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세계 3
고양이 길라는 여자를 따라 버스에서 잽싸게 내린 뒤 주변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면서도 여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그녀에게 착 달라붙어 그녀의 옆을 따라 걸었다. <성수>라는 곳은 자신이 살던 동네와는 사뭇 달랐다. 특히 동네의 구성원들이 그랬다. 이곳에는 그가 평소 보던 느릿하고 익숙한 움직임의 인간들보다 빠르고 경쾌한 걸음을 가진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곳은 사람이 살기 위한 공간보다 잠시 머물기 위한 공간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았다. 건물들에서 풍기는 냄새가 주거지의 냄새가 아니었다. 그것은 건물들의 외벽에 배인 오래된 시멘트와 커피 냄새, 그리고 금속의 차가운 냄새가 증명해주고 있었다. 된장국의 냄새가 부는 바람 속에 없었다.
길라는 그녀의 안내를 따라 어느 한 골목 안으로 들어갔다. 도착지는 골목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빨간색 벽돌로 된 건물이었다. 주변에서는 커피콩의 향이 진하게 나고 있었다. 길라는 여자가 문을 열어주자마자 안으로 성큼 들어가 한 바퀴를 돌며 주의 깊게 이곳저곳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이곳이 여자의 일터라는 개념의 장소임을 고양이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길고양이에게서는 사냥터의 냄새가 나고, 사람에게서는 일터의 냄새가 난다. 그녀에게서 풍기던 그 특유의 냄새가 이곳에서는 온 공기 중에 꽉꽉 차 있었다. 기름냄새였다. 깊고, 진하고, 끈적하게 달라붙는 냄새. 진한 커피 향도 창문을 통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처음엔 그것 때문에 머리가 어지러울 정도였지만, 금세 적응할 수 있었다. 야생에서 사는 자에게 그 정도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그곳은 따뜻했다. 그녀는 물과 맛있는 통조림도 내주었다. 길라는 이곳에서 지내는 동안 최대한 얌전히 지내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여자의 일터가 썩 마음에 들었다.
그곳에 도착한 지 시간이 오래 지나지 않아 길라는 졸음이 쏟아졌다. 오늘 그는 나름대로의 큰 결단을 했으니, 그만큼 피로감도 쌓였던 것이리라. 그는 빨간색 불을 내며 방 안의 공기를 달구는 전기난로 앞에 몸을 웅크리고 잠에 들었다.
그가 눈을 떴을 때, 방 안의 분위기는 그가 잠들기 전과 그대로였다. 바깥은 이미 어두워져 있었지만, 여자는 여전히 막대를 손가락으로 쥐고 천 위에 기름을 칠하고 있었다.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니 그것은 색깔을 칠하는 작업이었다. 그리고 그 색깔들이 이곳과 그녀가 풍기는 냄새의 원천이라는 것을 바로 알 수 있었다. 여자는 그가 기름으로 범벅된 천을 한참 쳐다보고 있는 것이 신기한지, 하던 것을 잠시 멈추고 고양이를 빤히 쳐다보았다.
그녀와 길라는 기지개를 한 번 켠 뒤 탁자 위에 사뿐히 올라가 앞에 있는 창문으로 밖을 보았다. 닫혀있는 투명한 유리를 통해 바깥의 온도와 세상의 미세한 진동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밤이 되면 사람들의 숫자가 확연히 줄어드는 그가 있던 동네와 달리, 이곳엔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밖을 배회하고 있었다. 이곳에 실체 하는 밤은 단순히 태양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아니었다. 밤이 더 깊어질수록, 거리의 불빛들은 더욱 선명해졌다. 마치 어둠이 밀려들수록 더욱 강하게 빛을 내야 하는 듯이. 마치 반항을 하는 듯이. 그의 눈에 보이는 성수동은 정적인 동시에 기묘한 에너지를 머금은 채로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그때 여자에게 전화가 왔다. 그것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는, 원리는 모르지만, 그것에다 대고 사람들이 말을 하는 것을 길라는 여러 번 봐왔다. 그것으로 짐작컨대, 인간들은 그것을 통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아무튼 여자는 그것을 귀에 댄 채로 무어라 말하며 방을 나갔다. 그리고 이내 어느 한 남자와 같이 들어왔다.
보통의 체구를 한 남자였다 그는 긴장한 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딘가 조심스러워 보였다. 그의 제스처와 움직임은 부드러웠고, 공간을 점유하는 방식이 조용했다. 아마 그 역시 이곳을 온 게 처음인 것 같았다. 남자는 모든 감각을 조금씩 열어두고, 이 공간을 읽으려 하고 있었다. 그가 풍기는 분위기는 대범함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충분히 강단이 느껴지는 남자였다.
길라는 코를 킁킁거리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아주 살짝 놀란 듯했지만 이내 자신의 손바닥을 길라의 코앞에 내주었다. 그가 입고 있는 옷에서 묻어나는 원단의 향과, 바깥공기에 섞여 온 비와 도시의 흔적이 뒤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 냄새의 밑에는 아주 희미하지만 단단하게 남아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길라는 그것을 단번에 맡아 챘다.
‘이 남자에게도 「그날 밤」의 농도 짙은 어둠의 냄새가 배어 있다.’
길라는 그것을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것은, 여자와 길라에게도 마찬가지로, 남자의 피부 속에, 그의 손톱 끝에, 그의 영혼에 깊고 무겁게 침투해 있었다. 그것은 물로 쉬이 씻어낼 수 있는 종류의 잔향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남자는, 이 여자와 닮았다.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닮아 있었다. 겉으로 드러나진 않았지만, 그녀를 그녀로 만들어낸 핵심적인 요소가 그의 그것과 매우 비슷했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 길라 자신과도 겹쳐져 있었다. 셋이 이렇게 모인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길라는 잘 알고 있었다. 셋은 필연적으로 서로에게 당겨진 것이다.
유정이 남자에게 말을 걸었고, 남자가 천천히 대답했다.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사이의 간격은 조심스러웠다. 그들의 대화를 통해 길라는 여자의 이름을 비로소 알 수 있었다. 여자의 이름은 유정이었다. 남자의 이름은 주원이었다. 주원은 여자와 대화를 하면서도 그의 부드러운 손으로 길라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긁어주었다. 그가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것을 고양이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의 손길은 자상했고 그의 목소리는 정직했다. 그 남자도 「그날 밤」의 해답을 찾고 있는 것일까? 그럴 것이다. 멍청하지 않은 이라면 누구나 응당 그래야만 하니까. 문득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빛엔 허투루 보낼 수 없는 어떤 깊이가 있었다. 그 역시도 유정이라는 여자에게서, 그녀의 주변에서 머무는 것이 「그날 밤」의 해답에 가까워지는 것임을 기대하고 있는 걸까? 그럴 것이다. 자신과, 유정이라는 이 여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같은 무거운 짐을 지닌 채, 같은 질문을 품고 지난 몇 달간을 살아왔을 것이다.
둘은 서로 몇 마디를 더 나눈 뒤 길라를 남겨둔 채 문을 굳게 닫고 그곳을 나갔다. 길라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머지않아 돌아올 것이다. 그리고 마침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길라는 필요했다. 「남겨진 자들」은 「선택받은 존재들」인가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는 그가 세상에서 모르는 것을 하나씩 알아가다 보면 「그날 밤」의 진실에 닿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붕어와 장미와도 얘기를 나눴었고, 올림픽 공원에도 찾아갔었다. 여전히 그것이 틀린 방법은 아니었다고 길라는 생각했다. 다만 너무 멀리서부터 시작했던 것이다. 이미 자신과 같은 경험을 한 이가 주변에 있는데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매듭을 실의 끝에서부터 하나씩 풀어보기엔, 길고양이의 생은 그리 길지 않았다. 「남겨진 자들」이 서로 공유하고 의지하며 나아가야 했다. 그것이 바로 집단 지식의 힘이니까.
물론 고양이들이 집단 지식을 활용하는 방식은 인간의 방법과는 조금 다르지만, 고양이들 또한 인간들 못지않게 집단 지식을 활용하는 동물이었다. 대부분은 생존에 관한 지식인데, 안전한 공간과 위험 지역에 대한 학습, 먹이를 찾는 법, 인간이나 다른 동물들과의 관계 형성이 그 예시였다. 고양이들은 특정 지역이 안전한지, 위험한지를 서로 공유한다. 새끼 고양이들은 어미의 행동을 보면서 ‘어디까지 가도 괜찮은지’를 배우고, 이는 다른 고양이들이 남긴 냄새, 긁힌 흔적, 소리 등을 통해 보강된다. 예를 들어, 어느 골목이나 건물 아래가 사냥하기 좋다거나, 인간이 친절한 구역인지 아닌지는 개별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이미 그곳에서 살아온 고양이들의 반응을 통해 자연스럽게 습득된다. 특정 편의점 앞이나 시장의 한 구역에서 친절한 인간이 먹이를 주면, 처음에는 한두 마리의 고양이만 나타나지만, 이내 주변 고양이들이 점차 모이게 된다. 그것이 고양이들도 집단 지식을 활용한다는 것의 증거였다. 누군가가 직접 알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고양이들의 행동을 관찰하면서, ‘아, 저곳에서는 먹을 것이 나온다’는 사실을 학습하는 형태이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도, 「그날 밤」에 대한 정보를, 길라는 그의 어머니 길라에게서 전승받았다. 그리고 어머니 길라도 그녀의 어미로부터 들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이야기나 경험이 아니라, ‘세상에 특정한 순간이 있다’는 하나의 감각적인 지식으로 전해져 왔다. 그것을 통해 길라가 「어둠이 무겁다」는 것을 감지했듯이, 이 정보는 단순한 경험의 축적이 아니라, 「길라들」 사이에서 오랜 시간에 걸쳐 전해 내려온 어떤 「지각적 유산」인 것이다. 그리고 그 유산은 길라의 세계에 대한 인식을 다른 고양이들보다 한층 더 고등(高等)하게 했다. 어쩌면, 그 인식의 레벨이 그를 「그날 밤」 그를 남겨지게 했던 원인 그 자체였을지도 모른다. 「그날 밤」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지 않았다면, 그것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고양이었다면, 길라도 「그날 밤」 다른 고양이들과 마찬가지로 사라져 버리지 않았을까? 지금으로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알아갈 수 있을 것이다. 셋이서.
길라는 언젠가 어머니 길라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와 그의 어머니는 작은 골목을 지나던 중이었다. 저녁이 되어가는 시간, 바람은 살짝 차가웠고 하늘엔 붉은 노을이 퍼져 있었다. 마른바람이 부는 가을이었었던 것으로 기억이 났다. 그날 길라는 익숙한 골목길의 끝에서 낯선 풍경을 보았다. 평소라면 늘 닫혀 있어야 할, 오래된 건물의 뒷문이 활짝 열려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길라는 그곳에 문이 있었는지도 인식하고 있지 못했다. 고양이들은 사람만큼이나 공간의 변화를 예민하게 감지하는 존재임에도, 언제나 꾹 닫혀있는 그 문에 대해서 길라는 한 번도 의식을 해본 적이 없었다. 길라는 순간적으로 발걸음을 멈추고 어머니를 올려다보았다. 어머니 길라는 침착한 얼굴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니 길라는 조용히 문을 바라보더니 길라를 향해 말했다.
“가볼래?”
길라는 망설였다. 문 너머의 공간이 너무나 낯설게 느껴졌다. 매일 지나가던 길임에도, 「닫힌 문」이라는 경계가 사라진 것만으로 그곳은 완전히 다른 세계처럼 보였다.
길라는 조심스럽게 문 앞까지 다가갔다. 문 안쪽에서 흘러나오는 공기는 밖의 차가운 바람과는 확연히 달랐다. 오래된 먼지 냄새와 눅눅한 습기가 섞여 있었다. 어머니 길라는 한 발짝 뒤에서 길라의 등 뒤를 지키며 그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 공간이 매일 지나가던 이 골목에 처음부터 있었다고는 생각이 되지 않을 정도로 낯선 느낌이 들었다.
그때, 갑자기 바람이 쌩 불며 열린 문이 쾅하고 닫혔다.
길라는 털을 곤두세우며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다. 방금 전까지 열린 문 너머를 바라보던 그의 눈앞은 다시 단단한 벽으로 바뀌었다. 그렇지만 문의 존재감은 더 이상 무시할 수가 없어, 그는 이제 그곳을 예전처럼 벽으로 볼 수가 없게 되었다. 길라는 어리둥절한 채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해?”
길라는 그제야 깨달았다. 문이 닫혔어도, 아까까지 느꼈던 낯선 기분은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이제 그 공간은 다시 「매일 지나가던 길」의 일부가 되었지만, 마치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 길라는 천천히 말했다.
“방금 그것으로 너의 세계는 넓어진 거야.”
길라는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문이 닫혀 있을 땐, 거긴 그냥 우리가 매일 지나치는 벽이었지. 하지만 문은 처음부터 거기에 있었어. 그리고 그 문이 열리자, 같은 장소가 전혀 다른 의미로 바뀌었어. 네가 그곳을 「낯선 곳」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곳은 정말로 낯선 곳이 되었지. 그리고 앞으로 저 문이 예전처럼 닫혀있다고 해도, 너는 이제 저 문을 다시는 벽으로 볼 수 없을 거야. 한 번 확장된 인식은 다시 좁아질 수 없기 때문이지.”
길라는 자신이 느꼈던 감각을 되짚어 보았다. 분명 같은 장소였지만, 「닫힌 문」과 「열린 문」이라는 인식의 차이만으로 그것은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 길라는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세계는 단순한 공간이 아니야. 우리가 그것을 어떻게 바라보느냐에 따라 달라지지. 너도 방금 그걸 경험한 거야.”
길라는 어머니의 말을 이해하려 애썼다. 방금 그가 느꼈던 모든 변화는 실제로 공간 자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인식하는 방식이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길라는 천천히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길라는 잠시 뒤를 돌아보았다. 다시 닫혀버린 문은,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하지만 길라는 이제 알고 있었다. 그곳에 문은 언제나 거기에 있었으며, 이제 그곳의 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시작으로 그의 세계는 그 문너머의 방만큼 넓어졌다. 방 안쪽이 얼마나 큰지를 확인할 수 없었으니, 그가 상상하는 만큼 커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한 번 인식했다는 것은, 영원히 그의 세계가 확장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길라는 조용히 어머니를 따라 걸었다. 바람이 스치며 골목 끝에서 종이 하나가 나뒹굴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인식과 믿음이 만들어내, 길라.” 어머니 길라가 길라에게 말했다.
“한 번 인식을 하게 되면 그것은 너의 믿음을 먹고 이내 너의 무의식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될 거야. 앞으로는 이 골목을 지날 때마다 저 문을 보고 예전처럼 벽이라고 생각할 수 없게 되겠지.”
이후로 길라는 그의 세상에 대한 인식을 넓혀왔다. 그리고, 그의 인식은 이제 「그날 밤」으로 대변되는 또 다른 어떤 세계로까지 확장되었다. 말하자면, 「그날 밤」 그가 보았던 「달」이, 그 세계로 통하는 일종의 「문」이 된 것이다. 그 「문」 너머로 어떤 세상이 펼쳐질지는 모를 일이었다. 그날, 그 골목의 문 너머 방 안에 무엇이 있었는지, 누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던 것처럼. 하지만 문은 사라지지 않는다. 단지, 아직 열릴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문은, 반드시, 다시 열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