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이야기 4
“이건 마치…” 박시현 대표가 적절한 단어를 찾고 있는 사이 수연이 나머지 네 작품 모두 옆 자리에 차례로 나란히 걸었다. 첫 번째로 밤 하늘의 달, 그리고 방 안의 오렌지색 조명, 밖에서 바라본 아파트의 창문, 작업실에서 타고 있는 촛불, 불을 켜둔 민트색 자동차의 헤드라이트의 순서였다.
“공기 원근법…?” 미술 이론에 빠삭한 수연이 말했다.
“… 그래. 달이랑 아파트 그림엔 공기 원근법……. 하지만 실내 그림엔 색채 원근법을 썼어. 그리고 스푸마토로 윤곽선을 자연스럽게 번지듯이 그렸네.”
“빛이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생생해요.”
“그건 검정 속에 명암을 너무나 잘 표현했기 때문이야.” 대표가 덧붙였다.
정말로 그랬다. 검정이 다 같은 검정이 아녔다. 그렇다고 회색을 섞은 것도 아녔다. 공기 원근법이니 색채 원근법이니 하는 것은 전혀 새로운 것도 아니고 이제는 딱히 기법이랄 수도 없을 만큼 오래된 장치이지만, 유정은 그것의 발란스를 완벽하게 구사해냄으로서 그것이 당당히 기법임을 모든 보는 이들에게 알렸다. 그것은 마치 어느 축구 선수가 패스를 너무 잘해서 그의 패스 자체가 그의 특별한 기술로 인정받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그 완성도 높은 기술로 그녀가 그린 밤에는 어두컴컴한 중에도 텅 빈 공간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꽉 차있는 듯한 밀도의 어둠이 느껴졌다. 텅 빈 어둠의 공간 안으로 잔잔하게 발화하는 빛이 파고 들며 깊이있게 그 공간을 메우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너무나 사실적인 묘사에 밤의 냉기가 느껴지는 듯했다.
“추상적이면서도 굉장히 초현실적으로 보이는 듯한 매력이 있어.” 대표가 연신 감탄하며 말했다. 여전히 그림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건 아마 제가 「보고 그린게」 아니어서 그럴지도 몰라요.” 유정이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보면서 그린 게 아니라, 제 상상 속에 있는 이미지를 최대한 사실적으로 그렸습니다.”
박대표는 유정의 대답을 잠자코 들으며 헤드라이트가 그려진 그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서였다. 그래서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진 그림이면서도 전체적으로 초현실적인 분위기를 내뿜고 있었다. 사물을 보면서 그리는 것과 사물을 머릿속에 떠올려 그 이미지를 그리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 가령 어느 사거리에서 자동차 사고가 크게 났다고 하자. 그것을 사실 그대로 정확하게 전달하는 기자의 묘사와, 그 자동차를 몰았던 본인이 며칠이 지난 뒤 병상에서 깨어나 그때 당시를 자세하게 설명하는 것의 차이일 것이다. 기자의 묘사에 비해서 당사자의 정확성이 오히려 많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인간의 기억은 사실이 아니라 인식이고, 그것은 여러 가지의 영향을 받아 왜곡되기 때문이다. 아무리 당사자라 해도 말이다. 어쩌면 당사자라서 말이다. 하지만 그 사람의 약간은 과장되고, 어떤 것은 생략이 된 설명 그 자체는 기자의 정확한 진실보다 훨씬 더 생생하고, 더 현실감이 넘칠 것이다. 그것엔 진실여부를 떠나 진실성이 느껴지는 개인의 믿음이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 머릿속의 이미지로 그린 유정의 그림은 실체의 단순한 모방이 아닌 아주 생생한 꿈을 관전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대단한 그림이었다. 무엇보다, 이런 그림은 박대표나 수연이나 전에 본 적이 없었다. 물감을 두텁게 칠하는 임패스토나 부조가 난무하는 현대 미술에 보기 드물게 캔버스에 온전히 스며들어있는 화풍이었다. 그럼에도 그림은 엄청난 거리감과 입체감을 뽐내고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굳이 비슷한 것을 말해보라면 제임스 휘슬러의 <녹턴> 연작이었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것의 추상적인 밤의 「느낌」이 그렇다는 것일 뿐, 화풍과 기법은 전혀 달랐다. 휘슬러의 그림이 단색조로 전체적으로 안개가 자욱한 느낌이라면, 유정의 그림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멀리서 본 유정의 그림은 캔버스의 모든 공간에 마치 그러데이션처럼 빛이 자연스럽게 흐르며 퍼져나갔다. 하지만 그림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빛의 붓질 하나하나에 다채로운 색이 보이기 시작하고, 아주 가까이서 보면 붓의 터치 단 하나도 바로 옆의 것과 같은 색이 없어 보였다. 약간 과장된 표현을 하자면, 멀리에서 보면 사람이고, 가까이 현미경으로 보면 세포인 것만큼의 수준이었다. 그리고 그 빛은 고흐의 빛처럼 노골적인 방향성 없이 자연스럽게
퍼지며 그야말로 빛나고 있었다. 거의 반짝이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촛불이 마치 휘청이는 것 같아요.” 수연 매니저가 말했다.
“가로등엔 전기가 흐르는 것 같고” 박대표도 말했다. 둘이 마치 만담 듀오처럼 주거니 받거니 했다. 유정은 그저 가만히 듣고 있었다.
마침내 다섯 개의 작품에서 눈을 뗀 시현이 유정의 얼굴을 보며 말했다.
“정말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매우 흡족한, 거의 황홀한 듯한 표정이었다.
“자기에게서 직접 좀 듣고 싶은데? 이 그림들에 대해서.”
“음…….” 유정은 로즈힙으로 목을 조금 적시며 잠시 단어들을 정리했다. “밤에 대해서 생각을 좀 해봤습니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에게 밤이란 어두운 시간을 부를 때 그렇게 부르죠. 예를 들어 해가 지고 나서 완전히 어두워지고 나면 그 시간을 대충 「밤」이라고 표현하는 것 같아요. 대충 아홉 시나 열 시쯤일까요? 왜인지 여덟 시는 「저녁 여덟 시」라고 보통 말하는데, 아홉 시는 「밤 아홉 시」가 되어버려요. 그러니까 결국 밤이란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어둠이 어느 정도 농익은 시간이어야지만 그때부터 밤으로 인정받기 시작한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시현과 수연 모두 잠자코 듣고 있었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는 아직 감이 오지 않았지만, 둘 다 앞에 놓인 그림들의 해석을 창작자에게서 최대한 자세히 듣길 원했기에 유정을 감히 재촉하지 못했다.
“하지만 세상은 본디 밤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시현 대표의 검정색 눈이 밝게 반짝였다.
“해가 지자마자 바로 어두워진다는 건, 세상은 애초에 어둠으로 가득 차 있으며, 세상 자체가 어둠이라는 뜻이 아닐까.”
“세상 자체가 어둠이다.” 시현이 유정을 따라 말했다.
“「사전적 의미」로, 어둠은 빛의 부분적 혹은 전체적 부재라고 하더라고요. 하지만 그것이 과연 맞는 것일까를 생각해 봤습니다. 그것은 마치 어둠이라는 것은 빛의 밝기를 표현하는 것일 뿐, 어둠이라는 것이 따로 존재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잖아요?”
수연은 유정의 말이 약간 어려운 듯 살짝 갸우뚱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빛이라는 것도 어둠 없이 존재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예요. 오히려, 빛이 없으면 온 세상이, 우주 자체가 어둡죠. 그래서 제가 내린 결론은, 세상은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것에 ’어둠도 포함 되어야 한다‘였습니다. 우리가 밤이라고 부르는 것이 세상의 본질이에요.”
유정은 잠시 숨을 고르며 박대표와 수연 매니저의 얼굴을 살폈다. 둘 다 아직은 잘 따라오고 있는 듯했다.
“그래서 시간과 공간은 비어있는 것이 아닌, 사실은 어둠으로 꽉 차있다는 발상이 떠올랐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어둠이라는 것은 과연 무(無)의 공간이라는 것일까. 그저 無라면 왜 내 두 눈에 보이고 있을까. 어둠이 분명히 어둡게 보이고 있지 않은가. 보이는 것을 無라고 할 수 있을까. 어두운 공간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다름아닌 어둠을 보고 있는 것이다.”
“인식의 차이라는 거야?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어두워서 어둠이 보인다. 밝아서 어둠이 보이지 않는다. 밝아서 빛이 보인다. ” 박대표가 잠시 끼어들며 말했다.
비슷했다. 적어도 비슷한 선상에 있는 말이었다. “네, 그런 셈입니다. 어두워서 안 보이는 게 아니라, 어두운 게 보인다.” 유정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어둠은 실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더 중요한 포인트였다. 과연 둘이 유정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걸까.
“빛이 실체 하는 것만큼이나, 어둠도 실체 하는 것이다.” 박대표가 말했다. 아마도 그녀는 이해가 된 것 같았다. 수연은 아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네, 「어둠이란 실체 하는 것」이라는 게 최소한이고요. 더 나아가서는, 「어둠 자체가 세상」이라는 거예요.”
“오케이, 이해된 것 같아.” 박대표가 여전히 눈을 반짝이며 질문했다. “그러면 굳이 사물을 보면서 그리지 않은 건 왜 그런 거야?”
“아, 그건 밤의 「이어짐」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랬습니다. 낮에 빛이 환한 동안에도 세상엔 여느 때와 다름없이 어둠이 기저에 깔려있다는 것, 그러니까 모든 밤은 낮에만 잠시 보이지 않을 뿐 사실은 계속 이어져 있다는 것을 표현하고 싶었습니다. 실내에서는 창문에 커튼만 쳐도 빛이 닿지 않으면 여전히 밤이니까요. 그리고 그것은 「인식」과 「의식」의 영역이지요. 그래서 보이는 것을 그대로 그리는 것보다는 제 기억 속의 이미지를 최대한 구체적으로 그리는 것이 저만의 세상인 것이죠.”
“유정씨가 원래 이렇게 말을 잘하는 스타일이었나?” 박대표가 웃으며 말하자 수연 매니저도 따라서 미소 지었다. 유정이 대견한 모양이었다.
“이렇게 가면 될까요?” 유정이 대표에게 물었다.
“나 사실 유정씨 때문에 그동안 고민이 많았어. 자기 그림 잘 그리는 거야 내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자기는 뭐든지 너무 잘 그렸잖아. 그래서 오히려 자기 스타일을 확립하기 힘들었었던거고. 그래서 나 요즘 공부도 많이 했거든. 근데 너무 훌륭한 게 나왔어. 수고했어 자기.”
박대표는 잠시 달 그림에 눈길을 주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
“우리가 그때 몇 년 계약했었지?”
“5년 하셨습니다.” 수연이 답했다.
“그래, 역시 내 안목이야.” 어떤 상황에서도 자연스럽게 자신 스스로를 높게 평가하는 것은 박시현 대표의 특징이었다.
“이 감성 잘 유지해요 유정 씨. 일 년 뒤에 개인전 한 번 하자고.”
유정의 설명을 듣고난 후에 앞에 나란히 걸린 작품들을 보니, 정말로 다섯 개 모두가 마치 하나의 밤처럼 이어져 있었다. 오렌지색 스탠드가 켜져 있는 방안의 밤도, 달이 떠있는 하늘의 밤도, 확실히 같은 농도의 같은 밤이었다. 분명히 이어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