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안아줄까요? 14

written by 브리

by 브리


오래간만입니다. 그래서 양이 좀 많습니다. 15금정도 수위의 베드씬 있습니다.




#15

“따라갔잖아. 그래서 물어봤어? 왜 비밀로 했는지 따져야지.”

“아니. 혼자 가겠다길래 보내줬어.”

“속도 좋다. 미친 놈. 걘 제일 중요한 걸 말 안 한거라고. 대표님 딸이라니. 그 동안 회사 욕을 얼마나 많이 했는데. 대표님한테 가서 다 이른 거 아니야?”

“내가 화내면? 그럼 재란이가 웃으면서 ‘들켰으니 이제 그만 보자’라고 할수도 있잖아. 그럴까봐 겁나. 그래서 그냥 보냈어”

“박세현 쫄았네.”

“네가 생각해도 이상하지? 나는 왜 재란이 앞에만 서면 쪼그라드는 거 같지?”

-<재란을 따라 갔으나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온 뒤 세현과 이재가 나눈 대화중에서>-


다음 날 이재와 세현은 청담동 러프 호텔 스파에 들렀다. 예약제이고 프라이빗하게 이용할 수 있어서 둘이 자주 가는 곳이었다. 눈꼽만 떼고 그대로 나왔기에 일단 먼저 샤워를 한 뒤 사우나로 들어갔다. 이제 필요한 건 생수병 하나와 젖은 수건뿐이다. 본격적으로 살을 빼야 할 때는 사우나를 꼬박 꼬박 들렀지만 지금은 비활동기다. 둘은 꽤 오래간만에 온 터라 느긋하게 즐길 마음이었다.

그런데 문을 열자마자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제길. 경호였다. 세현은 프라이빗한만큼 사이즈가 작은 사우나의 번호를 확인했다. 8번. 분명 안내 받은 번호가 맞는데 왜 저 녀석이 앉아 있는 거지? 이재 역시 얼굴이 잔뜩 일그러졌다. 사우나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수증기가 뜨겁다. 경호는 벌써 얼굴이 벌겋다. 경호가 끝나는 시간과 내가 시작할 시간이 겹친 건가? 들어가지는 않고 세현이 문을 잡고 있자 경호가 손을 들어 인사를 했다. 놀라지도 않는다.

“어이. 들어와. 들어와.”

세현은 등 뒤에 있는 이재를 밀어내고 문을 닫았다. 이재가 여기 있어 좋을 게 없다. 경호가 영교 근처에서 얼쩡대는 걸 알고 있는데 사이좋게 사우나를 할 리도 만무하고 잘못해서 싸움이라도 나면 곤란한 건 이재쪽이다. 사우나실 문에 있는 작은 유리창으로 밖을 내다 보니 이재는 쉽사리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있었다. 세현은 이재에게 저리 가라고 눈짓을 했다. 이재는 못마땅한 얼굴로 돌아섰다.

“여기서 다 보네. 박세현. 재란이가 한국에 왔으니 재미난 시간 보내고 있어?”

“오래간만입니다. 김경호 전무님. 아직 전무 맞죠? 이 시간에 사우나를 하고 계시니 회사에서 쫓겨났나 걱정했습니다.”

“다행히 아직은 괜찮아. 같이 온 사람, 한이재지? 사우나도 같이 다녀? 둘이? 소문대로네.”

“무슨 소문이요?”

“재란이는 연막이고 사실 진짜 연인은 한이재라던데?”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 소문이다. 세현은 대꾸도 않고 경호의 반대편에 가 앉았다.

“아니면 둘 다? 너 정도라면 둘 다 감당 가능하지. 남녀노소, 다 먹히는 박세현이니까.”

“지금은 제 예약시간입니다만.”

세현은 말을 돌렸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며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경호가 히죽 웃었다.

“프론트에서 내 다음 타임이 너인거 알고 기다렸어. 얼굴도 보고 싶고 대화도 좀 할까 하고.”

대화를 하겠다고? 사실일 리 없다. 살살 긁으며 놀릴려고 기다린게 분명했다. 이 남자는 그런 식으로 자신의 위치와 힘을 느끼는 걸 재미있어 했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상태에서도 자기가 가진 걸 드러내려고 안달인 사람이다. 세현은 젖은 수건을 머리에 얹고서 물을 마셨다.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세현의 목젖을 보고 있던 경호는 괜히 자기 목덜미를 스윽 만졌다. 그는 생각했다. ‘이 놈은 그냥 물 마시는 것도 멋있네.’ 세현은 분명 완벽한 미남은 아닌데 부드럽고 단정한 선에 쭉 뻗은 몸매가 군더더기 없고 경쾌해 보인다. 이런 점은 사촌인 영교와 궤를 같이 하는 것 같다. 그런데 벗겨놓고 보니 적당한 근육과 우아한 골격의 조화로움이 미학적으로 보기 좋았다, 어후. 만만찮은 놈. 경호는 은근히 기분이 나빴다.

“난 이해가 안돼. 왜 재란이가 선보러 다니는 걸 가만히 놔두는 거야? 사내새끼가 자기 여자를 그렇게 놔두는 건 마음이 없다는 뜻 아닌가. 친구라고 우길 생각을 하지 마. 아무도 그 말은 안 믿으니까. 둘이 미국에 있을 때 같은 집에서 먹고 자고 한 것도 알고 있어. 우리 회사 정보관리팀이 기자들 입 막느라 고생 좀 했지. ”

이제 그만 좀 나가지. 남의 시간대에 언제까지 버티고 있을건지. 저러다 살이 익어버릴지도 모른다. 솟아오르는 짜증을 꾹 눌러 넣고서 세현은 가벼운 미소를 띈 채 지긋이 보고만 있었다.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볼 생각이었다. 경호는 정수리부터 흘러내리는 땀이 눈에 들어가자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계속 말을 이었다.

“하긴 우리 집안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연예인을 들이지는 않을테니까 서로 즐기는 정도로 만족해야겠지. 아니면 할머니가 돌아가시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가?”

“아닙니다.”

“그럼 이 애매하고 뜨뜻미지근한 관계를 뭐라고 해석해야 하나? 섹파?”

이 부분에선 세현의 표정이 차게 굳었다. 이 양반이 못하는 말이 없다. 지금 누구 이야기를 하는 건지 자각이나 하고 있는 건가? 관계가 소홀하더라도 사촌동생이다. 재란을 눈깔사탕처럼 입안에 뗴굴떼굴 굴려 먹으며 재미를 느끼는 경호는 존중이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었다. 세현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상대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지자 반대로 경호가 만족스럽게 웃었다.

“섹파라면 인정! 재란이 결혼에 네가 걸림돌이 될 일은 없겠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말을 끊고 경호가 세현을 살폈다. 한 마디만 더하면 바로 주먹을 날릴 생각이었다. 경고가 담긴 눈빛을 읽어낸 경호가 가소롭다는 듯 킬킬 웃었다. 네 까짓 게, 감히. 그래봤자야. 그 뜻이었다. 그래도 세현이 눈을 풀지 않자 경호가 이미 한 대 맞은 사람처럼 턱을 스윽 쓸었다. 한발 물러서는 모양새였다. 잠시 뒤 경호가 몸을 숙이고 달래듯 말했다.

“제안할 게 있는데. 너에게도 나쁘지 않아. 우린 공통점이 있어. 그쪽 사촌, 내 사촌. 서영교와 이재란.”

세현의 짙고 반듯한 눈썹이 꿈틀거렸다.

“나하고 영교 사이를 도와준다면 나도 똑같이 도와줄 수 있어. 상부상조 어때?”

그러니까 전략적 제휴관계 맺자는 의미였다. 세현은 미쳤냐? 라는 말이 반사적으로 튀어나올 뻔했으나 간신히 참아냈다. 나쁜 것도 종류가 다양한데 폭력, 욕설, 비방, 무시, 모멸감. 그 중에서 경호는 이기적이서 나빴다. 자기말고는 중요한 게 없는 사람이었다. 지금에야 영교가 좋겠지만 영교가 자기 앞길에 방해가 된다면 칼을 꽃을 수도 있었다. 그런 놈과는 아무것도 함께 할 수 없다. 세현은 물을 다 마신 페트병을 손에 쥐고 우그러뜨렸다. 이만하면 예의도 차렸고 하고자 하는 말이 어떤 건지도 알아들었다.

“안 나가세요? 이러다 수육되시겠어요. 사우나 오래하면 심장에 무리가 가서 일찍 죽습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여차하면 물어 뜯겠다는 의사가 명확한 목소리였다. 경호도 알아차린 듯 쓰게 웃더니 한마더 던졌다.

“생각해봐.”

드디어 경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패인 웅덩이에 고여 있던 물이 후두둑 발치께로 떨어졌다. 사우나실을 가득 채운 뜨거운 공기 때문에 숨이 막힐텐데도 경호는 태연자약했다.

“재란이는 할머니가 워낙 싸고 돌아서 애들 노는 데에 낀 적이 없어. 그래도 내 친구들 중에 재란이를 모르는 사람은 없지. 왜냐고? 어쩌다 우리 집에 놀러온 애들이 보고 예쁘다고 소문을 냈으니까. 예쁘긴 예쁘잖아. 진짜 기가 막히게 예쁘지. 걔네 아빠가 정말 사람을 홀리게 잘 생겼었다던데 아빠를 꼭 닮았나봐. 할머니가 철통방어하지 않았다면 재란이는 지금처럼 얌전히 네 품안에만 있진 않았을거야.”

경호는 문 앞으로 가 나무로 된 손잡이를 잡고 나가려다 다시 돌아섰다.

“할머니는 재란이를 괜찮은 집안에 시집 보내고 싶어하셔. 그게 죽을 날 얼마 안남은 할머니 소원이야. 손자인 내가 그 소원, 들어드려야 하지 않겠어? 내 생일파티가 좋은 시작이 될거야. 할머니 마음에 들게 일부러 쭉정이들은 빼고 알짜배기들로만 초대했어. 재란이를 위해서. 기대해도 좋아.”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겠다는 의지가 보였다. 세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유유히 사우나실을 나가는 경호의 뒷통수를 노려보다가 맥이 풀렸다. 재란의 사촌만 아니라면 진작에 한번 붙었을텐데. 역시 한 대 쳐야 했나? 경호의 경고가 허튼 소리가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다. 재란과 함께 있을때면 끈끈하게 달라붙는 시선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어렸을 땐 그것때문에 질투와 소유욕이 들끓어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그들의 첫 키스가 갑작스러웠던 것도 그 이유였다.

미국 공연을 마치던 날, 재란을 향하던 남자들의 욕망을 알아차린 순간 세현의 귓가에 미하일 글린카의 ‘종달새’가 들려온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눈송이 보다 작은 새가 퍼덕거리며 태양을 향해 날아가는 것만 같았다. 그 새를 내 손에 내려 앉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성급하게 재란에게 마음을 쏟아냈다. 마치 아이처럼 투정 부리며 칭얼거렸다. 마치 내 것인 양 입술을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내 것이라고, 내 사람이라고 얼른 약속하고 싶었다. 그리고 성급하게도 서툴게 입술을 열어 자신을 받아들여준 재란이 자신과 같은 마음일거라고 생각했다.

‘불과 몇 시간도 못 가 착각이란 걸 깨달았지.’

그건 재란의 잘못이 아니었다. 찬찬히 생각했으면 눈치 챘을 수도 있다. 애초에 재란이 내민 명함에 떡하니 회사 이름과 대표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중학생에 불과한 재란이 어떻게 그 명함을 가지고 있는지 물었으면 됐을 일이었는데. 미국에서 다시 만났을 때 연습생에 불과한 세현을 다 꿰고 있던 일도 그렇고, 콘서트 스태프로 일하게 된 배경을 물어만 봤어도 됐는데 세현은 그게 하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나중에 영교와 통화를 하며 “너는 알면서 왜 말해주지 않았냐”고 따졌더니 영교의 대답도 마찬가지였다.

“네가 묻지 않았잖아.”

세현은 할 말이 없었다. 영교는 이렇게도 말했다.

“그런 게 하나도 안 궁금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고 재란이가 누구네 집 딸이든 상관없다는 거 아니야?”

맞는 말이다. 재란의 집안이 어떤지는 세현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그랬기에 그 밤, 재란을 뒤따라 나갔다. 어두운 밤길을 혼자 걸어가는 게 마음에 걸렸고 미국에서의 마지막 밤이니 둘만의 시간을 가지고 싶었다. “같이 갈까?” 하고 물었을 때 재란은 돌아서며 웃었다. 미소는 아름다웠으나 눈이 텅 비어 있었다. 세현은 몇 번이고 그 눈을 떠올렸다. 그때 내가 괜찮다고 말했어야 했다. 뛰어가 재란의 손을 잡았어야 했다. 후회해본들 뭐 하나. 다음 날 재란에게 전화를 했을 때 통화는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게 끝이었다.

한국에 돌아와 계속 연락을 기다렸다. 아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매일 연락을 넣었다. 그런데 답이 없었다. 처음엔 시간이 좀 필요한가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핸드폰이 꺼졌다는 알림이 나왔을 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영교에게 물어보니 마찬가지라고 했다. 오히려 세현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소문 때문인건가? 그 날 뒷풀이에 가고 싶지 않다고 그러던데.”

세현은 그날 자신이 놓쳤던 게 있는지 하나 하나 헤아렸고 어떻게든 이유를 찾으려고 애를 썼다. 마지막에 떠오른 건 키스였다. 질투심에 밀어 부쳤던 첫 키스. 그게 싫었던 걸까? 이대로 나를 멀리하려는 걸까? 오만가지 생각이 다 떠올랐다. 재란의 부드러운 입술이, 영혼을 빼앗길 것 같던 그 호흡이, 사방에서 그를 감싸던 체취가 못 견디게 좋아서 미칠뻔했는데. 정작 재란은 거부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아니, 혹시 그가 키스를 너무 못해서일 수도 있다. 하긴 준비한 게 하나도 없었다. 급작스럽고 충동적이었으니까.

아씨, 어디 가서 연습이라도 하는 건데.

정답을 말해줄 사람은 없고 세현 혼자만 끙끙 앓는 날이 이어졌다. 그들의 연결고리는 너무 나약했고 언제든 끊어질 수 있었다. 세현이 절망했던 건 바로 그 부분에서였다.

이재는 세현을 보고 미친 놈이라고 혀를 찼다.

“중학교때 4개월, 연수가서 두 달. 합하면 고작 반년이야. 그런데 둘이 뭐가 그렇게 끈끈하겠어? 영교는 무려 14년이야. 그 정도는 되야 끊을 수 없는 관계라고 할 수 있지. 지금 넌 완전 오버라고. 재란이는 시속 30킬로미터인데 너 혼자 200 킬로로 밟고 폭주중이라고.”

재란과 연락이 끊어진 지 두 달이 지났을 때, 회사 로비에서 이태광 대표와 마주쳤다. 새벽 1시였다. 세현은 멤버들과 늦은 연습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고 태광은 마무리할 일이 있어 다시 회사로 들어오는 참이었다. 세현은 엘리베이터를 타는 태광을 불타는 눈으로 지켜보다 결심했다. 멤버들을 먼저 보내고 세현은 옆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단숨에 마신 다음 대표실로 올라갔다.

“숙소 안 갔어?”

“묻고 싶은게 있습니다.”

“뭔데 이렇게 비장해? 물어. “

“재란이 지금 어디 있습니까?”

옷걸이에 재킷을 걸던 태광이 움직임을 멈추고 세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눈동자가 천천히 세현을 흝었다. 이거 봐라? 하는 눈빛으로 쏘아보던 태광은 입술을 뒤틀며 한 마디 내뱉았다.

“너냐? 그 새끼가?”

순식간에 태광의 얼굴이 바뀌었다. 그 새끼? 느닷없는 공격에 세현은 말문이 막혔다. 태광은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그리고, 바지 주머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한국으로 돌아오는 내내 얘 얼굴이 죽을상이더니. 너 때문이었구나. 누가 있을거다 짐작은 했지. 한달 넘게 시커먼 사내놈들이랑 어울려 일했으니 그 중 하나이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내 연예인이네. 동주는 애들 관리를 어떻게 한 거야?.”

태광의 말투는 다정한데 하는 행동은 거칠다. 사내금연은 본인이 만든 규칙이면서 그는 스스럼없이 라이터에 불을 댕겨 담배에 붙이고는 그대로 책상 위로 던졌다. 탁,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세현의 몸이 움찔했다. 태광의 기운이 어딘지 공격적이어서 한 대 맞는 줄 알았다. 젊은 시절 뒷골목 불주먹이라는 소문이 있는 태광이다. 세현은 바위처럼 단단해 보이는 태광의 주먹을 눈여겨봤다. 때리면 맞을 생각이었다.

“재란이가 연락이 안 됩니다. 지금 어디 있습니까?”

“내가 물어봐야 겠는데? 무슨 짓을 했길래 우리 애가 그럴까?”

질문이 아니라 확신에 찬 말투였다. 세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머리속에는 어쩔수없이 그날의 키스가 떠올랐다. 갑자기 귀가 핫핫해졌다. 세현은 목을 가다듬고 다시 물었다.

“재란이가 왜 연락이 안 되는지만 알면 됩니다.”

“됐어. 나가.”

“대답해주시면 나가겠습니다.”

“너하고 연락하고 싶은 생각이 없나보지. 눈치가 그렇게도 없냐? ”

“그럴 리가 없습니다.”

세현은 힘주어 말했다. 묘하게 확신에 찬 말투에 태광은 흥미가 생겼다. 그는 담배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둘이 언제부터 알고 지낸 거야?”

“중학교 때 입니다.”

태광은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맙소사. 그때라고? 재란이는 한번도 네 이야기를 한 적이 없는데?”

순간 태광은 기억 하나가 떠올랐다. 함께 지낼 때 재란은 바뀐 환경 때문인지 도통 말을 안 했다. 대신 행동으로 속마음을 표출했다. 방에 틀어박혀 있더니 갑자기 엉망으로 염색을 하고 나타나질 않나, 집에 있는 위스키를 훔쳐 마시질 않나. 그 시절, 재란은 비틀린 나무 같아서 대하기 어려웠다. 바로잡아줘야 하는데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할지 몰라 태광은 혼자 속앓이를 했다. 호적에만 올려놨지 아이를 키워보지 않은 총각이 아는 게 뭐가 있었겠는가. 어느 날,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있던 아이가 뜬금없이 연습생은 어떻게 뽑냐고 물었다. 태광은 반가워서 얼른 대답해줬다. 일단 얼굴이 좀 되야하고 키도 좀 봐야 하지만 무엇보다 사람을 끄는 매력이 있어야 한다며, 농담 삼아 그런 애가 보이면 한번 데려와 보라고 명함도 건네줬다. 재란이 말을 걸어준 것만 해도 고마웠다. 그 날을 시작으로 재란은 서서히 예전으로 돌아왔다. 예전처럼 다시 착한 아이가 되어 주었다.

“혹시 재란이한테 내 명함 받았냐?”

“네.”

“명함을 너한테 줬다고? 허, 참.”

태광의 목소리가 한결 누그러졌다. 그는 사무실 작은 창문을 열고 바깥 공기를 안으로 들이며 담배 연기를 흘려보냈다. 세현은 생각에 잠긴 태광의 옆모습을 지켜보았다. 담배 한 개피가 다 타도록 태광은 말이 없었다. 세현도 버티고 서서 기다렸다. 사무실 라디에이터에 걸터앉은 태광은 다시 친절한 대표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태광은 옆에 둔 머그컵에 담배를 비벼 끄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둘이 무슨 관계야?”

세현은 솔직하기로 마음먹었다.

“모르겠습니다.”

“모른다?”

“친구는 확실합니다. 그 다음은 모르겠습니다.”

태광이 어이없는 얼굴로 헛웃음을 지었다.

“요새 애들은 겁대가리가 없다더니 진짜네. 연애는 절대 안 된다는 회사 방침 몰라?”

“지금은 재란이 친구로 온 겁니다.”

“연애는 아니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세현은 입을 다물었다. 태광이 다시 담배 한 개피를 물며 말했다.

“뭐 좋아. 그럼 재란이 아빠로 말하지. 관둬. 오지 마. 이대로 그냥 멀어져. 친구로도 별로야.”

“대표님.”

“재란이한테는 내가 말할게. 그러니 이쪽은 걱정말고.”

“대표님!”

“딴 생각이 들 만큼 스케줄이 한가한가 봐. 더 늘려줘?”

“어디 있는지는 알려줘도 되지 않습니까? 왜 연락을 못 받는지, 혹시 아픈 건 아닌지 그 정도는…..”

“진짜 그거면 돼? 그렇다면 알려주지. 재란이는 괜찮아. 멀쩡하니 잘 있어. 됐지? 그러니 가 봐.”

“통화하고 싶습니다. 목소리 듣고 확인하고 싶어요.”

“이것 봐. 욕심쟁이군. 느닷없이 찾아와 재란이, 재란이…. 싹수없는 놈일세. 너, 지금 대표 딸이랑 뭐 하는 짓이야?”

세현은 이대로 대표실 문을 닫고 돌아갈 생각이 없었다. 그럴 거였으면 태광에게 이렇게 재란과의 관계를 시원하게 드러내지도 않았을 거였다.

“대표님이 재란이 아버님이라는 거, 이번에 알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저와 멀어질 이유는 없잖아요. 저는 재란이 만날 겁니다.”

“어쭈, 대 놓고? 이렇게?”

“재란이 어디 있습니까?”

스물 두 살 남자의 새파란 뚝심이 태광은 거슬렸다. 얌전한 놈인줄 알았더니 눈에 제법 힘이 들어갔다. 세상이 만만해 보이고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겠지. 그 시기의 기운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그래도 아직 어려. 그가 보기엔 재란도 세현도 여전히 어렸다.

“네가 보기에 재란이는 어때?”

갑자기 태광이 물었다. 세현은 당황했다.

“예?”

“내 나이쯤 되면 후회하는 일이 많아지지. 후회에는 두 종류가 있어. ‘그때 할 걸 그랬다’와 ‘그때 하지 말 걸 그랬다.’ 나에겐 후자가 훨씬 많아. 내가 지금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건 후회하고 싶지 않아서야. 내 후회지. 그런데 재란이는 나와 반대인 것 같거든. 재란이의 후회는 해야 했는데, 하지 못한 것에 있어. 혹시 그것 때문에 힘들어 하거나 불평하던가?”

“... 모르겠습니다.”

“그래? 뭐, 앞으로 지켜보면 알겠지.”

태광은 책상에 앉았다. 그는 갑자기 자신이 너무 나이가 든 것 같이 느껴졌다. 눈 앞의 이 남자(라고 말하긴 아직은 어리게만 느껴지는)는 과연 재란에게 든든한 존재가 되어줄 수 있을까? 유독 소년 같은 박세현이? 태광은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신경 써야 할 게 늘었다. 태광은 이쯤에서 답이 없는 문제를 덮기로 했다.

“네가 아는 재란이는 그 애의 일부분이야. 둘이 친구까지만 지내. 미지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말고.”

세현이 발끈해서 입을 막 떼려는데 태광이 고개를 저었다.

“그만! 이것만 말해 줄게. 재란이는 지금 걔네 외가에 있어. 그쪽 집안에 일이 있어서 거기 있어야 해. 연락이 안되는 건... 아마 정신이 없기 떄문일거야. 그 정도만 알고 지금은 가라.”

세현이 알아낼 수 있는 건 그게 전부였다. 대표실을 나와 세현은 작업실로 향했다. 거기서 밤을 새었다. ‘그냥 친구로만 지내라’는 태광의 말이 걸렸지만 간단한 소식만으로도 답답해서 미칠 것 같던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그 후로 태광이 재란을 언급한 일은 없었다. 세현도 찾아가지 않았다. 시간은 예전과 똑같이 흘러갔다. 세현은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시간이 길어졌다. 건반을 누르면서 재란을 생각했다. 그러다 음표가 모여 한 곡이 완성되고 그게 앨범에 실리고 사방에서 들려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세현은 말수가 줄고 눈빛이 깊어졌다. 두들겨진 쇠가 강철로 변하듯, 세현은 건반을 두들기며 견고한 자신만의 세상을 세웠다. 긴 시간, 스스로도 버거워하며 작업과 연주에 매달렸다. 곡의 시작점은 언제나 재란이었다. 재란의 따뜻한 목덜미를, 핑크 색 입술을 생각했다. 창피한 이야기지만 재란의 꿈을 꾸고 속옷을 버린 날도 있었다. 한 손엔 속옷을 말아쥐고 일어나자마자 혹시나 재란이 문자했을까봐 핸드폰을 확인했을 땐 자괴감이 느껴졌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휴식할 땐 핸드폰 속 재란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어떨 땐 둘이 주고 받았던 메시지를 처음부터 다시 읽으며 보냈다.

나중엔 미국 공연 실황 영상을 틀어놨다. 회사에서 투어때 촬영한 걸 모아 DVD를 발매했는데 그 영상 마지막에 함께 한 스태프들이 잠깐 비췄다. 세현은 스쳐 지나가는 단추처럼 작은 얼굴들 사이에서 재란을 찾았다. 한 열 번쯤 보니까 희미하게 보이는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랬다. 하루하루가 더 해서 한달이 되고 한 달이 모여 두 달, 세 달이 넘어가고 어쩌다 보니 일년이 갔다. 그 사이 세현은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그룹 활동이 줄고 프로듀싱에 몰두했으며 드라마 ost에도 참여하기 시작했다. 세현이 만드는 피아노 연주곡은 그냥 틀어놓으면 심신을 편안하게 해준다는 평이 자자했다. 그래도 재란은 연락이 없었다. 가끔 영교와 통화를 하면 영교가 물었다.

“요샌 안 우냐?”

“쓸데없는 소리.”

“그래. 그냥 살면 돼. 재란이는 알아서 찾아올거야. 네가 그 사이에 다른 여자를 만나고 연애를 한들 걔가 따질수가 있겠어? 그게 뭐든,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잘 살고 있어.”

응원같기도 하고 잊으라는 소리 같기도 한, 알쏭달쏭한 영교의 말에 세현은 그냥 웃었다. 사실 그거 말고는 답이 없었다. 그냥 살아야 했다.

재란을 못 만난 지 두 해가 흘렀을 때였다. 여름 끝자락임에도 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세현은 일찍부터 몹시 바빴다. 아침 일찍 샵에 가서 헤어와 메이크 업을 받고 연습실로 가서 피아노를 치며 손가락을 풀었으며 다시 강남 호텔로 이동했다. 올모스트 호텔 5층 리셉션장에서 영화 <흙먼지> 의 천만관객기념 파티가 열렸다. 영화에 참여한 모든 사람들- 감독, 배우뿐만이 아니라 스태프들까지 모두 모여 성대하게 자축을 하는 자리였다. 운좋게 세현도 한 자리 차지했다. 세현에게는 첫 영화 OST작업이었는데 어쩌다 보니 천만 영화 크레딧에 이름을 올리게 된 것이다. 어부지리로 기대 이상의 결과를 얻은 느낌이라 세현은 민망했다. 그래서 제작사 측에서 파티 중간에 작은 공연을 부탁했을 때 흔쾌히 받아들였다.

호텔 리셥센장에는 영화 관계자들이 가득했다. 기대 이상의 성과에 사람들의 표정이 좋았다. 다들 음료 잔 하나씩 들고 옹기종기 모여 수다를 떨거나 아니면 돌아다니며 인사를 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세현은 허윤정 음악감독 옆에 서서 미소를 띄고 있었다. 키가 크고 윤곽이 뚜렷한 배우들 사이에서 세현은 좀 다른 이미지였다. 눈 아래까지 늘어지는 웨이브진 앞머리가 자연스럽게 옆으로 넘겨져 편안하면서도 자유로운 분위기를 풍겼다. 넓은 어깨에 비해 슬림한 몸체는 둔중한 기운이 하나 없었다. 대충 걸친 것 같은 풍성한 푸른 셔츠와 검은 레더 자켓이 그와 잘 어울렸다.

“세현씨 연주 근사하더라. 새로 편곡까지 해서 해주고. 성의가 진짜 고마워요.”

“뭘요. 갑자기 하게 돼서 제대로 하지도 못했어요.”

“무대에 서는 사람이라 그런가? 피아노 앞에 앉아 있는데 집중이 확 되더라. 연주는 멋지지, 눈 앞에 사람도 멋지지. 연기를 해보지 그래? 잘 할거 같은데.”

“연기는 좀.... 이재는 준비중입니다.”

“아, 그 팀의 잘생긴 멤버?”

허윤정 감독은 단발머리를 귀 뒤로 넘기고 들고 있던 샴페인을 쭉 들이켰다. 이번 작업에서 세현을 끌어줬던 사람이었다. 직선적이고 시니컬한 성격에 적응하느라 처음엔 힘들었다. 친해지고 나니 오지랖도 넓고 감성적인 사람이어서 통하는 게 많았다. 윤정은 큰누나처럼 엄하고 다정하게 대해줬다.

“세현씨도 저쪽 세상이 어울리는 사람인데 말이지.”

윤정은 잔을 든 손으로 파티장 건너편을 가리켰다. 거기에는 주연 배우인 하문형과 이연재, 그리고 주요 조연진들이 함께 뭉쳐서 그들끼리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과찬이십니다. 저기 가면 기도 못펴요.”

“이연재가 자기한테 관심 있어 보이던데. 노래 좋다는 칭찬을 엄청 하더라. 세현씨 사인도 받고 싶다 그러고. 곧 연락 올 걸.”

“에이. 그럴리가요.”

“조심해. 이연재, 유명한 연하킬러야.”

세현은 그냥 웃었다.

“어디보자. 또 다른 킬러는 어디 있나?”

“누구요?”

“김 현 말이야. 여심 킬러.”

“아아”

김 현은 출입구 가까이에 있는 테이블 쪽에 있었다. 그는 세현에게서 등을 보이고 섰는데 그의 역삼각형 몸매가 잘 드러나는 멋진 슈트 차림이었다. 이제 서른 둘을 넘긴 김 현은 예능에서는 솔직했고 영상에서는 매력적인 두 면을 보여주며 인기를 끌었다. 여자들은 그가 바람둥이인줄 알면서도 만났다. 김현을 보면 그럴 수 밖에 없다는 게 여자들의 논리였다.

“저기 봐. 오늘도 부지런히 사냥 중이네. 참 싫어할 수가 없는 사람이란 말이야.”

“직접 만나보셨어요?”

“그럼. 세상 모든 여자에게 친절해. 상대가 누구든 소중하게 대한달까? 그걸 상대가 느끼게 하는게 능력이야. 그러고 보니 세현씨랑 비슷하네. 세현씨도 그렇잖아. 대부분 여자들에게 친절하지.”

“저는 모든 인간에게 친절하죠.”

윤정이 크하하 웃었다. 그녀는 한 소리도 지지 않고 대응하는 세현을 좋아했다. 웃음소리가 꽤 커서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잠깐 머물렀다. 김현도 뒤를 돌아 그들을 확인했다. 그때, 세현은 보았다. 김 현의 앞에 서 있는 검은 미니 원피스의 여자를.

미친.

세현은 순간적으로 어지러움을 느꼈다. 그 여자는 투명한 눈으로 세현을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지금 제대로 본 게 맞아? 세현이 눈에 힘을 주고 방해물인 김 현을 피하려고 고개를 오른쪽으로 기울였다. 설마, 하는 의심이 먼저 들었다. 세현은 천천히 그 여자를 흝어내렸다. 여자는 목은 가리고 어깨는 훤히 드러내는 검은 원피스를 입었다. 몸의 윤곽을 고스란히 드러내며 착 달라붙은 상의에 비해 허리부분에서 주름을 잔뜩 잡아 치마단이 꽃송이처럼 부풀었고 그 아래로 하얀 두 다리가 매끄러운 곡선을 그리며 뻗어있었다. 허리에 닿을만큼 긴 머리카락은 절반은 느슨하게 묶고 절반은 늘어뜨려 후광처럼 그녀를 감쌌다. 크고 둥근 눈, 검은 펜으로 그린 것 같은 눈썹, 차분한 붉은 색의 입술. 심장이 크게 한번 고동치더니 세현은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세현씨?”

“네.”

세현은 시선을 움직이지 않고 대답했다. 윤정은 세현이 무엇을 보고 있는지 확인하더니 피식 웃었다. 예쁜 여자한테 끌리는 건 본능이라지만 박세현까지 그럴줄은 몰랐다. 이렇게 대놓고 노리다니.

“처음 보는 얼굴인데. 신인배우인가? 나이도 어려 보이지? 스물? 스물 둘?”

스물 넷. 세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 여자는 스물 둘에 사라져서 스물 넷인 지금 나타난 재란이었다. 무려 2년이었다. 어떤 순간에 어떻게 다시 만나게 될지 많이 상상했었다. 보자마자 달려가 끌어안고 놓지 않겠다는 생각, 아니면 차분하게 한 걸음씩, 지나간 일을 털어놓으며 스며 들어갈 생각. 아니면 화를 내며 눈물 쏙 빠지게 혼내겠다는 생각. 하루에 열두번도 더 세웠다 부서뜨렸다 반복했던 계획을 떠올리며 세현은 홀린 듯이 재란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지면에 발이 묶인 듯 꼼짝도 못하고 있는데 비해 재란은 앞에 선 남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부드럽게 고개를 돌리기도 하고 음료를 마시기도 했다. 실내에 있는데도 재란 근처에만 바람이 부는 듯, 산들바람에 흔들리는 한 송이 코스모스 같았다.

“왜? 끌려? 그럼 가서 말 걸어봐. 저러다 김현이 낚아채겠어. 사랑은 기세지. 미리 포기하지 말고 밀어 부쳐. 혹시 알아? 저 여자는 세현씨가 더 취향일지도 모르잖아.”

“맞아요. 날 더 좋아해요.”

“어떻게 알아? 진짜 아는 여자야?”

“제 팬이에요.”

“뭐라고?”

윤정이 당황하든 말든 재란에게 붙박힌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김현의 넓은 어깨에 가리어 재란은 보였다가 혹은 가리워졌다. 그러는 사이 인사를 하러 다니던 제작사 대표가 기분 좋은 웃음을 지으며 세현에게로 다가왔다. 재란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세현을 윤정이 쿡 찔렀다. 세현이 퍼뜩 정신을 차리고 몸을 돌렸다.

“아이고. 우리 세현씨. OST 반응이 너무 좋아요.”

“아닙니다. 허윤정 음악감독님이 다 하신건데요.”

“물론 음감님도 멋지게 한 몫 해내셨고. 세현씨 곡을 적재적소에 넣었잖아. 여주인공 눈에서 눈물이 뚝 떨어질 때 거기서 그 피아노 곡이 쫙!. 크아. 소름이 쫙! 미친 타이밍이었어요.”

영화 수익이 엄청난 만큼 흥분한 제작사 대표의 목소리는 우렁우렁 컸다. 세현이 동조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다 슬쩍 재란쪽을 보았다. 그런데 김현은 있는데 재란은 없었다. 세현의 내부에서 팽팽하게 당겨진 끈이 툭 끊어졌다. 세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돌렸다. 그리고 빠르게 홀 안을 둘러보았다. 설마 이대로 떠난 건가? 이렇게? 손에 든 샴페인 잔이 마구 흔들렸다. 제작사 대표가 이상하게 쳐다보는 것도, 윤정이 어색하게 웃으며 그의 등을 툭툭 치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화장실이 가고 싶나봐요. 급한가?”

윤정이 알아서 핑계를 대는데 세현은 잔을 던지듯 내려두고 자리를 떴다.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급한대로 재란의 번호 열자리를 누르는 사이 알림창에 메시지가 떴다.

-나하고 같이 갈래?

이 짧은 문장이 세현은 2년 전 그 순간으로 다시 데리고 갔다. 어두운 거리와 가게 유리창을 통해 희미하게 드리우던 빛. 아무렇지 않게 “혼자 다녀올게.”라고 말하던 재란의 낮은 목소리. 건물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는 재란의 뒷 모습. 끊어졌던 필름이 다시 이어지듯 거기서부터 시작되는 기분이 들었다.

-좋아.

세현이 답을 보냈다. 그러자 곧 새로운 메시지가 깜빡거렸다.

-201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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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현은 엘리베이터 앞에서 재란을 찾았다. 주황빛 조명 아래 재란은 두 손을 앞으로 얌전히 모으고 작은 토드백 하나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세현은 주머니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흥분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속도에 신경 쓰며, 겉으로는 느긋하게 걸어 재란의 옆으로 가 섰다. 얼룩하나 없이 잘 닦인 은색 엘리베이터 문은 거울처럼 두 사람의 모습을 담았다. 엘리베이터 숫자판만 보고 있는 재란이나 권태롭다는 듯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세현은 낯선 타인들 같았다. 그러나 세현은 재란에게서 나는 향기를 맡을 수 있었다. 포근한 빵과 그을린 설탕, 그리고 진한 초컬릿을 떠오르게 하는 냄새였다.

엘리베이터 안에는 1층부터 타고 온 중년 남자 한명이 타고 있었다. 일본어로 된 여행안내서를 들고 있었기에 한국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세현은 재빨리 20층을 눌렀다. 잠시 후 남자가 내리고, 둘만 남았다. 세현이 과감하게 몸을 돌려 세란쪽으로 돌아섰다. 마침 고개를 돌리던 재란과 눈이 마주쳤다. 재란은 그가 엘리베이터에 달린 부속품인 양 무심한 시선을 주고 그대로 고개를 제자리로 되돌렸다. 정말 지독했다. 어떻게 이 순간에도, 이렇게 엘리베이터에 단 둘만 있는 순간에도 고요할 수가 있는 건지. 세현은 미술관에서 조각품을 감상하듯 팔짱을 끼고 물끄러미 재란을 바라봤다. 가까이서 본 재란은 화사하게 빛이 났다.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차려입고 꾸민 건 처음 봤다. 속눈썹이 뺨 절반 넘게 그림자를 드리울만큼 길었다. 피부는 도자기보다 더 매끈했다. 귓불에 매달린 작은 귀걸이는 연한 핑크색으로 입술과 잘 어울렸다. 세현은 겉으로는 침착해보였으나 속은 엉망이었다. 팔짱을 낀 것도 여차하다간 안아버릴 것 같아서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아니 생각은 이제 그만해야 한다. 그거라면 지년 2년동안 질릴만큼 했다. 세현은 재란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런데 재란은 세현쪽으로 고개도 돌리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 밖이니 거리를 유지하려는 모양이었다. 아예 확실히 하듯, 재란은 가볍게 손을 들어 오지 말라는 표시를 했다. 신분 높은 아가씨가 집안 하인에게 명령을 내리는 듯 단호한 몸짓이었다. 세현의 머릿속에 대표인 태광의 얼굴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공주님이네.”

세현이 중얼거렸다. 재란이 들었는지 눈이 커졌다. 자기가 입은 옷을 내려다보며 치마를 만지작거렸다. 붉은 구슬로 된 팔찌가 찰랑거렸다. 재란은 난처한 얼굴로 혼잣말을 했다.

“공주병이라고? 그 정도로 과하게 꾸민 건 아닌데.”

아씨. 말을 어디로 들은 거야?

“못 본 사이 박세현 눈이 엄청 높아졌네.”

서운한 기색이 묻어나는 것 같기도 하고. 당황한 세현은 이를 꽉 깨물고 웅얼거렸다.

“병이 아니고, 공주님이라고. 공주님. ”

“아. 공주... 으음... 그렇구나.”

그러고는 말이 없다. 흐음, 그렇구나? 그게 끝? 순간적으로 재란이 화가 났을까봐 쫄았던 자신이 어이가 없었다. 잘 갈무리 해 둔 감정의 둑이 툭툭 터졌다.

늘 생각했지만 재란은 모호하면서 거방진 데가 있었다. 재란 앞에 서면 깊이를 알 수 없는 바다, 혹은 밤 그림자로 가득한 숲이 떠올랐다. 자신이 아무리 부딪쳐도 재란은 끄떡도 하지 않을 것 같아 세현은 속이 상했다.

-내 키스가 별로였어? 내가 들이댄 게 싫었어? 대표님 딸인거 왜 말 안 했어? 내가 없이도 살만했어? 너에 비해 나는 늘 요란하게 들끓어. 감정의 진폭이 너무 커서 그게 부끄러울 정도야. 네가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 누구보다 좋아하는지는 확신이 없어. 나는 그런 존재가 되고 싶어.

눌러 놓은 말들이 튀어 나오기 일보직전이었다. 엘리베이터는 소리없이 20층에 멈추고 재란이 먼저 내렸다. 앞 뒤로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의 발자국 소리는 고급스러운 카페트 덕분에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재란이 가방에서 카드키를 꺼내서 인식기에 갖다 댔다. 삑. 잠금이 풀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번에도 재란이 먼저 방으로 들어갔다. 재란이 홀더에 카드를 꽃자 방안에 불이 켜졌지만 이상하게 그녀 주위는 어두워졌다. 어느새 뒤에서 덮치듯 세현이 재란을 끌어안았기 떄문이었다.

하아.

부드러운 재란의 머리카락이 향기를 풍기며 물결처럼 새현의 얼굴 위로 일렁거렸다. 순식간에 눈앞이 어지러웠다. 코 끝에 닿는 목덜미. 세현은 본능적으로 그 곳에 입술을 갖다 대었다. 매끄러운 피부 아래 따뜻한 혈관이 느껴졌다. 턱과 귀 근처에서 힘차게 뛰는 맥박을 감지했다. 살아있는 재란이었다. 이렇게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세현은 힘을 주어 재란을 결박했다. 터질 듯한 심장소리가 밖으로 들린 걸까? 재란이 진정하라는 듯 가만히 세현의 손등을 토닥였다. 그러나 세현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몸 안에서 뜨거운 기운이 제멋대로 날뛰는 중이었다.

“세현아, 이러지 말고 일단 들어가서...”

“네 말 안 들어.”

잠긴 목소리로 세현이 속삭였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웅웅거리는 낮은 냉장고 모터 소리만 희미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세현은 더욱 힘을 주어 재란을 자신에게로 밀착시켰다.

“서프라이즈도 싫어. 지키지 못하는 약속도 싫어. 손가락이 부러진 것도 아닌데 문자 한 통을 못해? 어디 있다, 보고 싶다, 언제 온다. 이 세 문장이면 되는데.”

“미안해”

“이재란. 너 짜증 나.”

“나한테 정 떨어졌지?”

“그게 아니라서 더 짜증 난다고.”

재란이 몸을 돌려 세현을 마주 안았다. 다정한 손이었다. 세현이 오래 기다렸던 체온이었다. 재란은 세현이 맛본 최초의 배신이자 열망. 그를 무너뜨리는 것도 세우는 것도 모두 재란이었다. 재란은 침묵으로 그를 얼리고 등을 토닥이는 손길만으로도 그를 녹였다.

“네가 내 엄마야, 누나야? 애 달래냐 지금?”:

“내가 감히. 대한민국 가요계의 어린 왕자님을 달랠 수 있니? 사죄하는 중이야. 부디 넓은 마음으로 용서해주십사, 하고.”

“시끄러. 너 지금 하나도 안 미안한 거 같아.”

“바닥에 엎드릴까?”

“그랬단 봐. 지옥 끝까지 따라가서 들들 볶을 테니까.”

세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재란이 어깨를 움츠리더니 장난스럽게 웃었다. 이제야 예전 모습이 보였다. 세현은 최대한 표정 없이 있으려고 했지만 재란이 고개를 이리 저리 돌리며 귀엽게 콧잔등을 찡그리자 그만 따라 웃고 말았다. 이재가 보면 또 혀를 찼을 거였다. 그러나 아기때 부터 순하기로 소문났고 평생 제대로 화 낸 건 다섯 번도 채 안 되는 세현으로서는 이만큼 버틴 것도 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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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방은 쾌적했다. 퀸 사이즈 침대 하나와 모던한 작은 테이블, 벽에 붙은 화장대 겸 책상이 있는 평범한 방이었다. 볼 거라고는 작은 창문 너머 멀리 보이는 남산타워였다. 천천히 안을 둘러보던 세현은 구석에 세워져 있는 은회색 알루미늄 캐리어를 발견했다. 사이즈가 꽤 컸다. 재란은 어딘가로 떠날 생각인걸까? 세현은 캐리어 안에 담겨있을 짐을 가늠해 보고 목적지가 어디일지 생각했다. 세현이 무얼 보고 있는지 알면서도 재란은 별 말이 없었다. 대신 냉장고를 열어 맥주를 꺼냈다. 시원하게 뚜껑을 연 재란은 침대에 걸터 앉아 한 모금 들이켰다.

“마실래?”

재란이 맥주캔을 주며 물었다. 세현은 받아서 남은 맥주를 한 입에 털어넣었다. 재란이 후후, 웃었다. 냉장고에는 맥주캔 두 개와 작은 샴페인 한 병이 남아 있었다. 술을 몽땅 꺼낸 후, 둘은 침대에 마주 앉아 나눠 마시기 시작했다. 처음엔 간단한 안부를 물으며 술만 마셨지만, 시간이 지나자 분위기가 점차 풀렸다. 창 밖의 붉은 해가 기울고 남산은 짙푸른 색으로 변했을 즈음 둘은 편안한 자세로 제각기 침대 헤드에 기댔다. 재란은 어떻게 해서 이 곳에 나타나게 된 건지 설명했다.

“네 스케줄을 확인하고 연줄을 이용했어. 네가 여전히 나를 친구로 생각할지 확신이 없어서 멀리서라도 살펴보고 연락하려고 했거든. 네가 나를 안 보려고 해도 한번은 만나야겠다고 생각했어. 어떻게 된 건지 내 입으로 말해주고 싶었어. 나에 대해”

“너도 날 모르네. 내가 어떤 놈인지.”

“넌 좋은 사람이지.”

“하! 웃기는 소리.”

내가 널 두고 무슨 생각을 한 줄 알면 천진한 얼굴로 그런 말은 못할텐데. 세현은 술을 들이켰다.

“지난 2년 동안 연락 못한 건 내가 법적인 문제에 얽혀 있어서야.”

“그게 무슨 소리야?”

“외할아버지가 갑작스럽게 세상을 뜨시는 바람에 상속 문제가 생겼거든. 그리고 외부에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소문이 나면 좀 곤란해서 핸드폰도 차단됐고.”

“... 상속 문제?”

“응. 혹시 선호 그룹이라고 알아?”

세현이 익히 아는 회사였다. 선호 그룹은 식품으로 시작해서 물류와 패키징, 웰니스와 바이오까지 사세를 확장한 기업으로 식품 업계에서는 독보적 선두 기업이었다. 일년 전쯤 선호 그룹의 김정대 회장이 별세했다는 기사가 났었다. 세현의 동료 연예인이 그 회사 광고를 맡고 있었는데 그때 내부 사정이 좀 복잡하다, 라며 투덜댄 기억이 남아 있다. 재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이름에 세현은 단숨에 그 사정을 이해하게 되었다.

“선호 그룹 김정대 회장이 내 외할아버지야.”

솔직히 놀랬다. 세현은 괜히 목이 막히는 것 같아 잔기침을 했다. 무슨 말이든 해야 할 것 같아 머리를 굴리다 재란의 치맛자락만 만지작거렸다. 입안이 쓰고 침이 말랐다. 세현이 중얼거렸다.

“진짜 공주였네.”

재란은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신데렐라쪽이야. 우리 엄마는 그쪽 집안에서 아무 힘이 없거든. 이미 돌아가셨으니까.”

이번에는 재란이 맥주를 쭉 들이켰다. 도톰한 입술을 오므리고 매끈한 목을 뒤로 젖힌 채 술을 마시는 모습은 매혹적이었다. 신데렐라가 계모와 언니들에게 구박을 받았다는 노래가사가 떠올랐다. 진짜 신데렐라쪽이라면 재란의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는 뜻이된다. 예전 태광이 말했던 게 맞았다. 2년 전 태광은 세현에게 재란이 ‘외가’의 일 때문에 정신이 없을 거라고 했었다. 그 외가가 어디인지 언급하지 않았을 뿐이다. 태광은 나름 진실을 말했다. 그리고 그는‘미지의 영역’으로 넘어가지 말라고 경고도 했었다. 세현은 재란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 경고가 재란의 뜻이었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아버지도 없어.”

“뭐?”

또 다시 놀랬다. 세현은 마시던 맥주를 내려놓았다. 재란은 양손으로 맥주캔을 꽉 쥐고 창 너머를 보고 있었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럼 대표님은?”

“사실은 삼촌이야. 어렸을 때 나를 호적에 올려주셨어. 출생신고도 하기 전에 부모님 두 분이 교통사고로 돌아가셨거든. 듣기 좋은 이야기는 아니지? 부잣집 딸과 클럽 댄서가 만나 결혼도 안하고 스무살에 애 낳고 한날 한시에 세상을 떠났어. 남의 이야기라면 엄청 가슴 아픈 러브스토리지만, 남은 사람에게는 막장 스릴러가 돼. 그렇다고 너무 안쓰럽게 보진 마. 나 정도면 나쁘지 않았어. 그냥 다른 사람한테 설명하기 복잡한 게 문제인 정도? 처음 만나자마자 이런 사정을 줄줄이 풀어놓기도 좀 그렇잖아. 적당한 타이밍을 잡는 게 힘들어.”

진짜 그러기만 했을까? 상처 없는 말끔한 얼굴로 말할 수 있게 되기까지 견뎌야 했던 시간은 어땠을지 생각해봤다. 이러니 재란이 자신보다 심연이 깊고 어른스러울 수밖에 없다고 세현은 생각했다. 몰라서 미안했고 궁금해하지 않은 자신을 원망했다. 재란은 남은 맥주를 탈탈 털어 마시고 협탁 위 샴페인을 힐끗 봤다. 세현은 마시던 맥주를 내밀었다. 재란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 마셨다. 세현은 손을 뻗어 샴페인을 집어들었다. 그리고 재란의 옆에 바싹 붙어 앉았다. 재란이 마지막 한 모금을 마시고 긴 한숨을 쉬자 기다렸다는 듯 샴페인을 내밀었다. 재란이 웃었다. “취하게 만들려는 거야?”라고 하면서도 받았다. 밤이 되기 직전 마지막 남은 빛이 재란의 머리위에 점점이 흩뿌려졌다. 세현은 손바닥으로 그 빛을 덮었다. 동그란 재란의 머리통이 한 손에 다 잡혔다. 세현은 빛이 사라지기 전에 잡고 싶었다. 그 빛의 열기로 지워지지 않는 낙인이 찍혀도 좋았다. 서서히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쫑파티 다음에 너한테 연락을 안한 건 이 설명이 하기 싫어서였어. 그 다음 연락을 못한 건 핸드폰이 없어서였고. 2년이나 연락을 못한 건 할머니 옆에 있느라. 할머니 상태가 좋지 않았어. 할머니 모시고 지방 요양지를 돌아다녔고 해외에도 좀 있었고. 나중에는 네 일상을 방해할까봐 연락 못 했어. ”

“후회해.”

세현이 불쑥 말을 꺼냈다.

“중학교 1학년때 방송실에서. 빨간 머리가 잘 어울리는 이상하고 예쁜 애를 만났을 때 잘난 척 하지 말고 내가 먼저 친해지자고 하는 건데.”

덤불처럼 짙고 뺵빽한 속눈썹이 가늘게 떨렸다. 세현의 손이 미끄러지듯 목덜미로 내려와 세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넘겼다. 섬세한 손끝이 조심스럽고 간지러워 재란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땐 시간이 많이 있을 줄 알았어. 우리가 그때부터 친구였다면 체육대회도 수학여행도 같이 갔을 거고 그랬다면 네가 힘들게 이런 이야기를 꺼낼 필요도 없었겠지. 다 알았을테니까. 그리고 분명 우리는 훨씬 더 전에 연인이 되었을거야.”

재란은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세현을 보지도 않았다. 묵묵히 샴페인을 홀짝였다. 그 말이 진심이든 아니든 그냥 꼭꼭 씹어 삼키려는 듯, 완전히 분해시켜 흡수하려는 듯 보였다. 그러나 세현은 재란이 자신의 말을 쉬운 위로나 값싼 애정표현으로 느끼지 않길 바랬다. 그랬기에 자신을 똑바로 보고 진심을 봐주길 원했다. 세현은 재란의 얼굴을 잡고 자신에게로 고정시켰다. 재란에게서 나는 상큼한 샴페인 향을 들이마쉬며 세현이 중얼거렸다.

“이제 됐어. 너하고 있으니까. 이젠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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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밖은 어두워졌다. 둘은 미니 냉장고에 있는 술을 모두 마셔버렸다. 그래봐야 맥주 세 캔과 작은 샴페인 병 하나였기에 정신은 말짱했다. 재란이 빈 병을 들어서 혹시 남은 게 없는지 들여다보았다. 완전히 바닥이었다.

“왜? 더 마시고 싶어?”

“응. 아쉬워.”

“내가 나가서 사 올게.”

“안돼. 내가 갔다 올게. ”

재란이 침대에서 일어서려하자 세현은 그대로 눌러 앉혔다. 어딜 혼자 보내는 게 불안했다. 이대로 사라지면 이젠 정말 미칠 것이 분명했다. 자신이 신뢰를 잃어버렸다는 걸 깨달은 재란은 더 나서질 않았다. 다만 걱정스럽게 밖을 내다봤다.

“다 방법이 있어.”

세현은 셔츠 자락을 밖으로 다 빼고 목 위에까지 단추를 다 채웠다. 그리고 잘 정돈되어 있던 머리카락을 손으로 마구 만져서 이마를 덮었다. 그것만으로 세련되고 예술적인 느낌을 풍기던 남자에서 너드 이미지로 변신이 충분했다. 세현은 화장실에서 선글라스의 렌즈를 깨서 안경으로 만들어 쓰고 재킷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내 얼굴을 가렸다. 결정적으로 구부정해 보이도록 어깨를 둥글게 말았다.

“이러면 못 알아보더라고. 사람을 구분하는 데 의외로 자세가 중요해. 걸음걸이나.”

못 본 사이 많이 능숙해진 세현이었다. 한 두 번 해본 솜씨가 아니었다. 2년은 짧은 시간이 아니었다는 걸 재란도 이걸 보며 받아들였다. 자신만만하게 밖을 나와 놓고 사실은 살짝 쫄았다. 외형을 바꿨다고 해도 세현은 최대한 눈에 띄지 않게 걸었다. 무음으로 해놨던 핸드폰을 꺼내 확인하니 연락이 꽤 많이 와 있었다. 그 중에 급한 것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세현은 고개를 푹 숙이고 구부정하게 걸으며 여기 저기 메시지를 보내고 전화통화를 했다. 요즘 세현을 전담으로 맡고 있는 매니저 기영에게는 호텔에서 친구와 있다고 솔직히 털어놓았다. 기영은 불안이 묻어나는 말투로 “그럼 동주형한테는 말하지 마요?”하고 물었다. 세현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상관없었다. 파티장에서 헤어진 윤정에게서는 메시지가 와 있었다.

-갑자기 사라지기야? 아무래도 꽃 찾아 날아간 것 같은데. 다음에 만나거든 어떻게 된 건지 알려줘. 궁금하니까.

세현은 죄송하다는 답신을 보냈다. 지나가던 사람들 중에 그를 힐끗 돌아보는 사람이 있어 세현은 순간 조마조마해졌다. 빨리 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꾹 누르고 머리카락을 더 앞으로 내렸다. 천천히 걸어가니 호텔 정문에서 30미터쯤 거리에 작은 편의점이 나왔다.

세현은 맥주캔 네 개와 컵라면을 샀다. 슬슬 배고플 시간이었다. 김밥과 샌드위치 사이에서 고민하다 김밥을 하나 선택했다. 그 다음으로 뭐 더 살거 없나 둘러보는데 우연히 그게 눈에 띄었다. 구강청결제와 일회용 밴드 사이에 있어 납작하고 네모난 종이 상자. 그건 콘돔이었다. 그 손바닥만한 상자는 언뜻 보면 약같기도 했다. 왜 그게 보였는지 모르겠다. 순간 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이어 그런 생각이 든 자신에게 당황했다. 잠시 고민했다. 필요할까?

결정은 빨랐다. 세현은 콘돔 상자 들고와 맥주와 함께 계산을 했다. 편의점 직원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코드를 찍고 비닐 봉지에 담아 주었다. 편의점을 나서기 전, 세현은 콘돔 상자를 빼서 슬그머니 바지 주머니 속에 넣었다. 다시 호텔로 돌아오는데 상자 모서리가 허벅지를 쿡쿡 찔렀다. 마치 거기에 자신이 있다는 걸 잊지 말라는 것 같았다.

돌아오니 방안은 어두웠고 재란은 잠들어 있었다. 세현은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었다. 재란은 베개를 등 뒤에 대고 완전히 드러눕지 않은 자세였다. 다리는 아직 바닥에 늘어진 채였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잠이 든 게 분명했다. 세현은 조심스럽게 비닐 봉지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재란의 옆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침대에 달린 수면등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와 재란의 얼굴에 그림자를 만들었다. 세현은 손끝으로 재란의 눈썹을 결대로 만졌다. 부드러워. 흰 피부 위에 검은 눈썹은 피아노 건반을 떠올리게 한다. 이곳에 입을 맞추면 아름다운 소리가 나올 것만 같다. 피부 아래 눈썹뼈를, 관자놀이에서 힘차게 뛰는 맥박을, 높고 좁은 산맥같은 콧대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잠든 재란은 훨씬 성숙해보였다. 그녀의 곡선은 그리스 신전에 서 있는 석상과 닮았다. 지중해 바다를 향해, 더없이 아름다운 자태로, 머리위에는 대리석 천장을 이고 있던 처녀들. 무겁지 않나, 걱정이 될만큼 거대한 천장을 이고 서 있지만 석상의 표정은 평온하기 그지 없었다. 재란도 그럴까? 그녀의 아픔은 이미 내성이 생겨 겉으로는 알아채기 힘들게 되어버렸을까? 재란이 말없이 사라지지 않겠다는 약속을 어길때가 버티지 못한 순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렇게 그의 눈 앞에 계속 잠들어 있었으면 했다. 신데렐라에 이어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말이다.

“세현아”

잠든 줄 알았는데 재란이 조그만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여전히 눈은 감은 채였다.

“자는 거 아니었어? 내가 깨운 건가?”

세현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자면 안돼. 나 좀 깨워 봐.”

“왜 안돼?”

“화장 지워야지. 머리도 감아야 하고. 이대로 자면 엉망이 된단 말이야. 그리고 너도 있는데 내가 어떻게 잠을 자?”

재란은 잠기운이 가득한 목소리로 간신히 입술만 달싹거렸다. 깨우고 싶지 않았다. 이 얼굴을 밤새 보고 싶다. 아니 이대로도 좋지만 또 자신을 보고 웃는 예쁜 눈을 마주하고 싶기도 했다. 세현이 손끝으로 재란의 오똑한 코 끝을 눌렀다.

“진짜 깨워?”

“응.”

세현은 한쪽 무릎을 침대에 대고 재란의 목 뒤로 왼 팔을 집어 넣었다. 이대로 일으킬 생각이었다. 부스스 눈을 뜨고 재란이 마지 거기에 있어야 할 것처럼 세현의 어깨를 팔을 둘렀다. 몸에 힘이 들어가자 주머니 속 상자의 존재가 감지되었다. 세현은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맥박이 조금 빨라지는 게 느껴졌다.

안고 싶다. 욕망은 뚜렷해서 스스로를 속일 수 없다. 세현은 재란의 모든 것을 갖고 싶었다. 재란이 비워야 했던 2년의 시간도 그의 것이어야 했다. 세현은 재란을 일으키는 대신 다시 눕혔다.

“네가 원하면 나는 뭐든 할 수 있지.”

재란의 귀에 입술을 바싹 대고 세현은 이렇게 속삭였다. 피부에 와 닿는 열기에 놀라 재란이 고개를 돌리자 둘의 눈이 마주쳤다. 아직 잠기운이 남아 몽롱한 재란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세현은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상대가 흡, 하고 숨을 들이 쉬는 것이 느껴졌다. 부드럽지만 열기 힘든 입술과 치아를 벌리려 세현은 재란의 아래 턱을 잡고 눌렀다. 자연스럽게 입이 벌어지며 작은 틈이 생겼다. 그 곳을 놓치지 않고 세현의 혀가 넘어갔다. 더 깊이 연결되기를 원하는 마음으로 세현은 재란의 입속을 샅샅이 탐험했다. 이번에는 다급하게 굴지 않았다. 막무가내로 밀어부쳤던 첫 번째와 달리 지금은 천천히 스며들 듯 그렇게 하나씩 맛보고 음미했다. 재란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틈에 재산의 두 손은 세현의 머리카락 속을 헤집고 있었다. 입술을 빨고 세현의 리듬에 맞춰 움직이는 사이 잠에서 완전히 깨어나 난생 처음 키스가 주는 자극에 몰두했다.

서로의 운명을 단단히 얽어매는 입맞춤이 끝나고 다시 둘의 눈이 마주쳤다. 둘 다 부족한 숨을 몰아 쉬느라 가슴을 들썩였다. 세현은 금세 부푼 붉은 입술을 엄지로 쓰다듬으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우리 사귀자.”

처음엔 짧은 기쁨이, 그 다음엔 곤혹스러움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약간의 두려움,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는 기대감. 재란은 눈을 깜빡거리며 세현이 읽어 낸 감정을 지워내려고 했다. 세현은 한 손으로 시선을 돌리려는 재란을 단호하게 잡았다.

“나를 봐. 나는 네가 필요해.”

재란은 망설이다 자신의 얼굴을 잡고 있는 세현의 손을 감썼다.

“사귀는 거 말고 그냥 만나. 넌 언제나 자유야.”

“나만 자유야? 너도 자유잖아. 나는 그게 싫어. 우리가 언제든 끊어져도 괜찮은 사이가 되는 게 못 견디게 싫다고.”

마지막 말에는 쌓였던 울분이 섞였다. 세현의 턱이 딱딱해졌다. 세현은 더 강하게 재란의 입술을 탐하며 거절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사람들은 세현의 외모만 보고 그가 부드러운 사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의 내부에는 질투와 소유욕이 사금처럼 깔려있었다. 세현이 처음 그 감정을 느낀 건 재란을 만났던 중학교때였다. 세월이 흐를수록 감정은 점점 진하고 응축되었다.

“키스해줘.”

이번엔 재란이 먼저였다. 재란은 세현을 끌어당겨 서투르게 그의 입술을 할짝거렸다. 이게 대답이라고 세현은 생각했다. 그녀의 숨소리는 가빠졌고 체온은 뜨거워졌다. 세현은 재란의 드레스 목부분을 잡아 당겼다. 가느다란 목이 그의 입술을 기다리며 보얗게 빛을 냈다. '바로 여기'라는 듯, 재란의 목 중간쯤에는 드라큘라가 물었던 흔적인 것처럼 점 두 개가 까맣게 박혀 있었다. 세현은 그곳을 강하게 물고 혀로 핥았다. 탄력있는 피부가 입안에서 맴돌았다. 세현은 아래서부터 열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세현의 오른손이 어느새 재란의 허리쪽에 가 있었다. 얇은 천 아래로 피부의 온기가 느껴졌다. 세현은 풍성하게 주름 잡힌 치마를 걷어냈다. 그리고 재란의 허벅지를 움켜쥐었다. 놀란 재란이 입술을 떼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두 사람 사이에 찰나의 틈이 벌어졌다. 세현은 한 쪽 다리를 쭉 펴고 나머지 다리는 재란의 허벅지 사이로 밀어 넣었다. 치마 아래로 손이 들어갔다. 피아노를 연주하고 마이크를 잡던 그 손이 여자의 둥근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납작한 아랫배에 머물렀다 검은색 속옷 위로 넘어갔다. 세현이 재란의 속옷 허리를 움켜쥐었을때였다.

아.

폭풍처럼 몰아치는 침입에 재란은 비명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내었다. 다가올 일을 감지하고서 재란은 본능적으로 세현의 어깨를 잡았다. 재란의 어깨와 쇄골뼈에 연신 입을 맞추고 있던 세현이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그는 흥분으로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다.

“하지 마?”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목소리로 세현이 물었다. 재란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게 아니었다. 재란은 입술을 깨물었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나는 처음이야. 넌 해봤어?”

“당연히 처음이지.”

세현은 빠르게 대답하고 재란의 입을 막았다. 다시 키스가 이어졌다. 일을 하면서 유혹이 없었던 건 아니다. 세현에게 노골적으로 들이대는 여자도 꽤 있었다. 그러나 세현은 모두 웃으며 거절했다. 재란이 아닌 다른 여자와 이렇게 친밀한 행위를 하는 게 내키지 않았다. 생리적인 성욕은 알아서 처리했다. 그 동안 억지로 견딘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이렇게 닿아있는데 지체할 여력은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빌어먹을, 이 옷 좀 어떻게 안될까? 내가 찢을 거 같아.”

세현이 진지하게 고백하자 재란이 눈을 깜빡이다가 곧 웃음을 터트렸다. 세현은 아래에 누워, 몸을 붙이고 있을 때 듣는 웃음소리는 사람의 마음을 간지럽히는 애교가 섞여 있었다. 그게 또 다시 세현을 충동으로 이끌었다. 답을 듣기도 전에 세현은 마음을 정했다. 찢어버리지 뭐. 세현이 소매라인을 잡고 힘을 주자 봉제선이 튿어지는 소리가 났다. 탁. 재란이 그 손을 얼른 잡았다.

“옆에 지퍼가 있어.”

재란의 손이 옆구리 쪽을 가리켰다. 겨드랑이 쪽에 동그랗고 작은 철제 장식이 달랑거리는 게 보였다. 지퍼 손잡이라는게 눈물방울처럼 작았다. 이런 걸로 어떻게 열고 닫을 수 있는지 여자 옷은 신기할 따름이었다. 세현은 손가락 끝에 힘을 주고 천천히 지퍼를 내렸다. 벌어지는 옷 사이로 눈부시게 하얀 속살이 드러났다. 재란의 체향이 더 짙어졌다. 세현은 그 사이에 코를 대고 킁킁거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속삭였다.

“팔을 들어.”

세현은 재란의 상체를 받쳐 들고 아래서부터 옷을 끌어올렸다. 검은 꽃 같던 원피스가 벗겨지자 재란은 단순한 모양의 속옷만 남겨졌다. 검은색 브래지어 위로 눈부시게 흰 가슴 둔덕이 부풀어 올라 있었다. 세현은 거기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 사이 재란이 세현의 셔츠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내 껀 그냥 찢어도 돼.”

억눌린 목소리로 세현이 웅얼거렸다. 다시 재란의 웃음이 터졌다. 세현은 난생 처음 옷이 거추장스럽다고 생각했다. 이거 벗기고 푸느라 들이는 시간이 아까웠다. 세현은 나머지 단추는 내버려두고 그냥 위로 벗어버렸다. 그리고 한손으로는 바지 지퍼를 내리며 다른 한 손으로 재란의 허리를 감싸안고 그녀에게 바싹 밀착했다. 다행히도 주머니 속 콘돔을 잊지 않았다. 완전히 바지를 벗기 직전 주머니를 뒤져 네모난 상자를 꺼내 사이드 테이블 위에 던졌다. 재란의 시선이 상자를 따라가려는 걸 세현은 재빨리 잡아 내렸다. 그리고 눈부신 가슴 둔덕에 처음으로 흔적을 남겼다. 붉고, 선명한, 재란이 그의 것이라는 낙인을 남겼다. 희고 둥그런 가슴을 베어 물자 재란은 몸을 부르르 떨며 다급하게 세현의 이름을 불렀다. 잘 익은 복숭아 같은 양 가슴을 차례로 욕심껏 핥자 입안에 단맛이 돌았다.

흐으으으음.

재란이 처음으로 신음소리를 토했다. 그녀의 반응이 세현으로 하여금 이성의 끈을 놓게 했다. 재란을 통째로 소유하고 싶다는 욕망이 들불처럼 일었다. 세현은 솟아오르는 본능의 고삐를 잡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그가 느끼기에 재란은 잡고 있어도 잡은 것 같지가 않았다. 그에게 재란은 형체 없는 안개였고 발을 뺄 수 없는 늪이었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흥분으로 경직된 몸은 재란을 눌러 그의 아래에서 꼼짝도 못하게 만들었다. 입술이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본능이 가슴 계곡을 지나 갈비뼈가 느껴지는 얇은 피부를 만나고 다시 납작한 아랫배와 분화구처럼 꺼진 배꼽으로 이어졌다. 세현의 길쭉한 손가락이 재란의 속옷을 끌어내렸다. 무의식중에 재란이 다리를 모았다. 동시에 세현의 목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두려움과 기대가 뒤엉켜 스스로도 어쩔줄 모르는 모양이었다. 재란은 세현의 가슴에 얼굴을 부비며 매달렸다. 나무줄기에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는 아이처럼 세현에게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세현은 재란의 손을 당겨 제 심장에 얹었다. 울 것 같이 물기 가득한 눈이 마주쳤다.

그들의 첫 번째 시도는 실패였다. 둘 다 힘을 빼지 못했고 그래서 고통스러웠다. 고통과 쾌락이 양 극단이 아니라 같은 선상에 있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끼고서 끝났다. 삽입도 절정도 상대와 맞춰가야 하는데 최초의 연인인 그들은 서투를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세현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웃어야 할지 도망을 가야할지 고민했다. 참담했다. 남자의 자존심, 뭐 그런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버텨왔던 시간이 하릴없이 용해되는 기분 때문이었다. 세현은 말없이 뒤처리를 하고 몸을 일으켰다. 뒤엉킨 시트로 몸을 가리고 침대 발치에서 뒹굴고 있는 그의 푸른색 셔츠를 가져와 재란에게 덮어주었다. 차마 재란이 얼굴을 볼 용기가 안 나 고개를 외로 돌리고 있는데 죽은 듯 누워있던 재란이“그런 거 알아?”하고 말을 꺼냈다.

“세상이 네모난 상자야. 예쁜 포장지로 잘 싸여 있고 리본도 크게 달려있지만 사이즈는 하나뿐이어서 거기에 담을 수 있는 물건의 크기도 딱 정해져 있어. 전학오기전까지 나는 그런 상자에 담겨 있었어. 사실 나 전학 가는 거 싫었어. 상자 안이 익숙했거든. 그래서 처음 이사 와서는 집 밖에 나가지 않고 망원경으로 여기 저기 둘러보면서 불평만 했지. 삼촌 아파트도 마음에 안 들고 동네도 싫고. 저긴 낡았고, 더럽고, 촌스럽고..... 그 곳에 네가 없었다면 난 더 나빠졌을거야. 영하의 날씨인데도 학교 운동장에서 얼굴이 새빨개진 채 열심히 공을 차던 박세현. 키는 껑충하니 크고 몸은 말라서 티셔츠가 깃발처럼 펄럭였는데. 안간힘을 쓰고 골대를 향해 슛을 날리던 박세현은 엄청 귀여웠어.”

“땀투성이였을텐데.”

“그리고 방금 그때의 너를 봤어.”

”그게 무슨...“

”섹스할 때 네가 그때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어. 너무 귀엽고 사랑스러운,“

“박세현”하고 말하며 재란이 손을 뻗었다. 그가 잡아주길 바라는 손이었다. 세현은 그 손에 뺨을 갖다 댔다. 따듯한 온기가 세현에게 스며들어왔다. 우아하게 올라간 눈썹 아래 검은 눈동자에서 더없는 신뢰와 애정이 보였다. 세현은 천천히 다시 침대에 몸을 뉘였다. 재란이 바싹 다가와 그의 품 안에 안겼다.

“어떤 아이일까 궁금했지. 같은 중학교인걸 알고는 기뻤고. 친해지고 싶어서 알짱거렸는데 너무 인기가 많아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 그때 내 나름대로 애쓴거야. 삼촌한테 받은 명함도 너 줬잖아.”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속도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세현의 몸 속으로 바로 전해졌다. 대기를 통과하지 않은 소리는 유난히 모서리가 둥글고 먹먹했다. 둘 사이에 한치의 틈도 없게끔 세현은 재란을 더 힘주어 안았다.

“그거 아직 가지고 있어.”

“정말?”

“지갑에 늘 넣고 다녔어. 그게 너에게로 가는 티켓 같아서. 그 역할을 하긴 했지. 처음 길거리에서 오디션 제의 받았을 때 그 명함 떄문에 오케이 한거니까.”

“흠. 삼촌이 들으면 좋아하지 않을거야. 하지만 난 기뻐.”

자신의 감정을 솔직하게 말해주는 재란은 처음이었다. 특히나 세현과 관련해서는 더욱 그랬다. 세현은 방금 전까지 그가 거칠게 탐했던 입술에 길게 입을 맞췄다. 재란은 그에 열렬히 응답하며 마지막 한숨까지 세현에게 내어주고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부탁이 있어.”

“뭔데?”

“가끔씩 나를 설이라고 불러줄래? 자주는 말고. 가끔. 이렇게 단 둘이... 뭐랄까 이렇게 있게 되면 말이야.”

“설? 이 설?”

“내 옛날 이름이야.”

“개명을 했구나. 왜?”

세현이 팔을 대고 상체를 일으키며 재란을 내려보았다. 재란은 몸에서 흘러 내린 셔츠를 끌어올려 어깨를 덮으며 말했다.

“재란은,”

여기까지 말하고 잠시 뜸을 들였다. 세현이 피아노 건반을 누르듯 엄지로 눈썹을 문지르자 그게 신호가 되어 깊이 넣어두었던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돌아가신 엄마 이름이야. 5학년에서 6학년으로 올라갈 때 할머니가 갑자기 나를 재란이라고 불렀어. 설이는 버리고 재란으로 살으라고. 나한테 물어보지도 않고 이름을 바꾼 거야.”

세현은 너무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앉았다. 재란은 만났을때부터 ‘재란’이었기에 그 이름에 부모의 사랑이외에 다른 의미가 담겨 있을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한국에서 자녀의 이름과 부모의 이름을 같이 쓰는 경우는 없다. 이름은 그 사람의 자리이며 정체성이다. 어떤 사람으로 자라기를 바라는 부모의 기대, 사회 속에서 자신을 소개할 때 맨 처음 받게 되는 인상, 다양한 관계 속에서 사랑을 담을 수 있는 도구였다. 그런데 재란은 이름을 빼앗겼다. 세현은 재란이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시련속에 살아왔음을 깨달았다.

“외가에서는 내가 클럽에서 춤이나 추던 아빠를 닮은 걸 싫어해. 아기때는 엄마 얼굴이 있었는데 자랄수록 자꾸 아빠 얼굴이 나오니까 할머니가 나를 보는 걸 힘들어했어. 그래서 고심 끝에 이름을 바꾼거야. 당신들이 제일 사랑했던 막내딸의 이름으로. 그러면 내가 곧 엄마이고 엄마가 곧 내가 되니까.”

재란이 일어나 앉으며 세현의 셔츠에 팔을 넣었다. 그녀는 두 팔로 무릎을 안고 공처럼 몸을 둥글게 말았다. 잔뜩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느슨하게 흘러내려 재란의 얼굴을 감춰주었다. 세현은 재란의 뒤통수를 잡아 당겨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했다.

“난생 처음 할머니에게 대들었어. 왜 마음대로 하시냐고 따졌지. 그땐 친구들에게 내 이름이 바뀐 이유를 설명하는 게 싫었어. 거기다 재란은 어딘지 어른스러운 이름같아서 마음에 들지 않았고. 울고 불고 떼쓰고 화내고. 그렇게 일년이 지나니까 할머니가 잠깐 떨어져 있자고 하더라. 그래서 삼촌집으로 이사하고 전학간거야.”

“... 나 욕해도 돼?”

세현은 중학교에 막 진학했을 때 그들이 얼마나 어렸는지를 떠올렸다. 다 큰 척 했지만 사실은 신체보다 정신의 성장이 훨씬 더뎠다. 그 시기에 접한 모든 건 깊은 흔적을 남겼다. 아주 잠깐 스쳐지나간 것이라도 인생을 뒤바꿀만한 상처가 될 수 있는 나이였다. 재란이 푸훗,하고 짧게 웃었다.

“나도 욕 엄청했어. 살벌했지. 그때. 지금은... 그냥 네가 가끔 설아, 하고 불러주면 행복할거 같아.”

“설아?”

세현이 조심스럽게 이름을 불렀다. 재란은 그 음성을 음미하듯 눈을 감았다. 세현은 재란의 몸을 잡고 돌려 마주보았다.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보고 싶었다.

“설아.”

감은 두 눈 위에 꾸미지 않은 편안함과 기쁨이 어리었다. 세현은 재란의 하얀 목이 자신이 만든 흔적으로 얼룩덜룩한 걸 보고 손바닥으로 천천히 쓸어내렸다. 내가 만든 흔적이 재란에게 켜켜이 쌓이고 있구나. 그래서 좋은 것만, 예쁜 것만 주고 싶었다. 행복한 기억을 계속 더해주고 싶었다.

“설아.”

재란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세현은 눈두덩이에, 관자놀이에, 입술 끝에, 그리고 귓불에 입을 맞추었다. 재란의 손이 세현의 허리를 감고 있는 시트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새로운 흥분이 피어올랐다. 서두르고 급박했던 처음보다 상대의 연약함이 사랑스러워 못 견디는 깊은 애정이었다.

그는 사정을 하지 않았으면 했다. 이대로 영원히 재란과 연결되어 있고 싶었다. 그의 것이 재란은 안에서 붙박힌듯 살았으면 했다. 세현은 참고 견뎠다. 아아. 끝나지 않기를. 지금처럼 내 것으로 머무르기를. 그러나 세현이 아무리 원한다고 해도 한계가 있는 법. 절정의 순간, 재란은 작고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고 세현은 지독한 쾌감속에서 그의 영혼이 재란에게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을 받았다. 영혼은 없고 이제 빈 껍데기만 남아 있는 셈이었다. 파정의 만족보다 아쉬움으로, 세현이 헐떡거리며 중얼거렸다.

-떨어지지 않을 거야. 절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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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우나실을 나와 휴계실로 가자 이재가 라운지 의자에 길게 드러누워 있는게 보였다. 세현이 옆에 가 앉자 이재는 얼굴을 덮고 있던 수건을 치우지도 않고 말했다.

"한 판 떴냐?"

"그런 놈이랑 무슨. 어쨌거나 재란이 사촌이잖아. 예의를 다해야지."

"네 안중에는 이재란뿐이냐? 영교는 어떡하라고?"

이재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수건이 흘러내려 바닥에 떨어졌지만 주을 생각도 안했다.

"내가 나서본들 영교가 퍽이나 고마워하겠다. 길길이 날뛸껄? 자기 일은 자기가 알아서 한다며, 왜 끼어드냐고 난리칠텐데. 어쨋거나 사업적으로는 그 사람이 영교한테 도움이 되나보더라."

이재에게 경호의 제안을 솔직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 이재쪽도 지독하다면 지독한 사랑이다. 일곱살에 만나 벌써 이십년이 넘었다. 얼마나 답답한지 이런 말을 한 적도 있다.

"엄마가 그러는데 우리 동네가 음기가 강하대. 그래서 남자들이 기운을 못쓴다나? 맞는 거 같지 않아? 우리 아빠를 봐도 그렇고 여자들한테 설설 기잖아. 나도 너도 여자라고는 서영교, 이재란뿐이고. 아니다. 너는 좀 낫다. 어쨌거나 둘은 서로 사랑하잖아."

세현은 이재나 자기나 도긴개긴이라고 생각했다. 경호가 대 놓고 선전포고를 한 셈이니 불안하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일 생일파티를 그냥 넘겨서는 안될것 같아 세현은 이재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일 바빠? 바쁘더라도 시간 내. 안그러면 후회할지도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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