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반대편 3
유정은 잠시 갤러리 밖으로 나와 주변의 풍경을 둘러보며 오랜만에 전자담배를 태우고 있었다. 안에서는 박대표와 이수현 매니저가 갑자기 늘어나게 된 유정의 작품들과 그들의 존재감 때문에 그것들을 어디에 걸어야 할지를 두고 설왕설래하고 있었다. 그것은 꽤나 예민하고도 민감한 일이었다. 유정의 각성은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지만 지금 이 타이밍일 줄은 아무도 예상치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작품이 갤러리의 간판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제치고 메인에 걸리거나 하면 기존의 스타 작가들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할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재계약 문제에도, 다음 작품의 동기부여에도 크게 악영향을 끼칠 것이다. 매년 의례적으로 열리던 연말 행사가 부랴부랴 새로운 별의 탄생을 알리는 쇼케이스로 변모해야 하는 것이다. 최대한 노골적이지 않게 말이다.
바깥은 겨우 몇 주가 지나는 사이 가을이 온 서울을 점거해 버렸고, 이제 여름의 흔적이라고는 짙어지는 단풍에 아주 옅게나마 남겨진 희미한 녹색밖에 없었다. 그마저도 완전히 붉어지고 이내 노랗게 색이 빠지면 곧 바싹 마른 낙엽이 되어 쓰레받기에 담겨질 것이다. 사람들은 그새 참 빨리도 옷을 갈아입어 버렸다. 여름 내내 쌩쌩하던 선풍기의 날개도 망에 갇힌 채로 더는 돌아갈 수 없었다. 유정에게 여름의 반대편은 겨울이 아녔다. 그녀에게 여름의 반대편이란 돌아올 여름에서 가장 먼 지점, 여름의 끝이자 가을의 시작인 바로 지금이었다.
유정은 그믐달을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더 이상 자연이라는 것을 믿지 못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자연이 과연 자연스러운 것일까 하는 의문을 품게 되었다. 물론 이유는 「그날 밤」 그녀가 목격했던 자연의 부자연스러운 행동들이었다. 그날 이후엔 낮이 밤이 되고 하늘이 어두컴컴해질 때마다 마치 누군가가 그 시간에 맞춰 스위치를 하나씩 끄고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이려고 애쓰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자연스럽다는 게 과연 뭘까. 그건 우리가 알고 있는 대로 세상이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평생을 살면서 익숙해져 있는 이 지구와 세상의 물리 법칙, 그리고 화학 작용인 것이다. 계절이 도는 것이 과연 「순리대로」인 걸까? 계절이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에 「순리」라는 표현을 붙여도 되는 것인가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이 들었다. 선풍기를 틀어놓고 그것의 날개가 돌아가는 것을 보며 그것이 「순리」라고는 하지 않지 않나. 선풍기를 돌아가게 만들어 놨으니 그것은 돌아갈 뿐이다. 계절 또한, 달 또한, 세상의 모든 것이 선풍기와 다르지 않았다. 누군가가 만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대로 돌아가고 있는 것일 뿐이다.
세상이 돌아간다는 것은 표현이 아니다. 적어도 유정이 느끼기엔 그랬다. 정말로 세상은, 「정말로」 돌아가고 있다. 마치 태엽을 드르륵- 드르륵- 감으면, 바닥 밑에 안쪽에서는 정밀하게 만들어진 톱니바퀴들이 질서 정연하고 일사불란하게 딱딱 맞물려서 돌아가고, 그것으로 위에서는 장난감 회전목마가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은 돌아가는 작은 것들에 의해 크게 돌아가고 있다.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그 「시스템」의 완벽함을 증명하며, 그것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회전목마의 어딘가가 삐그덕 소리가 난다 해도, 어딘가의 페인트칠이 조금 벗겨졌다 해도.
「그날 밤」의 달과 같은 모양을 한 달이 하늘에 가늘게 떠있었다. 그리고 그 뒤로 무수히 많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보이기엔 저렇게 밤하늘에 콕 박혀있는 것처럼 보여도, 저들은 저마다 열심히 돌아가고 있다. 저 별들은 세상의 「톱니바퀴」인 것이다. 저들이 다 합쳐져서, 이어지고 맞물려서 돌고 있으며 지구 역시 어엿히 그 속에 끼여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지구에 있는 모든 모래 알갱이 하나당 약 1만 개의 별이 있다고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었다. 당장 지구에 있는 모든 모래 알갱이는 대체 몇 개일까? 그리고 그 알갱이 하나당 1만 개의 별이 있다고? 그 별들에겐 또 얼마나 많은 행성과 얼마나 많은 달들이 딸려서 그 주변을 돌고 있을까? 또 그 위엔 얼마나 많은 모래가 있을까? 이 얼마나 거대하고도 세밀한 톱니바퀴인가.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어쩌면 오랜만에 주입된 니코틴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별들이, 모든 모래 알갱이들이, 이 톱니바퀴들이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 정교하게, 정확한 숫자가, 제대로 맞물려있다. 세상이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 그 증거다. 고가의 - 아니 굳이 고가라는 설정을 빼더라도 - 오토매틱 시계의 케이스를 열고, 그 무브먼트 안에서 돌아가고 있는 130여 개의 부품 중 그냥 아무거나 하나만 빼라고 한다면, 당신은 뺄 수 있겠는가. 유정은 본인이 롤렉스를 차면서도 시계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물론 우주에 대해서도 마찬가지고) 째깍째깍 부드럽게 돌아가고 있는 모든 톱니 중 그 어떤 조그마한 부품이라도, 빼버려도 아무런 탈없이 시계가 잘만 돌아갈 것이라고 절대 생각할 수는 없었다. 필요도 없는 부품이 그냥 돌아가고 있을 리는 없을 테니까. 「시계」를 돌리는 것도 그런데, 하물며 「시간」을 돌리고 있는 우주의 모든 부품에는, 이 모든 것의 움직임에는, 당연히 이유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다. 저기 보이는 저기서 별 몇 개쯤, 달 수십 개쯤은 없어져도 무의미하고, 몇 만 광년쯤 떨어진 아직 발견되지 않은 행성은 사라져도 된다고, 사실은 지금 당장 토성의 달 몇 개는 반대방향으로 돌기 시작해도 딱히 큰 상관이 없을 것 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다. 이 모든 게 「그날 밤」의 자연스럽지 못했던 시간 때문이었다. 이 세상이 자연스럽게 생겨났을 리 없다. 반드시 이 세계를 만든 이가 있다.
아무튼 유정의 세상에 대한 시각은 이제 그렇게 되어버리고 말았다. 무엇이든 당연한 것은 없었다. 세상과 세상의 모든 것은 철저하게 설계되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의 작품에 큰 바탕이 되었다. 이 세계를 만든 이는 우선 어둠을 바탕에 깔았다. 그리고 그것을 빛으로 덮었다. 언제나 저변에 깔려있는 어둠을, 그것을 억누르는 빛을, 그 엎치락뒤치락하는 레슬링을 유정은 이제 그릴 수 있게 되었다. 여태껏 그 누구도 붓으로 표현하지 못한 방식으로.
지이잉- 하고 전자담배가 사용종료를 알렸다. 유정은 갤러리 안으로 들어가 뜨겁게 익어진 담배를 기계에서 빼서 버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역시나 눈치와 행동이 재빠른 이수현 매니저가 그녀에게 다가와 다 핀 담배가 수북이 쌓인 통을 건넸다. 아마도 다 박대표가 핀 것일 거라고 유정은 짐작할 수 있었다.
“위치는 다 정한 거 같은데.” 박대표가 자신의 전자담배에 담배를 꽂아 넣고 스위치를 켜며 태연히 말했다. 굳이 밖에 나가서 흡연을 했던 유정이 무색해졌다. 아무리 자신의 갤러리라지만, 그리고 아무리 전자담배라지만, 박대표가 그림들 앞에서 담배를 피운다는 게 유정은 아직도 영 이상해 보였다. 마치 누군가가 카펫 위에 침을 뱉는 것을 본 것처럼 께름칙하고도 불편한 느낌이었다.
“자기가 오늘 가져온 다섯 개 다 걸 거야.”
“그래도 괜찮을까요?”
“덕분에 좀 공간이 너무 꽉 찬 느낌이 들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어쩔 수 없지 뭐. 대신에 한쪽 구석에 몰아넣기로 했으니까 괜찮을 거야. 그 편이 어울리기도 하고.”
확실히 유정의 그림들은, 그 속의 어둠은, 서로 이어져 있는 느낌이 강해서 그림들끼리 아예 겹쳐놓는다 해도 오히려 그런대로 어울릴 것 같은 느낌을 줄 것만 같았다.
“구석이라고 서운해할 것 없어 유정씨. 한쪽 면이랑 코너를 다 쓰게 해주는 건 정말 특별대 우니까 말이야.”
“전혀 서운하지 않습니다 대표님. 오히려 다섯 개 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하죠.” 유정이 차분하게 말했다.
“자 그럼 우리 오랜만에 술이나 한 잔 하러 갈까?” 박대표가 들뜬 목소리로 제안했다.
“대표님, 어제도 술 드셨잖아요.” 이수현 매니저가 웃으며 장난스럽게 말했다.
“아니, 유정씨랑은 오랜만이잖아. 이런 날은 좋은 술로 축하해야 하는 거야. 유정씨 이후에 스케줄 없지?”
“네, 대표님.” 유정이 술을 마다할 리 없었다. 물론 혼자 마시는 편이 더 좋았겠지만.
여자 셋이 쌀쌀해진 가을바람 속에서 조금 걸어서 도착한 곳은 한남동의 어느 고즈넉한 골목에 위치한 <쥬니방가이>라는 이자카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