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의 반대편 1
고작 몇 주가 지나는 동안 가을은 온 서울에 안정적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 계절을 풍미했던 장미는 열심히 키운 가시가 무색하게 검붉게 말라 쪼그라들었다. 가을에는 가을의 코스모스가 필 것이고, 겨울도, 봄도, 그 계절의 꽃이 피던 대로 필 것이다. 사람들 역시 이전 가을에 입던 대로 계절에 맞게 옷을 꺼내 입었다. 한 계절 내내 열을 내며 돌아가던 선풍기 역시 커버에 감싸진 채 창고 안으로 퇴장했다. 여름의 반대편, 겨울을 향할 준비를 다들 시작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날 밤」 이후 세상이 드라마틱하게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만약 그랬다면, 세상에 큰 난리라도 나거나 했다면, 아예 뒤죽박죽이 되었다면, 그것을 주원은 「그날 밤」이 이유였던 것으로 단정 지을 수 있었을 것이다. 그래, 그랬다면 차라리 나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에게 「그날 밤」에 대해서 털어놓을 수 있었을 테니까. 지금 이 사태는 내가 경험했던 그것으로 설명이 된다고 말할 수 있었을 테니까. 하지만 애석하게도 모든 것은 「그날 밤」이 있기 전과 아주 잘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그날 밤」의 「그 부분」만 딱 떼어놓고 이어진 듯한 느낌이었다. 때문에 주원 역시 「그 부분」을 겪지 않았던 것 마냥 그냥 그런대로 이어나가는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딱 한 가지 외적으로 드러나는 행동이 하나 있었는데, 그믐달이 뜰 때면 주원은 그것을 자꾸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는 달 아래의 구름들이 계속해서 제 갈 길을 가는지를 유심히 지켜보았다.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몇 번이나 들켜서 회사 사람들이 그에게 맨날 뭘 그렇게 보고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때마다 그것을 그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다는 사실은 그의 일상을 지진같이 흔들었고, 매번 동반되는 쓰나미 같은 큰 외로움이 그를 거세게 덮쳐왔다. 그때마다 그것에 휩쓸리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 외로움과 고립감은 지속되는 감정이었지만, 특히나 요즘같이 달이 그날 밤처럼 가냘프게 뜰 때 그것은 더욱 심화되었다.
주원은 <1Q84>를 떠올렸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 속에서 주인공 덴고는 어느 날 밤 태연하게 떠 있는 두 개의 달을 보았다. 그 역시 세상 사람들 아무도 그 사실에 동요하지 않음에 어쩔 수 없이 그것을 묵인한 채로 살아야 했다. 덴고의 세상에서 그를 곤란하게 했던 것 역시 「공교롭게도」 「달」이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엄밀히 말해서 주원이 「그날 밤」 겪었던 것의 문제는 달이 아니었다. 달은 여느 때처럼 그대로 떠있었고, 그 주변을 지나가는 구름들이 이상한 행동을 한 것이다. 이상했던 건 그가 탄 지하철이 같은 구간을 반복한 것이다. 그의 시곗바늘이 1-2분 남짓한 시간 속에 갇혀서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TV를 틀었는데 붉은색의 원피스를 입은 기상 캐스터의 일기예보가 무한히 반복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세상의 모든 불이 켜져 있는 방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상했던 모든 것은 서울과 달의 사이에서 벌어졌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날 밤」 일어났던 모든 이상했던 일들을 어느샌가 대표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달이었다.
「그날 밤」의 그 농도 짙던 어둠의 기억이 아직도 그를 질척이며 괴롭히고 있었지만, 다행히도 주원은 창작과 작문의 모멘텀을 잘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서퍼가 해가 지기 전의 마지막 *헤이즈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이, 그 역시 이 흐름을 어물쩍 놓치면 어쩌면 두 번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는 집념으로 <이어지는 이야기>의 두 번째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 최소 6피트(약 1.8미터) 이상의 파도)
길을 걷는 중에 장미꽃 한 송이가 바닥에 떨어져 있다면, 누구라도 그걸 굳이 밟고 지나가는 이 있을까. 누가 그럴까. 길 위에 무수히 깔린 낙엽 위를 부스럭부스럭 지나가는 것은 아마도 무의식적인 행동이겠지만, 장미꽃을 밟아 짓이긴다는 것은 꽤나 께름칙한 일이다. 그렇기에 그것은 필연적으로 의식적인 행위일 수밖에 없다. 나뭇잎에겐 퍽 서운한 일일지는 모르나,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이 세상에서 나뭇잎과 장미의 존재감은 뚜렷이 다르다. 설사 누군가 장미꽃을 굳이 밟고 지나간다 해도, 혹은 장미꽃 위를 폴짝 뛰어넘어간다 해도, 둘 다 장미를 의식한 행동임엔 다름이 없다. 밟았다면 일부러 밟은 것이고, 밟지 않았다면 애써 피한 것이다. 그러니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장미를 의식하면서 살고 있다」고 밖에 할 수 없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보다 더 우월하다거나, 혹은 우리의 삶이 그들의 그것보다 더 가치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애초에 가치란 값어치처럼 더하거나 덜한 것이 아니니까. 다만 세상이 그런 식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정한 것이 아니다. 내가 장미로 태어난 것만큼이나.
언젠가 밝은 톤의 고등어무늬를 한 어느 길고양이가 나에게 가시를 왜 내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왜 장미라는 꽃에겐 「유난히」 가시가 있느냐고, 자신의 푸른 두 눈을 반짝이 물어보았다. 「유난스럽다니」. 나의 가시와 나는 유난스럽지 않다. 나는 장미일뿐이다. 가시가 있어야 장미이거늘, 그것에 이유를 묻는 바보 천지가 세상에 어디 있나. 그것은 마치 고양이 본인에게 뾰족한 귀가 두 개 있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에 누군가 이유를 묻는다면 그 또한 황당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장미이기 위해서, 우리의 존재를 부정받지 않기 위하여 가시를 내는 것이다. 오직 장미만이 장미이기 때문이다.
그때의 일이, 그때 내 대답을 듣고 억울한 표정을 지었던 고양이의 얼굴이 왜 지금 문득 생각이 났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만약 나에게 가시가 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 이유만으로 장미가 아니게 되는 걸까? 혹은 불완전한 장미 취급을 받았을까. 그렇다면 그 고양이에게 쏘아붙이듯이 했던 내 대답은 과연 정당한 것이었을까.
내게 물 한 번이라도 준 적 없는, 나랑은 전혀 상관도 없는 사람들이 제 멋대로 나에게 ‘열렬한 사랑’이라느니, ‘영원한 아름다움’이라느니,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며 “꽃말”이라는 것을 갖다 붙였다. 그리고 그것이 나의 「의미」란다. 정말이지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다. 모든 삶은 각자의 가치가 있는 것이지, 한 종을 싸잡아 의미를 정해버리는 것은 도대체 누구의 얼마나 교만한 발상인가. 그 누가 감히 그럴 권리를 가질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식이라면 인간의 “인말”은 뭔가? 어린 왕자의 장미처럼, 의미는 「되는 것」이지 「정하는 것」이 아니다. 장미에게 꽃말 따위의 의미부여는 필요 없다. 나란 장미는 장미답기 위하여 살았고 그걸로 충분히 충분하다. 장미답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붉은 것이다. 향이 진한 것이다. 5월에 피어나 9월에 지기까지 여름을 대표하는 것이다. 주체적인 것이다. 고혹스럽고 매혹적인 것이다. 아름다운 것이다. 도도 한 것이다. 독보적인 것이다. 숨지 않는 것이다. 가려지지 않는 것이다. 당당한 것이다. 용기 있는 것이다. 가시 돋친 것이다. 진실된 것이다. 적어도 나란 장미는 그렇게 살았다.
많은 꽃들이 그저 이쁘다는 이유로 온실 속에서 키워진다. 그 꽃들에게는 계절은 물론 날씨란 개념조차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에게 비라는 것은 우중충해진 비닐 천장 위를 타닥타닥 때리는 소리일 뿐이요, 눈이라는 것은 하얀색이 아닌 어두운 그늘을 드리우는 것일 뿐이다. 필요 이상의 햇빛은 비닐에 걸러지고, 온도는 언제나 너무 덥지 않게, 너무 춥지도 않게 보온되고 보존되며, 꽉 닫혀있는 문 덕분에 한 점의 바람도 맞을 일이 없다. 그들을 갉아먹는 벌레는 물론 나비나 벌에게도 온실의 문은 열리지 않는다. 질서 정연하게 정해진 거리로 심어진 그들에겐 매일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의 물이 뿌려진다. 그 꽃들이 뭘 알겠는가. 그저 일평생을 라텍스 장갑을 낀 손들에게 아무 생각 없이 사육당하다가 가장 이쁠 때쯤에 잘려나간다. 그러면 그들에게 값이 매겨지고 사람들은 돈을 기꺼이 지불하고 선물을 하며, 받은 이는 이를 꽃병에 물을 담아 꽂아 놓기까지 한다. 「이미 싹이 잘려 죽어있는 것을 말이다.」 물에 담겨있는 불쌍한 꽃은 자기가 이미 죽어있다는 사실도 아마 모를 것이다. 그것을 보며 싱싱하다고 표현하는 것 또한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
그래서 나는 내가 장미임에도 - 그야말로 꽃 중의 꽃이면서도 - 그 누구의 도움 없이 당당히 이 모든 날씨와 모든 겨울을 다 받아들이고 견뎌내며 살아가는 것에 스스로 큰 자긍심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나의 아름다움이다. 자의식과잉이라고 해도 좋다. 어쩔 수 없다. 이 정도 자신에 대한 자존감은 있어야 내가 나를 믿고 살 수 있다. 바람에 흘러 전해 듣기로, 예전에 누군가가 제멋대로 “담장에 기대어 자라는 식물”이 장미의 어원이라 했다지만, 우리는 결코 그렇게 나약하지 않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기대어 살지 않았다. 평생을 장미로서, 모든 이가 장미에게서 바라는 것을 나는 해냈고, 지키며, 부끄럽지 않게, 어디 하나 모자라지 않은 장미로 살았다.
십 년 차 장미로서, 나는 직감할 수 있다, 나의 마지막 봄이 드디어 목전이라는 것을. 나는 여름에 피는 꽃이기에, 그만큼 봄이 중요하다. 겨울의 시작부터 내가 기다리고 바라던 것은 단 하나, 그저 겨울의 끝이었다. 그러니 겨울의 아무리 미세한 변화라도 그걸 내가 눈치채지 못하는 게 이상하다면 이상할 일이었다. 겨울이 서운하다 해도 어쩔 수 없다. 하지만 나는 결국 여름에 피어나는 꽃. 겨울, 당신은 나에게 그저 견뎌내야 하는 고난일 뿐이다. 조금이라도 당신이 예전 같지 않다면 나는 알아챌 수 있다. 그리고 어제는 마냥 춥고 건조하기만 했던 새벽녘의 이 시간에게서 오늘 나는 소량의 봄내음을 맡을 수 있다. 하늘에서 지저귀는 새들의 톤은 좀 더 높아진 것 같고, 땅 밑의 지렁이들도 조금씩 꿈틀대는 것이 느껴진다. 필시 봄이 머지않았다.
하지만 방심치 말고 조금 더 버텨야 한다. 따뜻해지는 온도에 봄이구나 싶어서 섣불리 봄맞이 준비를 시작했다간 줄기가 아직 제 컨디션이 아닌 상태로 꽃샘추위에 된통 당하는 수가 있다. 지독하고 매몰차던 겨울을 잘 버텨놓고 이제 와서 급할 것은 없다. 우선 봄비가 내리기를 진득하게 기다리면 된다. 때가 되면 봄비가 내릴 것이고, 그다음엔 꽃샘추위가 올 것이다. 그러면 완연한 봄이 어련히 알아서 온다. 반드시 온다니까. 겨울 동안은 그렇게나 길고 추울 땐 그렇게나 추웠으면서 막상 봄이 오면 세상이 따뜻해지는 데는 또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으니까. 그러니 조금만 더 인내하면서 올해에는 또 몇 송이의 꽃을 피울지 계획부터 세워보자.
마지막 봄이라고 해서 하나도 다를 것은 없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다. 언제나처럼 올해의 목표도 역시나 바로 전 해보다 조금이라도 더 고고하고 아름답게, 붉게, 장미꽃을 피워내는 것이다. 찬찬히 기지개를 켜며 겨우내 얼어있던 잎들을 한 잎씩 조심스럽게 다시 깨웠다. 그중 몇 잎은 특히나 추웠던 지난겨울의 바람을 버텨내지 못했는지, 이미 바싹 마른 채로 똑 떨어져 버렸다. 겨울 동안 몇 번이나 안부를 물었지만 몇몇 잎들에게서 아무런 대답이 없어서 나도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다. 매년 거쳐야 하는 작별인사임에도, 결코 그 반복성이 내 마음을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진 않았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이 그들을 데리고 저만치 날아간다. 너무나 가볍게 날려가는 모습에 내 마음이 무겁다.
‘그동안 고마웠어. 모두가 꽃송이만을 볼 때 너희들은 묵묵히 이 땅에 나와 함께 오도카니 서서 햇빛을 받아줬지. 그러니 이젠 나를 대신해서라도 부디 최대한 멀리 날아가도록 해. 자동차 같은 것에 밟히기보단 바람에 날리고 날리다 아름답게 바스러지길…’
내 주변의 장미들도 하나 둘 분주하게 잎들을 깨우는 작업을 시작한다. 우리는 어느 공원의 바깥쪽 돌담 외벽에 심어져 살아가고 있다. 바로 옆에는 인도가 꽤 널찍이 나있어서 꽃을 피우기만 하면 봐줄 사람들이 꽤 많이 지나다닌 다는 것이 다행이다. 아마도 세상에는 여러 가지 색깔과 다양한 종의 장미가 있는 모양인데, 나는 나와 우리의 「빨강」에 굉장한 자부심을 가지고 살아왔다. 다른 색의 장미들을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우리의 빨강이 장미를 대표하기에 한 색의 붉음도 모자람이 없는 것은 사실이지 않는가. 그것은 질문이 아니다. 그것은 나의 믿음이다. 나는 붉게 피어나기 위해서 태어났다는 것, 그 믿음이 5년 전 지독한 가뭄 때 나의 원동력이었고, 3년 전 거친 태풍 속 나의 버팀목이었다.
이제 양분을 모으기 시작해야 한다. 아직 나의 모든 뿌리와 모든 줄기의 끝까지 내 힘이 닿지는 않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다. 기력을 다 차릴 때까진 그만큼 힘을 잘 분배해서 쓰면 된다. 지난 아홉 번의 봄을 허투루 보낸 것이 아니지, 나는 베테랑이다. 봄에는 햇빛보다 수분 섭취가 우선이다. 얼어붙은 겨울을 버티느라 햇빛을 조금이라도 더 받고 싶은 유혹이 크지만, 그보다 우선은 겨우내 바스러지도록 메말랐던 몸에 수분을 전달하는 것이다. 기껏 겨울을 잘 버텨놓고 봄에 체력이 따라주지 않을 때 가뭄이라도 만나 말라죽게 된다면 그야말로 허무한 개죽음이 아닐 수 없다. 말했다시피, 이번 봄은 나의 무려 열 번째 봄이다. 나의 뿌리가, 나의 줄기가, 확실히 여덟 번째 봄만도, 심지어 작년 같지만도 않다는 것이 느껴진다. 겁도 없고 어리석었던 어린 시절의 나는 다행히 체력도 넘쳐나서 쌩쌩한 뿌리로 수분을 쑥쑥 흡수하고 동시에 무수히 많은 잎으로 봄 햇살을 쫙쫙 빨아들이는 게 가능했었다. 젊다는 것, 어리다는 것은 아마도 조금 덜 조심스러워도 괜찮을 수 있다는 것이었나 보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시작부터 잎은 우수수 떨어져 버렸고, 뿌리 몇 가닥은 솔직히 아직 아무런 감각도 없다.
여기까지 썼을 때 민재에게서 카톡이 왔다.
“뭐 하십니까?”
민재의 용건이 무엇인지 주원은 바로 알 수 있었다. 당연히 술이었다.
“글 쓰는 중.”
“술?”
“콜”
“한남동 갈래?”
“갑자기 왠 한남동?”
“최근에 회사 회식을 거기서 했었는데 기가 막힌 곳을 하나 발견했다. ㅋㅋ”
“오키 주소 보내줘.”
한창 글을 쓰는 와중에 그 흐름을 끊고 나가는 것이 주원은 썩 내키지는 않았다. 한남동까지 가야 한다는 것도 맘에 들지 않았다. 거리가 문제라기 보단, 익숙하지 않은 곳을 가는 것이 별로였다. 하지만 지난 몇 주 동안 민재의 콜을 이미 여러 번이나 뿌리쳐서 더 이상은 거절을 하기가 미안했다. 어쩌면 「그날 밤」에 대해서 그에게 이야기를 해 볼 수도 있을까? 어쩌면 주원이 미처 눈치채지 못했던 「그날 밤」의 조짐들 중에 민재만 알아챈 무언가가 있지는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