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지는 이야기 2
<이어지는 이야기>의 1편은 주원 본인도 놀랄 정도로 술술 써내려 져 갔다. 시리즈를 쓰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시작한 것은 아녔다. 그저 쓰이는 대로 적었고, 다 적고 나니 적당한 길이의 단편이 몇 시간 만에 완성되었다. 그리고 이것을 다 쓰고 나서야 비로소 이 이야기는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이것을 시작으로 이와 같은 단편들을 옴니버스 방식으로 묶으면 한 권의 책이 되겠다는 아이디어가 어렴풋이 떠오른 것이다. 한 편으로서 온전하지만, 그렇게 한 편 한 편이 모이면 완전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이 「1편」으로 결정된 것도 그때의 일이었다.
고작 몇 계절을, 파랗게, 그 손을 쫙 펴고 있으려 애쓰다가, 결국에는 메마른 가을바람에 점점 쪼그라들어 바싹 오므라든 채로 누렇게 떨어진다. 그리고 죽는다. 이미 말라비틀어져 땅에 떨어진 나뭇잎 위로 뒤늦게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나무는 계속 살겠지만, 나뭇잎의 생은 거기까지인 것이다.
우리의 모진 겨울이 황량한 것은 아직 피지 않고 있는 나뭇잎 때문이고, 우리의 찬란한 봄이 생기 있게 파란 것도 울창하게 피어난 나뭇잎 때문이지, 나무의 있고 없음 때문이 아니다. 무더운 여름날 잠시나마 우리의 머리 위에 그늘이 드리워지는 것은 빽빽하게 우거진 나뭇잎 덕분이고, 가을에 빨갛게 물들어 죽어가는 모습마저 아름다운 것은 나뭇잎이지 나무가 아님에도, 그 누구도 마지막에 땅에 떨어져 바스러져가는 낙엽이 된 그들을 밟고 지나가는 데에 아무런 거리낌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심지어 나무도 보지 말고 숲을 보라는 소리나 하고 있다. 나뭇잎은 안중에도 없는가. 어쩌면 그렇게까지나 매정할 수 있는가. 큰 그림을 볼 줄 아는 것만이 대단한 것인가. 멀리 보는 것 만이 중요한 것인가. 맹렬하게, 온 힘을 다해 푸르렀던 나뭇잎의 고결했던 삶은 제대로 알아주지도 않고, 오로지 제 나무를 위하여 태양에 맞서 끝까지 장렬하게 버티다, 이내 온몸에 시뻘겋게 화상을 입은 채로 곧 죽음이 가까워지면, 사람들은 그제야 제대로 바라봐준다. 그제야 그에게 단풍이라는 이름을 따로 붙여주며 비로소 예쁘다 한다. 그리고 그것을 보며 “구경” 혹은 “놀이”라 한다. 아무도 단풍을 보며 슬퍼하지 않는다. 모두들 죽어가는 것을 보며 아름답다며 그저 감탄을 할 뿐이다.
물론 그것은 더없이 아름답다. 나뭇잎의 삶은 얼마나 이타적인가. 이타적이라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가. 꽃의 잎은 이쁘다고 사람들이 봐주기라도 하고, 달다고 나비와 벌이 찾아주기라도 하지, 나무의 잎은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다. 모두들 그저 겨울이 지나가기를, 봄이 오기를, 그리고 그늘을 찾을 뿐, 아무도 나뭇잎을 찾아오지는 않는다. 그저 해가 쨍하면 쨍한 대로 다 받아내고, 비가 오면 또 오는 대로 오롯이 다 맞으면서, 바람 불면 그거 부는 대로 이리저리 휘날리며, 그냥 그렇게, 요령 없이, 잔꾀 없이, 오로지 자신의 나무를 위해 묵묵히 산다. 그러다 기력이 다하면 다 하는 대로, 중력에 몸을 맡기고 미련 없이 「똑」 떨어져 낙엽이라는 이름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하는 것이다.
하지만 나뭇잎은 자신의 잎생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쓸쓸한 삶이라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숭고하다고도 생각하지 않았고, 애초에 자신이 희생하고 있다고도 의식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의 나무가 좋았으므로. 그래서 스스로가 나무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 보람찼고, 무럭무럭 자라는 나무가 그에겐 그 무엇과도 바꾸지 않을 기쁨이자 행복이었다. 나무에게 고맙다는 말 한마디 바란 적도 없었다. 물론 나무는 충분히 자신의 나뭇잎들에게 고마워할 줄 아는 기특한 나무였다. 그래서 나뭇잎의 삶은 더없이 행복했다.
그런 삶이 있는가 하면, 저기 하늘 위에 한 덩이의 구름처럼 오직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삶도 있었다. 그 구름의 삶은 나뭇잎의 그것과는 정반대였다. 그는 하늘을 위해서 살지도 않았고, 태양을 위해서 살지도 않았다. 그 무엇도 위하지 않았다. 그저 자신만을 위했을 뿐 - 그저 그렇게 - 바람이 이끄는 대로 이곳저곳을 누비며 살았다. 그렇게 큰 덩어리의 구름은 아니었지만, 구름은 여기저기 가볍게 떠다니기에 적합한 자신의 덩어리가 썩 마음에 들었다.
낮에는 사람들의 하루가 서로 얽히고설키는 것을 구경했다. 사람들 한 명 한 명의 사소한 행동들 하나하나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치며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물결처럼 퍼져나갔다. 원인은 끝없이 결과가 되었고, 결과는 끝없이 원인이 되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행하는 행동과 내리는 선택에 「타의적」인 요소가 얼마나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지 전혀 눈치채지 못했지만, 이 하늘 위에서 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노라면, 구름은 그런 것들이 다 보였다.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을 자기가 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구름은 그것이 완벽한 착각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의 기준에 이 세상에서 온전하게 자신의 삶을 사는 이는 아마도 정말 몇이 안될 것이며, 그중 하나가 바로 구름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거의 확신했다.
밤에는 달빛을 벗 삼아 유유히 밤마실을 다녔다. 호화롭게 반짝이는 도시의 야경도 보고,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도 구경했다. 모두가 각자의 사연이 있었다. 모두들 힘에 부치고, 잠 못 들고, 후회하며 외로웠다. 다들 비슷했다. 도시의 매캐한 냄새가 질릴 때쯤이면 바람을 타고 한적한 산으로, 바다로 갔다. 산속의 밤은 반딧불이가 아름답게 수놓았고, 풀벌레 소리가 야음을 메웠다. 바다의 밤은 등대가 우직하게 바다의 어딘가를 비추었고, 철썩이는 파도소리가 어둠을 가득 채웠다. 도시든 산이든 호숫가에나 어디에나 별은 빛나고 있었다. 낮이든 밤이든 언제나 달은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구름은 자신의 하늘에서 세상의 다양한 모든 것들이 어쨌든 자신들의 행복을 위해서 나름대로 살아가는 것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그것이 구름이 깨달은 것이었다. 결국은 모두가 각자의 방법으로 행복하려 하는 것뿐이라는 것. 어떤 이의 희생도 결국 그로 인한 본인의 행복을 위한 수단이라는 것을. 행복한 삶을 살려는 것은 구름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그저 다들 자신의 방식대로 행복하려고 발버둥 치며 사는 것이고, 누군가의 삶의 목적이나 과정이 다른 이의 그것보다 더 고결해봤자 결국 순수한 동기는 다 거기서 거기라는 것을. 그러니 구름은 지금 이대로 하늘 위에서 충분히 행복했다. 가끔씩 비행기가 허락도 없이 시끄럽게 자신을 뚫고 지나가는 것만큼은 많이 언짢은 일이었지만, 그렇다 해도 이렇게나 이미 속속들이 깨우친 세상을 포기하고 굳이 비나 눈이 되어 내릴 이유가 그에겐 전혀 없었다.
왜냐면, 구름이라는 것은, 비나 눈을 내리면 「딱 내린 만큼의」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름은, 단순히 작아졌다는 사실 이상으로, 이전과는 「약간」 다른 존재가 된다. 그리고 존재가 「약간」 달라졌다는 것은, 결국 「엄연히」 다른 존재가 됐다는 것이다. 만일 어떠한 이유로 완전히 구름이기를 포기한다면, 구름은 비가 되어 떨어져 나가는 동안, 수만, 수십만의 빗방울로 나뉘는 동안, 떨어지면서 먼지가 뒤섞이는 동안, 지면에 도착한 충격으로 인해, 결국은 자아를 잃게 된다. 그러니 자신의 작은 덩어리를 소중히 유지하고 있는 구름으로서는 쉽사리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었다. 자신은 그저 지금 이대로의 자신이 좋았다. 굳이 비를 내리려면 몸집도 어느 정도 불려야 하는데, 구름은 자신이 무거워지는 것도, 언젠가 비를 내려 지금의 자신과 조금이라도 달라지게 되는 것도, 도무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영원히 나일 수 있다면, 도대체 왜 본인 스스로 내가 아니게 되기를 원하겠는가 말이다.
구름은 비 온 뒤 펼쳐지는 무지개만큼은 참 좋아했다. 어떤 구름이든 비를 내리는 것은 구름 본인이 정하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구름들에게 주어지는 권리이다. 그래서 우리의 이 작은 덩어리 구름은 무지개를 보는 것이 좋으면서도, 항상 약간은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이런 것들을 다 포기하고 비가 되어 내리기로 한 구름들의 마음은 도대체 뭐였을까. 그들은 어쩌다가 그런 결심을 하게 된 걸까.
아무래도 구름은 지금 이대로의 자신이 좋았다. 그리고 그는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좋았다. 구름은 자신의 붉음에 대단한 긍지를 가지고 매년 여름 붉게 꽃을 피워내는 장미를 기특해했다. 구름은 저 멀리 태평양에서 동해의 어느 해변까지 맹렬히 돌진하는 한 줌의 파도를 응원했다. 구름은 별을 낚는답시고 매일 밤 호수에 비친 별을 향해 하염없이 그물을 던지는 어부를 존중했다. 구름은 매일 학교를 오가는 길에 돌탑을 쌓으며 자기 할머니가 다시 건강해지기를 바라는 기특한 꼬마 소녀를 귀여워했다. 구름은 달을 보며 매일 밤 사랑의 세레나데를 부르는 어느 한 가로등의 정열적인 사랑에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렇지만 구름은, 특히나 노을을 좋아했다. 해가 지평선 밑으로 숨으면서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드는 것이 너무나 이뻐 몇 번이나 태양을 쫓아가 지평선에서 다시 끌어올리고, 또다시 끌어올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그러던 어느 여름날, 너무나 뜨거운 열기에 마치 솜사탕처럼 녹아버릴 것 같았던 날씨에, 구름은 아랑곳하지 않고 태양에 맞서는 한 나뭇잎을 보았다. 그 길에는 수많은 가로수들이 일렬로 줄지어 심어져 있었고, 그 나뭇잎의 나무도 그 자체로서는 별로 특별할 것 없는 가로수였다. 그리고 그 나무엔 무수히 많은 나뭇잎이 나있었지만, 그중 유난히 씩씩해 보이는 나뭇잎이 하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무관심한 표정으로 빌딩과 그 가로수 사이의 길을 지나갔지만, 구름은 잠시 머물며 그 나뭇잎을 지켜보기로 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나무만을 위해서 사는, 정말이지 굳세고 건경한 아이였다. 어쩌면 나무가 우뚝 서있는 것은 바로 이 나뭇잎을 믿고서가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잠시만 머무르려 했던 구름은 어느새 계절이 지나도록 그 주위를 맴돌며 그 나뭇잎을 응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어떤 날은 이러다가 정말로 타버리지는 않을까 싶을 정도로 태양이 뜨거울 때도 있었지만, 구름은 워낙에 그동안 자신의 몸집을 작게 유지해 온 탓에 나뭇잎을 위해 그늘 하나 제대로 만들어 줄 수 없었다. 하지만 나뭇잎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 열기에 오히려 가슴을 쫙 펴고 제대로 맞섰다. 어떤 날은 성난 태풍이 거센 비와 바람을 휘몰아쳤지만, 그때도 구름은 바람 한점 막아줄 수 없었다. 그러나 나뭇잎은 악착같이 매달려 버텨냈다. 그는 아직은 나무를 위해서 해줄 것이 있었기에, 그래서 아직은 떨어질 수 없었던 것이다.
구름의 삶은 하늘과 하늘 사이에 있었다. 구름은 아무런 목표도, 희생도 없이, 그저 누리며 살았다. 그리고 이제는 그것이 부끄러워졌다. 그저 자연을 즐기고 사람들을 지켜보며, 세상을 내려다보며 내심 자신이 마치 세상의 모든 이치를 깨달은 현자인 마냥 우쭐댔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유유자적 신선놀음이나 하며 그가 축적한 그의 깨달음은, 그의 지식과 그가 평생 경험했던 모든 것은, 무엇하나 이루지도, 그 누구에게도, 그 어떤 의미도 되지 못했다. 하루에도 제 좋을 대로 몇 번씩이나 노을을 봤던 것에 죄책감마저 들 정도였다. 반면 나뭇잎은 한평생을 한 가로수의 일부분으로서 꼼짝도 못 하고, 세상 구경은커녕 자신의 길목 너머조차도 구경해 본 적 없었다. 나뭇잎은 오로지 자신의 나무를 위해서, 그것만을 자신의 행복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것에 대하여 딱히 자부심을 가진 적도 없었다. 나뭇잎의 삶은 빌딩과 빌딩 사이에 있었다.
대찬 비가 몇 날 더 오고 거센 바람이 불며 태양이 점점 식어갔다. 나뭇잎은 어느덧 생기를 잃고 가지에 간신히 매달려있었다. 길 건너편의 장미들은 이미 진작에 호들갑을 떨며 벌써 겨울 준비를 시작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나뭇잎과 같이 가지에 매달려 함께 열심히 했던 동료 잎들 대부분도 이미 작별을 고하며 낙엽이 되어 땅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자신 역시 더 이상 나무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아주 잠깐이라도 더 붙어있고 싶지 않았다. 나뭇잎은 자신 없이 겨울을 맞이해야 하는 나무에게 조금이라도 빨리 짐을 덜어주고 싶었다. 정말이지, 미련스러울 정도로 나무만 생각하는 나뭇잎이었다. 나뭇잎은 놀라울 정도로 의연했고 싱싱했던 자신의 지나간 젊음에, 그 푸름에 일말의 미련도 없었다. 그만큼 후회 없이 치열한 삶을 살았다고 스스로 생각했으리라. 그럴 자격이 있는 잎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태양이 자신의 등 뒤 빌딩 위로 지는 것을 느끼며, 아주 담담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낙하했다.
병적으로 동쪽에서만 뜨는 야속한 태양은 하루도 예외 없이 가로수 옆을 꽉 막고 선 빌딩 뒤로 졌다. 나뭇잎은 매일매일 평생을, 태양이 앞에 있는 빌딩 위로 떠서 뒤에 있는 빌딩 뒤로 지는 주어진 시간 동안 그저 열성을 다해 광합성을 했을 뿐이다. 그렇다. 나뭇잎은 단 한 번도 그 빌딩 뒤로 펼쳐지는 붉은 석양을 보지 못한 것이다. 그럴 수는 없다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구름은 생각했다. 구름은 말라비틀어지도록 최선을 다해서 살았던 그 나뭇잎이, 자신은 하루에도 몇 번이고 좋을 만큼 보았던 노을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한다는 것이 안타까워서 견딜 수 없었다.
그래서 구름은 비가 되어 내렸다. 떨어진 나뭇잎을 위하여. 자신도 빌딩과 빌딩 사이로 떨어지기로 결심했다. 차마 사람들에게 밟히거나 혹여 바람이라도 불어 차도로 날아가게 그냥 둘 수는 없었다. 결국은 그렇게 되겠지마는, 그전에 마지막으로 보여주고 싶은 게 있었다. 꼬부랑 낙엽이 된 나뭇잎은 괜찮다고, 나를 가여워하지 않아도 된다고, 그 쪼그라들고 메마른 손으로 한사코 손사래를 쳤다. 괜찮다고, 나뭇잎은 진심으로 구름에게 말했다. 자신은 한 번도 나무를 위해 희생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노라고,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니라고. 오히려 자기는 자신의 행복을 오롯이 나무에게 맡겨버린 비겁자일지도 모른다고. 하지만 구름은 막무가내였다. 추적추적 내리던 구름은 이내 한 방울의 망설임 없이 세차게 장대비로 내렸다. 사람들은 갑자기 쏟아지는 여우비에 양손등으로 머리 위를 가리고 허겁지겁 건물 안으로, 차 안으로 사방팔방 뛰어들어갔다. 비는 이내 얕게나마 물길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고, 나뭇잎을 자기 위에 업은 뒤 밑으로, 밑으로, 골목의 끝을 향해 흐르기 시작했다.
나뭇잎은 영문도 모른 채 물 위에 둥둥 떠내려 가면서 어쩔 줄 몰라했다. 구름은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낙엽이 된 나뭇잎도 어차피 더 이상 기력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기 때문에 비가 되어 흐르는 구름에게 그저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구름 역시 자신의 의식이 조금씩 흐릿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지만 최선을 다해 자신을 잃지 않으려 하고 있었다. 적어도 나뭇잎을 그곳까지 데려다 주기 전까진 자아를 붙잡고 있어야 한다.
여기저기 살짝씩 모서리가 튀어나와 있는 보도블록들이 꽤나 성가셨지만 구름의 물길은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열심히 피하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하늘에서 보던 올곧고 마냥 가지런하기만 하던 이 길이 이렇게나 울퉁불퉁할지는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 골목의 끝에 거의 다 왔다고 생각했을 때 전봇대가 앞을 가로막았다. 아뿔싸, 젖은 나뭇잎이 전봇대에 찰싹 붙어 버리고 말았다. 구름은 이미 형태를 잃고 거의 다 쏟아져 가고 있었다. 그저 이곳저곳을 조금이라도 더 편하게 다니고 싶다는 이유로 덩어리를 키우는데 전혀 관심이 없었던 자신의 지난날이 너무나 한심했다. 하지만 지금 후회나 하고 있을 수는 없다. 나뭇잎의 생명은 거의 다해가고 있었다. 이미 정신을 잃은 듯했다.
하늘이 점점 붉게 물들고 있다. 시간이 없다. 더 많은 비가 필요하다. 자신의 한 조각도 남기지 못할 수 있다는 각오는 처음부터 되어있었다. 구름은 혼신의 힘을 다해 자신을 끝까지 쥐어 짜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본인도 놀랄 정도로 세찬 비가 되어 다시 한번 쏟아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기회였다. 굵은 빗줄기로 전봇대를 사정없이 때렸고 흘러내린 빗물이 나뭇잎을 떼어냈다. 됐다!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왔어. 거의 다- 나뭇잎에게 하는 말인지, 자신에게 하는 말인지, 이제는 거의 끊어질 듯한 의식의 실을 간신히 붙잡고, 구름이 마치 주문을 외듯이 반복했다. 그리고 기어이 나뭇잎을 데리고 도착했다, 골목의 끝에. 그리고 딱 타이밍 좋게 비는 그쳤다. 구름은 비로소 완전히 다 쏟아졌다. 구름은 이제 구름으로서의 형태는 한 줌도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구름은 이제 「완벽하게」 구름이 아니게 됐다. 시간이 지나고 언젠가는 다시 하늘로 올라가 구름이 되겠지마는, 「그」 구름은 다른 물들과 섞이고 증발하는 과정을 거치는 동안 「이번」 구름으로서 쌓았던 모든 사색과 추억을 완전히 잃게 될 것이다. 혹여 또다시 노을을 좋아하는 구름이 된다 해도, 자신이 예전에도 노을을 좋아하는 구름이었었다는 것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사실 많은 부분이 이미 희미해지고 있다.
구름은 나뭇잎을 깨웠다. “자, 나뭇잎, 저기를 좀 봐.” 나뭇잎이 꺼져가는 자신의 생명의 불씨에 마지막 남은 숨을 후 하고 힘겹게 내쉬었다. 그리고 하늘을 보았다. 골목의 끝에는 평생 동안 자신의 등 뒤에 있던 빌딩 대신 지금껏 한 번도 보지 못했던 나머지 반쪽의 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었다. 그리고 태양이 저 멀리 지평선 뒤로 지는 것을 보았다. 자신의 생에 첫 석양이었다. 그 주변으로 붉게 물드는 노을을 이렇게 제대로 마주한 것은 처음이었다. 나뭇잎은 노을이 정말로, 정말로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나뭇잎은 매우 기뻤다. 구름도 매우 기뻤다.
갑작스럽게 몰아쳤던 비가 그치자 사람들이 다시 하나 둘 밖으로 나왔다. 하늘에는 무지개가 떠있었다. 모두들 그 무지개가 참 예쁘다고 생각했다.
어째서 첫 이야기가 빌딩과 빌딩 사이에서였고, 구름과 나뭇잎에 대해서였는가 하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그가 어젯밤 하루 종일 빌딩과 빌딩 사이를 헤매면서 본 거라곤 모든 것이 사라진 세상에 홀로 우뚝 서 있는 나무들과 끝없이 제자리걸음을 하는 구름뿐이었으니까. 물론 그가 겪었던 그 악몽 같았던 경험과는 전혀 다른 내용과 분위기의 글이 나왔지만-.
심장이 기분 좋게 두근거렸다. 얼핏 봐도 여러 문장이 깔끔하지 못하게 군더더기가 있었고 매끄럽지 못한 부분이 군데군데 보였다. 그것은 어쩌면 <다소다>의 어법일지도 모른다. 어떤 문단은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아예 싹둑 잘라내는 편이 나을지 고민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럼에도 일단은 글을 오랜만에 썼다는 스스로가 대견한 감정, 그리고 글이 썩 괜찮은 것 같다는 뿌듯한 감정 두 개가 적당히 섞여 주원은 약간 흥분한 상태였다. 어느덧 시계는 새벽 두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가벼운 외투를 대충 걸치고 슬리퍼를 신고 1층 밖으로 나갔다. 찬 가을 공기가 발목을 휑하니 훑고 지나갔다. 외투의 왼쪽 주머니에서 <팔리아멘트> 한 개비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여 깊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집 앞의 거리엔 아무도 없었지만 저 멀리 대로를 지나가는 차 소리가 들렸다. 벌레들도 잘은 모르지만 귀뚜라미라던가 하는 것들이 제대로 울고 있었고, 가로등 아래에서도 그 불빛을 태양이나 달로 착각한 것들이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고 으레 그렇듯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쳐다본 하늘 위에 달은 어제보다 아주 살짝 더 컸고 그 밑을 지나가는 구름은 위치를 갑자기 바꾸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아마도 지하철 역시 오늘밤은 제자리걸음을 하거나 하는 일은 없었으리라고 주원은 생각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좋았던 기분은 아무래도 오래가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