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어있지 않은 공허 1
“그새 살 좀 빠진 거 같다?” 민재가 말했다.
“요새 일이 바빠가지고. 웬일로 한남동에서 보쟤? 고기 먹을 거면 <땡구>나 가지.”
<땡구>는 둘이서 자주 가는 잠실 쪽의 정말 오래된 삼겹살집이었다. 주원이 민재와 그곳을 처음 갔을 때가 이미 십 년도 더 전이었으니 최소 십 년도 더 넘은 가게였다. 연기를 빨아들이는 팬도 시원치 않아서 손님 숫자에 비해 항상 연기가 자욱했다. 요즘 서울에는 십 년을 넘기는 가게가 흔치 않다. 그에 비해 한남동의 이 고깃집은 반찬부터 인테리어까지 모든 것이 정갈한 가게였다. 직원들이 사용하는 모든 집기가 새것 같았다. 사람들이 많았다. 연기는 없었다.
“야, 땡구 지겹잖아. 여기서 1차 하고, 2차로 갈 곳 정해놨어. 저번에 바이어들 만난다고 근처에 이자카야 한 번 갔었다가 술 킵해둔 게 있어서 그거 마시러 갈 거야. 거기 분위기 죽인다.” 민재가 주원의 잔에 소주를 따르며 말했다. 둘 사이에 삼겹살이 노릇노릇 익고 있었다.
민재는 그의 크고 두툼한 손으로 그만큼이나 두툼한 고기를 한 번 뒤집었다. 정민재는 임주원의 둘도 없는 친구였다. 둘도 없다는 것은, 정말로 둘이 없다는 뜻이었다. 민재가 주원의 유일한 벗이었다. 민재는 주원과 같은 보육원 출신이었다. 주원이 날씬하고 호리호리한 편이라면, 민재는 체구가 크고 통이 두꺼운 타입이었다.
주원은 민재에게 「그날 밤」에 있었던 일에 대해서 뭐라도 물어볼까 했지만 결국 그러지 못했다. 그의 표정과 말투에 아주 조금이라도 다르거나 어색한 기색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말을 한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전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날 밤」 있었던 일들은 주원이 여태껏 살면서 믿어왔던 확신과 상식을 통째로 뒤엎는 사건이었다. 사람들이 사라졌고, 시간이 반복되었다. 그것에 대해서,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에 대한 믿음이 깨진 일에 대해서, 주원은 타인에게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뭐가 그렇게 생각이 많어?” 민재가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너 깻잎 싸 먹을 때 꼭지 따서 먹냐?” 주원이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갑자기?”
“삼겹살이든, 목살이든, 장어든, 뭐가 됐든, 깻잎으로 쌈을 쌀 때 말야. 너는 꼭지를 따?”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데, 나 그냥, 딸 때도 있고 안 딸 때도 있는 거 같은데.” 민재가 잠시 생각을 해보고 대답했다.
“나는 따거든. 나는 무조건 따는 스타일이야. 우리 맨날 만나서 먹는 게 삼겹살이잖아. 아마 여태 살면서 너랑 나랑 삼겹살을 몇백 근은 먹었을 거고, 몇천 번 짠을 하는 동안, 몇백 번의 깻잎쌈을 쌌을 거야. 그리고 그 몇백 번 중 단 한 번도, 꼭지를 따지 않은 적이 없어.”
‘얘가 또 뭔 소리를 하나’ 하는 표정으로 민재는 묵묵히 왼손으로 집게를 들고 삼겹살을 집고 그것을 가위로 자르고 있었다.
“문득 내가 오늘 깻잎으로 쌈을 몇 번이나 싸 먹었나 궁금하다면, 내 앞접시 위에 놓인 깻잎 꼭지의 수를 세면 돼. 열 개의 깻잎 꼭지가 있다면, 나는 틀림없이 열 장의 깻잎을 먹은 거야. 그 사실은 내 손가락이 열개인 것만큼이나 틀림이 없어.” 주원이 확신에 찬 표정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것은, 생각해 보면, 사실 대단한 거야. 살면서 내가 이렇게나 전적으로 자신할 수 있는 게 얼마나 있을까? 예를 들어서, 나는 내가 지난 한 주 동안 몇 끼의 밥을 먹었는지 몰라. 어떤 날은 두 끼를 먹었고, 어떤 날은 삼시 세끼를 꼬박 다 챙겨 먹었겠지. 자, 어제저녁은 집에서 간단히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어. 점심때는 된장찌개를 먹었고. 그저께는… 그저께 저녁은… 김치찌개에 계란말이를 먹었어. 점심때는 아침 겸 점심으로 시리얼에 우유를 타서 먹었지. 그러고 보니 어제 아침은 뭐였지? 따로 챙겨 먹었었나? 기억이 안 나. 아마도 안 먹었었던 것 같아. 그럼 엊그제는? 엊그제 저녁… 새우볶음밥이었어. 맛있게 먹어서 바로 기억이 나. 근데 딱 거기까지야, 엊그제의 점심 메뉴는커녕,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조차 기억이 나질 않아. 나흘 전부터는 아예 깜깜해. 그러면 나는, 지난주에 내가 몇 끼를 먹었는지, 절대로 기억하지 못할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영원히 알 수가 없는 거야.”
“야 다 익었어. 먹으면서 얘기해.” 민재가 소주잔을 들며 얘기했다.
주원이 잔을 부딪치며 말을 이어갔다. “보통의 사람들은 열두 쌍, 그러니까 총 스물네 개의 갈비뼈를 가지고 태어나는데, 아주 가끔씩, 이백 명 중 한 명 꼴로, 갈비뼈가 한쌍 많게 태어나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 그리고 갈비뼈의 수가 스물네 개든, 스물여섯 개든, 그 사람의 건강이나 생활에는 거의 아무런 지장이 없댄다. 그렇다면 너나 나나 자신에게 열두 쌍의 갈비뼈가 있다고 확신할 수 있어? 글쎄, 이백 명 중 한 명… 뭐 그렇게까지 막 희박한 가능성은 아니지 않아? 모를 일이라고 생각해. 물론 「아마도」 나에겐 열두 쌍이 있겠지만, 그래도 정말 내가 그 이백 명 중 한 명일지 어떨지는 모를 일인 거야. 지금 당장 손으로 만져봐도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갈비뼈인지 난 솔직히 잘 모르겠어. “ 주원이 자신의 갈비뼈 부분에 손을 갖다 대고 만져보는 제스처를 하며 말했다. ”살면서 엑스레이 사진을 몇 번 찍어봤지만, 그 어떤 의사 선생님도 나에게 ‘갈비뼈가 열두 쌍이네요’라고 말해 준 적은 없단 말이야. 물론 나 역시 여태껏 그게 궁금했던 적이 없었고, 그동안 내 엑스레이 사진을 봤던 의사들 중 단 한 명이라도 마침 평소에 이런 생각을 해서 매번 사람들 엑스레이 사진을 볼 때마다 갈비뼈 숫자를 굳이 세어봤을 거라고 생각되지 않고.”
“갈비뼈가 부러진 환자가 아닌 이상.” 민재가 불쑥 끼어들어 말했다.
“그렇지.” 주원이 고기를 깻잎에 싸 먹으며 말했다. 꼭지를 똑하고 떼어냈다.
“아무튼 나는 나 자신이 가진 갈비뼈의 숫자도 확신할 수 없는 인간이야. 그래서 일평생 내가 꼭지를 따지 않은 깻잎쌈을 먹은 적이 없다고 확신할 수 있는 건 생각보다 대단한 일이라고 한 거야. 나는 가끔씩 「나」라는 존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조차도 의구심이 든단 말이야. 나는 나의 감각인가. 나는 내가 가진 신념인가. 스스로 평가하는 내가 진정한 나일까. 아니면 나를 아는 사람들의 숫자만큼의 내가 존재하는 걸까. 그들이 아는 나는 결국 나에 대한 이미지일 뿐, 다들 나를 오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그렇게 여러 가지 버전의 내가 있다면, 그중에서 「나」라는 것의 「오리지널 버전」이라는 게 실제로 있기는 할까. 아니면 이 모든 것은 허상인가.”
주원이 네 번째 잔을 짠하며 말했다.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존재하는가, 내가 존재하기 때문에 세상이 존재하는가. 내가 세상에 존재하는 거라면, 나는 우주의 한낱 먼지일 거야. 하지만 세상이 내 안에 존재한다면, 그렇다면 내가 이 온 우주의 중심이겠지. 그렇다면 나는 나만의 우주인 거야.”
“너 요즘 가을 타냐?” 민재가 다섯 번째 잔을 빠르게 들이키며 말했다. “이 새끼 이거 원래 이렇게 가을 타는 성격이었나. 뭔 갑자기 우주 타령이야. 중2병이냐? 야 요즘은 애들도 그런 고민은 안 해.”
주원이 머쓱하게 웃으면서 민재를 따라 다섯 번째 잔을 목 뒤로 넘겼다. 오늘따라 빨리 취기가 오르는 느낌이었다.
“야, 그냥 네 스스로가 생각하고 느끼는 너도 있고, 사람들의 시선 속 너도 있는 거야. 둘 중 하나가 오리지널이 아니라, 그냥 이런저런 네가 다 있는 거야.” 민재가 불 위의 고기를 하나 집어 쌈장을 듬뿍 찍어 먹으며 말했다. “우주에 네가 존재하기도 하는 거고 네 안에 우주가 있기도 한 거라고. 너의 관점에선 네가 우주의 중심이고, 우주의 관점에선 넌 먼지 같은 거야. 둘 중에 뭐가 옳고 그른 게 아니라, 둘 다 맞는 거야. 상대성이론 몰라?”
“그래 그래, 네 말이 맞아.” 주원이 수긍했다. “근데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거야. 나는 누구일까를 가지고도 고민하는 내가, 바로 지난 주조차 밥을 몇 번 먹었는지도 모르는 내가, 갈비뼈가 열두 쌍이 있다고도 확신하지 못하는 성격의 내가, 적어도 딱 한 가지는 일말의 주저 없이 말할 수 있는 게 있다는 거야. 그 내가, 나의 모든 버전 중 그 어떤 나였더라도, 나는 사는 동안 내가 싸 먹은 모든 깻잎의 꼭지를 뗐다는 사실이야.”
“아, 그래서 뭐 어쩌라고 미친놈아. 네가 깻잎 꼭지를 따는 게 뭐. 그게 왜 중요한 건데.”
“아니지, 아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것을 내가 확신할 수 있다는 게 중요하단 거야. 세상에서 내가 확신할 수 있는 것들은 내가 무의식 속에서도 믿는 것들이야. 깻잎의 꼭지가 그것의 한 가지 예라고 할 수 있다는 거지. 꼭지를 딸까 말까를 나는 의식하면서 선택을 해본 적이 없어. 마치 운전을 하기 전에 시동을 걸어야 되나 말아야 되나 가 선택의 요소가 아니듯이. 마치 시리얼을 먹기 전에 포크를 쓸지 숟가락을 쓸지 고민하지 않듯이. 우리가 숨을 쉬어야 한다고 계속 의식하면서 살지 않는 그런 거야. 내가 차로 목적지에 도착해서 ‘아, 내가 운전하기 전에 시동을 걸었었나?’ 하고 생각하지 않잖아. 시리얼 먹고 나서 ‘내가 혹시 포크를 쓰진 않았겠지?’ 하진 않잖아. 내가 어제 살아있는 동안 숨을 계속 쉬고 있었는가에 대해서 의심할 수 없잖아.” 주원이 여섯 번째 잔을 들으며 말했다.
민재가 그 잔에 자신의 잔을 짠하고 부딪쳐 주었다.
“나는 모두가 그런 확신을 기반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해. 나 역시 그것을 무의식적으로 믿으며 살아왔고…” 주원이 잠시 뜸을 들이다가 잔에 든 술을 목 뒤로 넘기며 말했다. “그런데 최근에, 그 믿음이 깨지는 일이 하나 있었어.”
“무슨 일?” 민재가 물었다.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판단이 서면 그때 말해줄게. 아무튼 한 번 그런 일이 있고 나니까, 무의식적이던 것들에 대해서 의식을 하게 됐어. 예를 들어서, 지금은 밤이고 밖에는 달이 떠있어. 그건 네가 무의식적으로 알고 있는 거야. 「그렇게 믿고 있는 거야.」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건 무의식적인 영역인거지. 그런데 나는, 예를 드는 거야, 예를 들어서 요즘 나는 ‘달이 과연 떠 있을까?’ 하고 슬쩍 하늘을 올려다보는 거지. 의식적으로. 그러면 난 더 이상 세상을 믿지 못하고 있단 거야.” 주원이 말을 마쳤다.
민재가 자신의 잔에 일곱 번째 술을 졸졸졸 따랐다. 그리고 주원의 잔에 따라주었다.
“너 요즘 주식하냐?” 민재가 말했다.
“아, 이거 존나 심각한 얘기야 새끼야.” 주원이 애써 활짝 웃으면서 장난처럼 얘기했다.
“야, 개소리 그만하고 이거 얼른 막잔해. 너 거기 가서는 다른 얘기해라, 짜증 나게 하지 말고.” 민재가 짠을 재촉하며 말했다.
둘은 짠을 했다. 거칠게 부는 가을바람을 뚫고 그들이 2차로 도착한 곳은 <쥬니방가이>라고 하는 업스케일 이자카야였다.
이자카야는 손님들로 가득했다. 가득했으나 조용했다. 어디 무슨 깊은 숲 속의 절간처럼 정숙했다기 보단, 누구 하나 큰소리로 시끄럽게 떠들거나 하는 이가 없었다. 그저 모든 사람들의 말이 뭉쳐져 웅성웅성 화이트 노이즈처럼 들릴 뿐이었다. 가게는 조명이 굉장히 어둡고 모던한 스타일이어서, 밖에 이자카야라고 쓰여있지 않았다면 이곳을 그렇게 생각할 사람은 없을 정도였다.
자리에 앉으며 메뉴판을 훑어보자 역시 이곳은 이자카야라는 단어 자체가 컨셉에 안 맞지 않나라는 생각을 주원은 했다. 이자카야는, 말하자면 선술집이 아닌가.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소소한 안주거리와 사케를 파는 그 동네의 아지트 같은 곳을 이자카야라고 부르는 것이라고 주원은 알고 있었다. 이곳은, 일식을 다룬다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이자카야라는 단어가 대표하는 것의 반대점에 있지 않을까 할 정도였다. 메뉴의 구성과 가격부터 값비싼 고급 와인의 존재까지, 이곳은 재패니즈 파인 다이닝이라고 하는 것이 맞지 않을까. 저렴한 꼬치나 간단한 반찬 대신, 섬세한 일식 요리와 듣도보도 못한 메뉴들이 즐비했다. 수제 로스트비프 위에 성게를 올린 음식도 있었다. 소주는 8000원이란 가격에 굳이 왜 메뉴에 갖다 놨는지가 의아할 정도였다.
“정민재 출세했네 이런 데서 술을 다 먹고.”
“야, 내가 미쳤다고 내 돈으로 이런 데서 먹겠냐. 지금 여기 있는 사람들 다 법카 긁는 거야.” 민재가 웨이터에게 자신이 킵해둔 술과 안주 몇 개를 주문한 뒤 말했다.
확실히, 데이트를 하는 남녀들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대부분이 남자들끼리, 혹은 여자들끼리, 아니면 소규모 모임 같은 구성으로 삼삼오오 앉아있었다. 이들은 ‘동네 아지트’ 대신 고급 사교장을 선택한 것이다. 확실히 이곳은 일반적인 선술집이 아녔다. 일반적이라면, 그 술집엔 침울한 표정도 있어야 하고, 언성을 높이는 목소리도 있어야 한다. 아니면 기분이 너무 업돼서 하이톤으로 지르는 고함이나 무언가 재밌는 말에 빵 터지면서 치는 박수소리가 들려야 한다. 하지만 이곳에 앉아 있는 모든 이들은 그저 하하호호 하면서 웃고만 있었다. 그들이 행복한지 어떤지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들 표정이 밝아보였다. 세련된 외양 속에서 비즈니스와 네트워킹이 은밀히 진행되는, 이자카야라는 이름 아래 존재하는 다른 차원의 영역이었다. 도저히 위치를 파악할 수가 없는 어딘가의 스피커에서는 <The Eddie Higgins Trio>의 <Shinjuku Twilight>가 가게 전체에 낮고 고른 볼륨으로 재생되고 있었다.
“너 방금 여기가 왜 ‘이자카야’라고 생각하고 있었지?”
“어떻게 알았어.” 주원이 기가 막힌다는 듯이 말했다.
“내가 니 아빠야 짜샤.” 같은 보육원 출신으로서 둘만이 서로에게 할 수 있는 농담이었다. “여기는 가격대가 말이 안 돼. 음식이 맛이 없느냐 하면 그런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 가격만큼의 음식은 절대 아니란 말이지. 여기는 사케나 와인도 다른 곳들보다 대체적으로 더 비싸게 팔아. 그러면서 ‘이자카야’래. 왜 그렇겠어.”
“글쎄…? 왜?”
“여긴 애초에 보통 사람들 밥 먹으러 오라고 만든 공간이 아닌 거야. ‘올 테면 와, 근데 굳이?’ 이런 거지. 이곳은 법카쓰는 사람들의 접대하는 장소, 모임 같은 장소로 컨셉을 잡은 거야. 그러고선 나중에 카드 내역에 ‘이자카야’라고 찍혀 있으면 좋잖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불법이 아니니 훌륭한 상술이었다. 그때 민재가 킵해뒀다던 술이 나왔다. 웨이터가 술 이름을 뭐라 뭐라 하며 킵해둔 술이 이게 맞는지 확인했다. 그가 그렇다고 대답하자, 병과 함께 고급스러운 유리로 된 잔을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 사라졌다.
“이게 다이긴죠슈라고 정미보합이 50%인 술이야.”
“정미보합이 뭔데?”
“정미율, 정미된 비율. 술을 쌀로 만들잖아, 그런데 쌀을 깎아내면 그만큼 잡미가 사라지면서 맛이 더 깔끔해지거든. 그러니까 ‘정미’라는 건 쌀을 깎아내는 거고, 깎아내고 얼마큼 남았는지를 백분율로 나타낸 게 정미율, 정미보합. 많이 깎아낼수록 퍼센티지가 낮아지고, 그만큼 고급술이다 뭐 이런 뜻이지.”
설명을 들으며 음미하니 확실히 뭔가 맛있고 깔끔한 느낌이 드는 것 같았다. 주원은 자랑을 하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스스로를 박학다식한 편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술에 있어서, 그것의 지식에 있어서는 민재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그 지식만큼 민재가 빨리 죽을까 그게 주원은 걱정이었다.
“요즘 일은 별일 없냐?” 민재가 주원에게 물었다.
“일, 뭐, 별일 없지. 지루하다.” 그것보다는 자신이 요즘 글을 쓰기 시작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자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주원은 그러지 않기로 했다. 이제 고작 두 개의 단편을 썼을 뿐이다. 그는 무언가 표면적인 성과가 있어야 남들에게 말할 그런 성격이었다.
“요즘은 취재하러 안 나가나?”
“그치, 나야 이제는 촬영 같은 건 그냥 컨셉만 잡아주고, 애들 기사 써오면 교열해 주고, 뭐 광고주들 들어오면 미팅 한 번씩 해주고 그러면 땡이지.”
“잡지사 다니면서 너같이 사람들 안 만나고 다니는 놈도 없을 거다 진짜.”
“우리는 편집장이 영업을 다 하니까.”
“너네 젊은 사장?”
“그렇지.”
“걔 아빠가 큰 여행사 회장이라고 그랬지?”
주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소다>는 그래서 생겨난, 국내에 흔치 않은 ‘여행’ 잡지사였다. 편집장의 부친은 국내에서 업계 1등인 여행사, <마음>의 회장이었다. 그는 한국에서 ‘여행사’라는 컨셉의 사업을 가장 처음 시작한 사람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리고 이제는 한국 방방 곳곳에 부동산을 사들여 직접 숙박업을 운영하는 레벨에 이르렀다. 망해가는 잡지 시장에서, 그것도 ‘여행’이라는 테마로 <다소다>가 운영이 되는 것은 <마음>과의 연계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간단한 방법이었다. <마음>에서 여행코스를 짜면, 그 코스 그대로 <다소다>에서 「취재」를 한다. 그곳에서 감성적인 사진을 찍고 심금을 울리는 글을 쓴다. 숙박도 어디서 했는지 독자가 찾아보면 알 수 있게끔 충분히 티를 낸다. 이 모든 것을 너무 적나라하지 않게 하는 것이 <다소다>의 일이었다. 사람들은 노골적인 것을 싫어하는 법이니까. 어쨌든 그러면 사람들은 이 여행지를 인터넷에 검색하고, <마음>은 타이밍을 맞춰 광고를 올려놓는다. ‘다소다 소개된 맛집!’, 혹은 ‘다소다 구독자 할인!’ 이런 식이다. 그런 식으로 <다소다>는 <마음>에게서 수수료를 받는다. 말하자면 하청인 셈이다. <다소다>는 엄밀히 말해 기사가 담기는 잡지사가 아니었다. 잡지의 표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한 글자, 사진 한 컷도 빼지 않고 모든 게 광고였다.
그것에 주원은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다. 세상 누구나 그렇게 사는데 자신이 죄책감을 느낄 이유가 무엇인가. 심지어 자신은 그곳에서 그냥 월급을 받는 일개 직원일 뿐이었다. 살려면 돈이 필요하다. 그리고 <다소다>는 그에게 업계에선 최고 수준의 연봉을 지급했다. 그러니 그가 강남에서 비좁은 원룸이라도 월세로 살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오로지 그곳에 낭비되는 그의 문학적 재능과 그곳에 오래 있을수록 사라지는 자신의 꿈을 이룰 시간이었다. 꿈에 제대로 도전해보지 못했다는 사실이 나중의 그를 괴롭게 할까 하는 죄책감.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그 죄책감 때문에 요즘 그나마 글을 쓰기 시작한 게 아닌가. 그게 그로선 최선이었다.
마음이 갑갑해졌다. 마침 민재가 화장실을 간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주원도 따라서 일어나 담배를 챙겨 바깥으로 향했다. 문을 닫고 나오자 백색소음 같던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순식간에 지워졌다. 골목은 한산했다. 가을바람에 꺼져가는 오렌지색 가로등 불빛 아래엔 아직 죽지 못한 여름 곤충들이 마지막으로 빙글빙글 돌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쳐다본 하늘의 달 아래엔 구름 한 점 없었다. 아까 자신이 말한 대로 만약 믿음이 무의식적인 영역이라면, 주원은 「그날 밤」 잠시 고장 났었던 세상을, 언제든 세상이 고장 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불 붙인 담배의 연기가 달 아래에서 구름처럼 사라졌다. 그때, 가게의 정문을 기준으로 그에게서 반대편으로 약간 떨어져 있는 한 여자가 문득 시야에 들어왔다.
그녀는 새까만 긴 생머리에 가냘픈 손목으로 전자담배를 들고 있었다. 회색 스웨터에 검은색 긴치마를 입은 수수한 모습이었다. 그리고 달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는 시선을 돌려 그녀가 보고 있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곳엔 그가 방금 보고 있던 달이 여전히 떠 있었다. 누구나 밤에 달을 쳐다볼 수야 있다. 하지만 주원은 알 수 있었다. 그녀는 그냥 달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와 같은 이유로, 그와 같은 눈으로 그것의 주변을 「확인」하고 있다는 것을.
다시 시선을 그 사람에게로 돌리자, 그 여자는 주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두 눈과 그녀의 두 눈이 둘 사이의 중간쯤 어딘가의 공기 중에서 딱 맞닥뜨린 것이다. 그리고 그들을 감싸고 있는 공기가 그의 세차게 뛰는 심장에 파동 하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 파동을 감지한 것이 분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