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안지안 Sep 26. 2024

O

이어지는 이야기 3

    틈만 나면 무의식적으로 밤하늘에 달을 쳐다보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그날 밤」에 있었던 일 자체가 유정에게는 그다지 유난스럽게 다가오지는 않은 듯했다.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그래 보였다. 어쩌면 아직도 그녀에게는 그날 밤의 일이 현실적으로 와닿지 않고 있는 중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녀는 그날 밤 이후 바로 다음 날에도 여전히 오후 두 시에 화실에 나갔고 자정이 넘어서 집에 돌아왔다. 집으로 오는 길의 편의점엔 그 시간의 아르바이트생이 태연하게 일을 하고 있었고, 약간은 고민을 했지만 결국 엘리베이터도 탔다. 엘리베이터는 잘만 오르락 내리락 했다. 어쩌면 오히려, 그날 그 시간이 「그저 그런 일」이 되는 게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냥 혼자 묻어두고만 있는 것이다. 구태여 입 밖으로 꺼내서 타인에게 부정당하게 되면 그것이 진짜로 있었던 일이라고 믿는 자신이 흔들릴까 봐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유정은 자신의 그림에 더더욱 매진했다. 그전까지 지난 몇 개월을, 그녀는 새하얀 캔버스가 올라간 이젤 앞에 넋 놓고 앉아만 있었다. 그림을 시에 비유하자면, 시상이 도무지 떠오르지 않는 것이 이유였다. 보통의 화가들은, 특히 페인터들이라면, 어느 정도의 경지에 이르게 되면 그때부턴 자신만의 기법을 정하여 그것을 자신의 아이덴티티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인 일이었다. 하지만 유정은 그것을 아직 이루지 못했다. 절대로 그녀의 그림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녔다. 오히려 반대였다. 그녀가 특정한 도구나 터치, 혹은 기술을 고집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그녀의 다재다능함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 차라리 딱 하나만 월등히 잘했다면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을 것을, 그 무엇으로도, 그 어떤 스타일로도 곧잘 그려내는 유정으로서는 한 가지 기법에 정착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정착을 한다면, 그것이 왜 자신을 대변하는 스타일인지 스스로 납득할 만한 이유를 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 전속 갤러리가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녀의 그림 실력 덕분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녀는 자신만의 미술적 철학을 아직 구체화하지 못했다.


어떤 날은 화실에서 하루종일 있으면서 제발 캔버스에 획이라도 하나 그으려 해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그런 날은 그저 윤상의 노래를 틀어 놓고 사색에 잠겨있다가 집에 올 뿐이었다. 그리고 와인을 마시는 거다. 아무리 축축이 그녀의 간을 적셔도 유정의 머릿속은 영감이 쏙 말라버린 건조한 겨울의 방 같았다. 아니, 밤새 방 안의 습기를 모두 빨리느라 모든 면적의 털 끝을 바싹 세운채로 카펫같이 딱딱하게 굳어버린, 아주 바싹 마른, 한 방울의 영감도 짜낼 수 없는 겨울 아침의 수건 같았다. 그 무엇이라도, 단 한 병의, 한 잔의, 한 모금의 영감이라도 주어진다면, 유정은 두 눈을 감고 그것으로 가능한 한 천천히, 목구멍의 최대한 많은 면적을 축이며 그녀의 의식의 씨앗을 적시고 어떻게든 흐름에 꽃을 피워내리라 다짐하고 있었다. 그렇게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그녀에게 사건이 드디어 터졌던 것이다. 「그날 밤」 이후, 마치 그날의 달처럼, 하나의 영감이 드디어 그녀 의식 위로 떠올랐다. 그리고 그것은 「그날 밤」의 어둠처럼 그녀를 잠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바로 「밤」이었다.


밤은 언제나 도사리고 있는 것이라고 그녀는 생각하게 되었다. 세상은 원래는 언제나 밤이라는 것이다. 태양이 빛을 비추는 동안을 사람들은 낮이라고 부르지만, 그것이 퇴장하는 순간 세상은 순식간에 다시 밤으로 뒤덮이게 된다. 그렇기에 세상은, 기본적으로, 어둠이다. 어둠이, 밤이 이 세상의 「기본값」이다. 그러한 어둠을 유정은 그날 밤 직접 목격하였다. 세상은 밤 그 자체였고, 달은 실눈을 뜨고 그 어둠을 확인시켜 주었다. 그러니 「빛은 어둠 속에 존재한다.」 그것을 유정은 자신의 그림에 담기 시작했다.


유정은 걸신에 들린 사람이 음식을 탐하는 듯한 기세로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캔버스 위에 사전 스케치나 에스키스도 없이 단번에 어둠 속에서 조용히 빛나는 다양한 것들을 그렸다. 휘청이는 촛불, 구름에 가려진 달과 별, 거리의 식어가는 가로등, 항상 켜진 채로 있는 거실의 주황색 조명, 밖에서 바라본 아파트 창문, 그런 것들을. 그리고 그 빛들은 마치 어둠과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분명히 빛나고 있지만 어느 새라도 당장 꺼져버릴 것처럼 위태롭게, 하지만 생동감 있게 캔버스 위에서 번지고 있었다. 작업이 계속될수록, 밤을 칠한다는 것은 어둠을 표현하는 것만큼이나 빛을 표현하는 작업이라는 것을 유정은 이해하기 시작했다. 빛을 그려야지만 어둠을 그릴 수 있었다. 그녀는 빛으로 어둠을 빚었다. 언제든지 잡아먹힐 듯한 빛으로. 죽음이 곧 삶을 증명하는 것처럼, 빛과 어둠의 두 개념이 서로가 공존하지 않으면 둘 중 하나도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을 입증이라도 하려는 듯이 그녀의 그림에는 그 어떤 실루엣도 없었다. 경계선이 없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가 모호하게 뒤섞였다. 둘은 이어져 있었다. 결국 둘은 하나였다.


본격적으로 작업을 시작하고 고작 열일곱 번의 밤이 지났을 때, 유정은 무려 다섯 개의 완성된 작품을 그녀의 차에 실었다. 갤러리에 그림을 가져가기로 한 날이었다. 연말에 있을 갤러리의 그룹전에 전시되기로 한 「아티스트 지유정」의 그림은 총 세 작품이었다. 소속된 모두가 최소한 다섯 개씩 올리기로 한 것을 생각해 보면, 유정만 세 개로 정한 것은 「시상」이 떠오르지 않아 헤매고 있는 그녀를 위한 대표의 배려였다. 하지만 「그날 밤」은 그녀에게 다섯 개의 작품을 내려주었다. 사실 작업은 그 다섯 개 이후로도 동시다발적으로 쉴 새 없이 진행되고 있었다.


유정은 오랜만에 자신의 운전대를 잡았다. 그녀는 2005년식 민트색 볼보 S70 R 기종의 왜건을 몰고 다녔다. 서울의 길에서는 정말 둘도 보기 힘든 모델이었는데, 꽤 오래된 연식에 비해 겉과 속이 모두 아주 관리가 잘 된 차였다. 그리고 그것과 별개로 언뜻 보기엔 정말 그녀와 어울리지 않는 박시한 차이기도 했다. 유정이 어렸을 때 화가를 한다고 처음 말 했을 때부터, 그녀에게 첫차로 물려줄 요량으로 그녀의 아버지가 산 차였는데, 그것이 그 차가 민트색인 이유였다. 그게 아니었다면 누가 봐도 무난하게 실버나 블랙 같은 무채색 계열이 잘 어울렸을 법한 차였다. 물론 그녀는 왜건이 싫었고 심지어 민트색도 맘에 들지 않았지만, 자신을 생각해서 고르고 골랐을 아버지가 실망할까 봐 싫은 티를 내지 않으려 많이 노력했었다. 그리고 지금에 와서는 자신의 볼보를 많이 애정하고 있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의도했던 대로, 여러 가지 재료나 장비를 실어야 하는 그녀는 아주 실용적으로 이 왜건을 아직도 잘 타고 있었다. 그녀의 이미지가 민트색과 어울리는 것은 아녔지만, 오랫동안 그녀 옆에 있었던 이 차는 이제는 유정을 아는 누구나 그녀를 바로 떠올리게 했다.


「그날 밤」 이후 많은 밤들이 지났다는 것이 새삼 실감이 났다. 날은 이미 많이 짧아져 오후 7시만 되어도 밖은 어두컴컴해졌다. 달은 다시금 완연하게 차올랐고 차오른 그만큼 요즘은 그때처럼 어둡거나 무겁거나 한 기색은 없었다. 하지만 밀물이 들어온 만큼 썰물이 빠지듯이, 달이 차올랐다면 역시나 딱 그만큼 다시 꺼질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날 밤 있었던 일 역시 반드시 또 일어날 것이다. 그것이 달의 모양과 직접적인 관계가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것이 당연히 마지막일리는 없다는 생각이 유정에게 막연히 들었다. 어쩌면 그날이 처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둔감한 유정이라면 몇 번이라도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보냈을 법도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였다. 달은 시치미를 뚝 떼며 간격을 유지한 채 옆에서 그녀의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한남동의 갤러리에 도착한 것은 밤 8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유정의 민트색 볼보가 앞에 차를 대자 담당인 이수연 매니저가 타이밍 좋게 갤러리의 문을 활짝 열고 나왔다. 열어놓은 문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박시현 대표도 와있었다.


“안녕하세요, 작가님.” 수연이 또각또각 유정에게로 다가오며 방긋 웃는 얼굴로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매니저님.” 유정 역시 최대한 밝은 얼굴로 수연에게 인사를 건넸다.


“지난주에 화실로 찾아뵈려고 했는데.” 그런데 당신이 전화를 받지 않아 가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아, 죄송해요. 그날따라 작업이 좀 잘되어서…” 흐름이 끊기질 원치 않았다는 뜻이었다.


“아이고, 그럼요. 작가님 작업하시는데 제가 도움은커녕 방해라도 되면 안 되죠.” 딱히 가시가 있는 말이 아녔다. 수연은 내성적인 유정을 잘 이해하고 있었다.


“죄송해요.” 유정이 트렁크를 열며 말했다.


“에이, 아니에요. 다음에 카라멜 프라푸치노 벤티로 사가지고 놀러 가겠습니다. 어머, 작품을 다섯 개나 가져오셨네요?” 유정을 도와 캔버스를 트렁크에서 꺼내며 매니저가 말했다.


“어서 와 유정씨.” 박시현 대표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반갑게 맞아주었다. 긴 생머리를 포니테일로 묶고 얼핏 봐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검은색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몸에 딱 맞아서 대표의 굴곡진 몸매가 다 드러났다. “오랜만이네, 얼굴이 좀 상했다.”


“그러게요, 밝은 데서 보니까 살이 좀 빠지셨는데요.” 수연이 걱정하는 투로 말했다.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자기?”


“괜찮습니다.” 유정이 담담히 대답했다.


유정과 대표가 큰 의미 없는 담소를 나누는 사이 어느새 수연이 차를 내왔다. 로즈힙 향이 났다. “대표님 한 잔 더 드릴까요?”


“아니야, 난 괜찮아요. 작품 좀 여기 걸어줘.”


아무리 덤덤한 유정이라도 이 순간만큼은 매번 긴장이 되었다. 자신의 작품을 남에게 보일 때면 언제나 그랬다. 세월이 지난다 해도 과연 그것에 무뎌질 수 있을까. 흰색 면 장갑을 낀 수연이 발포지를 능숙하게 차례로 벗기자 작품의 짙은 속살이 조금씩 드러났다. 수연의 눈이 휘둥그레지며 그녀도 모르게 살짝 탄식을 했다.


“와-.”


그리고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한 채, 수연은 조심스레 그림을 벽에 걸은 뒤 몇 발짝 옆으로 물러섰다. 여자 셋이 앞에 놓인 그림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유정은 사실 약간 뒤에서 대표와 매니저의 얼굴 표정을 번갈아가며 힐끗 살피고 있었다. 한동안 이어진 침묵을 깨고 대표가 유정에게 말했다. 시선을 그림에게 떼지 못한 상태로였다.


“자기,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이전 14화 O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