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
국도변에 있는 작은 종합병원 응급실에서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국내 탑급 아이돌 멤버 둘이 들어오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헷갈리는 생명체가 그들과 함께 였다. 거기다 이제 치정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장면의 시작이다.
사진을 찍는 소리가 또 들려왔다. 그게 수민의 신경을 긁었다. 자기도 모르게 수민은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핸드폰을 든 여자가 흠칫 놀라며 뒤로 물러섰다. 명원이 수민을 가리려는 듯 옆으로 바싹 다가 섰다. 그 모습을 남자가 유심히 보았다. 수민은 딱딱한 어조로 남자의 이름을 내뱉었다
“여기서 만나네. 윤현우. ?”
현우라 불린 남자가 난감하게 웃더니 금방 허리를 쭉 폈다. 그는 어떻게든 평정심을 찾으려고 애쓰는 중이었다.
“잠깐 나갈래?”
“의대는 졸업 했어?”
수민이 대뜸 이렇게 물었다. 그 말에 감전이라도 된 듯 현우가 화들짝 놀라며 다가와 수민의 어깨를 잡았다. 손가락 관절이 툭 튀어 나온 단련된 손으로 있는 힘껏 잡은 게 보였다. 아플 것 같은데. 수민은 아무 감각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현우를 바라볼 뿐이었다. 명원만 그 손에 놀래서 무의식중에 움찔거렸다.
“가자. 여기선 다른 환자들에게 방해돼.”
힘이 잔뜩 들어간 손에 비하면 목소리가 나긋했다. 이 상황이 아니라면 환자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달래주는 것 같기도 했다. 수민은 눈썹을 치켜 올리고 현우의 손을 쳤다. 거칠고 무례한 태도였다. 흥미진진하게 보고 있던 사람들이 헉하고 숨을 들이키는 소리가 났다. 현우가 당황해서 주의 눈치를 보는 사이 수민은 현우의 목을 와락 껴안았다. 어디선가 짧은 비명소리가 터졌다.
다음 순간 응급실 안이 고요해졌다. 사실 뺨을 후려치는게 아닐까 예상했던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그만큼 수민의 태도가 차가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의 차가움은 뜨거움을 가두는 얼음화로였다. 그 속에서 불이 타오를 줄 누가 알았을까? 간호사들도 분주한 손을 멈추고 그들을 보았다. 경악을 한 사람도 있었다. 그건 바로 명원이었다. 바로 옆에서 그 작태를 본 명원은 기분이 묘했다. 루오가 다른 팀 멤버를 끌어안고 니네 팀이 더 좋다고 속 없는 소리를 하는 걸 봤을 때 느꼈던 기분 같기도 하고 우리 집 멍멍이가 다른 놈 보고 꼬리를 흔들 때 느꼈던 기분같기도 했다. 어쨌거나 명원의 입장에서 이건 그냥 놔둘 수 없는 일이었다. 현재 루오와 수민, 둘 다 그의 책임하에 있으니까.
“저기 수민아. 이러지 말고…”
현우가 황급하게 수민의 팔을 잡아 내렸다. 쉽게 놓지 않으리라는 예상을 또 박살내고 수민이 얌전하게 팔을 풀어주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차가웠지만 눈꼬리가 조금 젖어 있었다. 명원은 거기서 마침내 만났다는 안도감을 읽어냈다. 그러니까 이 아가씨가 저 멀리 비행기를 타고 만나러 온 사람은 아빠가 아니라 이 남자였다.
“나가자. 나가서 말해.”
현우는 다급하게 수민의 팔을 잡아 끌었다. 이번엔 잠깐 버티는가 싶더니 수민은 순순히 그를 따랐다. 명원도 그들의 뒤를 따라 나섰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지금 침대에 누워 수액을 맞으며 잠들어 있을 루오 대신 그가 함께 있어 줘야 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해자 현우가 뒤를 돌아보고 명원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는 입술을 잘근 씹더니 정중한 태도로 말했다.
“저기 죄송한데 둘이서만 이야기를 하고 싶은데요.”
“안되는데요.”
명원이 이렇게 대답하는 동시에 수민도 팔짱을 끼며 또렷한 말투로 “상관없어”라고 거절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지 못한 현우가 잠시 멈칫하더니 주위를 둘러보고는 빠르게 체념했다. 그는 이 자리를 피하는 게 더 급했던 것이다.
현우는 접수대를 지나 코너를 돌더니 어두운 복도로 향했다. 복도에는 다양한 방문들이 닫혀 있었는데 그 중 현우는 ‘직원 전용’이라고 씌여진 철문을 열었다.
탁.
불이 켜지고 사방에 철제 선반이 보였다. 이곳은 비품실인 모양이었다. 붕대와 거즈, 솜, 핀셋 등 흔히 보던 의료제품들이 상자마다 정리되어 있었다. 사람의 온기라고는 없는 살풍경한 장소에 들어서자 그들은 제각기 상황을 정리할 시간을 가졌다.
명원은 현우를 천천히 뜯어봤다. 상체 근육이 발달되고 몸이 좋은 걸로 봐선 운동을 꽤 한 사람이다. 나이는 이십대 후반? 눈꼬리가 처지고 서글서글해 보여서 웃는 입매가 시원했다. 반듯한 치아가 라미네이트를 했나 의심이 들만큼 반짝거렸다. 앞니가 살짝 큰 느낌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더 귀여워 보였다. 요새 여자들이 좋아하는 스타일의 남자였다. 좋은 몸에 훈훈한 인물 조합이니 어딜가나 인기 있겠다 싶었다. 그는 어떻게든 강원도로 가기 위해 애쓰던 수민을 떠올렸다. 이 남자를 위해 집에는 아무 말도 없이 한국으로 날라오다니. 많은 이야기를 하진 않았지만 가족들 걱정을 꽤나 시킨 것 같던데. 고작 이 남자 때문에. 이 남자를 위해서라니.
“어떻게 여기까지 올 생각을 했어?”
잠시 뒤에 현우가 부드러운 미소를 띄고 물었다. 그는 잠깐 사이에 안정을 되찾은 모습이었다.
“내가 올 거라고 생각 못했어?”
“혹시 그럴지도 모른다고 잠깐 생각했었지. 그렇지만 스웨덴과 한국은 머니까. 그리고 석 달이나 연락을 안하는 건 무슨 의미인지 다 알테니까.”
“알아서 정리할 거라고 생각했구나?”
“내가 아는 너라면. 넌 예리하잖아. 또 강한 사람이고. 이 정도 일에 흔들릴 사람이 아니니까. 어떤 면으로는 나는 너를 믿거든. 어쨌거나 와 줘서 기뻐. 다시 보니까 너무 좋고. 이렇게 만난게 우연이라면 역시 우리는 운명이었네. 어떻게든 만났을 거야.”
이렇게 매끈하게 이별을 말하는 사람은 처음 봤다. 옆에서 대충 봐도 현우가 잘못한게 분명한데 이 남자는 말캉한 말투와 다정한 미소로 모두 없던 일로 만들고 있었다. 명원은 재빨리 수민의 상태를 살폈다. 절망에 빠지는 건 아닐까? 아니면 분노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건 아닐까? 그러나 양쪽 다 아니었다. 수민은 콧방귀를 흥 뀌더니 더 쌀쌀맞은 목소리로 물었다.
“의대생 맞아? 나한테 의대 다닌댔잖아. 그런데 지금 보니 간호사인거 같은데.”
현우가 눈을 찌푸렸다. 수민은 연거푸 물었다.
“나이가 스물 넷은 맞아? 살고 있는 데가 강원도 영월은 맞아? 아빠가 대학교수고 엄마는 병원장이 맞아? 네가 나한테 했던 말이잖아.”
“헤어진 마당에 그게 뭐가 중요해?”
현우의 눈빛이 흔들렸다.
“맞아. 중요하지 않지. 말 안해도 알아. 다 거짓말인 거. 너한테 여자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다. 결혼을 했을지도?”
수민이 눈이 현우의 네 번째 손가락으로 향했다. 거기에 반지는 없었다. 그러나 반지 폭만큼 원형으로 피부가 좀 더 하얗게 보였다. 반지의 흔적이라고 생각하고 보니 딱 그렇게 보인다.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관찰력이 셜록홈즈 저리가라다.
명원은 수민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형사가 연쇄살인범을 쫓는 것처럼 집요하게 굴더니 남들 보는 앞에서 와락 끌어 안고, 배신당한 설움에 눈물을 철철 흘리거나 매달릴거나 혹은 분노할 줄 알았더니 생각보다 덤덤하다.
-너 나 사랑했던 것 맞니?
현우가 이렇게 물어도 합당하다고 느껴질 만큼 수민은 태연하게 굴었다. 그녀는 적당히 말라서 보송해진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며 이어 말했다.
“넌 날 잘 알고 있네. 맞아. 나는 석 달 전에 네가 연락을 끊었을 때 우리 관계가 끝났다는 걸 알았어. 만나서 반갑긴 한데 내가 한국에 온 건 너 때문이 아니야. 내 사촌을 만나러 온 거지. 그런데 나한테 말해주지 그랬어? 내가 한국에서 이렇게 유명한 사람과 닮았다는 거. 역시 넌 나한테 도움이 하나도 되지 않았어.”
“뭐?”
“우리 오빠가 너 엄청 싫어했던 거 알지? 수호가 딴 건 몰라도 사람보는 눈은 정확해. 너보고 라타(ratta)라고 , 아!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
수민이 싱긋 웃었다.
“한국어로 하면 쥐새끼야.”
현우가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명원은 입을 꾹 다물고 웃음을 참았다. 살짝 큰 앞니가 생쥐와 잘 어울렸다.
현우가 매끄럽게 이별을 말했다면 수민은 부드럽게 어퍼컷을 먹이는 중이었다. 이제보니 수민의 행동은 종잡을 수 없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모든 행동은 ‘너 엿먹어라’는 하나의 목적으로 귀결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 사촌을 보러 왔다는 거짓말도 서슴치 않는 수민이었다.
“내가 여기에 온 것도 당연히 우연이야. 나는 별을 보러 온 거야. 별마로 천문대. 혹시 기억나? 내가 가고 싶어 했던 곳이잖아. 한국에 왔으니 당연히 보러가야지.”
수민이 명원의 팔을 잡아당겨 몸을 바짝 붙였다. 뭐하는 거지? 명원이 자신의 손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오는 수민의 손을 느꼈다. 가냘픈 손이 명원의 손을 꽉 쥐었다. 놀라운 힘이었다. 둘의 손가락이 칡덩굴처럼 얽혔다. 명원은 수민이 입꼬리를 올리고 웃는 모습을 신중한 눈으로 지켜봤다.
“내 남자친구야. 너한테 소개하게 돼서 기뻐.”
명원은 팬들이 꿀보다 더 달다고 난리치는 팬 서비스 용 다정한 눈빛으로 수민을 내려다보며 미소지었다. 이런 건 얼마든지 자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