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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강과 파랑 2

by 안지안

유정의 출근 시간은 그날 이후로 아침으로 바뀌었다. 길고양이 한 마리가 그녀의 화실에 아주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던 그날부터 말이다. 이 아이를 이곳에 혼자 두는 게 계속 마음이 쓰였다. 그렇다고 아직 집으로 데려올 엄두까지는 나지 않았다.


물론 처음 며칠 동안은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게 쉽지 않았지만, 결국 일찍 일어난 만큼 일찍 잠들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생각보다 빠르게 그녀는 새로운 패턴에 적응해 냈다. 오후 2시에 출근해서 밤 12시가 다 되어서 집에 도착하는 생활을 얼마나 길게 했는지를 생각하면, 그것은 대단한 일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화실까지 걷는 걸음은 예전보다 빨라졌고, 화실에 도착하면 자연스레 고양이부터 찾게 되었다. 그것은 확실히 고양이가 가진 귀여움의 힘이었다.


처음엔 자신이 이 푸른 눈을 가진 고양이를 귀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동네에서 몇 번 보고 밥을 주었을 때도, 딱히 그가 귀여워서라기 보단 측은함과 안쓰러움 때이었다.


처음엔 고양이가 소파 위에 올라가는 것도 못하게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또 어느새 그 위에 올라가 쌔근쌔근 조는 그 모습에 그저 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고양이가 그녀의 화구를 툭툭 건드릴 때도, 그녀는 나름대로 사뭇 진지하고 엄숙한 말투로 주의를 주었지만, 그 소리는 여태껏 그 누가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보다도 다정했다.


매일 지나가는 길에 있는 고양이 용품점에도 한 번씩 들어가 보게 되었다. 분명 예전부터 이 자리에 있었을 테지만, 그전에는 이런 곳이 있는 줄도 몰랐었다. 그리고 불과 며칠 사이에 화실엔 고양이를 위한 물건들이 이미 제대로 갖춰져 있었다.


이 푸른 눈의 고양이는 애교가 많다거나 붙임성이 딱히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확실히 의외성이 있었다. 그림에 열중하다 보면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쿵하고 유정의 발목에 부딪치며 비빈다거나, 그녀가 손을 내밀면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다가 바로 앞에서 꼭 기지개를 켠다거나 하는 그런 행동이었다. 오히려 그런 면이 그를 더 귀엽게 하는 것 같았다. 꾸벅꾸벅 난로에서 졸고 있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자신을 스스로 알아챘다. 이미 어느샌가부터 이 고양이에게 애착이 생겼다는 것을.


며칠 전에 그녀가 환기를 시키려 열어놓은 창문으로 고양이가 불쑥 뛰쳐나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그림을 그리다 말고 벌떡 일어나 그를 쫓아 나갔다. 그녀는 겉옷도 걸치지 않은 채 추운 줄도 모르고 한참을 돌아다니며 주변을 찾아 헤매었었다. 결국 그를 찾지 못한 채 양쪽 귀가 시뻘게진 채로 돌아와 소파에 앉아있었는데, 고양이가 창문으로 불쑥 점프해 뛰어 들어왔다. 돌아온 고양이는 태연한 표정으로 자신의 그릇에 담긴 물을 할짝였다.


유정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리고 동시에, 방금 일어난 일에 대해서 딱히 어쩔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의 관계는 철저하게 고양이가 주도한다는 것을 그녀는 그때 깨달았다. 그녀는 이미 이 고양이에게 무장해제 되어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그런 면이 있다는 것을 유정은 그때 처음 알았다. 이러다가는 이름도 지어주겠다는 생각마저도 했다. 결국 그렇게 될 것이다.


그녀의 그림은 여전히 잘 되어가고 있었다. 그녀는 이미 너무나 능숙하게 어둠과 빛을 조율할 수 있게 되었다. 모든 것을 자신의 머릿속에 떠올리며 그리는 그녀는, 사물을 보고 그리는 것보다도 더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집중했다. 자신만의 현실을 구체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그녀의 그림들은 자연스럽게 몽환적인 분위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어둠을 그리기 시작했던 그녀의 초반 작품들과 요즘 작업들을 비교하자면, 일단 그 특유의 꿈결에 안갯속을 걷는 듯한 분위기는 여전했다. 하지만 미묘하게 그림의 톤이 바뀌고 있었다. 예전엔 푸른 안개같이 건조하고 차가운 인상이었다면, 지금은 붉은 온기가 캔버스에 스며든 느낌을 자아냈다. 그것은 단순하게 그녀가 다른 계열의 색을 썼다던가 하는 이유가 아니었다. 분명 칠해진 색 자체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분명히 캔버스의 온도는 올라가고 있었다. 그녀의 조금씩 변하고 있는 내면의 무언가가 가장 큰 이유였다. 그 와중에 화가 본인은 그 뚜렷한 차이를 아직 특별하게 인지하고 있지는 않았다.


고양이에 대해서도, 자신의 그림에 대해서도 둔감한 만큼, 자신의 일러진 출근 시간에 불만이 없는 가장 큰 이유는 주원이란 것도 역시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주원이란 남자의 스케줄에 자연스럽게 맞춰지고 있었다. 그녀가 아침 출근을 하게 된 것은 물론 고양이 때문이었지만, 그 덕분에 자연스럽게 저녁 시간이 비었고, 그 시간에 주원을 만났다. 그 모든 변화가 결국 한 줄기처럼 이어졌다. 그들은 처음 맥주집을 갔던 날 이후에도 몇 번 정도 더 만났다. 주원은 보통 일이 여섯 시에 끝났고, 유정 역시 그처럼 오전에 출근을 하면, 그가 저녁에 자신을 만나러 와도 충분한 작업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그것을 자신이 그를 위해 맞춰가고 있다고 자각하지 않았다.


어쩌면 그게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녀의 사소하면서도 대단한 변화는 그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것이었다. 그를 만나 소소하게 맥주를 한 잔 하며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는 것은 꽤나 즐거운 일이었다. 그렇다. 그들은 언젠가부터 「그날 밤」에 대해서 그다지 말하지 않게 되었다. 그녀는 더 이상 윤상만을 듣지 않았다. 그녀는 성큼 시작된 겨울조차도 그렇게 싫지 않았다.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그것은 정말로 괄목할 만한 변화였다.


아직까지 자신이 그에게 먼저 만나자고 한 적은 없었지만, 평생 무음 모드이던 그녀의 스마트폰은 어느새 소리 모드로 바뀌어 있었다.


붓을 잠시 내려놓고 폰으로 새로운 음악을 고르던 찰나 주원에게 톡이 왔다. 순간적으로 온몸이 찌릿했다.


‘뭐 먹고 싶어요?’


‘곱창이요.’ 그녀가 답장했다.


‘곱창이요?? 의외인데요.’


‘왜요? 안 좋아하세요?’


‘아니요 좋아하는데, 유정씨가 곱창을 좋아할

줄 몰랐어요.’


‘오늘 왠지 그런 느낌이에요. 곱창이랑 소주.

딱이죠?’


‘좋아요. 곱창 가시죠.’

그의 톡에 ‘ㅋㅋㅋ’는 없었지만 타자를 치며 웃고 있는 그의 얼굴이 보였다.


#


저녁 채 일곱 시도 아니었지만 밖은 한밤중처럼 깜깜했다.


그녀가 직접 정한 곱창구이집은 성수동 특유의 트렌디함이 거의 묻어나지 않는 노포 같은 느낌이 물씬 풍기는 곳이었다. 이 동네에서는 드물게 옛날 스타일의 네온사인이 번쩍이고, 벽에는 사람들의 낙서로 꽉 찬 그런 가게였다. 안쪽에서는 소주잔을 부딪치는 소리와 손님들의 왁자지껄한 소리가 컸다. <쥬니방가이>와는 거의 반대라고 할 수 있는 분위기였다. 유정은 김이 서려 있는 유리창 밖으로 점점 가까워지는 남자의 형태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많이 기다리셨어요?”

주원이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와 그녀 앞의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저도 금방 왔어요.”


가게 직원은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원형 철제 테이블에 소주 한 병과 불판을 올리며 말했다.

“고기는 초벌 해서 갖다 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주원이 말했다.


“감사합니다.” 유정이 따라 말했다.


지금까지 유정이 본 주원은 예의가 바른 사람이었다. 어떤 가게에 들어가던 “안녕하세요”와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감사합니다 “가 입에 붙은 사람이었다. 그게 유정은 참 마음에 들었다. 그와 다니다 보니, 어느새 자신도 그의 옆에서 같이 따라서 인사를 하고 있었다. 유정은 그런 자신의 모습이 나쁘지 않았다.


“곱창, 대창, 막창 하나씩 시켰어요.” 유정이 밝은 얼굴로 말했다.

“오늘은 왠지 식욕이 좀 폭발하거든요.”


주원이 웃으며 소주를 유정의 잔에 따랐다. 다음엔 반대로 유정이 주원의 잔에 따르며 말했다. “오늘도 수고하셨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둘은 짠을 하고 빈 속에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둘은 동시에 크-하고 소리를 내었다. 크 소리를 내게 된 건 최근이었다. 그전엔 둘 다 크 소리를 참았었다.


“오늘 작업은 잘 되셨나요?” 주원이 물었다.


“아, 네. 요즘 좀 물이 올랐네요.” 유정이 대답했다.


주원이 웃었다. 이 사람에게 이렇게 발랄한 면이 있었나 하는 표정이었다. 그건 유정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했다. 자신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2주 뒤에 저희 갤러리에서 연말파티 겸 전시회가 열리는데, 이미 개수는 많이 해놓은 상태라서 별 문제없을 것 같아요.”


“오, 궁금하네요, 유정씨 그림. 유정씨 그림은 어떤 스타일이에요?”


“음…….” 유정은 한참을 뜸 들였다.


어떤 스타일일까. 그게 과연 말로 설명할 수 있는 걸까.


“아… 제가 안 그래도 전시 가이드 내용에 들어갈 말을 직접 써야 하는데 애를 먹고 있어요. 제가 글쓰기에는 도무지 자신이 없거든요. 뭐, 정 못하면 대표님이 알아서 써주시긴 하겠지만, 그래도 제가 몇 가지 키워드라도 드리긴 해야 할 텐데.”


“그럼 제가 그림을 혹시 직접 구경해 봐도 괜찮을까요?” 주원이 말했다.


“앗, 저 대신 써주시게요? 아 맞다, 직업이 편집장인 분이시죠?”


“허허” 주원이 살짝 민망한 듯 웃었다.

“뭐… 제가 그림에 조예가 깊거나 한 건 아니지만… 조금이라도 아이디어가 필요하시다면…….”


“그래주시면 저는 너무 감사하죠! 감사합니다!” 유정이 다시 채워진 소주잔을 들며 말했다. “짠!”


둘은 그 사이에 벌써 그들 앞에 지글지글 놓인 고기를 먹으며 대화를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주원씨가 쓴 글 다 읽어봤어요.”


“엇, 정말요?”


주원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개졌다. 술 때문이 아니었다.


“네, 제가 글재주는 없어도 평소에 소설은 많이 읽거든요. 그래서 주원씨 글도 순식간에 다 읽어버렸죠. 너무 짧아서 아쉬울 정도로.”


“아이고, 감사합니다.” 주원이 약간 부끄럽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주원은 언젠가 자신이 글을 올리고 있는 온라인 플랫폼의 링크를 보내줬었다. 그리고 유정은 그것을 한 자리에 앉아서 모조리 다 섭렵해 버렸다.


“첫 번째가 나뭇잎 하고 구름 이야기, 두 번째가 장미, 그리고 가장 최근께 돌탑 이야기.”


“와, 정말로 다 읽으셨네요.”


“그럼요, 제가 설마 읽지도 않고 읽는 척하겠어요?”


“아, 아뇨 그런 뜻이 아니라!” 주원이 당황한 말투로 말했다.


“농담이에요, 농담.” 유정이 놀리듯이 말했다.

“아니 근데, 저는 그렇게 사물이나 자연을 의인화하시는 상상력도 대단하다고 생각했고, 특히 문장들 자체로도 비유나 표현력이 정말 좋으시다고 생각했어요. 첫 이야기에서 마지막에 나뭇잎이 막 비에 떠밀려가는 부분에서 저는 거의 울 뻔도 했거든요.”


“정말요?” 주원의 눈이 커졌다.


“네… 읽으면서 뭔가… 구름이 저 같다고 생각했어요. 아, 물론 제가 그 정도로 혼자 잘난 줄 알고 깍쟁이고 그런 건 아니지만, 아무튼. 그리고 나뭇잎은 계속 제 부모님이 생각이 나더라고요. 저한테 정말 아낌없이 주신 분들이라.”


유정은 그때 바로 ‘아차’ 싶었다. “아-”

그리고 그걸 바로 눈치챘는지 주원이 바로 그녀에게 질문했다.


“혹시 가장 최근껀 어땠어요? 그 돌탑 이야기.”


유정의 얼굴이 순간적으로 화끈 달아올랐다. 본의 아니게 부모님 자랑을 한 건 자신이 배려 깊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미안해할까 봐 주원이 자연스럽게 그녀가 ‘미안하다’ 말할 틈도 주지 않은 것이다. 유정은 그의 배려를 일단 받아들이기로 했다.


“돌 이야기도 너무 좋았어요……. 아니죠, 별 이야기죠.”


“제대로 읽어주셨군요.” 주원이 넉살 좋게 말했다.


“일단 처음에 세상이 천지개벽할 때부터 이야기가 거대하게 시작하잖아요. 그렇게 막 수십억 년이 흐르는 것부터, 그다음엔 인간의… 문명이랄까? 그런 역사도 지나고, 현재의 돌의 형태가 되기까지의 흐름이 되게 압축적이면서도 효과적이었다라고 생각했어요. 별이 점점 작은 돌이 되면서 이야기의 스케일도 우주적인 규모에서 점점 개인적인 이야기로 좁혀지는 방식?”


주원이 조금은 놀란 표정으로 그녀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 와중에 ‘인간은 분류하기를 마치 정확히 하는 것으로 착각했다’ 뭐 이런 부분 있었잖아요? 그 부분이 저는 되게 좋았어요. 그리고 결국 한 명의 아이가 돌을 쌓는 작은 행동으로 귀결이 되잖아요. 그것으로 인해서 돌이 자신을 별로서 다시 인지할 때, 아이의 행동은 단순한 놀이가 아니라, 어찌 보면 우주의 질서를 다시 세우는 행위가 되는 순간이었던 거죠.”


“유정씨 혹시 평론가세요? 와… 배보다 배꼽이 더 큰 것 같은데.” 주원이 아주 작은 소리로 박수를 짝짝 치는 시늉을 하며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놀란 것처럼 보였다.


“처음 읽었을 땐 우선 감동적인 이야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어요. 뭔가… 따뜻하고, 동시에 쓸쓸한 느낌도 있었고요. 돌탑과 아이, 별, 여름의 장마 같은 이미지도 이뻤어요. 그런데 두 번째 읽었을 땐 이야기 자체보다 그 안의 메시지가 좀 더 명확하더라고요. 나 자신이 누구인지는 내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리고 세상의 거대함과 인간의 작은 행위가 결국 연결되어 있다. 맞죠? 그리고 세 번째 읽을 땐, 그 감정이 제 이야기처럼 느껴졌어요. 글 속에서 ‘저건 내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싶은 순간들도 있었구. 그래서 더 오래 마음에 남더라고요. 그냥 좋다고 넘길 수 있는 글이 아니라, 시간이 지나도 계속 생각나게 되는 그런 글이었어요.”


“세 번이나 읽으셨다고요…?” 주원은 거의 감동을 한 것처럼 보였다.

“와… 너무 감동이에요……. 제가 쓴 글이지만, 이 글이 이런 식으로까지 해석될 거라고는 상상 못 했어요.”


“감동받은 건 저죠. 진짜로. 좋은 글 읽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정이 막창을 한 입 집어먹고 소주잔을 들며 말했다.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주원이 잔을 부딪치며 말했다.


#


둘은 거리로 나와 맥주집을 찾고 있었다. 기름진 고기를 먹었으니 이번엔 속을 좀 시원하게 씻어주는 게 좋겠다고 둘은 합의를 봤다. 꽤 추운 바람이 불고 있었다. 골목골목을 꽤나 많이 걷고 있었지만, 둘은 계속 대화를 하느라 얼마나 멀리 왔는지도 잘 모르고 있었다. 비로소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거리엔 불이 켜져 있는 가게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왼쪽으로 골목이 하나 나있었고, 어귀에 <안리>라는 간판의 카페가 있었는데, 골목의 더 깊은 안 쪽에서는 보라색 조명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주 진한 농도의 보라색이었다. 둘은 그 불빛에 마치 꿀 냄새를 맡은 꿀벌 마냥 홀린 듯이 이끌렸다.


“펍일까요?” 주원이 물었다.


“가볼까요?”


골목 안으로 쑥 들어가자, 등 뒤 먹자골목의 모든 소리가 방 문을 닫은 듯이 먹먹해진 느낌이었다. 마치 두 길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보라색 불빛의 출처는 골목 안 깊숙이 위치한 가게의 동그랗게 생긴 간판의 네온사인이었는데, 주변엔 온통 빌라와 불 꺼진 사무실 건물이어서 유난히 선명하고 존재감 있게, 동시에 몽환적으로 발광하고 있었다. 언뜻 봐도 저 형태와 색상의 네온사인은 필시 펍일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을 인도했던 보라색 네온사인엔, 안에 각진 모양의 알파벳 “R”과 “B”가 살짝 겹친 디자인의 로고가 구리색으로 프린트되어 있었다. 가게 자체는 약간의 반지하 형태로, 도로에서 몇 계단 내려가 있었고, 보통은 유리창으로 되어있을 법한 외벽은 간살 형태의 나무로 견고히 감싸져 있었다. 가게의 문은 정말 센스 있게도 네온사인이 뿜어내고 있는 빛과 「정확히」 같은 톤의 보라색이었고 (유정의 직업병이었다), 문 위에는 다시 한 번 구리색으로


Red

and

Blue


라고 한 단어씩 세로로 나열되어 있었다. 물론 간판 속 “RB” 로고와 같은 폰트였다. “RB”는 <Red and Blue>의 줄임말이었구나. 문의 오른쪽 간살 무늬 벽에는 “Bar Open”이라고 쓰인 나무판이 못에 매달려 있었다.


묵직한 보라색 문을 여니, 고고한 외관보다는 훨씬 더 안락한 분위기와 적당히 알맞게 따뜻한 온도의 실내가 펼쳐졌다.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 벽에는 따뜻한 온도의 실내가 펼쳐졌다. 입구를 기준으로, 오른쪽 벽에 위스키 캐비닛과 바 테이블이 있었고, 왼쪽에는 짙은 고동색 나무로 된 고풍스러운 라운드 테이블이 서너 개 놓여있었다. 벽에는 각양각색의 스테인 글라스가 알로록달로록 아름답게 달빛을 투과하고 있었고, 생각보다 높은 천장에는 크지 않은 사이즈의 팬이 달린 조명이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하고 바텐더가 바 테이블 뒤에서 인사했다. 청남방 위에 가죽으로 된 앞치마를 두른 차림새로, 대충 마흔 중반 정도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아마도 이 가게의 주인일 것이라고 유정은 생각했다.


“안녕하세요.” 주원이 말했다.


“처음 오시죠?” 메뉴판을 바 테이블에 가까이 위치한 한 라운드 테이블 위에 올리며 남자가 물었다.


보통은 “몇 분이세요?” 라거나, “편하신 곳에 앉으세요.” 일 텐데, 바텐더는 ‘어차피 두 명이라는 것은 알고 있어, 그러니 여기에 앉아.’라고 하는 것 같았다. 그러면서도 그의 자연스러운 행동과 말투 때문에 전혀 고압적인 느낌은 없었다. 그리고 약간은 분하게도, 유정은 어차피 딱 그 테이블의 위치가 마음에 들었다.


“네 맞습니다.” 덤덤하지만 씩씩하게 대답했다.


바텐더는 둘의 코르를 받아 안쪽의 행거에 걸어주었다.


둘이서 장소를 찾아 헤매는 동안 그들이 구체적인 무언가를 원했던 것은 결코 아니었다. 하지만 유정은 자리에 앉는 순간, 내가 원했던 건 전체적으로, 그리고 꽤 정확히 이거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냥 그런 느낌이 들 정도로 분위기가 만족스러웠다. 마치 어두운 도시 정글에서, 짙은 안개를 지나고 빌딩 숲을 넘어 깊숙한 곳에 은밀히 숨어있던 비밀의 방을 찾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메뉴를 볼 것도 없이, 그들이 앉은자리 바로 앞에 맥주 탭은 더도 말고 딱 두 개가 있었다.


“맥주는 딱 두 가지인가요?” 주원이 바텐더에게 물었다.


“저희가 보통은 두 가지 탭을 운영하고 있는데, 오늘은 죄송하지만 IPA 한 종류밖에 남아있지 않습니다.” 바텐더가 대답했다.


“유정씨 IPA 괜찮으세요?” 주원이 유정에게 물었다.


“네, 저 IPA 좋아해요.” 유정이 대답했다.


바텐더는 맥주 두 잔을 주문받은 뒤 물러났다.


“여기 분위기 좋은데요?” 주원이 말했다.


“그렇네요. 저도 이런 우드톤을 좋아해서.”


“그런데, 가게 이름은 <Red and Blue>인데 왜 바깥에 조명이랑 문은 보라색일까요?” 그가 물었다.


굉장히 특이한 질문이라고 유정은 생각했다. 유정은 여태 살면서 그런 게 궁금한 적이 별로 없었다. 그런 게 궁금한 그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빨강과 파랑을 더하면 보라색이니까요.” 그녀가 대답해 주었다.

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