖춘 CEO였다. 그녀는 미술 쪽에 전혀 배경이 없었음에도 불과 몇 년 만에 이 정도의 컬렉션과 이름 있는 아티스트들을 자신의 갤러리에 모았다. 미술에 어느 정도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남동의 <아트 레베리>라는 갤러리, 그곳의 대표 박시현이라는 이름 석자를 모르는 이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것은 순전히 박시현 본인의 뛰어난 직관과 직감, 그리고 과감성으로 이루어낸 것이었다. 물론 그것을 시작할 수 있었던 초기 자본은 그녀의 부모에게서 나왔다지만, 요즘 세상에 그것을 흠으로 보는 사람은 잘 없었다. 그것은 차라리, 어쩌면, 가장 중요한 「재능」이었다. 부모의 부를 타고났다는 것, 태어날 때부터 주어졌다는 측면에서 그것은 재능의 분야라고 하기에 큰 이질감이 없는 것이라고 유정은 예전부터 생각해 왔다. 부모의 축복을 받은 것은 유정 역시도 마찬가지여서일 지도 모른다. 어쨌든 대표 박시현은 마치 여장부 같은, 여러모로 비범한 여자라고 생각해 왔다. 아마도 그렇게 멋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기 때문에 오히려 지금 대표의 이런 모습이 유정은 더 못마땅한 것일 수도 있다. 남녀를 바꿔본다면, 마치 평소 아주 교양 있고 점잖던 사람이 알고 보니 어리고 이쁜 여자를 엄청 밝히는 모습을 보이면 급 실망스러운 감정이 드는 그런 것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물론 그것이 꼭 잘못된 것은 아니라 해도 말이다.


유정의 변용을 축하하기 위해 만든 자리라고 했지만 대표는 아주 자연스럽게 가게의 사장과 단 둘이서 점점 데시벨을 높이고 있었고, 수현 매니저는 어색하게 호호하며 비위를 맞추고 있었다. 유정은 그들의 실없는 대화에 대충 맞장구를 쳐주는 척하며 비싼 와인을 음미하는 데에 집중했다. 값이 값이라 그런지, 자신이 평소 혼자 즐기는 값싼 와인들과는 차이가 확실히 있긴 했다. 물론 그 맛의 차이가 돈의 차이만큼인지는 확신할 수 없었지만. 그리고 남자 사장이 옆의 보조 셰프와 함께 하나씩 내놓는 사시미와 음식들은 그의 얄팍한 인상에 비해 그래도 꽤 깊이가 있는 맛이었다. 그래도 생각보다 나름 실력은 갖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물론 그럴 것이다. 인생은 요행만으로 어떻게든 되는 것은 아니니까. 박대표의 지금의 가벼운 모습과 마찬가지로 이 젊은 남자 사장 역시 지금 보이고 있는 이 얄팍한 모습이 그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자기가 뭐라고 이런 가게의 사장을 깎아내리겠는가. 어쨌든 이 성게를 얹은 수제 로스트비프는 굉장히 맛있지 않은가. 이런 메뉴는 어디서 본적도, 들어본 적도 없었다. ‘이런 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먹는구나.’ 새삼 박시현 대표가 자신의 아티스트들에게 각별한 것은 선의라던가 하는 것이 절대 아니라는 사실이 확 와닿았다. 역시 유정의 머릿속은 이랬다 저랬다, 여기 갔다 저기 갔다 하는 게 매우 빨랐다.


앞에 놓인 빈 와인잔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와인 병은 그녀 주변에 없었고, 다들 말하는데 정신이 팔려서 아무도 그녀에게 와인을 권하거나 따라주지 않았다. 그때 갑자기 와인잔에 짙은 루비 색깔의 와인이 순식간에 가득 담겨있는 환영이 보였다. 눈을 질끈 감았다 뜨니 잔은 다시 비어있었다. ‘이제는 헛것이 다 보이는구나.’ 「그날 밤」의 모든 것도 헛것이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꿈이었다면.


갑자기 속이 답답해졌다. 평소 하루에 하나라도 필까 말까 하는 담배가 밖에서 술을 마실 때면 왜 그리도 땡기는지 유정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잠시 화장실을 다녀오겠노라고 하며 전자담배를 챙겨 가게 바깥으로 나왔다. 담배를 태우러 가는 것임을 대표는 아마도 알았을 테지만 따라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마도 그녀는 이 남자에게 자신이 흡연하는 것을 딱히 알리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유정은 그 편이 혼자일 수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점점 이들에게 기가 빨리는 중이었으니까.


가을밤은 확실히 여름의 밤보다 무언가 더 어두운 감이 있었다. 아마도 차가워진 온도 탓에 그렇게 느껴지는 것일 것이다. 어쩌면 그냥 오늘 뜬 달이 매가리 없는 그믐달이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다. 유정은 그날의 어둠을 생각했다. 그 짙었던 농도를 기억해 냈다. 어두운 건 지금이 더 어두울지 몰라도, 어둠의 밀도는 「그날 밤」의 그것에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후우-하고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유정은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빈약한 달 아래에 오늘은 구름 한 점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지금 막 시간이 반복하기 시작했다고 해도, 「그날 밤」처럼 제자리걸음을 하는 구름이 없이는 그것을 판단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게 안으로 다시 들어가서 사람들이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채로 태연하게 술을 마시며 왁자지껄 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면 될 것이다. 물론 정말로 「그날 밤」이 갑자기 재현되지는 않았을까 하고 심각하게 걱정을 하고 있는 건 아녔다. 하지만 아까 와인잔도 그렇고, 이런 상상을 자꾸만 한다는 것 자체가 노이로제 증상, 혹은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같은 것을 유정이 겪고 있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행히도 가게 밖에는 유정 외에도 어떤 한 남자가 조금 떨어진 곳에서 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세상은 사라지지 않았나 보다. 키가 180이 조금 안되어 보이는 그 남자에게서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그가 연초를 피우고 있다는 것이었다. ‘요즘 세상에도 연초를 피우는 사람이 있구나’ 하는 생각을 유정은 했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그에게서 눈치챈 것은 그 남자가 자신과 마찬가지로 밤하늘을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시선의 끝은 달을 향해 있었고, 유정이 그랬던 것처럼, 그는 분명 그 주변의 구름들의 행방을 쫓고 있는 듯 보였다. 유정은 확신할 수 있었다. 이 사람은 자신과 같다.


이 남자는 「그날 밤」을 겪은 것이 분명하다.


심장이 폭발할 듯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유정이 남자가 보던 하늘에서 그의 얼굴로 시선을 옮기자, 그 역시 하늘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의 두 눈은 그녀의 두 눈과 딱 맞닿아버렸다. 그의 심장 또한 터질 듯이 요동치기 시작했다. 유정은 그것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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