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O

파동의 종착 1

by 안지안

생각해 보니 오늘 그가 유일하게 입 밖으로 소리를 냈던 건 아침이었다. 추운 날씨를 정말 싫어하는 주원에게, 아침의 따뜻한 샤워는 겨울의 하루를 보내기 위한 중요한 의식이다. 샤워는 단순히 몸을 씻는 행위가 아니라, 밤새 진행된 냉동 수면된 자신의 몸을 따뜻한 물로 해동시키는 작업이었다. 매사에 조심스러운 그로서, 당연히 샤워기에 물이 따뜻해지길 충분히 기다렸다. 다만 예상보다 더 뜨거웠던 바람에, 온도를 살짝 낮춘다는 게, 바로 너무 차가워지는 바람에 비명을 질렀던 것이다. 그게 오늘 그가 해가 뜨고 달이 지는 동안 목구멍을 통해 냈던 소리의 전부였다.


그는 여행지 취재를 위해 강원 삼척에 출장을 와 있었다. 그리고 이번 여행의 테마는 다름 아닌 호캉스였다. 주원이 살면서 한 번도 호캉스 같은 호사스러운 여행을 해봤을 리 없었다. 그래서 그는 더더욱이 직접 이곳을 와보는 수밖에 없었다. 그것이 꼭 이유가 아니더라도, 그는 <다소다>의 기자들이 기사를 쓰기 전에 적어도 그곳을 직접 답사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았다. 그것이 당연한 것이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기자들이 업체에서 제공하는 자료만 가지고 대충 그럴듯하게 기사를 쓰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면, <다소다>는, 아니, 임주원은 그나마 양심적인 편집자였다.


물론 이번 여행지도 김대표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여행사 <마음>과 연계되어 기획된 곳이었다. 이곳은 강릉이나 속초보다 훨씬 조용하고 소도시 해변 느낌이 나는 곳이었는데, 아직 관광객들의 때가 묻지 않은 이곳을 그들은 기어이 찾아내었고, 돈을 벌기로 했다. 그들이 전국 곳곳에 고급 펜션과 빌라를 짓는 기세는, 가히 과거 대영제국의 식민지개척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그리고 주원은 그들의 앞잡이가 되어 이곳에 와있었다. 생각을 하면 할수록 이런 곳에서 호캉스를 한다는 게 스스로 잘 이해가 가지 않았다. 물론 숙소 자체는 훌륭했지만, “굳이?”라는 생각이 계속 드는 걸 어쩔 수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그의 진심을 숨긴 채, 이 아름다운 마을에서, 「굳이」 방 안에 틀어박혀 호캉스를 해야 하는 이유를 어떻게든 생각해 내야 할 것이다. 그것이 그가 그곳에 있는 이유이니까.


성공적으로 해동을 마친 주원은 샤워실 문을 드르륵 열고 자욱한 습기와 함께 거실로 나왔다. 혼자 쓰기엔 너무 큰 방이었지만, 이 방이 이들의 주력 상품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이 정해주는 대로 있으면 됐다. 펜션은 오픈을 한지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모든 가구와 시설들이 전부 새 거였다. 아직 주름도 제대로 잡히지 않은 소파의 가죽은 빤짝빤짝 매끈했고, 세심하게 폴리싱 된 철재의 다이닝 테이블은 번쩍번쩍 빛이 났다.


아침부터 착실하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돌체구스토에 아메리카노 캡슐을 넣고 빨간색 커피잔을 밑에 대었다. 지이잉 하는 소리와 함께 캡슐이 팍 터지고 커피가 내려왔다. 진한 커피를 호호 불어 한 모금 마시자, 아까 샤워 중에 미처 다 깨우지 못했던 손끝의 세포들까지 비로소 깨어났다.


마침 누군가가 방문을 똑똑 두들겼다. 깔끔하고 정중한 노크 소리였다. 아마도 어제 체크인을 하면서 미리 정해둔 메뉴의 조식일 것이다. (그 외에 그를 이곳까지 찾아올 사람은 없다) 직원이 가기를 일부러 조금 기다렸다가 방문을 열자 다이닝 카트가 떡하니 서있었다. 주원은 그것을 끌고 들어와 큰 통유리창 앞에 두었다. 카트엔 접이식 테이블 기능이 있어서 그 앞에 의자만 끌고 와 앉으면 됐다. 덮여있던 뚜껑을 열자 스크램블 에그와 소시지, 매시드 포테이토 같은 것들이 정갈하게 그릇 위에 담겨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오션뷰가 펼쳐져 있었다. 맑고 파아란 파도가 규칙적이고 정돈된 느낌으로 해변에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양양이나 속초의 파도처럼 시끄럽게 철썩이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그는 자연스럽게 유정을 떠올렸다. 그녀가 보고 싶었다. 그녀와 함께 이 풍경을 같이 보고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는 자신이 점점 더 자주,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의 모든 소리는 진동이자 파동이라고 한다. 그리고 파동은 계속해서 퍼져나간다. 그 파동을 비록 귀로 들을 수는 없다 해도, 그녀의 몸짓, 손짓, 심지어 쉬는 숨결마저 - 그 모든 것이 어쩌면 지금 이 순간에도 끝없이 자신에게 부딪혀오고 있는 건 아닐까. 그렇게 믿고 싶었다.


꽤 오랜 시간을 아무 말 없이 혼자 있다 보니, 그의 하루는 시간의 흐름보다는 사유의 흐름을 따라가고 있었다. 그가 워낙 조용히 있어서인지, 창이 닫혀있음에도 파도 소리가 사아아 하고 들렸다. 그는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섬까지 와서 바다에 발은 한 번 담가봐야 하지 않겠는가.


#


방 안에서 내려다봤을 땐 전혀 가늠할 수 없었는데, 바깥에서는 생각보다 꽤 거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역시 바다는 바다라는 생각을 했다. 주원은 저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바다와 하늘의 색이 너무 비슷해 둘의 경계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그 흐릿한 선을 보며 상념에 빠졌다.


태평양 북쪽 바다 어딘가에 바람이 불었다. 바람에 바다가 일렁이고 그렇게 여정은 시작됐다. 지구에서 가장 큰 대양으로서, 태평양은 50개도 넘는 나라의 해변으로 파도를 수출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물론이거니와, 미국에서 동티모르, 파푸아뉴기니에서 핏케언 제도까지 이어주는 것이 바로 이 바다, 태평양이다. 그러니 이 바다 어딘가에서 여정이 시작됐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일단은」 아무것도 아니다. 너무 막연하다. 목표가 있어야, 끝이 어느 정도 예상이 되어야,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할 수 있는 것이라고 주원은 생각했다. 너무나 많은 출구가 있으면, 입구의 의미는 크게 퇴색된다. 그럼에도 결국 하나의 출구가 마지막에 정해질 것이다. 반드시 하나가.


그럼에도, 과정과 끝을 이야기하려면, 어쨌든 시작에 대해서부터 시작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다시 한번 말하지만, 태평양이라는 그 넓은 망망대해에, 그저 북쪽이라는 막연한 어딘가에서 불었던 한 줌의 바람으로, 그것으로 인해 살짝 일렁인 물결로, 「그것」은 시작됐다. 이 시작에는 목적하는 바가 없었다. 이 시작은 그냥 어디에선가, 그리고 언젠가 끝이 있을 것이라는 것만이 정해져 있었다.


이름만으로도 설레는, 바로 그 대항해시대였다. 세계 최초로 세계 일주에 성공한 유럽인이자, 포르투갈 태생의 스페인 탐험가, 페르디난드 마젤란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여느 때처럼 바다를 개척하며, 험준한 항해를 하던 중 만난 잔잔한 바다에 감동하여 그곳을 <태평양>이라고 명명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날 딱 「아다리가 맞게」 좀 얌전했을 뿐, 태평양은 본래 전혀 「태평」한 바다가 아니다.


태평양은 열대 저기압이 그치지 않아 태풍이나 허리케인 같은 난폭한 날씨에 휘말릴 수 있는 위험이 언제나 도사리고 있다. 태풍이 뿌리는 비는 맞으면 아플 정도로 세게 내렸다. “바다는 비에 젖지 않는다”고? 웃기지 마시라. 내리는 비를 한 방울도 빠짐없이 다 맞아버리는 게 바다다. 바다로서 비를 맞아 본 적도 없으면서, 그렇게 무책임하게 할 말이 아니다. 이 행성에 내리는 모든 비의 78퍼센트가 바다에 내린다.


그리고 아무리 목적지가 정해져 있지 않더라도 기피하고 싶은 종착지는 당연히 몇 군데 있다. 태평양은 대양 중에서도 깊은 해구가 많기로 유명한데, 특히 1만 1천 미터의 깊이나 되는 <마리아나 해구>에라도 갇히게 된다면 그거야 말로 끝없는 암흑, 지구의 끝바닥으로 추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곳은 너무 깊어서 한줄기의 햇살도 비치지 못한다. 1만 1천 미터를 반대로 땅에서 올라가면 성층권이다. 그곳은 너무 높아서 한 조각의 구름도 미치지 못한다.


아무튼 운 좋게 허리케인을 피하고 <마리아나 해구>도 안전하게 건너고 나면, 이번엔 해류의 갈림길에 놓인다.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어떤 해류를 타느냐에 따라 도착지는 완전히 달라진다. 대륙 자체가 달라질 수도 있고, 자칫하면 무풍지대로 갈 수도 있다. 무풍지대에는 바다의 흐름도, 바람의 흐름도 없다. 그 어떤 흐름도 없이 시간만이 흐른다는 것은, 굉장히 고통스러운 일이다. 고여있는 바다에는 플랑크톤도 거의 없기 때문에, 플랑크톤이 없는 그곳에서는 물고기조차도 구경할 수 없다. 그저 가만히, 저 위 하늘에서 해가 왔다가 달이 왔다가 별이 졌다가 하는 것을 바라보는 일 밖에는 달리 할 수 있는 게 없다.


더 최악은 「쓰레기섬」에 닿는 것이다. 바다에 버려진 비닐이나 플라스틱류의 부유성 쓰레기, 미세 플라스틱 등이 해류에 밀려와 응집되어 섬을 이루고 있다. 일정한 부피의 바다에 일정한 농도 이상의 쓰레기가 있는 것을 계산하여 규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섬」이라는 것의 면적 대부분이 실제로 쓰레기가 산처럼 쌓여 눈으로 볼 수 있는 그런 형태는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쓰레기가 섬의 형태를 아예 이루고 있지 않은 것 또한 아니다. 만에 하나 이곳에서 여정이 끝나게 된다면 비닐봉지 손잡이에 목이 걸려 괴로워하는 거북이나 플라스틱을 먹이로 착각해 먹게 되는 불쌍한 해양생물들을 보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다행히 쓰레기섬으로 흘러가는 일은 없었다. <북적도 해류>에 합류를 한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부터의 여정은, 순수하고 완전한 의미의 복불복이다. 해류를 탄다는 표현은, 말이 좋아 「탄다」는 것이지, 사실상 빨려 들어가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사다리 게임과 같아, 「의지」나 「지혜」로 어찌해 볼 수 있는 게 아닌 것이다. 해류는 끝없이 나뉘고 여정은 그 흐름에 따라 흘러갈 뿐이다. 「운명론」이나 「결정론」을 설파하려는 게 아니다. 그 흐름이라는 것은 거스를 수 있는 종류의 어떤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 그저 사실일 뿐인 것이다.


주원 자신의 삶 또한 마찬가지였다. 일단 태어났고, 이름 석자를 받았지만, 그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만으로, 이름이 있다는 것 만으로는 「일단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목적이 딱 정해져 있었으면 좋았으련만, 「그것」의 여정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딱 한 가지 확신할 수 있었던 건 그의 삶이 언젠가 반드시 끝날 것이라는 것뿐이었다. 자신의 미래를 생각하면 너무나 막연했고, 이 세상을 생각하면 너무나 막막했다. 그러다 어떤 날엔 그런 생각들이 특히 「심해」 져, 깊은 바다처럼 그는 잠식당했다. 세상은 태평해 보이는데, 그의 속은 끝없는 태풍이었다. 그 혼자 그물에 갇혀있는 듯했다.


그 역시 자신의 운명의 해류에 떠내려가고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맞서도 거스를 수 없음에 자책하고 또 자책했다. 그리고 이내 그를 끝없이 휘감는 흐름에 그는 완전히 무력화되었다. 차라리 인정하는 편이 조금이라도 편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흐름에는 흘러갈 수밖에 없다고. 그는 지금 이 동해 바다 앞에 서있었다. 이것 또한 그가 어쩔 수 없는 그의 흐름이었다.


주원이 저 멀리 흐릿한 수평선 쪽을 보자, 저어-기, 「그것」이 보였다. <북적도 해류>를 타고 <류큐 해류>를 지난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쿠로시오 해류>를 쭉 타고 갈 수도 있었지만 <대마 난류>로 빠진 거다. 그 뒤엔 수온과 염분이 점점 높아지면서, 마지막으로 <동한 난류>를 붙잡았다. 북태평양에서 동해바다로 오는 방법은 그 길밖에 없다. 넓디넓은 태평양의 북쪽 어딘가에서 한 줌의 바다가 삼척의 해변으로 올 수 있는 확률은 어떻게 될까? 게다가 지금 딱 이 시간에 맞춰 자신과 랑데부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찌 인연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까. 아니, 오히려 이것은 「어느 정도」의 인연이라고 해야 할까.


“바다는 넘치지 않는다”고? 웃기지 마시라. 하루에 70만 번이나 파도가 넘쳐 쏟아지는 게 바다다. 「그것」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자기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듣기 그럴싸한 말이나 이러쿵저러쿵하면서 우쭐해하는 동안, 자신은 이 해류에 치이고 저 해류에 치이며 힘들게 살았다. <쿠로시오 해류>의 태풍이 얼마나 고약한지 아는가. 몇 번이나 화물선에 짓밟히고 프로펠러에 갈렸음에도 「그것」은 최선을 다해 존재했다. 거스를 힘이 없었던 삶이기에, 그만큼 그것을 견뎌냈다는 것에 위대함이 있는 것이다. 그것을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는 것에 분노했다. 잠자코 있을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 「반항」이, 드디어 「그것」에게 이름을 주었다.


자, 이쯤 되면 의아하시리라, 도대체 이것은 누구의 여정인가. 무엇이 지구의 끝 바닥으로 추락할 수도 있단 말인가.


「그것」은 정체불명의 어떤 존재였다. 정확히 물이라고 하기엔 너무 불확실하고, 하나의 바다라고 하기엔 너무 작았다. 어쩌면 그저 흐름 그 자체였을지도 모르고, 이름 붙이지 못한 무언가였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것」의 시작은 시작 그 자체만으로는 의미를 부여하기가 어렵다고 했던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그것」은 수없이 갈라지고 흩어지며 부유했고, 태어나기를 선택한 적도 없었으며, 도착지를 정한 적도 없었음에도, 버텼다는 것이다. 어딘가에 닿기 위해. 자신이 누구인지, 어디서 왔는지도 모른 채, 수많은 파도와 비바람을 견디며 여기까지 왔다.


하지만 「그것」은 이제 여기에 왔고, 주원을 향해 맹렬히 돌진하고 있다. 몇만, 몇십만 킬로의 길고도 긴 여정이었다. 수개월, 어쩌면 수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지금 여기서 그 피날레를 장식하려 한다. 그를 보러 그 먼 길을 일부러 온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그는 겸허히 신발을 벗고 맨발로 축축한 모래 위, 우렁찬 바다 앞에 섰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소한의 경의이자 존중이었다.


그것의 이름은 「파도」.


「파도」는 고개를 있는 힘껏 치켜들고 장렬히 부서지며 그의 발 끝에서 하얗게 거품이 되었다.

keyword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