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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안 Oct 10. 2024

O

이어지는 이야기 5

    천천히 해가 지면서 빠르게 노을로 물들어가는 하늘을 배경으로, 저기, 마을의 서쪽 언저리에 아주 적은 양의 여우비가 사뿐사뿐 뿌려지고 있었다. 「그날 밤」 이후 호기심이 부쩍 왕성해진 고양이가 요즘 서쪽 동네에 볼일이 많다고 했던 것이 생각나, 혹시 저 비에 젖지는 않았을까 하고 부엉이 곤은 생각했다. 걱정은 아니었다. 한창인데 비에 좀 젖은들 어떠하리.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잠시 뒤 밝은 톤의 고등어 무늬에, 코는 살짝 누렇고 아주 새파란 눈을 한 고양이가 흠뻑 젖은 채로 나타나 달동네 위를 털레털레 걸어왔다. 그것을 부엉이 곤은 말없이 지켜보았다. 고양이 길라는 약간 심통이 난 듯 보였다.


“비에 맞아 기분이 영 안 좋은가 보군.” 오돌토돌 빛바랜 붉은색 벽돌로 쌓아 올려진 담벼락 위에 앉은 채로 곤이 인사대신 말을 건넸다.


“그래-” 길라가 부르르 떨어 자신의 털에 물기를 털어내며 말했다.

“가을비는 맞으면 추우니까.”


“그래도 덕분에 뜬 무지개는 이쁘지 않나.”


“그래- 그래-” 고양이는 자신의 목덜미와 몸 이곳저곳에 남은 물기를 혀로 연신 닦아내며 대답했다. 그리고선 담벼락 위로 사뿐히 올라가 자리를 잡은 뒤 고개를 돌려 말없이 무지개를 감상하였다. 곤의 말대로 이쁜 무지개였다.


“일찍 일어났군.” 고양이가 말했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됐어. 너야말로 얼마나 일찍부터 서쪽 마을에 다녀온 거야?”


“아니야, 난 아예 아침을 샜어.” 고양이가 대답했다.


부엉이는 놀란 눈으로 길라를 쳐다봤다.


둘이 처음 알게 된 것은 둘 다 아주 어렸을 때였다. 고양이는 달동네에서 유명한 미친개 한 마리에게 쫓기고 있었고 때마침 그것을 본 부엉이 곤이 후우-후우- 소리쳤다.

“담벼락 위로 올라가!”

미친개는 달동네 동물들의 공공의 적이었다.


누가 외쳤는지도 몰랐지만 일단 그 소리를 듣고 고양이는 담벼락을 잽싸게 타고 올랐다. 그 조그만 것이 빠른 판단력과 날카로운 발톱, 그리고 가벼운 몸놀림으로 자기 자신을 구한 것이다. 담을 오를 수 없는 검은색과 누런색 털이 뒤죽박죽 섞인 미친개는 그 밑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꼬마 고양이를 올려다보았다. 거품을 물고 동네 시끄럽게 짖는 것 밖에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해가 다 저물고서야 개는 결국 제 풀에 지쳐 침을 질질 흘리며 어디론가 가버렸고, 고양이는 그제야 숨을 한번 크게 내쉬며 그 목소리의 주인에게 인사했다.

“고마워, 네가 아녔으면 큰일 날뻔했어.”


“벽을 타는 솜씨가 아주 제법이던데?”


그것을 인연으로 고양이는 달동네를 자주 찾았다. 그리고 둘은 대체적으로 무용한 것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마치 지금처럼 담벼락 위에 가만히 앉아서 둘이 같이 무지개를 보고 있는 것 같이 말이다. 둘은 쓸데없는 수다도 참 많이 떨었다. 예를 들어 물속의 물고기들도 과연 하품을 할지, 재채기도 하는지, 장미에는 왜 가시가 나는지, 무지개 속에 들어가서 세상을 보면 모든 것이 무지개 색으로 보일지, 이런 것들 말이다. 그리고 그런 호기심은, 뭐 어디에 딱히 쓸데는 없는 질문들 일지라도, 고양이의 밤을 더 밝혀주었고, 그의 푸른 눈을 반짝이게 하였으며, 그의 세상을 더 크게 하였다.


물론 고양이보다 몇 년 더 일찍 태어났고 또 훨씬 위에서 세상을 보고 있는 부엉이는 고양이가 가지고 있는 세상에 대한 질문들에 대한 답을 대부분 이미 알고 있었다. 동물들 사이에서는 일 년만 해도 꽤나 큰 차이의 경험을 축적할 수 있는 세월이고, 세상을 하늘 위에서 멀리까지 내려다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엄청난 이점이었다. 그래도 세상을 직접 알아가는 것이 길고양이의 특권임을 알기에 부엉이 곤은 어설프게 고양이를 가르쳐 들려하지 않았다. 그저 맞장구를 쳐주며, 잠자코 고양이가 스스로 세상을 깨우쳐가는 것을 지켜보며 응원해 주었다. 그렇게 도란도란 수다를 떨며 몇 개의 계절을 같이 지나 보내는 동안 부엉이는 고양이에게 잊을만하면 나타나는 동네의 미친개가 근처에서 보일 때마다 어디서든 길라가 들을 수 있도록 후우-후우- 울며 신호를 보내주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후, 고양이 길라에게 부엉이 곤은 이제 정말로 둘도 없는 존재가 되었다.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을, 길라의 말을 믿어줬기에, 진정한 의미로 둘도 없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모두가 사라졌던 「그날 밤」의 세상에서 길라는 어쩌면 영원히 혼자가 될 뻔했다. 곤이 그곳에서 함께 했던 건 아니었지만, 길라의 말을 믿어준 것 만으로 길라는 혼자가 아닐 수 있게 된 것이다. 곤이 길라를 믿어준다면 그는 길라의 세상에 속한 것이나 다름없다. 믿어만 준다면, 같이 있지 않더라도 혼자가 아닌 것이다. 만약 언젠가 「그날 밤」 같은 일이 또 한 번, 아니 몇 번이고 반복된다 하더라도, 그리고 그곳에서 잠시 혼자가 되더라도, 세상이 다시 돌아왔을 때 길라는 부엉이 곤에게 돌아올 수 있다. 그러면 둘의 세상은 다시금 「이어지는」 것이다. 정말 다행인 일이었다.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 만으로도 큰 의지가 되는 법이다.」


언젠가 곤이 고양이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집고양이가 아닌 길고양이로 살면서 불공평하다고 느껴진 적 없었느냐고.


“솔직히,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 고양이는 대답했다.

“하지만 길고양이가 되길 원한 건 나의 선택이었는 걸. 그리고 이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건 진작에 깨우쳤어. 불공평하다는 것에 대해 너무 사로잡혀서 화만 내봤자 나만 더 불행해질 뿐이지-”


정말이지 씩씩한 고양이라고 곤은 새삼 감탄했다.


“있는 집 귀한 고양이로 입양이 됐다면 겨울에도 등 따시고 평생 편히 좋은 사료만 먹으며 살 수 있었겠지. 하지만 그렇게 태어나지 못한걸 누구에게다 대고 한탄을 하겠어? 길고양이로 태어나서 인간의 지붕 아래 살려면 내가 어렸을 때 눈도 땡그랗고 그나마 조금 귀여웠을 때가 마지막 기회였겠지,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여운 고양이만 집에 들이려 하는 성향이 있으니까. 하지만 이젠 그것도 오래전 일인걸. 다 큰 고양이 또한 정말로 인기가 없지.”


“그럼 그러지 왜 안 그랬어? 너의 무늬는 충분히 이쁘게 생겼잖아. 게다가 너의 그 파란 눈은 인간들이 참으로 좋아하는데.”


“어리고 이뻤을 때 내가 좀 더 약게 굴었어야 했다는 거야?” 길라가 킥킥 웃으면서 말했다.

“물론 겨울에 너무 추울 땐 나도 ‘아 그때 내가 왜 다른 고양이들처럼 영악하게 행동하지 않았을까’ 하고 후회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난 길고양이의 자유로움이 좋아.”

고양이가 문득 드높은 가을 하늘을 보며 말했다. “내 위에 지붕은 덮여 있지 않더라도 대신 내 천장은 이렇게나 높으니까-”


곤이 잘 몰랐던 것은, 그리고 길라가 굳이 해명하지 않았던 것은, 길라는 이번 생이 처음이 아녔다. 곤이 길라보다 몇 년을 먼저 태어났다면, 길라는 곤보다 몇 번을 더 살았다. 모든 고양이들에겐 아홉 개의 목숨이 주어지는 법이다. 고양이 길라는 다섯 번 정도의 삶을 이미 살아봤다. (아마도) 이번이 여섯 번째고, (고양이들에게 전생의 기억들은 전부 흐릿하고 뒤죽박죽이어서 그 부분을 단정 지을 수가 없다.) 그 전의 삶에선 (아마도) 다섯 번을 전부 집고양이로 살았었다. 편한 삶의 기억은 충분했다. 다만 그때의 편했던 기억이 오히려 지금의 길바닥 생활을 더 어렵게 하는 부분은 확실히 있었다.


곤과 고양이는 물러나고 있는 노을과 깊어가는 밤의 경계선 어딘가를 함께 아무말 없이 조용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양이는 담벼락 위에서 스르르 잠들었다.


편의점 앞의 시계탑에 작은 바늘이 12를 가리켰을 때쯤 고양이 길라가 일어났다.


“오늘도 서쪽으로 가려고?” 곤이 물었다.


“그래-” 길라가 대답했다. ”내가 세상에 대해 궁금한 것들은 거의 다 마을의 서쪽에 답이 있는 것 같아. 그곳엔 연못이나 인공 호수 따위도 있고, 공원에는 인간들이 심어놓은 장미들도 많아. 마침 방금 무지개도 떴었으니까 그쪽의 새들에게 무지개에 대해서 물어볼 수도 있을 것 같고-“


“하지만-.” 곤이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난 네가 「그날 밤」에 대해서 궁금해하는 줄 알았는데. 장미나 무지개나 그런 것들이 「그것」과 다 무슨 상관인 거야?”


“그러니까, 그게 상관이 있는지 없는지를 알아보려는 거야.” 길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세상의 모든 것은 이어져 있어, 그렇지?”


곤이 큰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내가 이유를 모르는 현상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내가 아직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알아가는 것부터 시작할 거야. 내가 세상에 대해서 알고 있는 지식으로는 「그날 밤」을 이해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모르는 것들에 대해서 조금씩 알아가다 보면 결국엔 「그날 밤」의 비밀의 실마리에 닿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 모든 건 이어져 있으니까 말이야.”


조금은 억지스러운 논리고, 굉장히 무모하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주 틀린 말 또한 아니라고도 생각했다. 부엉이는 한 번 더 두 눈을 꿈뻑이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석촌호수>로 가는 길은 무척이나 험했다. 일단 도착만 한다면 나무나 수풀이 곳곳에 많아서 여차하면 숨거나 할 수 있고, 그곳의 사람들도 고양이들에게 대부분 호의적이었지만, 가는 길이 언제나 문제였다. 그 주변은 사람도, 차도 너무 많이 다녔고, 무엇보다 모든 것이 너무 평평하고 탁 트여있었다. 그래서인지 그 인공호수에 사는 고양이들은 그곳에서 벗어나지 않고 평생을 사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일단 벗어나는 것이 일단 위험한 행동이고, 그곳의 사람들은 먹을 것도 많이 던져주기 때문이었다. 물론 고양이란 애초에 영역 동물이고, 이렇게 길라처럼 싸돌아 다니는 고양이가 이상한 고양이인 것이지만.


어쨌든 조심조심 열심히 달려 도착해 낸 호수엔 새벽임에도 꽤 많은 인간들이 주변을 걷거나, 뛰거나, 서성이고 있었다. 다행히 그중 누구도 길라에게 관심이 있거나 눈길을 주지 않았다. 고양이는 온통 밝게 밝혀진 호수에서 그나마 조명이 덜 닿는 곳을 찾아 은밀히 울타리를 넘어 호수의 물에 가까이 다가갔다.


호수의 시커먼 표면엔 물 기포로 인해 여기저기서 잔물결이 동그랗게 퍼지고 있었는데, 그중엔 물고기들의 입질도 분명히 섞여 있었다. 고양이는 그것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쟤넨 하루종일 저러고 있는 건가.’

물속에 자신의 꼬리를 살짝 담고 기다렸다. 차가운 가을 날씨에 호수의 물도 무척이나 차가워서 길라의 온몸이 순간 찌릿하고 경련을 일으켰다. 참는 수밖에. 그리고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오동통하고 멍청한 비단잉어 한 마리를 꾀어내 잽싸게 낚아챘다. 살이 아주 제대로 올라 노란색과 붉은색이 섞인 비늘에 윤기가 좌르르 흘렀다. 아무리 멍청해도 자신이 하품을 하는지 안 하는지 정도는 말해줄 수 있겠지.


길라는 지면에서 숨 가쁘게 헐떡이는 비만 잉어의 아가미를 앞발로 지그시 밟으며 다짜고짜 물었다. ”너네도 물속에서 하품을 하니? “


”예? “ 통통하고 멍청한 잉어가 잘 못 들었다는 듯이 되물었다.


”너네-, 물고기들도 말이야, 물속에서 하품을 해? 기침 같은 것도 하고? “ 고양이가 참을성 있게 다시 한번 물었다.


”하품이라 굽쇼? “ 잉어가 지방이 잔뜩 낀 아가미 틈 사이로 힘겹게 숨을 몰아쉬며 말했다. 자신의 목숨이 왔다 갔다 하는 와중에 「그런 게 도대체 왜 궁금하느냐」는 말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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