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의 세계 2
유정이 이 푸른 눈의 고양이에 대해서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를 잠시 고민했다. 어디서부터 해야 할까.
아마도 이 고양이에게 동네 편의점 앞에서 밥을 줬던 것부터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이 고양이는…” 유정이 어느새 한쪽 무릎을 굽히고 앉아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있는 주원에게 말했다.
“원래 제가 사는 동네에서 오고 가다가 가끔씩 보이던 고양이인데요. 오늘 오는 길에 집 앞 편의점에서 마주쳐서 먹이를 좀 줬더니 그때부터 갑자기 따라오기 시작했어요.”
“그러니까요, 간택당하신 거예요.” 주원이 여전히 고양이를 만지며 말했다.
“그건 그런데… 저를 따라서 무려 버스까지 탔어요.”
“네?” 주원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고양이를 만지던 손을 멈추고 유정을 쳐다보았다.
“처음엔 저를 따라왔는지도 몰랐어요… 제가 버스에 타서 자리에 앉았는데 거기까지 따라와서는 제 무릎에 폴싹 앉아버렸어요. 너무 놀라서 비명도 못 지를 정도였죠.”
주원을 보니 그도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다행히 그땐 버스가 비어있어서 아무도 뭐라 안 했는데… 그다음부터 타는 사람들마다 제 고양이인줄 알고 귀엽다 그러고 신기하다 그러고……. 그러니까 저도 내릴 때 고양이를 버스에다 두고 내릴 수는 없으니까 일단 데려오긴 했는데……. 데려온 것도 아니에요. 물론 그렇다고 제가 거기다 그대로 두고 오지도 않았겠지만, 정류장에서부터 여기까지도 저를 졸졸 따라오더라구요.”
“그러고선 지금 여기 떡하니 있는 거예요?” 주원이 말했다.
“넵… 떡하니…….”
고양이는 어느새 밥그릇이 놓인 구석으로 돌아가 그릇에 담긴 물을 할짝이고 있었다.
“여기 온 뒤로는 여기저기 냄새를 맡고 다니더니 한참 자다가 방금 일어난 거예요. 고양이들은 코가 좋아서 이 안에 있기엔 유화냄새가 진동을 할 텐데.”
“제가 언젠가 책에서 읽었는데, 고양이는 자기가 정 싫으면 참지 않는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러니까 본인이 여기 붙어있는 거면 괜찮으니까 있는걸 거예요.” 주원이 다시 고양이에게로 시선을 돌리면서 말했다.
“그래도 벌써 그릇이랑 통조림이랑 다 내어주셨네요.”
“네, 급한 대로 구해왔죠. 내쫓을 수는 없으니까…….” 유정도 고양이를 보며 말했다. 고양이는 마치 귀를 쫑긋 세우고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집으로 데려가실 건가요?” 주원이 물었다.
“생각을 해봤는데, 일단 여기에 둬보려고요. 어차피 저는 여기 있는 시간이 더 길기도 하고요.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아마 치지 않을까요?” 주원이 웃으면서 말했다. “고양이니까.”
“네, 그래서 일단 작업한 것 들은 좀 안에 넣어놨어요.. 다행히 그 외에 잡다한 물건들은 거의 없으니까.”
“오늘 작업은 그럼 이제 다 끝나신 건가요?”
“아, 네, 네.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유정이 스탠드 행거에 걸려있는 코트를 집어 들어 입으며 말했다.
“아닙니다. 제가 갑작스럽게 연락드렸는데 만나주셔서 감사하죠.”
유정은 고양이의 그릇에 담긴 물과 사료를 체크한 뒤 작업실의 무거운 철문을 쿵 하고 닫은 뒤 걸어 잠갔다. 요즘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열쇠로 열리는 잠금장치였다. 그러고선 건물 밖 외벽의 왼쪽으로 돌아 들어가 창문으로 안에 있는 고양이를 두 눈으로 확인했다. 고양이는 타이머를 맞춰놓은 전기난로 앞에 얌전히 앉아 창문 밖의 그녀와 두 눈을 맞추고 있었다. 마치 ‘걱정 말고 가셔라’라는 것 같았다. 유정은 짧게 한숨을 후 쉬고 뒤돌아 걸어 나왔다.
“걱정되세요?” 남자가 물었다.
“네, 아무래도. 저 혼자 뭘 키워보는 건 처음이라서요.” 유정이 대답했다.
“괜찮을 거예요. 고양이는 자립심이 강한 동물이니까요. 이름은 있나요, 고양이?”
“이름…은 잘 모르겠어요.”
“하나 지어주셔야겠네요.” 주원이 말했다.
“글쎄요… 아직 어떻게 해야 할지를 정하지 못해서요. 제가 데리고 있어도 될지, 여기에서 키워도 될지…” 유정은 무언가를 책임지고 기르거나 키우는 게 익숙지 않은 인간이었다.
“제가 보기에 그런 건 아마 고양이가 직접 정할 것 같은데요? 자기가 유정씨 옆에 있을 건지, 자기가 거기에서 지낼 건지, 본인이 아마 알아서 정하지 않을까요?”
“저한텐 아무런 선택권이 없는 건가요.” 유정이 웃으며 말했다.
“귀엽잖아요. 어쩔 수 없죠. 이 추운 겨울에 안에 있겠다는 고양이를 길바닥에 내쫓을 수 있는 사람인가요 유정씨는?” 주원 역시 웃으며 말했다.
“아니죠, 아니죠…….”
둘의 대화와 텐션은 고양이로 인해 부쩍 자연스럽게 되었다.
주원의 안내로 도착한 곳은 어느 동네에나 있을 법한 크게 특별하지 않은 호프집이었다. 유정은 이런 곳이 긍정적으로 나쁘지 않았다. 적어도 예전에 그 <쥬니방가이>보다는 훨씬 나았다. 안에는 아저씨들이 그득했고, 마른안주나 과일화채 같은 것을 앞에 두고 생맥주나 소주를 마시고 있었다.
“여기 괜찮으세요?” 주원이 약간 눈치를 보듯이 유정에게 물어보았다.
“아, 네 그럼요. 좋아요.” 유정이 대답했다.
“제가 밖을 잘 안 돌아다녀서요.”
그게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유정은 대충 남자가 자신을 좀 더 화려한 곳으로 데려오지 못했다는 것을 겸연쩍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저 이런 감성 좋아해요.” 유정이 그를 거의 달래주듯이 말했다. 그리고 그건 진심이었다. 그녀는 너무 감각적이거나 화려한 것엔 크게 혹하지 않았다. 오히려 예전부터 그런 것들로 자신의 환심을 사려했던 남자들에겐 괜한 거부감만 들었었다. 물론 자신에게 잘 보이려 애쓰는 게 잘못된 건 아니었다. 다만 그 방식이 좋은 외제차에 고급 레스토랑이라는 게 그녀에겐 오히려 촌스러운 부분이었다. 그녀가 좋아하는 건 자연스러움이고 그녀가 사랑하는 건 자연이었으니까.
둘은 적당한 곳에 자리를 앉고 생맥주 두 잔과 감자튀김을 주문했다.
“죄송해요 제가 저녁을 먹은 지가 얼마 안 돼서.” 유정이 주원에게 말했다. 애초에 저녁을 먹을 수 있을만한 곳을 제안했던 주원이었다.
“아닙니다. 저도 점심을 늦게 먹어서 이 정도가 딱 좋습니다.” 주원이 대답했다.
잠시의 적막을 깨고 주문했던 음식들이 나왔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맥주잔을 부딪치며 둘은 요란하지 않게 짠을 했다. 주원이라는 남자는 담담히 자신의 대한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MBTI, 자신의 직장, 편집자라는 직책에 대하여, 그것의 아이러니함과 애매함에 대하여, 그리고 그날, <쥬니방가이>에서 마주쳤던 날 그가 같이 있었던 민재라는 친구에 대하여. 남자는 남자로서 크게 흠이 없는 괜찮은 남자였다. 성격은 차분했고, 말투는 빠르지 않았다. 오히려 말이 약간 느린감이 있어서 듣는 이로 하여금 그의 말에 집중하게 하는 묘한 힘이 있었다. 사뭇 신중한 표정을 지으며 하나하나 단어 선택을 해가며 말하는 것이, 그가 말을 허투루 하지 않는 사람이라는 것을 유정은 알 수 있었다. 청산유수의 반대말이 있다면 그게 그의 어투였다. 그는 가장 최소한의 단어 조합으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데에 일가견이 있는 것처럼 보였다. 퍽 신뢰가 가는 사람이었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믿음이 갈 수밖에 없다.
그가 민재라는 친구에 대해서 얘기를 할 때 자연스럽게 그가 보육원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그 부분에 있어서는 본인도 말을 해놓고 살짝 당황한 것처럼 보였다. 아마도 그것에 대해서 얘기를 해야겠다 말아야겠다는 생각 자체를 안 해봤다가 불쑥 튀어나와 버린 것 같았다.
그는 입을 꾹 닫고 손에 들린 그의 맥주잔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할 말을 찾는 듯 보였다. 그리고 이내 입을 열었다.
“저는 보육원에서 태어난 것이나 다름이 없어요.”
유정은 아무 말도 않고 잠자코 그를 바라보며 그의 말을 듣고 있었다.
“보통 그곳에 오는 아이들은 대부분 부모의 얼굴을 어렴풋이나마 기억을 해요. 대한민국 보육원에 입소하는 아이들의 평균 연령은 대략 8세에서 9세 정도라고 해요. 물론 구체적인 수치는 보호소의 종류나 지역에 따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지만… 보통은 그렇다는 거죠. 저같이 아예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시설에 맡겨지는 경우는 매우 드물죠. 민재라는 친구도 제가 있던 보육원에 9살에 들어왔으니까요. 그래서 저는 그곳이 처음부터 집이었어요. 저에겐 그곳에 계신 보육사 분들이 제 부모님이시고, 그곳에서 같이 자란 친구들이 제 가족인 샘이었죠.”
주원이 들고 있던 맥주로 한 모금 목을 축이고 다시 말을 이어갔다.
“종종 적응을 못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부모에게 버려졌다는 배신감, 상처가 있었겠죠. 민재도 처음엔 그랬어요. ‘이곳엔 잠시만 있는 거다. 언젠간 다시 부모님과 함께 살 수 있는 날이 올 거다.’ 어떤 경우엔 보육원에 있게 된 걸 오히려 좋아하는 애들도 있었어요. 그만큼 그전에 같이 있었던 「가족」이라고 했던 곳이 그만큼 안 좋았던 거겠죠. 어떤 쪽이든,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을 해야 하죠. 규칙과 질서를 새로 받아들여야 해요. 하지만 저에게 그곳은 유일한 집이었고 저의 세계의 전부였어요. 그 「이전」의 가족의 개념은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곳에서 익혀온 체계는 어렸을 때부터 익혀오며 자랐고 아직도 제 큰 단면이에요.”
주원은 숨을 크게 한 번 들이키고 맥주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 유정이 자신의 잔을 그에 가까이 가져갔다. 주원은 그녀의 잔에 가볍게 짠을 하고 맥주를 들이켰다.
“어디 보육원에 계셨어요?”
“어디 보육원이요?” 주원이 유정의 질문에 약간 당황한 듯했다.
“아, 저도 보육원 출신이라서 여쭤봤어요!” 유정이 급하게 말을 더했다.
“「출신」이라는 게 부적절한 표현인진 잘 모르겠지만.”
“유정씨가요?” 주원이 눈이 휘둥그레져서 말했다.
“네, 저도 아주 아기였을 때 맡겨졌대요. 제 원래 부모님 얼굴은 전혀 알지도 못해요.”
뭘까. 이 사실이, 보육원 출신이라는 게, 의미하는 바가 과연 뭘까. 그 사실로 인해 둘은 「그날 밤」을 겪은 것일까? 주원의 친구 민재라는 사람은 같은 보육원 출신임에도 전혀 그 낌새를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주 어렸을 때 시설에 맡겨졌다는, 그러니까, 부모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것이 어쩌면 관건인 것일까. 부모에 대한 정보가 없다는 것은, 아주 저 위에서부터 내려와 자신에게 주어진 DNA의 여태까지의 행보, 혹은 출처가 끊긴 것과 같은 것이다. 자신과 주원이라는 이 남자의 「기원」은 어쩌면 남다른 것일까? 말 그대로 「출생의 비밀」이 둘을 갑자기 한 묶음으로 묶어버렸다.
유정은 자신의 부모님을 문득 떠올렸다. 물론 생물학적 부모님이 아닌 자신을 키워준 부모님을. 유정에게는 그 둘의 차이가 거의 없었다. 겨우 여섯 살 때 두 분께 입양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유정이 조금만 더 어렸다면 어쩌면 두 분은 아마도 영원히 자신의 딸에게 입양에 관한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유정은 평생 몰랐을 것이다. 마침 온 가족이 전부 다 A형인 데다가, 셋이서 같이 있으면 누가 봐도 부모와 딸일 정도로 유정은 그들을 닮았다. 특히 엄마를. 하지만 애석하게도 여섯 살은 그 전의 기억을 잊을 정도로 적은 나이는 아녔다.
그 사실을 딱히 의식하며 살지 않았다. 자신이 아주 어렸을 때, 기억이 나던 시점부터 이미 시설에 맡겨져 있었다는 점은 물론 잊혀지지 않았다. 다만 그때 그곳에서의 기억도, 그곳에서 처음 부모님을 만났던 순간도, 그리고 그들과 가족이 되어 함께 살게 됐던 즈음도, 모든 게 기억이 가물가물했다. 그 거의 모든 것들이 그저 어렴풋한 「팩트」이자, 어렸을 때 있었던 일일 뿐, 그것을 언제나 생각하며 살지 않았다.
“그 사실이…” 주원이 유정의 얼굴을 살피며 말했다.
“그게 「그날 밤」과 「연관성」이 있을까요?”
글쎄, 둘의 특이하다면 특이한, 조금은 남다른 「출생의 비밀」이 그들에게 초자연적이고 기이한 일을 겪게 하는 촉매제가 될 수 있었을까? 아니지, 엄밀히 말해서 비밀은 아니지. 비밀이라기 보단, 미스테리지. 그들의 부모들은 그들을 낳았고, 아마도 거의 태어나자마자 보육원에 맡겨졌다. 그것의 어느 부분도 비밀은 없다. 그저, 그들이 ‘누구였는가’와, ‘왜 그랬는가’가 미스터리로 남아있는 것뿐이다. 그리고 유정의 경우엔 그 미스테리에 대해서 살면서 한 번도 진지하게 고민해 봤던 적이 없었다. 그것을 미스테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궁금하지 않았다. 그것은 어쩌면 일종의 방어기제일 수도 있고, 어쩌면 보육원에 있었던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 6살에 부모님을 만났으니 6년이라는 시간을 그곳에서 보낸 것이 맞지만, 그중에서 그녀가 기억할 수 있는 것은 아마도 일, 이년 정도, 체감은 그것보다도 더 짧았으니까.
그런데 그것이 과연 「그날 밤」과 어떻게 연결이 될 수 있을까. 그녀와 주원이 둘 다 보육원에 있었다는 것은 확실히 기가 막힌 우연인 것은 맞았다. 그리고 그것만이라면 아마도 그냥 신기하다며 넘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는 것은, 둘 다 갓난아기였을 때부터 시설에 맡겨져 각자의 부모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는 그 디테일 때문이었다. 보호 시설에서 지냈던 경험이 있는 이들이 모두 「그날 밤」을 겪었을 거라는 상상은 뭔가 와닿는 부분이 없었다. 하지만 ‘부모에 대한 정보가 없는 아이들’이라는 「설정」은 어감도, 그 숫자도 확연히 달랐다. 전국에 몇 명이나 있을까, 자신의 생물학적 부모에 대해서 아무런 정보도 남아있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을까? 수 백 명? 수 천명?
“그러게요… 그저 우연의 일치라기엔 좀 놀랍고, 그렇지만 단순히 우리의 공통점이라고 해서 그것을 「그날 밤」과 연결을 지어버리려는 것도 꽤 비약적이죠.” 유정이 말했다.
“확실히 논리적인 부분이 부족하죠… ‘그게 뭐 어쨌다는 건데’라고 물어본다면 할 말이 없죠.” 주원이 말했다.
“그렇지만 동시에 저희 둘만의 남다르면서 공통적인 부분이기도 하구요.” 유정이 덧붙였다.
“확인해 볼 방법은 있겠네요.” 주원이 무언가 생각이 난 듯이 말했다.
“방법이요?”
“저희의 공통점이요. 그게 우리가 겪은 현상과 연관이 있는지 알아볼 수 있어요. 자신을 낳아준 부모를 모르는 사람들이 우리뿐만은 아닐 테니까요.”
“아…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 직접 물어본다?”
틀린 말은 아녔다. 아니,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하지만… 그럴 수 있는지는 또 다른 문제겠네요. 그 사람들을 찾는 건 그렇다 쳐도, 막상 어떻게 물어봐야 할까요.” 주원이 약간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새삼 둘이 <쥬니방가이>에서 그렇게 만나 그런 식으로 서로를 알아본 것은 참 대단한 일이었다고 유정은 생각했다.
“뭐… 떠볼 수 있는 방법은 좀 있지 않을까요? 최대한 미친 사람처럼 들리지 않는 선에서.” 유정이 살짝 웃음을 띠며 말했다.
“그렇죠. 필요하다면 해야죠. 설령 미친 사람 취급을 조금 받더라도. 이걸 알아내는 것보다 체면이 중요한 건 아니니까요.” 주원 또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이 남자와 그날 마주치지 못했다면 지금쯤 자신은 「그날 밤」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감정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었을까. 혼자가 아니라는 것은 「그날 밤」을 대하는 데에 있어서 얼마나 큰 차이가 있었을까. 이미 혼자가 아닌 둘이기에 혼자였다면 어땠을지를 알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렇지만 짐작건대, 혼자라면 훨씬 더 고독했을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그럼 너는 지금 고독한 감정은 아닌 거냐’ 묻는다면 확실히 ‘자신은 고독하지 않다’고 유정은 말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터놓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더 이상 「그날 밤」은 공포가 아니게 됐다. 정말로 무서웠던 점은 그날의 일이, 자신이 겪었던 것들이, 자신만의 것이라는 거였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그저 자신만의 인식이 아니었다는 「확인」은 그녀의 세계의 근간을 단단하게 지켜주었다. 그녀가 그동안 혼자서 아무리 씩씩했다 해도 말이다. 이제와 알게 된 사실이지만, 그녀가 겪었던 두려움의 본질은 그녀가 자신의 세상을 이해하지 못함이 아니라, 자신의 세상이 이해받지 못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무리 자존감 강한 지유정이라 해도 말이다. 「그날 밤」 이후 그녀는 줄곧 혼란과 공포 속에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자신의 세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계를 확고하게 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게 되었다. 결국 그녀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이 세계가 ‘혼자만의 경험’이라는 것이었고, 이제 이 남자와 공통된 인식을 공유하는 것만으로도 이미 그 공포는 희미해지고 있었다. 인간이 겪는 공포의 본질은 이해받지 못하는 것에 있었다.
둘은 짠을 했다. 벌써 세 번째 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