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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동의 종착 2

by 안지안

바깥의 바람소리가 너무 유난스러워 창밖을 봤다. 미세먼지가 구름의 윤곽선을 흐릿하게 만들어 하늘은 그 어떤 형태도 가지지 못하고, 그저 잿빛으로 동네를 무겁게 짓누르고 있었다. 살색이라는 단어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 것처럼, 하늘색이란 단어도 이제는 없어져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유정은 생각했다. 애초에 색깔의 이름을 다른 명사에게서 빌려다 ‘색’만 붙여서 명명한다는 설정 자체가, 태생부터 아슬아슬한 거다. 주황색이 오렌지색이라면, 왜 빨간색은 랍스터색이라고, 노란색은 피카츄색이라고 하지 않는가? 살이 살색이라면 컴퓨터는 컴퓨터색이고, 의자는 의자색인가? 세상에 어떤 오렌지가 있을 줄 알고 주황색을 오렌지색이다라고 호언장담할 수 있을까. 실제로 지구의 적도에서 따뜻한 햇빛에 잘 익은 오렌지는 엽록소가 충분해 「오렌지색」이 아닌 녹색을 띤다. 그리고 숙성과정에서 차가운 온도에 노출되는 동안 오렌지의 엽록소가 죽어 우리가 보통 오렌지라고 하면 떠올리는 그 오렌지색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오렌지의 색은 「오렌지」색인가 녹색인가.


유정은, 그냥 아주 가끔씩, 그럴 때가 있었다. 절대로 평소에 저런 말을 입 밖으로 내는 스타일은 아녔다. 그냥 생각을 하다 보니 그렇다는 것이다. 일상생활 중에 저런 식으로 까다롭고 피곤한 스타일로 말하고 행동하는 스타일이 절대 아니었다. 누군가가 오렌지색이라는 말을 써도 아마 별생각 없이 지나갔을 것이다.


어쨌든, 오늘 하늘색은 하늘색이 아닌 잿빛이고, 그녀의 살색은 어제보다 아주 조금 더 창백했다. 그래도 이제 해가 있는 때에 출근을 하고, 주말에도 고양이 때문에 잠시라도 화실을 들리기 때문에 그나마 예년의 겨울보단 조금 더 살색에 가까운 모양을 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집에서 여유를 즐기고 있었다. (화실엔 아침 일찍 다녀왔다. 고양이는 아주 잘 있었다. 사실 그는 알아서 화실을 자유롭게 들락날락하고 있는 것 같다.)


창밖에서는, 기이하게도, 비둘기가 마치 부산 바다의 갈매기처럼, 두 날개를 펼치고 바람을 타고 있었다. 비둘기는 사실상 이제 거의 이족보행만 하는 동물이 아닌가 싶었는데. 어쩌면 비둘기는 인간을 동경하고 있는 게 아닐까란 생각도 해봤었다. 그래서 사람인채 하며 최대한 날갯짓을 자제하고, 뒷짐을 지고 사람처럼 걸으며, 사람이 남긴 것을 먹고, 사람들을 졸졸 쫓아다니는 게 아닐까.


하지만 이 비둘기는, 정말이지 갈매기처럼 날개를 쫙 펴고 그야말로 바람을 타면서 공중에 떠 있었다. 어쩌면 자신이 태어나서 본 비둘기 중에서 가장 우아한 모습을 하고 있는 비둘기가 아닐까 그녀는 생각했다. 전체적으로는 하늘색과 비슷한 잿빛을 한 「비둘기색」의 비둘기였고, 눈가와 날개 중간에 초록색과 보라색으로 오묘하게 반짝이는 털을 가진, 그야말로 평범 중에 평범인 서울의 길 비둘기였지만, 그가 바람을 능숙하게 타고 있는 모습의 어딘가엔 그녀를 감탄시키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새들도 나는 게 재밌을까? 인간들은 영화에서 아이언맨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릿한데, 새들 본인도 날면서 짜릿할까? 아니면 사람으로 따지면 그냥 걷는 정도와 비슷한 느낌일까. 하지만 창밖의 이 비둘기는 적어도 지금 이 순간, 비행을 비행 자체로서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딱 봐도 밖에 나무들이 정신없이 휘청이고 바람이 창문을 때리는 소리가 무시무시한데, 비둘기는 마치 큰 파도를 만나 신난 서퍼처럼 강풍을 재주 좋게 타고 있었다.


하늘색이 점점 짙게 뿌예지고 있었다. 미세먼지라고 생각했는데 이건 어쩌면 안개인 걸까. 저 비둘기는 혹시 전생에 갈매기였을까. 그래서 자욱한 안개가 깔리니 전생에 바다 위에서 짙은 안갯속을 가로지르던 게 생각나서 그렇게 갈매기처럼 날고 있었던 것일까. 업보에 따라 무엇으로 환생하는지가 정해진다던데, 갈매기에서 비둘기가 되었다면, 그 갈매기는 과연 착하게 산 걸까, 아님 못되게 산 걸까. 애매하다. 갈매기와 비둘기 중에 어떤 게 더 고귀하다고 할 수 있을까?


그녀는 비둘기에 대해 좋은 선입견을 가지고 있진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과 아마도 비슷한 견해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악담을 하고 싶진 않지만, 비둘기는 사실은 사람들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쥐와 별반 다르지 않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물론 쥐처럼 몰래 숨어 들어가진 않지만, 그렇기에 더 뻔뻔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물론 쥐는 적어도 사람 눈치를 본다. 비둘기는 그런 눈치조차 없다. 사람들 사이를 오가며 거리낌 없이 다가오는 모습이, 그녀에겐 괜히 불편하게 느껴졌다.


그럼 갈매기는 또 뭐 크게 다른가. 비둘기보다야 이미지가 좀 더 좋긴 하겠지만, 그들도 사람들 손에 들린 새우깡만 보면 눈 뒤집혀서 쫓아오는 건 매한가지다. 아마도 이 비둘기는 전생에 새우깡을 어지간히나 많이 받아먹었나 보다. 그래서 환생을 비둘기로 밖에 할 수 없었던 거다. 그저 유람선 꽁무니를 쫓아다니는 것보다는, 좀 더, 멸치라던가 새우라던가 하는 것들을 손수 사냥하며 착실하게 살았다면, 글쎄, 앵무새라던가 공작새 같은 게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물론 앵무새나 공작새가 비둘기와 갈매기보다 더 고등하고 우월한지에 대한 기준점은 그녀가 정하는 게 아니지만, 이미지적으로 그런 이미지라는 말이었다.


주원은 삼척이라는 곳에 출장을 가있다고 했다. 그가 서울에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어딘가 허전함이 느껴졌다. 아마도 근래에 그를 자주 만났기 때문일 것이다.


그의 오늘의 하늘색은 어떤 색일까? 그곳에도 이곳처럼 바람이 세게 불고 있을까? 어쩌면 그곳에서 시작된 바람이 여기까지 온 걸까?


「그날 밤」이 있고 나서 몇 주 뒤 영종도를 간 적이 있었다.


어차피 아무도 없는 집의 문을 최대한 조용히 닫고 밖으로 나섰다. 아파트 복도의 센서등은 최대한 기척을 내지 않으려는 그녀의 의중을 잘 알고 있는 듯, 텅 빈 통로의 어둠에 최소한의 빛만을 섞어 엘리베이터의 버튼이 겨우 보이게끔만 해주었다. 그리고 그에 비해 띵-하고 도착한 새벽 3시 엘리베이터의 요란스러운 벨 소리는 소환한 이를 충분히 민망케 할 만큼 고요한 아파트 복도의 적막을 일말의 고민 없이 날카롭게 찢었다. 엘리베이터는 너무나 해맑게 자신의 문을 열어젖히며 어두컴컴한 복도에 빛을 환히 비추었다. 눈치는 좀 없지만, 그래도 그녀의 부름에 지구의 중력을 거스르고 그녀에게로 와줬음이 약간의 위로가 되었다. 아니, 그것이 위로가 될 정도로 그녀는 그때 힘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얼마나 내려갈지, 얼마나 올라갈지, 결정하기 전까지, 절대로 재촉하지 않고 잠자코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이내 그녀가 결정을 내리자, 묻고 따지는 일 없이 그녀를 직선으로 데려가기 시작했다. 그녀는 지구의 밑으로 가기로 했다. 수직으로 하강하는 엘리베이터에서 그녀의 자의식도 최단거리로 함께 가라앉았다. 딱 지하 5층만큼.


지하 주차장 5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여전히 눈치 없는 띵- 소리는, 마치 동굴의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아마도 자고 있던 차들 중 잠귀가 밝은 몇 대는 필시 그 소리에 잠에서 깨서 짜증이 났을 것이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 어둠과 적요가 다시 주차장의 습하고 퀴퀴한 지하의 공기에 깊게 깔렸다. 그녀의 차는 그녀가 지난번에 세워둔 곳에 서 있었다. 이 세상에 무엇 하나도 당연한 건 없다는, 어찌 보면 당연한 얘기에, 쓸데없이, 필요 이상으로 사로잡혀 불안정한 상태였던 그녀는, 응당 그곳에 있어야 하는 그녀의 차가 당연하다는 듯이 묵묵히 서있는 것에 큰 안도감을 느꼈다.


발소리를 죽이고 그녀의 차로 걸어가는 동안, 아까의 엘리베이터 소리에 깬 차들이 숨을 죽이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는 듯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느냐.’


그녀는 애써 그 시선들을 못 본 척하고 꿋꿋이 걸어갔다. 벌써 지쳐버린 것만 같았다. 차에 타고 문을 닫자, 고요는 한층 더 심화됐다. 마치 그전에는 지구의 공전하는 소리가 우웅-하고 들렸던 것처럼, 그런데 이제는 그 우웅-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된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가 그녀를 커다란 지퍼백에라도 넣은 것처럼, 어쩌면 커다란 공기방울 안에 갇혀있는 것처럼, 그 밤은 진공상태처럼 느껴졌다.


「그날 밤」의 존재를, 그녀는 세상이 그녀를 「배신」한 것이라고 느꼈었다. 그녀는 배신을 당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그녀를 이루는 많은 부분을, 그것의 근간을 흔들고, 무너뜨리고 있었다. 점점 빛과 어둠의 경계가 희미해졌다. 혼돈이라는 단어의 뜻 그대로, 그녀에게 하늘과 땅은 점점 나뉘지 않게 되고 있었다. 더 이상 무엇이 옳고 그른지, 진실과 거짓을 분별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세상의 그 무엇 하나도 확신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만 차의 시동을 거니 시동은 걸렸다.

‘어디로 가야 할까.’

차를 타고 올라온 지상은 지하보다 전혀 밝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쫓아오지 않는데, 그녀는 도망쳤다. 반복되는 무질서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혼란이 반복되니 그것이 질서처럼 느껴지려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무리 이런 상태의 그녀라도, 그것만큼은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누군가가 그저 자신을 따라와 주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혹여 누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지는 않았는지 궁금해서 시작된 몸부림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가 지금 이렇게 도망치기 시작했을 때, 어디선가 불쑥 나타나서 그녀의 떨고 있는 손목을 붙잡고, 어딜 가느나고 물어봐줄 테니까. 혹시 지금껏 내가 혼자가 아니었다면,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알려달라고. 하지만 아무도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아무도 그녀의 도주를 모르고 있었다.


오직 크고 낮게 뜬 달만이 마치 그녀의 보호자인 양 간격을 유지하며 옆에서 묵묵히 그녀의 차를 따라오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배신을 당했다. 「그날 밤」 그렇게 눈을 감고 자신의 밑에서 일어난 모든 일을 방관했던 달이, 이제 와서 그녀의 보호자 일리 없었다.


그녀는 지금껏 그녀와 그녀의 세상은 한 배를 탔다고 생각해 왔다. 그렇게까지 인생을 열심히 살아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존중한다고 생각해 왔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세상에 배신을 당했다는 정념에 사로잡혔고, 배신의 정령에 의해 난파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바다 위에서 표류하고 있었다. 더 이상 자신이 있는 곳이 바다인지 조차도 알 수 없었다. 언제까지나 불 것이라 신뢰했던 바람은 멈춘 지 오래고, 그녀의 믿음의 돛은 갈기갈기 찢겨져 있었다. 더는 노를 저을 힘도 없었다. 흔들리는 마음을 붙잡기 위해, 바다라고 짐작되는 어둠에다 닻을 던졌다. ‘바다이긴 했구나’라고 생각할 수 있었던 것은 공허한 ‘풍덩’ 소리였다.


‘나는 배신을 당했다.’

그것에 대하여 생각을 하면 할수록, 그녀의 마음은 달빛 한줄기 닿지 않는 깊은 바다에 빠진 닻처럼, 끝없이 가라앉았다. 끝없이 하강하는 그녀의 마음은 뽀글뽀글 실의와 체념의 공기방울을 대신 올려 보냈다. 아까 그 지하 주차장에서 느낀 것처럼, 그 공기방울은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했다.


그녀는 배신을 당했다. 닻에 가해지는 무자비한 중력만큼이나, 그것에 대하여 그녀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닻은 언제쯤 바닥에 닿을 수 있을까. 바닥이 이렇게나 깊었던가. 그때쯤이면 이 「밤」이 끝나 있을까. 그때쯤이면 그녀의 마음은 다시 선명해져 있을까. 그때쯤이면 다시 세상과, 사람들과, 관계,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것들과 믿고 있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다시금 여러 가지를 분별할 수 있게 될까. 낮과 밤이 나뉘게 될까. 아니면 이것으로 끝나버린 것일까. 영영 이대로 저 심연의 암흑에 빠져서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마는 걸까.


음악은 틀지 않았다. 그녀에게 타인의 감정을 들어줄 여유 따윈 없었다. 타자의 감성 따위 들어줄 마음의 여백은 없었다.


‘나는 배신을 당했다.’

그녀는 그 한 문장만으로도 그녀의 머릿속과 마음이 꽉 차있어서 어쩔 줄 몰라하고 있었다. 새벽바람이 차에 부딪치는 소리와, 네 개의 바퀴와 고속도로 아스팔트의 마찰음 외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도착」보다 「도망」이 목적일 때, 그 사람의 방향은 어떻게 정해야 하는 걸까. 애초에 왜 「내가」 도망을 가야 하는가. 당최 왜 배신을 「당한」 마음이 도망을 가고 있고, 배신을 「한」 세상은 버젓이 존재하고 있는 걸까. 적어도 자신이 배신을 했다는 것을 인지는 하고 있을까. 그에 따른 최소한의 죄책감은 있을까? 없을까. 이 「밤」은 설마, 혹시 정말, 설마 그냥 잠들어 있는 걸까.


목적지가 없음에, 유정이라는 도망자는, 적어도 길을 잃어버릴 일이 없다는 것이 그나마의 작은 위안이었다. 평생을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살았다. 그리고 결국 보기 좋게 길을 잃었다. 그러니 지금은 계속 달려야 한다. 드디어 길을 잃을 걱정이 없게 된 도망자가 된 그녀는 일단 계속 달려야 했다. 차는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또 어딘가로 가고 있지만, 헤드라이트는 언제나 앞만을 밝히니, 그녀는 어쨌든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해야 했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그녀는 터널을 지나고 있었다. 누군가 터널을 고통에 비유하면서, “인생의 고난은 동굴이 아닌 터널이다. 언젠간 끝이 난다”고 했다. 동굴에는 출구가 없지만, 터널에는 출구가 있으니 참고 견디라는 뜻이다. 그리고 고통을 터널에 비유한 것은, 아마도 터널이 낮보다 어둡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지금같이 칠흑 같은 밤에는, 차라리 터널 안이 더 밝다. 그녀는 그녀가 지나고 있는 터널을 고난이라는 비유와 어울린다고 생각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두운 절망은 터널 천장의 백열등조차 너무 밝아서, 눈물이 날 정도로 눈이 시렸다.


어차피 아무도 듣고 있지 않았으나, 그녀는 소리 내어 울지 않았다. 도망자의 도착지는 을왕리 바다였다. 달은 거기까지 그녀를 쫓아와 주었다. 그녀는 부정하였을지언정, 마치 달은 자신이 그녀의 밤의 보호자가 맞았다는 듯이, 다시 밤이 올 때까지 잠시만 그녀를 태양에게 맡겨 놓으려는 듯이, 이제 희미하게 사라지려 하고 있었다.


바다는 그곳에 없었다. 정확히는 안개가 너무나 심해 바다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안개 저 너머 어딘가에서 들리는 갈매기떼의 소리만이 어쨌든 그녀가 바닷가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습기를 가득 먹어 단단한 모래 위를 밟고 바다 앞으로 나아갔으나, 그녀의 발 앞에 얌전하게 부서지는 파도만이 정말 간신히 보이는 정도였다. 수평선은커녕, 고작 몇 미터 앞도 보이지 않아, 어디까지가 바다인지, 어디서부터가 하늘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앞을 보아도 자신이 지금 보고 있는 게 바다인지 하늘인지 도통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그때 그녀가 보고 있었던 것은 바다도, 하늘도 아닌, 그저 안개였을까. 어차피 바다가 증발해 하늘이 되기도, 안개가 되기도, 그리고 다시 바다가 되기도 하는 것이지. 그때 그녀가 그 셋을 구분하지 못했던 것처럼, 바다와 하늘과 안개는, 「다르다면 다르겠지만, 같다면 또 같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하늘을 올려다보며 또 다른 형태의 바다를 볼 수 있고,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유리컵에 하늘을 한잔 따를 수도 있다. 안갯속의 유정은 그날 바닷속에 있었다. 하늘에 발을 담겄었다.


그녀는 스마트폰을 확인해 보았다.

미세먼지 농도가 “매우 나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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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 금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