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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지안 Sep 12. 2024

O

이어지는 이야기 1

    주원은 꽤나 한참을 역 안의 그 벤치에 앉아서 등을 잔뜩 웅크린 채로 고개를 떨구고 헛구역질이 가시기를 기다렸다. 속이 쓰려왔다. 그 정신에도 어찌어찌 회사에는 속이 좀 좋지 않아 반차를 쓰겠노라 팀원들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아까 민재에게 전화로 할 말이 없어 속이 안 좋다고 둘러댔던 말은 이제 거짓이 아니게 됐다. 집으로 돌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집에 도착한 주원은 그의 갈색 가죽 크로스백을 바닥에 툭 내려놓고 침대에 조심스레 누웠다. 벌러덩 누우면 혹시라도 그것이 만드는 아주 약간의 침대 스프링의 반동이 그를 조금이라도 어지럽게 만들까봐서였다. 하얀색 천장이 보였다. 단단한 무력감이 그와 천장 사이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전신으로 느껴지는 그 무게를 주원은 오롯이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그의 세상은, 인생은 영원히 변해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따질 수도, 반항할 수도, 심지어 질문조차도 할 수 없을 것이다. 다른 이와 그것에 대해 이야기도 할 수 없다. 그렇다. 어젯밤으로 인해 자신 외에 이 세상의 모두가 완벽히 타인이 되어버렸다. 어차피 혼자 왔다가 혼자 가는 인생이라는 걸 알고는 있었지만 - 각오하고 있었지만 - 이건 또 다른 종류의, 더 깊은 종류의 외로움이었다. 그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마주할 것인지. 마주할 것인가, 임주원. 마주하겠는가. 혼자서, 세상의 비밀을 파헤쳐 볼 것인가. 아무도 격려해주지 않을 것이다. 알아주지 않을 것이다. 머리가 어지러워 눈을 감았다. 그러자 바로 견딜 수 없는 잠이 또다시 쏟아졌다. 그것은 아마도 현실을 쉽사리 받아들일 수 없어서 나타나는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니었을까.


눈을 뜨자 이미 방은 어두운 채로였다. 화들짝 놀라서 본 시계는 벌써 오후 7시를 넘어가고 있었고, 스마트폰에는 민재와 회사 사람들로부터 몇 통의 부재중 전화와 몇 개의 톡이 와있었다. 반차를 쓴다던 사람이 연락도 없이 아예 결근을 해버렸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대부분 안부를 묻거나 회사일은 신경 쓰지 말고 푹 쉬라는 내용들이었다. “맙소사.” 주원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탄식하며 연락을 받은 순서대로 모두에게 전화와 답문자를 돌렸다. 사과를 하며 이제 괜찮아졌다며 대충 둘러대니 다들 오히려 걱정을 해주는 눈치였다. 주원이 평소에 쌓은 성실하고 착실한 이미지 덕분이었다. 한숨을 돌리고 맨 손바닥으로 얼굴을 거칠게 비볐다. 이래서는 안 된다고 주원은 스스로를 질책했다. 그에게는 누구 하나 기댈 수 있는 가족이 없다. 그의 친구인 민재가 행여 이 말을 들었다면 그가 서운해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이 엄연한 사실이었다. 그는 오로지 스스로에게만 의지할 수 있고, 그러려면 지금의 상태가 오래가서는 안 됐다. 극심한 갈증에 거실로 나가 냉장고를 열어 1.5리터짜리 생수병을 입에다 대고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침에 느꼈던 메스꺼움이 입 끝에 아직도 조금 남아있었다.


뭐라도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냉장고를 열어 생수병을 다시 넣고 식빵 두 쪽을 꺼냈다. 도마 위에 마요네즈를 바른 식빵 한쪽을 놓고 그 위에 슬라이스 햄 한 장, 슬라이스 치즈 한 장, 양상추 한 장을 올렸다. 그리고 머스터드를 바른 나머지 식빵 한쪽으로 덮은 뒤 칼로 정확히 가운데를 잘라 접시에 옮겨 담았다. 우유도 한 잔 컵에 따른 뒤 책상으로 가지고 와 자리에 앉았다. 랩탑을 열며 샌드위치를 크게 한 입 베어 물었다. 생각보다 배가 고팠던 건지, 바로 두 번째, 세 번째 입으로 샌드위치의 반을 순식간에 목구멍 뒤로 넘겨버렸다. 나머지 반쪽도 회사 이메일을 체크하는 그 잠깐 사이에 해치워버렸다.


다행히 오늘 회사에서는 별다른 일이 없었던 것으로 보였다. 그건 또 그것대로 썩 기분이 좋은 일은 아니었다. 마치 주원이 그 자리에 없어도 된다는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그런 해로운 생각은 전적으로 그의 잘못이었다. 그 누구도 그런 비슷한 말도, 농담이라도 한 적 없었다. 그건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가 언제라도 사라질까 항상 전전긍긍하는 주원의 강박이었다. 주원은 유리컵에 담긴 우유를 꿀꺽꿀꺽 들이켠 뒤 빈 접시와 함께 싱크대 안에 두었다. 그리고 다시 책상 앞으로 와 앉았다. 드디어, 어쩌면, 그는 글을 쓸 수 있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글을, 특히나 소설을 쓰는 것은 그의 오랜 숙원이었다.


자신이 보육원에 있었다고 해서 무언가가 많이 부족하게 자랐다고 주원은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게 세상 사람들의 시선엔 마치 그의 열등감 때문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물론 그가 남 부럽지 않은 풍족한 환경에서 자란 것 또한 사실이 아니란 걸 스스로 알기에, '절대 부족한 적 없었노라' 이 악물고 주장할 생각도 없었다.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했다. 그에게 책만큼은 절대로 부족하지 않았다.


주원은 끝없이 읽었다. 읽고 또 읽었다. 책은 그에게 벗이자 스승이었고, 세상이었다. 책을 통해서 위로를 받았고, 바깥세상을 배웠으며, 사회에 대한 식견을 넓혔다. 그렇게나 책을 읽어댔으니 어찌 보면 당연하게도 그는 작가의 꿈을 키웠는데, 결론적으로 그 꿈은 그에게 일종의 저주라고도 할 수 있었다. 그는 아무 작가나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문학적으로 인정을 받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런 재산도, 가족도 없는 그가 천진난만하게 예술을 꿈꿔도 되는지 스스로가 의문이었다. 게다가 문학 작품을 쓰면 요즘 세상에 누가 그걸 소비해 줄 것인가 하는 생각부터 들었다. 그게 사실이니까. 돈을 버는 것은 그에게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고, 자신의 예술이 인정을 받을 때까지 뚝심 있게 자신의 글을 써나갈 수 있을 정도의 현실적인 여유가 그에겐 주어져 있지 않았다. 그래서 작가가 된다는 것은 그에게 꿈이면서도 동시에 현실을 일깨워주는 저주였던 것이다. 물론 그저 작가가 되는 것 그 자체가 목표였다면 고리타분한 문학적 작품을 추구하지 않아도 됐다. 사람들의 감성에 맞춰 얄팍한 시를 쓰거나 세상의 입맛에 맞는 아기자기한 책을 쓰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종류의 작가가 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다. 그래서는 아무리 작가님 소리를 듣는다 해도 꿈을 이뤘다고 스스로 인정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이런저런 핑계를 대고, 현실을 이유로 든다 해도, 어쨌든 모든 것은 그의 선택이고 그의 책임이다. 한 번뿐인 인생, 만약 주원이 그냥 눈 딱 감고 죽기 살기로 등단에 도전했었다면 또 어떻게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한 것은 주원 스스로가 내린 결정이었다. 의지만 있다면 글은 퇴근 후나 주말에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고 자기 자신을 설득했다. 그것을 그의 친구 민재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해주었지만, 주원 본인은 비겁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안일한 마음가짐으로는 끝끝내 자신이 꿈꿨던 모습의 작가가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그래서 프리랜서 기자로 들어간 것이 여행 잡지사 <다소다>였고, 거기서 가끔씩 글을 쓰는 것이 조금이나마 그의 꿈과 현실의 타협점을 찾은 것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런 글」을 쓰는 작가가 되기 싫었다던 그는 막상 회사에서는 「그런 얄팍한 글」을 잘도 써냈다. 오히려, 거기에 상당한 재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주원은 별거 아닌 낯간지러운 말을 세련된 문학적인 표현으로 계승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었다. 사내의 여러 기자들이 아무리 다양한 글을 써서 내도 그를 거치면 하나의 일관된 「억양」을 갖게 되었고, 그것이 곧 <다소다>의 감성 그 자체가 되었다. 그것으로 그는 편집장에게 큰 신임을 얻을 수 있었다. 그 재능으로 그는 단기간에 회사의 편집자까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대신 회사에서 그렇게 일이 잘 되고 인정을 받을수록 주원의 작가의 꿈은 멀어져 갔다. 매일 반복되는 가식적인 문장의 치장과 형식적인 멘트 속에서 날카롭게 날이 서있던 그의 영감은 점점 무뎌져갔다. 그리고 어느샌가, 아예 창작의 펜을 놓아버렸다.


그랬던 주원이, 지금, 다시금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어제 홀로 남겨졌을 때 그가 뼈저리게 느낀 단절이, 역설적으로 온 세상이 원래는 얼마나 이어져 있는지를 그가 깨우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그 이어짐에 대해서 쓰면, 무언가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빠르게 키보드 위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제목은 <이어지는 이야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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