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강과 파랑 3
”가로등으로서 부끄러운 얘기지만, 저는 어둠이 무섭습니다. “ 가로등이 말했다.
성수동의 화실을 거점으로 삼은 지 얼마 되지 않은 고양이 길라는 이미 주변의 세상을 꽤 많이 넓혀가고 있었다. 여자 유정이 살짝 열어놓은 창문으로 그는 자유롭게 그곳을 드나들고 있었다. 여자는 아직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지만, 길라가 일부러 그녀에게서 그것을 숨긴 것은 아녔다. 그의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되는 시간과 그녀가 화실을 나갈 때쯤이 공교롭게도 겹쳤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녀가 아침에 출근하기 전에 그는 그곳으로 돌아와 잠을 청했을 뿐이다. 그렇게 밤 내내 그는 그곳의 주변 일대를 돌아다녔다. 그러다가 만난 것이 이 가로등이었다.
처음 만남은 우연이었다. 아, 이 세상에 우연이란 건 없다고 생각하기로 했었나. 아무튼 「우연히」 만났다. 길라는 화실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어느 골목을 배회하다가 귀뚜라미 한 마리를 발견했다. 그는 본능적으로 그것을 쫓았고, 그것이 번쩍 뛰어오르자 길라는 그것을 잡으려 두 앞발을 뻗었는데, 귀뚜라미 대신 가로등을 퉁 하고 친 것이다.
그와 동시에 꺼져있던 가로등에 불이 다시 들어왔다. 그리고 가로등은 그에게 갑자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죠?”
“언제부터?” 고양이는 되물었다. 그게 얼마나 뚱딴지같은 질문인가. 다짜고짜 시간이 얼마나 지났냐니?
“아, 제 전구가 또 나갔었나 보군요. 전구는 괜찮은데, 가끔씩 이렇게 불이 안 들어올 때가 있어요. 소켓 쪽 접촉이 잘 안 되는 것 같아요. 어쩌면 소켓에 연결된 전선의 접촉 불량일 수도 있죠.”
길라는 물어보지도 않은 내용을 그냥 잠자코 들었다.
“엉뚱한 질문을 해서 죄송합니다. 저는 전구가 나가면 의식도 같이 꺼지거든요. 그래서, 혹시 제 전구가 꺼지는 것을 보셨다면, 방금 켜지기 전까지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를 아실 것 같아서 여쭤봤습니다.”
“글쎄, 나도 이 동네에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이 골목은 오늘이 처음이야.”
“그렇군요. 저는 당신에게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당신이 저를 한 대 쳐주셔서 전구가 다시 연결이 된 것 같거든요.”
그렇게 그 둘은 처음 만났다. 그리고 길라는 종종 가로등이 서있는 그 골목을 종종 들렸다. 그는 말이 많은 편이었다. (길라는 잠시 곤을 그리워했다.) 그리고 그는 오늘은 이런 말을 했다.
“저는 어두운 게 싫거든요. 그래서 이렇게 미약하게나마 아침 해가 뜰 때까지 저는 언제나 열심히 전기를 때며 환하게 주변을 밝히고 있습니다. 맞아요. 그래서 해가 늦게 뜨는 추운 계절에는 아침 늦게까지도 켜져 있죠.”
너는 이곳에 오래 있었어?
“네, 그렇습니다. 이 골목도 오래되었고, 저도 그만큼 오래되었죠. 저는 구형인 나트륨등이라고 해서, 요즘 주류인 LED 등에 밀려서 조금씩 교체되고 있습니다. 네, 「저희」 입장에선 멸종위기라고 할 수 있죠.”
하나를 물어보면 열을 대답하는 친구였다.
“너는 계속 한 자리에만 서있을 텐데 어떻게 「너희들」이 교체되는 지를 알 수 있는 거야?” 길라가 물었다.
“아하, 좋은 질문이군요.” 가로등이 대답했다. “저희는 전깃줄과 전기로 연결되어 있으니까요. 전기는 순서대로 가로등을 훑고 지나가기 때문에 저희는 매 순간 서로의 안부를 뒤로 전달할 수 있죠.”
길라는 그의 말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지만, 더 이상 물어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저는 이 골목을 꽤나 좋아합니다. 근처 어딘가에 카페가 있는지, 매일 아침 커피콩을 볶는 향도 정말 좋아요. 봄에는 밤이 되면 더욱더 하얗게 빛나는 벚꽃나무도 있고요, 여름이면 저쪽에선 붉은색 장미도 고고하게 피어납니다. 가을엔 건너편 가로수들이 아름답게 그을린 단풍을 거리에 듬뿍 쏟아내고, 겨울은… 겨울은 좀 춥고 사람들도 많이 밖에 나오지 않아 조금 심심하긴 하지만, 그래도 겨울은 참 멋있습니다. 겨울은 이 골목에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다른 계절들이 다시 돌아올 수 있도록 혼자서 묵묵히 재정비를 해주니까요. 세상에 누군가는 반드시 그 역할을 해줘야 합니다.”
“그렇다 해도 나는 겨울은 싫어. 너무 춥거든.” 길라가 말했다.
“맞습니다. 저는 하필 또 철 재질이라 겨울엔 꽝꽝 얼어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지요. 그래도 뭐 어쩌겠습니까.” 가로등이 호응해 주었다.
“그렇지만, 저에겐 이 추운 겨울을 버티게 해주는 존재가 있답니다. 저는 항상 이렇게 등이 굽어있다 보니, 밤하늘을 올려다볼 일이 거의 없었습니다. 골목의 가로등으로서 제가 해야 할 일은 그저 제 밑을 밝히는 일이니, 제가 밤하늘에 볼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근데 어느 날, 전구를 교체하려고 녹이 슨 덮개를 잠시 벗었던 밤, 저는 처음으로 밤하늘을 올려보게 되었고, 이 밤을 밝히는 것은 나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 전에 보석처럼 빛나는 별들이 진작부터 반짝이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거죠. 그리고 그중에서도 저는 그것을 보았지요. 그것의 이름은 「달」이었습니다.
밤하늘에는 수많은 별들이 쏟아질 듯이 촘촘했지만, 그중에서도 달은 최고로 아름다운 별이었습니다. 그날 이후로, 밤하늘에 그득 찬 별처럼 제 안의 우주를 동그랗게 채운 저 달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습니다.”
길라는 그의 말을 들으며 문득 고개를 들어 하늘에 뜬 달을 쳐다보았다. 전혀 동그랗지 않았다. 조금 있으면 그믐달이 될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저렇게 가까이 보이는 달은 사실 밤하늘 저 깊숙이, 까마득하게 멀리 있습니다.” 감수성이 풍부한 가로등은 말을 계속했다.
“나는 나의 캄캄한 우주 속 변방의 어딘가에 있고, 달은 나의 우주 정 가운데에 저렇게, 저기 저- 위에서 영롱하고 또렷하게 빛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아득합니다. 그럼에도 매일의 밤은 틀림없이 오고, 매일의 밤은 틀림없이 어두우며, 매일의 달은 틀림없이 빛나니, 나 또한 매일 밤, 어김없이 달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건, 사랑이라는 감정인가?” 길라가 물었다.
“글쎄요, 어쩌면 존경, 어쩌면 선망, 어쩌면 동경일지도 모르죠. 저보다 훨씬 더 높은 곳에서, 훨씬 더 크게, 더 밝게 빛나고 있으니. 하지만 제 감정의 정확한 형태는 저에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할 수만 있다면, 매일 전구의 필라멘트를 끊어 잠시라도 덮개를 벗어버리고 활짝 열린 천장으로 달을 온전히 보고 싶지만, 그랬다간 사람들에게 불량하다고 오해를 받아 아예 뽑혀버릴 수도 있겠지요. 그랬다간 아예 LED로 대체되어 버릴 수도 있을 거예요. 괜찮습니다. 달의 존재만으로도, 그 생각만으로도, 밤하늘처럼 캄캄하던 제 머릿속은 상념이 환하게 반짝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밝기로 따지자면 달보다 태양이 훨씬 더 밝을 텐데.” 길라가 약간은 의아하다는 듯이 말했다.
“네, 그렇다고 들었습니다만, 저의 세상에 태양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해가 뜨기 전에 전구가 꺼지고, 전구가 꺼진 동안엔 의식이 없거든요. 전구가 다시 켜지는 시간은 이미 해가 지고 난 뒤라서, 저는 한 번도 태양을 본 적이 없습니다.” 가로등이 담담하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본 적이 없다 해도, 그것이 존재한다는 것은 알고 있잖아.” 길라가 가로등에게 말했다.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것은 제가 사는 세상에는 의미가 없는 「정보」일뿐이지요.”
길라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엄연히 존재하는 것을 자신의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이유로 없는 것과 마찬가지의 취급을 할 수 있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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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어느 밤, 길라는 화실 근처 쓰레기장이 있는 골목을 걷고 있었다. 그곳은 항상 고요했고, 사람들의 인기척이 적은 대신 여러 동물들이 많아 길라가 자주 들르는 코스였다.
그날 밤도 별다를 것 없이 쓰레기 더미 옆을 지나가던 길라는 어떤 낯선 향기에 이끌려 발길을 멈췄다. 그곳엔 어떤 새가 있었다. 작고 둥글게 생긴, 이름 모를 새였다. 그는 쓰레기 더미 사이를 톡톡톡 쪼아대며 뭐가 그렇게 바쁜지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
호기심이 생긴 길라가 가까이 다가가자, 새는 낯선 눈으로 길라를 쳐다보더니 조심스럽게 그에게 말했다.
“형광개미를 쫓는 거야.”
“… 뭐라고?”
“형광색으로 빛나는 개미들이 여기 근처에 살아. 너에겐 보이지 않니?”
길라는 어리둥절했다. 개미는 당연히 알지만, “형광”이라는 단어는 처음 들어봤다. 그래서 자세히 들여다보니, 꿈틀꿈틀 개미들이 부지런히 쓰레기 더미에서 먹을 것을 나르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봐도 그들의 색은 검은색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 고양이는 그 파장을 못 느끼거든. 우린 눈이 좋으니까, 자외선 영역을 감지할 수 있어. 아마도 너의 눈에겐 그저 검게 보이겠지만, 이 개미들은 어두운 데선 우리 눈엔 밝은 형광색으로 보여.”
길라는 아무 말 없이 바닥을 바라봤다. 그에게 보이는 것은 여전히 검은 개미들 뿐이었다. 새가 구태여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리는 없었다. 그 ‘형광색’이라는 것이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자신의 눈에 보이든 말든.
“자세한 건 나도 잘 모르지만, 우리는 네 가지의 색을 섞어서 세상을 본다고 하더라고. 너희 고양이와 대부분의 동물들은 두 가지라고 하던데.” 밤새가 우쭐대듯이 말한 뒤 다시 개미들을 쪼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고양이 길라는 지금껏 밤새의 세상보다 절반인 세상에서 살아왔던 것이다. 그리고 앞으로도 형광색이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세상에 살아가는 것이다. ‘형광’이란 것이 도대체 무엇인지 평생 알 수 없을 것이다.
길라는 그제야 가로등이 자신에게 했던 말이 이해가 갔다. 그에게 태양의 존재는 의미가 없다는 말이, 자신이 볼 수 없는 태양은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그 말이 비로소 이해가 됐다. 그는 곧장 가로등에게로 달려갔다.
가로등은 하필 또 꺼져있었다. 길라는 그를 두 앞발로 힘차게 걷어찼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를 깨우려 여러 번 그를 흔들었지만 전구에는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아 길라씨, 타이밍이 좋게 오셨네요.” 공기 중에서 흩어질듯한 희미한 소리로 가로등이 대답했다.
“어떻게 된 일이야?” 길라가 물었다.
“제 필라멘트가 끊어졌어요. 그리고 전구를 갈 계획이 없다나 봐요. 어차피 조만간 이 골목의 모든 가로등들을 LED로 대체하기로 했다네요.”
“그러면… 그렇게 되면 너는 사라지는 거야?”
“괜찮습니다. 저는 어쩌면 기다리고 있었는지도 몰라요. 길라씨의 눈에 보이진 않겠지만, 저는 지금 필라멘트가 끊기면서 바삭 타올라 한 줌의 연기가 된 상태예요. 그리고 점점 얕아지고 점점 분해되고 있어요.”
길라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거 아시나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우주의 모든 것은 점점 더 넓게 퍼지고 있대요. 그러면 저도 이렇게 피어오르면서 언젠간 달까지 도달할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거기까지 가는 길은 정말로 어두울 거야.” 길라가 목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허공에다 대고 말했다. 가로등의 목소리는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괜찮습니다. 가는 길이 끝없는 어둠뿐이라면, 그저 눈을 감으면 돼요. 눈을 감으면 찬란하게, 제 안에 달이 환하게 빛날 테니까요.”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의 목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았다. 길라는 그를 몇 번이고 더 불러보았지만, 아마도 그는 이미 밤하늘 저 높은 곳으로 씩씩하게 피어오른 모양이었다. 다행히도 달은 충분히 밝게 떠 있었다. 그가 길을 잃을 일은 없겠다고 길라는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