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지 않은 공허 2
유정의 두 눈은 그 남자에게 자석같이 붙었다. 그건 그 남자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보였다. 그 역시 유정의 두 눈에게서 자신의 두 눈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의 시선은 둘 사이의 공기 중에서 만나 하나의 곧은 일직선이 되었다. 그 하나의 선 위를 빛이 쉴 새 없이 왕복하며 묵직한 밤을 송곳같이 뚫어내고 있었다. 그때 그 순간에, 서울 하늘 아래, 그보다 더 완벽한 직선은 없었다. 둘의 불확실한 세상에 쩍 하고 금이 간 것이다.
남자가 마치 자력에 이끌리듯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으로 그녀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유정 역시 자신도 모르는 새에 그를 향해 몇 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남자가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거리에 멈춰 섰다. 그의 시선은 끊어지지 않고 있었다.
“혹시…….”
그의 목소리의 미세한 떨림인지, 그의 심장 박동인지, 그가 일으키고 있는 알 수 없는 파장으로 유정의 머릿속은 혼미해서 정신을 잃을 지경이었다.
“혹시…….”
남자가 할 말을 찾고 있는 듯했다. 그렇지만 유정은 그가 무엇에 대해 말을 하고자 하는지 이미 알고 있었다. 남자도 알고 있었다. 자신이 아직 적당한 말을 찾지는 못했음에도 이 여자는 이미 자신을 이해하고 있다는 것을.
“몇 주 전에… 밤에…” 남자는 「그날 밤」에 대해서, 그중 무엇부터, 어떻게 표현해야 하는지 정하기가 영 어려운 모양이었다.
“그… 세상에 사람들이…” 남자는 차마 말을 끝낼 수가 없는 듯했다.
“사라졌다...?” 유정도 남자가 먼저 ‘사람들이’라며 운을 떼주지 않았다면 어쩌면 차마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몇 주 전 밤에 사람들이 세상에서 사라졌다, 졌었다. 그것만으로 둘은 충분했다. 둘이 서로를 「인정」 하는데에 그 이상의 디테일은 필요치 않았다.
“9월 23일이었을까요 혹시?” 남자가 유정에게 물었다.
“네, 맞아요.” 무던한 유정이 자기 생일은 깜빡하더라도 그날의 날짜만큼은 아마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남자가 밤하늘을 한번 휙 쳐다보더니 이내 다시 유정을 보면서 말했다. “혹시 저 말고도… 제가 처음이신가요?” 만약 제삼자가 이를 들었다면 퍽 이상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와 세상을 공유하게 된 유정은 말의 의도를 정확히 알 수 있었다.
“아 그러니까, 제 말 뜻은-” 말이 좀 이상했다는 걸 눈치챈 남자가 다급하게 자신의 말을 고치려 했다.
“네, 네. 저도 여태 제가 혼자였는 줄 알았어요.” 유정이 괜찮다는 듯 손사례를 치며 말해주었다.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둘은 여전히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으며,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휘이잉 하고 바람이 불었다.
“저는 임주원이라고 합니다.” 남자가 갑자기 주섬주섬하더니 명함을 꺼내 유정에게 천천히 내밀며 말했다.
“아, 저는 지유정입니다. 저는 지금 명함이 없어서…….” 명함을 받아 들며 유정이 말했다.
“아 네, 괜찮습니다.” 남자가 말했다. “혹시 저희 나중에 만나서 얘기를 좀 할 수 있을까요?”
“네, 네, 제가 이 번호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시 어색한 침묵이 흐르자 주원이라는 남자가 <쥬니방가이>의 문쪽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정은 그의 뒤를 따랐다. 남자는 문을 열어주었다. 유정이 감사하다는 의미로 살짝 고개를 숙이며 인사했다.
“연락드리겠습니다.” 유정이 남자에게 말했다.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남자가 말했다.
남자는 가게의 왼쪽에 자리한 어느 테이블로 가서 앉았다. 일행은 비슷한 나이대의 친구인 것 같았다.
“유정씨, 이 전복 구이 좀 먹어봐” 자리에 돌아가자 박시현 대표가 기분 좋은 얼굴로 유정에게 음식을 권했다.
전복을 한 입 베어 물자 아주 적당한 양의 버터와 트러플 향이 났다. 간은 소금만 살짝 뿌린 것 같은 맛이었다. 와인을 꿀꺽 들이키자, 그제야 그녀의 심장이 좀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녀들은 그 자리에 두 시간 정도를 더 있었다. 나올 때 그 남자가 앉았던 곳을 스윽 확인해 보니 그와 그의 일행은 이미 자리를 떠난 듯했다.
_______
다음날 아침, 유정은 부족한 잠과 약간의 숙취를 느끼며 커피를 내렸다. 그리고 그 남자를 떠올렸다. 이름은 임주원이라고 했다. 나이는 아마도 서른 중반쯤일까? 유정의 기억 속의 그는 적당한 체격이었고 무채색 계열의 재킷을 입고 있었다. 화려하거나 눈길을 확 잡아끄는 외모나 스타일은 아니었으나,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인상에 잘 정돈된 「어른 남자」의 느낌이었다. 물론 그녀에게는 먼저 말을 걸어주었지만, 평소엔 상대방이 말을 걸지 않으면 먼저 나서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조용한, 혹은 수다스럽지 않은 이미지였다. 그림으로 치자면, 낮은 톤의 수채화 같은 남자였다.
그녀는 갓 내린 따뜻한 커피와 그의 명함을 함께 식탁 위에 올려놓고 앞에 앉아 적혀있는 그의 이름 세 글자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임 주 원
그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 그는 누구이길래 「그날 밤」 세상의 다른 사람들과 같이 사라지지 않았던 것일까.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유정 자신의 정체성도 스스로 되짚어봐야 할 것이다. 그녀는 특별하거나 남들과는 다른 누군가가 아니다. 그저 지유정이라고 불리는 한 인간일 뿐이다. 그러니 그도 임주원이라는 한 사람일 뿐이겠지. 아닌가? 어쩌면 자신은 그냥 한 인간이 아닌 것일까? 그와 나와는 공통되면서 세상의 다른 모든 이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는 것일까? 그렇게 생각하는 게 논리적일 것이다. 연기가 솔솔 나는 커피를 호호 불어 한 모금 하자 속 안에서 따뜻한 액체가 그녀 속으로 들어차는 것이 느껴졌다. 남자는 <다소다>라는 곳의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다. 사무실의 위치는 성수동이었다. 유정은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셨다.
스마트폰의 문자 앱을 열었다. 누군가에게 「문자」를 보내는 것은 너무 오랜만이라, 약간의 이질감마저 느껴질 정도였다. 명함에 적힌 대로 전화번호를 입력하고 내용 입력창을 눌렀다. 왠지 바로 번호를 저장하는 것은 좀 이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톡을 하기보다는 문자가 좀 더 알맞다는 생각을 했다.
‘안녕하세요. 어제 뵀던 지유정이라고
합니다. 언제가 시간이 괜찮으실까요?’
문자를 보냈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커피를 또 한 모금 하는 사이 그에게서 바로 답이 왔다.
‘안녕하세요. 임주원입니다. 연락주셔
서 감사합니다. 혹시 오늘도 괜찮으시
다면 퇴근 후에 시간 어떠실까요?’
‘네 시간 괜찮습니다. 주신 명함에 주
소가 성수동으로 되어있는데 제가
그쪽으로 가면 될까요?’
‘앗 그러시면 너무 죄송해서 제가 계
신 곳으로 가면 어떨까요?’
‘괜찮습니다. 계신 곳이 제 직장에서
멀지 않아서 제가 가도 큰 무리가
없습니다. 6시 반쯤 그쪽으로 가면
될까요?’
어째서인지 서로가 서로에게 보내는 모든 문자가 물음표로 끝나고 있었다.
‘네, 감사합니다. 그러면 오실 곳 장
소는 제가 곧 보내드리도록 하겠습
니다.’
‘네 알겠습니다.’
유정은 폰을 내려놓았다. 생각해 보면, 둘 중 아무도 어제 바로 대화를 시작하려 하지 않았던 건 참 특이한 점이었다. 왜 바로 서로의 일행에게 양해를 구한 뒤 가게를 박차고 나와 어딘가로, 어디든 가서 당장 대화를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런 큰일이 일어났고 그것을 겪은 유일한 서로인데, 어떻게 그들은 바로 그것에 대해서 얘기하지 않은 채 서로를 집으로 그냥 보낼 수 있었을까? 어쩌면 둘 다 너무 갑작스럽고 당황해서 그랬던 것일까?
유정은 커피를 다 마신 후 나갈 채비를 했다. 오늘은 평소와 달리 일찍 작업실에 갈 요량이었다.
_______
유정의 작업실은 성수동에 있었다. 이 일대는 과거의 공장들과 창고들이 카페, 갤러리, 공방으로 거듭난 지역으로, 쓰임새가 바뀐 낡은 건물들 사이로 회색빛 콘크리트와 따뜻한 간판 불빛이 뒤섞여 있었다. 근래엔 팝업 스토어가 몰려들면서 점점 번잡하고 시끄럽게 변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작업실이 위치한 골목은 아직도 동네의 예전 특유의 느린 호흡과 재생된 공간의 매력을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그녀의 작업실은 재생건축된 2층짜리 소규모 건물 1층의 왼쪽 절반에 자리 잡고 있었다. 1층의 나머지 절반과 실내외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는 2층 전체는 <Fata Morgana>라고 하는 (‘파타 모르가나’라고 읽는 것 같았다) 카페가 입주해 있었다. 「입주해 있다」고 표현한 이유는 이 건물이 다름 아닌 유정의 부모님 소유였기 때문이었다. 유정은 작업실을 무상으로 사용하는 조건으로 건물주 부모님을 대신해 건물 관련 자잘한 일들을 처리하곤 했다.
크게 귀찮은 점은 없었고, 작업에 방해되는 경우도 흔치 않았다. 동네의 특성인 것인지, 가게의 특성인 것인지, 이곳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크게 시끄럽지 않았다. 간혹 시끄럽다 해도 윤상의 노래를 틀어놓고 작업에 몰두하는 유정의 귀에는 거의 잘 들리지 않았다. 입구 또한 서로 달라서 카페의 손님들이 그녀의 작업실에 실수로 침범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건물의 외벽은 페인트가 여기저기 벗겨져 있었고 군데군데 붉은 벽돌이 드러나 있었지만 이 동네에선 그 또한 하나의 장식처럼 보였다.
꽤 묵직한 철문을 끼이익 열고 그녀의 작업실에 들어서면 내부는 온통 갈색과 고동색 나무로 인테리어가 되어있었다. 작업실의 제일 안쪽 벽에는 우드슬랩 테이블이 길게 놓여 있었고, 다른 벽 한쪽에는 아담한 소파와 얇은 블랭킷, 그리고 탁자가 그 옆에 놓여 있었다. 가운데에는 세 개의 이젤이 자리했다. 이젤과 이젤 사이엔 조그마한 선반들이 있었고, 그 위엔 커다란 팔레트와 유리병에 꽂힌 다양한 크기의 붓들이 올려져 있었다. 그 밑의 시멘트 바닥 위에는 어두운 톤의 두꺼운 천이 깔려있었는데, 그것은 아마도 바닥에 물감이 떨어지지 않기 위함인 듯했다. 곳곳에는 유화 냄새가 짙게 베어, 그것과 나무와, 커피 원두의 향이 공기 중에 절묘하게 섞여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꽤 높은 천장엔 조명들이 설치되어 가운데 이젤들을 향하고 있었고,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광과 함께 방을 그림을 그리기에 적당한 조도로 밝히고 있었다. 밖에서는 멀리서 내리는 커피 머신의 김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유정은 세 개의 이젤 중 캔버스가 놓인 하나의 이젤 앞에 앉았다. 널찍한 캔버스의 빈 공간은 완전한 공허처럼 새하얬다. 하지만 유정은 이미 이 세상의 본질에 대해 어렴풋이나마 알아가고 있었다. 공허란 어둠이라는 것을. 어둠은 실제 한다는 것을. 그래서 어둠으로 꽉꽉 차있는 공허는 사실 전혀 비어있지 않다는 것을.
남자가 알려준 주소에 도착한 것은 정확히 여섯 시 반이었다. 장소는 서울숲역 쪽에 위치한 어느 작은 카페였다. 유정의 화실은 성수역 근처에 있으니, 그녀는 지하철로 약 한 정거장 정도의 거리를 걸었다. 걷기 딱 적당한 거리였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남자는 가장 안쪽의 벽을 등 뒤에 두고 이미 자리를 잡고 앉아있었다. 그녀의 얼굴을 확인하자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인사를 했다. 유정의 심장은 너무 쿵쾅거려서 터질 것만 같았다.
“뭘 드실지 몰라서 아직 주문을 안 했습니다.”
“저는 따뜻한 커피를…” 유정이 계산대 쪽으로 움직이며 말했다.
“아, 여기까지 와주셨는데 이거라도 제가 하겠습니다.” 남자가 자신의 카디건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며 유정을 말렸다.
“그럼 감사히 마시겠습니다.”
남자는 카운터 앞에서 음료가 나오기를 기다렸다가 두 잔의 커피를 트레이 위에 올려 가져왔다.
“잘 마시겠습니다.” 유정이 또 한 번 인사했다.
“여기까지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남자가 말했다. 그녀 역시 그랬지만, 그도 많이 어색한 듯 유정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어젯밤 <쥬니방가이> 앞에서 처음 본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던 것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자신의 작업실 역시 성수동이란 말을 유정은 굳이 하지 않았다. 딱히 무언가 염려가 되는 부분이 있거나 그를 의심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가 무슨 말을 할지, 그들의 대화와 오늘 이후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될지 유정으로선 전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오늘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마지막 일지도 모르는데 굳이 자신의 화실이 이 근처에 있다는 둥 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남자는 약간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자신의 얼굴도 아마 비슷하게 어색한 표정일 것이라고 유정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거였다. 홀로 세상에 남겨졌었다고 생각했던 「그날 밤」을 똑같이 겪었다고 하는 이를 앞에 두고 어찌 긴장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커피잔을 든 손이라도 달달달 떨리지 않는 게 정말 다행이었다.
둘은 빨간색 원형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서로를 마주 본 채 앉아있었다. 남자는 마른 헛기침을 한 뒤 자신의 잔에 든 커피를 홀짝 목 뒤로 넘겼다. 그리고 그의 말을 시작했다.
“일단 제가 파악한 것은… 그날밤 저는 시간에 갇혀있었다는 건데요. 시간은 대략 12시 6분에서 8분 사이. 그 2분 정도의 시간 속에서 세상의 모든 게 무한루프 하고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저는 처음엔 지하철을 타고 있었는데, 잠시 졸다가 일어나 보니 열차 안에 아무도 없었어요. 이상하다고는 생각했지만 어쨌든 열차는 달리고 있었고, 역삼에서 선릉으로 한 역만 더 가면 되는 상황이어서 그냥 그런가 보다 하고 처음엔 그대로 있었습니다. 그런데 열차가 멈추고 내리려고 했을 때 제가 도착한 역은 역삼이었습니다.”
유정은 크게 대꾸하지 않았고, 그녀의 모든 신경은 그의 말에 쏠려 있었다. 그도 그것을 아는지, 그녀의 별다른 추임새나 맞장구 없이 혼자서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갔다. 그의 말투는 마치 증언을 하는, 아니 증언문을 발표하는 것만 같았다. 아마도 “-습니다”가 이유일 것이다. 어색해서 그럴 것이다. 적어도 그는 말을 할수록 점점 그녀와의 시선을 맞춰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말투가 어색한 것에 비해 내용은 비교적 잘 정리된 느낌이었다.
“몇 번이고 역삼역에서 출발해서 역삼역에 도착했어요. 결국엔 내릴 수밖에 없었고, 지상으로 올라갔는데 그 어떤 사람도, 차들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처음엔 그 상황 자체를 받아들일 수가 없었죠. 그러다 밤하늘을 우연히 봤는데, 그 밑으로 지나가던 구름들이 순식간에 조금 전의 위치로 순간이동을 하는 걸 목격했습니다. 방향을 바꿔서 돌아간 게 아니고요, 그야말로 순간이동이었어요. 저는 그 모든 게 시간과 관계가 있다고 일단은 결론을 내렸습니다. 시간은 12시 6분에서 8분 사이를 무한히 루프하고 있었고, 시간이 8분에서 6분으로 리셋되는 순간, 세상의 모든 것들도 6분 당시에 있었던 위치로, 혹은 상태로 돌아가기를 반복한 게 아닐까…….”
유정은 남자의 말을 곱씹어보듯 잠시 침묵을 유지하다 입을 열었다.
“저는 아마도 버스에서 내려서 집으로 가는 길에 시작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말씀하신 시간을 생각해 보니 그때가 맞을 거라는 확신이 드네요. 동네가 그날따라 조용했고,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이미 그때부터 길에 사람이 전혀 없었던 것 같아요. 단 한 명도. 이미 말씀하신 그 시간의 루프가 진행되고 있었던 거겠죠. 제가 원래 좀 둔감한 편이라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 같아요. 그러고선 아파트 1층에 도착해서 엘리베이터를 타려고 했는데 잘 내려오던 엘리베이터가 내려오기 전에 멈춰있던 층으로 순식간에 리셋되는 걸 봤어요. 버튼을 다시 눌러서 결국 어떻게 1층까지 오긴 했는데 께름칙해서 도저히 타질 못하겠더라고요.”
주원이라는 남자 역시 입을 굳게 다문채로 그녀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집에 도착해선 한심하게 뭣도 모르고 욕조에 물을 받아놓고 와인 한 잔 하려 했는데… 와인이 계속 줄지를 않았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와인잔을 아무리 비워도 어느 순간이 되면 저절로 다시 찬 상태가 되었죠. 근데 그게 와인을 누가 따르듯이 잔 위로 차오르는 게 아니라 한 순간에 잔이 찬 상태로 되어버리는 거였어요. 반대로 욕조의 물은 아무리 틀어놔도 전혀 차지 않았구요. 그리고 저도 달 밑에서 구름들이 순식간에 위치가 되돌아가는 걸 목격했습니다. 그제서야 정말로 무언가가 이상하다는 걸 감지했고, 저는 밖으로 나갔어요. 우스우실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정말 나가서 경비아저씨라도 찾아볼까 하는 심정으로…….”
유정은 그때 기억을 떠올리며 몸을 약간 움츠렸다.
“아, 전혀 우스운 얘기가 아닙니다.” 남자가 번쩍 손사례를 치며 서둘러 호응해 주었다.
“물론… 밖에는 역시나 아무도 없었고 풀벌레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어요. 세상에 살아 움직이는 것들은 다 사라진 것 같았어요. 그런데, 뭘 어떻게, 그 상황에, 제가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결국 집에 돌아왔어요.”
남자는 유정이 말해주는 새로운 단서들과 자신이 미리 정리해 둔 사실들을 가지고 머릿속에서 더하고, 곱하고, 괄호를 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계산이 끝난듯한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아마도 저희 둘 다 12시 6분 몇 초부터 12시 8분 사이의 시간 루프에 갇혀 있었다고 볼 수 있겠네요. 시간이 시간대 끝인 8분에 닿으면 다시 6분 상태로 ‘팟’하고 돌아가는 루프… 지하철이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던 것도 사실은 시간이 리셋되면서 열차의 위치도 시간에 따라 재설정됐던 거고요. 구름의 위치도 그랬던 것이고. 그러니…”
“그렇다면,” 유정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와인도, 욕조의 물도 같은 이치였을 가능성이 크겠네요. 12시 6분 무렵의 「와인이 꽉 찬 상태」가 저장되어 있다가, 8분이 되면 다시 「6분 상태」가 불려 오는 거죠. 마찬가지로 욕조의 물도 시간이 계속 리셋이 되니 그 이상 찰 수가 없었던 거고요. 엘리베이터도 그래서 그렇게 행동했었던 거군요.”
“하지만 엘리베이터는 결국 1층까지 내려왔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남자가 물었다.
“네, 그러니까 아마도… 제가 처음 1층에서 버튼을 눌렀을 때는 8분 쪽에 가까운 타이밍이어서 아마도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하지 전에 시간이 리셋되어 버린 게 아닐까요. 그리고선 제가 다시 눌렀을 때는 리셋이 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1층까지 내려올 수 있는 시간이 충분히 있었던 거죠. 하지만 그 역시 12시 8분이 되고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요.”
둘의 눈이 서로와 잠시 마주쳤다.
유정은 여러 개의 희미하면서도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중에서 그나마 가장 뚜렷한 감정은 안도감이었다. 그날 일을 겪은 것이 자신만이 아니라는 안도감. 임주원이라는 이 남자의 존재로 인해 그녀는 자신이 미치거나 그저 고약한 꿈을 꾼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정말로 확신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말고도 더 있을까요?” 유정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그럴 수도 있지 않을까요…?” 남자 또한 복잡한 기분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그… 「유정」님 외엔 본 적은 없습니다. 제가 딱히 찾아다닌 것도 아니지만.”
유정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살짝 테이블로 떨어트렸다. 어색함에 괜히 식은 커피 위를 후 하고 불었다.
“다른 누군가에게 얘기를 해보신 적 있으신가요?” 이번엔 남자가 물었다.
“아니요, 저는 없습니다. 「주원」… 씨는요?”
“저도 얘기 못했습니다. 다들 이상하게 생각하거나 아무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아서요.”
“네, 저도…….”
“그러고 보면, 저희가 만난 건 굉장한 우연이기도하네요. 어제 그 시간에, 그곳에 딱 저희가 있었다는 게, 그 와중에 가게 밖에 나오는 타이밍이 맞았다는 게, 게다가 서로를 알아봤다는 게…….”
둘 사이에 잠시 침묵이 돌았다. 남자는 고개를 돌려 잠시 창문 밖을 응시했다. 유정도 무의식적으로 그를 따라 창 밖을 봤다. 밖은 어느새 그들과 다른 세계처럼 느껴졌다. 마치 둘만이 그들의 세계를 따로 구축한 것처럼.
“왜 우리였을까요?” 남자가 말했다. “단순한 우연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뭔가 특별한 걸까요? 전 사실 이런 일을 겪기 전엔 평범하게 잡지사 편집자로 일하고 있었는데…….”
“저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긴 하지만, 전혀 특별한 사람은 아니에요.” 유정이 말했다.
“화가세요?” 주원이 정말로 놀란 것처럼 말했다.
“네, 네……. 제 화실도 이 근처에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화가라는 직업은 처음 뵙는 것 같습니다.”
“저도 편집자라는 직업은 처음 뵌 것 같아요.” 유정이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 편집자도 흔한 직업은 아니죠 하하.” 남자가 어색하게 웃었다.
약간 시간차를 두고 남자가 말했다. “음… 만약 그날 일을 저희 둘만 겪은 게 아니라면… 어쩌면 온라인에 저희와 비슷한 일을 겪은 사람들이 뭔가 글을 남겼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아 정말로 그럴 수도 있겠네요.” 유정이 대답했다.
“그리고 만약, 그날 밤 남겨진 게 정말 저희 둘 뿐이었다면…” 남자가 숨을 한 번 고르고 말했다. “그렇다면… 저희가 어제 그렇게 만나게 된 건 아마… 아마도 절대로 우연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유정은 그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대답했다. “확실히 그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