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반대편 2
주원은 버스를 타러 가는 길에도,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도 두 손으로 폰을 붙들고 글 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신들린 듯이 글을 쓰면서 본인도 한 가지 의아했던 것은, 왜 주체가 하필 장미였는가 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평소에도 그렇게나 장미에 대해 관심이 많았는가 하면 전혀 아니었다. 그의 집에는 화분 하나 없었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그는 마치 전생에 붉은 장미이기라도 했었던 것 마냥 그것의 삶에 대한 글이 화면 위에서 무럭무럭 스스로 자라나고 있었다.
태양은 맹렬히 엔진을 돌리고 시간은 액셀을 밟아 어느덧 5월이다. 이제 지난겨울은 생각도 나지 않을 정도로 햇빛이 뜨거워지고 있다. 이번 여름은 장마가 어떨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로서는 다시 한번 꽃을 피울 준비가 되었다. 말년에 이제 와서 장마가 무섭진 않다. 오히려 비에 젖으면 나의 붉은색은 더 선명해질 것이고 내 향은 물을 머금고 더욱 짙어질 것이다. 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된다. 그동안 무뎌진 가시를 다시금 날카롭게 내세우기 시작한다.
날은 조금씩 이르게 밝아지고, 밤은 조금씩 더디게 어두워진다. 여름이 도래했다. 나, 드디어 다시 한번 장미의 꽃을 피울 때가 되었다. 많은 이가 「장미」와 「장미의 꽃송이」를 동일시한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난 서운하지 않다. 묵묵히 꽃받침 쪽에 단단하게 힘을 모으기 시작한다. 마라톤으로 치자면 이제 마지막 스퍼트다. 볼륨감 있고 색깔 짙은 꽃잎을 최대한 겹겹이 피워내려면 그동안 비축해 둔 체력을 꽃받침을 통해 다 쏟아내야 한다.
두 눈을 꼭 감고 정신을 집중하여 일곱 개의 꽃받침에 내 모든 기를 분출하고 있다. 열 번의 낮과 열 번의 밤을 이를 악물고 버텼다. 그리고 기어이 피워냈다. 정확히 일곱 송이의 장미꽃을 붉디붉게 피워냈다. 어쩌면 여덟 송이까지 가능했을지도 모르지만, 난 양보다 질을 선택했다. 물론 보기에도 짝수보다는 홀수가 더 매력적인 이유도 있었다. 일곱 개의 꽃송이들이 나로서도 감격스러울 정도로 아름답게 잘 피었다. 따뜻한 바람이 살랑살랑 불기 시작했고, 내 인생의 마지막 역작을 이제는 그저 내세울 뿐이다. 세상을 위해서 할 수 있는 나의 모든 붉음을 다 할 것이다.
여름이 지났다. 나에게 어린 왕자와 그의 장미같이 동화 같은 인연은 없었지만, 그래도 많은 이들이 내가 피어난 곳을 직접 찾아와 주었다. 좋아한다는 건 그런 것이다. 줄기를 자르고 가시를 손질하고 잎을 떼어내 버린 뒤 다른 꽃들과 뒤섞어 종이와 플라스틱 포장지에 싸버리는 게 아니고 말이다. 꽃을 좋아한다면서 그것을 갖기 위해 기어이 꺾어버리는 것은 얼마나 모순된 행동인가. 그거면 됐다. 사람들이 내 앞에 멈추어 선채 이쁘다고 해주었다. 그리고 피어난 이 꽃을 제대로 마주하고, 내가 자라도록 지탱해 준 흙을, 이 꼿꼿하면서도 활처럼 유연한 줄기를, 내 잎과, 가시와, 나를 이루는 모든 것을 봐주었다. 이들은 나를 보기 위해서 일 년을 기다려주었다. 일 년 내내 나만을 그리워하며 살진 않았겠지만, 그래도 잊지 않고 와주었다는 것이 내게는 중요했다. 사진도 몇 장이나 찍혔는지 모른다. 어떤 한 젊은 화가는 일주일을 꼬박 매일 같은 시간 늦은 밤에 찾아와 내 앞에 앉아 나의 이곳저곳을 보고 그려주었다.
그러니까 이제 이만하면 된 것 같다. 후두둑 잠깐 내린 소나기에 길 맞은편의 떨어진 낙엽들이 떠내려가고 있다. 나 또한 가련다. 더 있으려면 더 있겠으나, 나의 제일 이쁜 모습이 내 가장 마지막 모습이길 난 바란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지금이다. 아직 미약하다며 머쓱한 듯이 노랗던 봄의 햇살, 추운 새벽에 파랗게 번지며 포근히 덮어주었던 안개, 상냥하게 어루만져 줬던 바람의 손길, 몇 번이고 찾아주었던 노란색과 파란색, 그리고 하얀색 나비들, 그 모든 것들과 모든 과정이, 그 모든 계절이, 그 모든 인연이, 이 세상이, 나라는 장미를 이루었구나.
그러고 보면 온실 속의 그 꽃들과 나와의 차이는 다름 아닌 겨울이었다. 나의 자긍심은 겨울에게서 온 것이다. 내가 꺾이지 않고 가시를 세우고 이렇게 당당하게 서서 아름다울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겐 이겨내야만 했던 겨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에겐 없었던 결핍이 나에겐 「주어졌던 것이다」. 꼭 호전적인 것들만이 나에게 도움이 됐다고 할 수는 없지. 고통도, 시련도, 기쁨과 행복만큼이나 지금의 나를 만드는데 일조했겠지. 어쩌면 훨씬 더. 실제로는 어떤 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었을지는 쉽사리 단정 지을 수 없는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달콤했던 것들은 결과적으로 내가 더 강해질 수 없었던 독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니까.
나를 이루어낸 모든 것이 나인 것이다. 그러니 겨울도 나에게서 걷어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가 없었다면 나는 온실 속의 그 꽃들과 별반 다를 게 없는 나밖에 되지 못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지금의 나만큼 아름답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의 나이려면, 그 무엇도 부족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나에게 부족했던 것들도 덜 부족했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주어지지 않음이 내게 주어진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나 내가 시련을 이겨내고 활짝 피어난 장미인 것에 긍지를 가졌으면서, 평생 동안 내게 버틸 수 있는 만큼의 시련을 주었던 겨울을 적대시하는 누를 범했다. 내가 아름다운 이유가 겨울을 이겨냈기 때문이라면, 겨울이 없었다면 나는 이렇게 아름답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왜 나는 몰랐을까.
나는 장장 십 년을 살았다. 열 번의 봄, 열 번의 여름, 그렇게 열 번 꽃을 피웠다. 온실 속 꽃들에게는 그 어떤 결핍도 없었고 나에겐 겨울이라는 결핍이 주어졌다. 그것이 나의 가치의 원천이다. 망치 없이는 못을 박을 수 없듯이 망치도 피차 아픈 것을, 못이 망치를 원망하는 것보다 우스운 게 또 있을까. 겨울 없이 나는 나일 수가 없는데, 추워도 겨울 자신이 제일 추울 것을, 겨울을 원망하던 나는 얼마나 어리석은 장미였던가.
그렇다면 겨울, 너는 나의 자랑이구나. 그렇다면 겨울, 너는 그 누구보다도 나라는 장미의 큰 일부분이었구나. 일부분이라는 것은 결국 나라는 것이지. 가시가 나의 일부분일 뿐이라고 장미가 아닌 게 아니듯이. 그럼에도 난 겨울에게만 참 모질었었다. 그 역시 장미였을 뿐인데. 겨울의 끝은 가을의 처음과 정말 많이 닮아있다. 계절의 구분은 그렇게나 모호하고 경계선은 이렇게나 흐릿한데, 나는 그걸 굳이, 굳이, 갈라서 차별을 했나. 어차피 돌고 돌아서 또 돌아오는 것들에게 그 구분이 뭐가 그리 중요하다고. 이제 와서 부끄러움에 얼굴이 많이 붉혀졌지만 내 붉은 꽃에 가려지니 얼마나 다행이냐.
그러니 가을아, 전해다오 겨울에게. 나는 평생 장미의 길을 걸어왔고, 돌아보니 내 길이, 그 자체가 곧 장미였다고. 그러니 겨울, 당신 또한 장미였다고. 그것을 너무 늦게 알아서 내가 진심으로 미안해했다고 전해다오. 덕분에 나는 훌륭한 장미로서 살 수 있었고, 우리는 함께 이쁜 꽃을 열 번이나 붉게 피워냈다고. 그리고 꼭 제대로 알려다오. 겨울은 한 번도 내 꽃을 제대로 보지 못했으니. 꼭 전해다오. 그와 내가 함께 피워낸 마지막 꽃송이가 얼마나 어여뻤는지.
이 이야기의 결말이라던가 메세지라던가 하는 것은 주원도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뜬금없이 언젠가 <올림픽공원>에서 봤던 장미들이 생각이 났고, 그때 몇 자 끄적인 메모를 토대로 글을 시작했을 뿐, 써내려 가다 보니 이런 결말로 써진 것이다. 게다가, 저번의 나뭇잎과 구름도 그렇고, 이번의 장미도 그렇고, 어째서 그들의 마지막 순간을 이야기의 끝으로 정한 것일까. 어쩌면 주원은 자신도 모르게 죽음을 그렇게나 무의식적으로 의식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비로소 약간의 멀미가 느껴지기 시작했다. 다행히 다음역이면 내릴 수 있었다. 주원은 멀미가 심해서 웬만하면 버스 이용을 선호하지 않았는데, 「그날 밤」 이후로 지하철을 타는 것엔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그는 잠시 자신이 지금 타고 있는 이 버스가 마치 그때의 그 지하철처럼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하고 다시 한번 그전 정류장에 멈춰서는 상상을 했다. 등골이 오싹 아려왔다. 다행히도 주원이 반자동적으로 둘러본 버스 안에는 사람들이 거의 꽉 차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높은 빌딩들에 가려져 달이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그믐달일 것이라는 예감이 들었다. 이제는 감만으로도 주원은 그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