똑똑, 안아줄까요 13
#14
“무슨 음식을 좋아해요?”
“샌드위치요. 밤새고 난 다음 피곤한 상태로 먹는 샌드위치. 채소는 거의 없고 슬라이스 햄이 두껍게 들어간 걸 좋아해요. 거기에 미지근한 커피까지 있으면. 끝내주죠.”
“... 특이한 취향이네요.”
-<재란이 선보는 남자와 나눴던 재미없던 대화 중에서>-
-너는 남이 정해준 인생을 왜 이렇게 정성스럽게 사니?
언젠가 승호가 재란을 보며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물었다.
“그런 인생도 있는 거지. 오빠는 뭐, 마음대로 사나? 사람 사는 게 다 거기서 거기야. 적당히 서로 맞춰가며, 양보할 건 양보하고 욕심낼 건 욕심 내며 살아. 다들 그래. 그러니까 날 너무 불쌍하게 보지 마.
태어나면서부터 원망을 짊어졌다. 그럴만했다. 재란이 있어 남은 가족들에게 세상은 낙원이 아니었다. 재란은 행복으로 가는 길에 서 있는 걸림돌, 방지턱, 장애물이었다. 엄마의 제삿날이 되면 재란은 커다란 상 앞에 혼자 서 있었다. 다른 가족들은 각자의 방에 숨소리도 내지 않고 숨었다. 멀리서 할머니의 우는 소리가 들려오면 재란은 우주에 혼자 남겨진 기분이 들었다. 엄마의 제삿날은 애도하는 날이 아니라 재란이 벌 받는 날이었다. ‘너는 혼자’라는 걸 뼛속 깊이 새기게 하는 그런 날이었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살 수 없었다. 재란은 지금의 삶이 자기 것이라는 생각이 도저히 들지 않았다. 스무 살에 세상을 떠난 엄마와 아빠의 남은 인생을 배턴 터치해서 사는 것 같았다. 그래서 제 맘대로 하지 못했다.
재란은 딱 하나만 욕심냈다.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있는 이 사람만.
“드디어 나왔네. 난 네가 지하세계로 끌려가 다시 안 돌아올까 봐 쫄았어.”
“페르세포네처럼?”
재란은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세현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케이크를 만들러 왔다는 말에 세현은 그냥 알았어, 하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네 시간이 흘렀다. 이미 사방이 어두워졌고 공기는 서늘했다. 세현이 재란을 덥석 안자 그에게서 바람 냄새가 났다. ‘오래 기다렸네’ 재란은 그런 생각을 하며 세현의 가슴을 밀었다.
“끝나면 전화한다니까.”
“네 말은 못 믿어. 이대로 택시 타고 가면서 ‘미안, 집에 가는 중이야’라고 문자 하나 보내면 끝이잖아. 지키고 서 있어야 안심이 돼.”
세현은 멀어지려는 재란을 다시 잡아당기며 발걸음을 옮겼다. 자연스럽게 둘은 세현의 집으로 향했다. 중간 과정이 어떻든 이렇게 얼렁뚱땅 세현의 집에 가게 된 건 운이 좋다. 시간이 늦어 창 너머에는 어둠만 가득했다. 세현이 말하던 피처럼 붉은 노을을 못 보는 건 아쉽지만 한강 불빛이 별처럼 반짝이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재란은 이마를 유리창에 대고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세현이 거실 전등 스위치를 누르려 하자 재란이 말렸다.
“잠시만. 불빛은 어두워야 잘 보이니까. 좀 더 보고 싶어.”
왼쪽으로는 포물선 형태로 조명을 매단 한강 다리와 고층 빌딩들이 무대 장치처럼 서 있었다. 반대쪽에는 강 한가운데 커다란 둥근 점이 보였는데 세현이 다가와 수초로 된 섬이라고 알려주었다.
“새들이 앉았다 가는 곳이야. 낮에 보면 초록색인데 군데군데 흰색이 보이거든. 그게 다 새야.”
“이 근처에선 쉴 곳이 없긴 해. 한강이 엄청 넓은 강이잖아. 단번에 날아서 건너가는 건 힘들 거야.”
“네 집도 강 너머에 있지. 단번에 오기 힘들어서 우리 집에 한 번도 안 온 건가?”
재란은 몸을 돌려 세현을 바라보았다. 세현은 키가 크기 때문에 올려다봐야 한다. 아래에서 보면 제대로 표정을 읽을 수가 없다. 그러나 그냥 알았다. 세현은 지금 쓸쓸한 눈을 하고 있을 것이다. 22살의 그 밤, 재란의 눈 속에 새겨진 세현이 떠올랐다.
세현의 공연에서 스태프로 일한 건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한 학기 내내 조셉이라는 유대계 남학생에게 시달렸는데 피할 곳이 필요했다. 그렇다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진 않았다. 안희녀 여사는 미국 관련 사건이 뉴스에 나오면 전화를 걸어 재란을 들들 볶았다. 술, 담배, 대마초, 시답잖은 남자들, 살인, 성폭행. 걱정은 끝이 없었다. 할머니는 불안으로 재란을 조종하려 들었다. 그건 한국으로 돌아간다고 해서 나아지는 게 아니었다. 그리고 세현이 있었다. 그 애가 빛나는 순간을 직접 보고 싶은 마음이 제일 컸다. 재란은 외할머니에게 2학기 과제 준비 때문에 바쁘다고 거짓말을 하고 투어를 따라가기로 마음먹었다. 마침 미국지사에 나와 있던 승호가 도움을 줬다.
“할머니는 싫어하지만, 그 정도 사회 경험은 해보는 게 좋아. 거기다 너희 친삼촌이 동행하신다며.”
승호는 내막도 모르고 응원을 했다. 태광은 태광대로 재란을 기특하게 여겼다. 속 사정을 아는 건 영교뿐이었다. 처음에는 무대 팀으로 들어갔지만, 나중에는 이 일, 저 일 가리지 않고 시키는 걸 다 했다. 통역도 했다가 소품도 날랐다가 스태프들 식사도 준비했다. 정신없이 일하고 무대가 시작되면 적당한 곳에 숨어 공연을 지켜봤다. 공연을 하도 봐서 멘트와 노래, 멤버들의 제스처까지 다 외울 정도였다. 그해 여름 재란은 살이 쏙 빠질 만큼 호되게 일을 하며 세현에게 집중했다. 세현을 중심으로 도는 세상은 단순하고 아름다웠다.
아티스트 숙소와 스태프 숙소는 다르게 잡았는데 보통 차로 10분 정도 떨어져 있었다. 세현은 아침 6시면 일어나 스태프 숙소까지 달려왔다. 매니저들도 잠들어 있는 시간이었다. 모자를 눌러 쓴 세현이 출근하는 현지인 틈에 섞여 커피와 샌드위치를 사서 숙소 앞에 기다리고 있으면 재란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방을 빠져나와 그에게로 갔다. 잠을 거의 못 자서 둘 다 눈 아래가 까매져 있었다. 다크 서클 부자라고, 서로 낄낄대고 놀리며 야채가 눈곱만큼 들어간 샌드위치를 함께 먹었다. 나중에는 그만 오라고 했지만, 세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뭐든 해준다며? 아티스트 기분 관리 안 해줄 거야? 이것도 스태프가 할 일인데?” 말이 안 되는 핑계인 줄 알면서도 재란은 토 달지 않았다. 그냥 그러고 싶었다.
마지막 댈러스 공연 날, 재란은 꽃다발을 사느라 마지막 무대를 보지 못했다. 멤버들에게 줄 꽃이었다. 소품팀 남자 스태프와 시내를 돌아다니며 꽃다발 일곱 개를 준비하고 폭죽과 케이크도 샀다. 턱이 네모지게 각이 진 그 스태프는 쭌이라고 불렸다. 25살로 한국에서 대학을 휴학하고 회사에 입사했다. 먼지가 잔뜩 앉은 지프를 몰며 그는“투어가 끝나서 아쉬워요”하고 말을 꺼냈다.
“한국에는 안 들어오시나요?”
“가끔 가요.”
“그럼 한국에서 만날 수도 있겠네요. 혹시 연락처 주고받을래요?”
쭌이 재란에게 호감이 있다는 건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재란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쭌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미안해요.”
“역시 소문이 맞나보네요.”
“무슨 소문이요?”
“멤버랑 사귄다면서요.”
“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꽃다발을 안고 있는 손에 힘이 절로 들어갔다. 그러나 재란의 표정은 겉으로는 변화가 없었다.
“근거 없는 소문이 났군요. 사람들이 그걸 믿어요?”
“재란씨가 워낙 예쁘니까. 그리고 한이재씨하고 같이 있는 것도 여러 번 봤고.”
쭌이 우물쭈물하며 대답했다. 상대가 세현이 아니라는 점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재와 단둘이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무대 뒤 대기실에서 멤버 전부와 마주치거나 아니면 이재와 세현과 동시에 마주친 적이 있긴 했다. 그러나 그게 다다. 하필이면 거기서 이재만 쏙 뽑혀 입방아에 올랐는지는 모를 일이다.
“어처구니가 없네요. 둘만 있었던 적은 한 번도 없는데. 한이재씨가 알면 화낼 거에요.”
“진짜 아니에요? 그런데 왜….”
흐려진 뒷말은 ‘왜 누구의 마음도 받아주지 않느냐’는 질문이 담겨 있었다. 재란은 답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쭌은 재란의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차가 공연장으로 돌아오는 사이 재란은 그동안 자신이 너무 생각 없이 지냈음을 반성했다. 이번엔 이재였지만 다음에는 세현일지도 모른다. 팬 커뮤니티에 들어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스태프들 사이에 난 소문이 거기까지 번졌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자 아찔했다. 세현에게도 걸림돌이 되어선 안 된다. 재란은 어디선가 향냄새가 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끔찍해. 재란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꽃다발과 소품을 대기실로 옮겨 놓고 재란은 무대와 대기실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연출 콘솔박스로 갔다. 마지막 단체무대가 마무리 중이었다. 하늘에서 색색의 컨페티가 떨어지고 찢어질 듯한 함성이 공연장을 가득 채웠다. 투어는 대성공이었다. 흥분한 스태프들이 대기실 방향으로 신이 나서 뛰어갔다. 지현오 CP도 헤드폰을 벗으며 대기실로 가려고 일어섰다.
“같이 갑시다. 다 같이 축하해야지.”
“여기 정리하고 갈게요. 연출님 먼저 가세요.”
재란이 책상 위에 흐트러진 종이와 음료 잔을 치우며 말했다. 가라앉은 기분을 바꿀 시간이 필요했다. 잠시 뒤 태광이 고개를 쑥 내밀더니 재란을 보고는 반색하고 들어왔다.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는 둥근 얼굴에 한가득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사람 좋아 보이는 외모지만 젊었을 때는 조폭이었다는 소문이 있을 만큼 거친 면도 있는 사람이었다.
“삼촌.”
주위에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는 재란이 오래간만에 그렇게 불렀다. 태광은 흐뭇하게 웃으며 재란의 어깨를 두드렸다.
“대표님, 대표님하고 부를 때마다 어색하고 민망해 죽겠더니. 이제야 삼촌 소리 들어보네. 그동안 고생했다. 사회생활이 힘들지? 그래도 젊어서 하는 고생은 천금이야.”
“나야 뭐. 삼촌이 고생했지. 한국과 미국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느라. 은영이도 자주 못 봤을 거잖아.”
태광은 늦게 결혼을 해서 현재 다섯 살 딸을 두고 있었다. 호적상으로는 재란의 여동생이었다. 태광의 아내는 태광이 동생의 아이를 호적에 올렸다는 걸 이해해준 착한 여자였다. 재란은 그게 고마워서 될 수 있으면 태광의 가족에 끼지 않고 조카로서 있으려고 했다.
“나중에 공항 갈 때 말해. 삼촌이 태워줄게. 그럼, 있다 보자.”
“삼촌!”
재란은 나가려는 태광을 불렀다.
“왜?”
돌아보는데도 웃고 있다. 얼마나 좋은지 대표 직함을 잊은 사람 같다. 하긴 미국 진출은 삼촌의 오랜 꿈이었다. 그걸 알고 있는 재란은 코끝이 찡해져서 눈을 깜빡거렸다.
“투어 성공 축하해!”
“고맙다. 네 삼촌 능력 있지?”
“그럼. 내 아르바이트비도 넉넉히 챙겨줘. 잘 된 만큼 보너스도 두둑이 얹어주나요?”
“나는 냉정한 사업가야. 무조건 계약서대로야.”
태광이 떠나고 그사이 무대는 조명만 남기고 비었다. 관객들은 라이트 스틱과 손수 만든 패널을 들고 천천히 출입구로 향했다. 이제 축제는 끝나고 일상으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다.
거리 조절을 해야 해. 너무 가까우면 걸림돌 되는 거야. 재수 없으면 나한테 걸려 넘어질 수도 있어.
재란은 한참 주조정실에 있다가 무대 팀이 하나둘씩 나오기 시작할 때 1층으로 내려갔다. 재란이 목장갑을 끼며 나타나자 다들 어디 갔었냐며 한마디씩 던졌다. 너무 피곤해서 구석에서 잠깐 졸았다는 재란의 말에 대부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투어 막바지에 이르면서 체력부족을 느끼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자, 얼른 하자고. 오늘 대표님이 한턱내신다니까. 쫑파티 가야지.”
오늘 쫑파티 장소를 예약한 사람도 재란이었다. 소주와 삼겹살을 팔면서 공간이 넓은 곳을 찾느라 한참 뒤졌다. 작업팀장은 일 인당 김치찌개 하나씩을 약속하며 마지막 투혼을 불 지폈다. 다른 팀들은 짐을 정리해 숙소로 돌아가 잠시 휴식을 취한 뒤 쫑파티장으로 모일 예정이었다. 재란은 일에 몰두했다. 무대 위 소품들을 정리하고 거대한 천막을 걷어 차곡차곡 접었다. 돌출무대 위에 있는 작은 소형전구를 엉키지 않게 둘둘 말아서 바구니에 넣는데 지나가던 스태프가 재란의 머리를 툭 쳤다. 그 바람에 머리카락을 말아 올리고 있던 고무 끈이 끊어졌다.
“아, 미안해요.”
결 고운 머리카락이 스르르 흘러내려 재란의 작은 얼굴을 감쌌다. 순식간에 재란의 분위기가 훨씬 더 여성스러워지고 우아해졌다. 남자 스태프가 홀린 듯 그 모습을 지켜봤다. 재란은 순간 짜증이 나서 머리카락을 뒤로 홱 넘겼다. 바닥에 떨어진 고무줄을 찾는데 남자 스태프는 기다렸다는 듯 주머니에서 핑크색 리본과 구슬이 달린 머리핀을 내밀었다.
“혹시 괜찮으시면 이거 써요.”
재란은 남자가 내민 머리핀을 보다가 실소를 흘렸다. 그러니까 의도적인 거였다. 어떻게 했길래 끈만 딱 끊어졌지? 재란은 남자를 빤히 쳐다봤다. 이름은 모르지만, 조명팀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안면이 있었다. 남자가 워낙 당당하게 머리핀을 내밀어서 그런지 가까이 있던 사람들이 안 보는 척하며 힐끔거렸다. 무대 뜯는 소리가 요란하던 공연장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잠시 고민하던 재란은 머리핀을 받기로 했다. 이까짓 것 하나 가지고 피곤하게 굴기 싫었다. 차라리 이게 나을지도 모른다. 받으려고 손을 내미는데 재란과 남자 사이로 다른 손 하나가 쑥 들어왔다.
“어이쿠. 실례. 제가 잃어버린 팔찌인 줄 알았어요. 아니네요.”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이재가 와 있었다. 트레이닝 복 차림으로 모자를 눌러쓴 이재는 어딘지 껄렁하고 위압적으로 보였다. 깜짝 놀라 재란이 옆을 보자 이재뿐만이 아니었다. 세현도 거기 서 있었다.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 상당히 기분 나쁜 표정을 하고서.
“팔찌라니요?”
“무대하다가 팔찌를 잃어버렸어요. 이쯤에서 끊어진 것 같은데. 혹시 보셨어요? 딱 이렇게 생겼는데.”
웃기는 소리. 남자 팔찌가 아무리 예쁘다고 해도 핑크색 리본이 달려 있을 리 만무한데. 누가 봐도 거짓말이었다. 그걸 이재는 뻔뻔하게 밀고 나갔다. 누가 봐도 명백한 훼방이었다. 난처해진 남자는 머리핀을 어정쩡하게 들고 있다가 재란의 손에 버리듯 던지고 가버렸다. 자기만 무대 위에서 퇴장해버린 것이다. 이제 사람들의 시선은 이재와 재란에게로 와 꽂혔다. 재란은 기가 막혔다. 지금 뭐라고 생각하겠는가. 역시 소문이 맞다고, 한이재랑 이재란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하지 않겠는가.
“팔찌를 잃어버리셨다고요. 제가 여기 대충 둘러봤는데 팔찌 같은 건 없던데요. 혹시 찾으면 동주 매니저님께 전해드리겠습니다.”
그러니까 이제 그만 꺼지시지요. 재란은 뒷말을 삼키고 싱긋 웃었다. 이재도 눈을 부라렸다. 내가 좋아서 이러는 게 아니라는 뜻이 역력했다.
“일단 좀 찾아보겠습니다. 야, 박세현 얼른 찾아.”
무대 위에 쪼그리고 앉은 남자 두 명을 보며 재란은 한숨을 내쉬었다. 재란은 머리핀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바닥을 훑었다. 끊어진 머리끈이라도 찾아서 어떻게든 묶어볼 요량이었다. 그러나 재란보다도 세현이 먼저 머리끈을 찾았다.
“자.”
세현이 속삭였다. 긴 손가락이 재란의 손바닥을 스쳤다.
“여긴 왜 온 거야?”
재란도 목소리를 낮췄다.
“진짜 팔찌 잃어버렸어. 그리고 네가 보이질 않으니까. 메시지에 답도 없고.”
“그만 가. 여기 있으면 소문만 나빠져.”
“소문이라니?”
“있어. 그런 게.”
재란은 벌떡 일어서서 화장실로 향했다. 사람들의 시선이 끈질기게 따라붙었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여자 화장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거울을 보자 볼이 살짝 붉어진 게 보였다. 나머지 부분은 창백했다. 장갑을 벗고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재란은 방금 한 행동을 냉정하게 점검했다. 너무 멀었나? 아니면 여전히 가까웠나? 재란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어지러웠다. 실제로도 머리가 빙빙 도는 것 같아 세면대 위에 몸을 기대섰다. 그때였다. 화장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세현이 들어왔다. 재란의 눈이 커졌다.
“여기 여자 화장실이야.”
“알아. 밖에 이재 있어.”
“도대체 무슨 짓이야? 왜 들어와?”
“소문이 뭐야? 무슨 소문이 난 건데?”
세현이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재란에게로 바싹 다가와 붙었다.
“걱정하지 마. 다행스럽게도 너하고 관련된 소문은 아니야.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나하고 한이재야.”
“너하고 이재?”
“나하고 이재하고 사귄다고 소문났대. 그런데 아까 이재가 와서 그러니 소문에 박차를 가하게 된 거지 뭐.”
세현은 혼란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어디쯤에서 왜 그런 소문이 난 건지 그도 알 수 없을 테니까. 아까보다 얼굴이 더 나쁘다. 정확히 기분이 나쁜 포인트가 어디인지 모르겠지만 예감이 좋지 않았다. 재란은 자기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서서히 고개를 드는 세현의 눈이 차갑게 번쩍거렸다.
“그래서 소문을 덮느라 그 남자가 준 걸 받은 거야?”
“받은 건 아니지. 그냥 내 손 위에 놓아둔 거지. 성의인데 버릴 순 없잖아.”
“성의면 괜찮은 건가?”
“생각해보니 그 남자가 차라리 나아. 너희랑 소문나는 거 보다는.”
“... 진심이야?”
소름이 끼칠 만큼 다정한 목소리였다. 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면 문제를 해결하기 쉬워. 어차피 나는 미국에 있을 거니까 다시 볼일도 없고. 그런 점에서…….”
“이재란.”
“응?”
“전에 말했지? 내가 원하는 거 전부 해주겠다고.”
“내가 해줄 수 있는 거라면.”
“너만 해줄 수 있지.”
“뭔데?”
날카로운 감각이 목뼈 근처를 스쳐 지나갔다. 불안했다. 세현이 반쯤 내리뜬 눈으로 재란을 지긋이 보았다. 그의 커다란 몸이 재란의 시야를 막고 다른 곳으로 눈 돌리지 못하게 했다. 어느새 세현의 손가락이 재란의 손등을 어루만지더니 팔목을 꽉 잡았다. 그 손이 너무 의식되어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재란은 애써 웃었다.
“뭐길래 그래?”
“키스해도 돼?”
요청이었으나 재란의 귀에는 선언으로 들렸다. 재란은 답을 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동시에 세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고 싶다는 마음이 불쑥 모습을 드러냈다. 재란이 침묵하자 세현이 다시 말했다.
“그 머리핀을 꽂을 거라면 키스 먼저 해.”
“버릴게. 이거.”
재란이 머리핀을 들어 보였다. 세현이 장난꾸러기처럼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그래도 키스 할 거야.”
입술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재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부드러운 감촉이 맨 처음 느껴졌다. 말캉하고 보드라웠다. 그러나 곧 재란을 향해 밀려오는 힘이 고개를 뒤로 젖혀지게 했다. 자연스럽게 입술이 벌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혀가 침입해 들어왔다. 밀려가는가 싶더니 세현이 세차게 재란을 빨아들였다. 재란은 몸 안의 공기가 다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핑하고 잠깐 정신이 나갔다가 들어왔다. 맞댄 입술에서 느껴지는 열기가 엄청났다. 입술이 탈 것 같아. 본능적으로 재란은 몸을 뒤로 뺐다. 그러나 곧 세현의 커다란 손이 재란의 뒤통수를 잡았다. 세현은 재란이 물러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미쳤나 봐. 미쳤나 봐. 세현이 잠깐 입술을 떼자 재란은 가쁜 숨을 토해냈다. 오래 잠수했다 올라온 사람처럼 헐떡거렸다. 금방 다시 세현이 각도를 바꿔 입술을 겹쳤다. 세현의 혀가 가지런한 치열을 더듬고 자꾸만 도망가는 혀를 얽었다. 재란은 두 손을 허우적거리다 세현의 어깨를 잡고 매달렸다. 기다렸다는 듯 세현이 재란의 허리를 꽉 잡아 자신의 몸에 밀착시켰다. 그들은 조금의 틈도 허락하지 않고 완벽하게 서로 맞물려 있었다. 재란의 가느다란 팔이 세현의 목을 감싸자 만족스러운 신음이 들려왔다. 해일처럼 몰아치던 키스가 조금 잔잔해지고 세현의 손이 등을 타고 위로 올라와 재란의 양 볼을 감싸 쥐었다. 급한 갈증을 채운 세현이 재란의 얼굴 여기저기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입꼬리와 뺨, 콧잔등, 이마, 눈두덩이. 마지막으로 다시 입술을 깊게 물었다. 재란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세현의 눈이 바로 앞에서 그녀를 보고 있었다. 눈동자 안 홍채까지도 보일 만큼 가까웠다.
멀어질 수가 없어.
재란은 거리 조절에 완벽히 실패했다. 후회할 거야. 언젠가 이 순간을 후회하는 날이 올 거야.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재란은 먼 미래를 예감했다. 그러나 멀어질 수 없었다. 그것 또한 분명한 예감이었다.
똑똑.
화장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둘을 얽어맨 팔이 스르륵 풀리고 세현이 뒤로 물러섰다. 그의 입술이 살짝 부풀어있었다. 재란도 마찬가지였다.
“가야 해. 이따 쫑파티에서 보자.”
그리고 재란의 눈썹을 엄지손가락으로 쓱 문질렀다. 다정한 손길이었다. 재란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세현이 떠난 뒤 재란은 물을 틀고 한바탕 세수를 했다. 젖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데 낯선 여자가 담겨 있다. 싱그럽고 환한데 그래서 불안한 여자가 물끄러미 재란과 눈을 맞췄다.
쫑파티가 가기 전 재란은 숙소에 가서 짐을 쌌다. 두 달 동안 짐이 꽤 불어 있었다. 내일 오후에 러브필드 공항으로 가서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를 탈 예정이었다. 대부분 스태프들은 한국행 비행기를 타야 해서 재란과 가는 곳이 달랐다. 그들은 내일 밤 비행기였다. 쫑파티에 빨리 오라는 메시지가 계속 들어왔다. 가고 싶지 않아 재란은 계속 짐을 풀었다 챙기기를 반복했다. 영교에게 돌아간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전화가 걸려왔다. 둘은 짧은 통화를 했다. 재란은 영교에게 키스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대신 재미있는 에피소드인 것처럼 이재와 자신을 둘러싼 소문을 말해주니 영교는 깔깔 웃었다.
“외양으로 보면 너하고 이재가 잘 어울리긴 하지. 미남 미녀잖아. 세현이 기분은 별로겠는데? 걔가 가만있어? 뭐라고 안 그래?”
“별말 없었어.”
“그럴 리가 없는데. 세현이, 알고 보면 욕심이 얼마나 많은데 이 상황에서 가만히 있다고? 그럴 리가. 어릴 때 제 몫으로 나눠준 과자는 소중하게 놔뒀다가 꼭 혼자 먹었어. 내가 좀 먹으려고 들면 그 많은 걸 한꺼번에 입에 다 처넣고 억지로 씹어 삼키는 애가 박세현이야.”
“나는 과자가 아니야.”
“과자보다 더하지. 너는. 박세현한테.”
“쫑파티 가기 싫어.”
“네가 겨우 이까짓 일로 쫑파티를 안 갈 사람은 아닌데. 또 다른 일이 있어?”
털어놓고 싶지만 정리되지 않은 상태라 뭐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차했다간 너무 깊은 속내까지 드러낼 위험이 있었다. 재란은 아니라고 답한 뒤 전화를 끊었다. 잠시 후 영교에게서 메시지가 도착했다.
-너무 많이 생각하지 말고 지금을 즐겨. 우리 겨우 스물두 살이야.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입술을 만지작거리며 재란은 그녀에게로 거침없이 다가오던 세현을 떠올렸다. 재란은 첫 키스였고 세현도 그럴 거라고 짐작했다. 둘 다 서툴러서 막무가내로 밀어붙인 결과가 지금 입술 상태였다. 이제 세현이 한국으로 돌아가면 다음 방학 때까지는 볼 수 없다. 그 생각이 들자 재란은 쫑파티에 가겠다고 결심했다.
쫑파티가 열리는 식당은 스태프 숙소에서 20분 정도 떨어진 번화가에 있었다. 재란은 늘 묶고 다니던 머리카락을 풀어 늘어뜨려 바람에 흩날리게 내버려 두었다. 대신 일할 때 쓰던 모자로 얼굴을 감추었다. 식당 주위에 팬들이 지켜보고 있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식당에는 투어팀 말고 다른 손님은 없었다. 들어가자마자 때마침 건배가 이어졌다. 재란은 혼란스러운 틈을 타 맨 끝자리에 앉았다. 모자를 벗으며 주위를 둘러보는데 대각선 방향으로 태광이 벌써 벌겋게 취해 있는 게 보였다. 양옆에는 연출과 각 팀 팀장들이 자리를 채우고 왁자지껄 떠들어 댔다. 바로 그 옆 테이블에 세현이 멤버들과 함께 앉았다. 말석에 앉은 재란과 거리가 꽤 있다. 둘의 시선이 잠시 스쳤다.
‘이 정도 거리면 괜찮겠지?’
재란은 재빨리 고개를 돌려버렸다. 무대 팀 스태프들 앞에는 김치찌개가 한 그릇 가득 놓여있었다. 재란은 빈 그릇에 찌개를 조금 덜어 숟가락으로 떠먹었다. 건너편에 머리핀을 준 남자가 집요하게 재란을 지켜보고 있었지만 모른 척했다. 술잔이 한 바퀴 돌았다. 재란 앞에도 소주 한잔이 채워졌다. 재란은 기꺼이 한 잔을 들이켰다. 이번에는 쭌이 술을 들고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한국 들어오면 연락하깁니다.”
또 소주 한 잔. 재란은 옅게 웃으며 이번에도 단숨에 마셨다. 주위에서 “재란씨 술 좀 하네.”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입술에 묻은 술을 손등으로 닦아내는 모습이 매혹적이다. 재란을 둘러싼 시선이 더 많아졌다. 세 번째 술을 받는데 갑자기 태광이 재란을 불렀다.
“재란아. 이리 와.”
술을 따르던 쭌이 흠칫 놀라 동작을 딱 멈췄다. 다른 사람들도 놀란 얼굴로 태광과 재란을 번갈아 봤다. 이런! 난처함에 재란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재란은 태광이 엄청나게 취했다는 걸 알았다. 태광과는 아는 척하지 않기로 약속을 했던 터였다. 그랬는데 갑자기 여기서 이름을 부르다니. 도대체 술을 얼마나 마신 거야?
“싫습니다.”
“너 인마, 그렇게 급하게 마시면 취해.”
“알아서 해요.”
마음 같아서는 “삼촌. 약속 지켜.”하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대표님 체면을 생각해서 이 정도로 거절했다. 그랬는데 굳이 태광이 비틀거리며 일어나 재란에게로 걸어왔다. 지현오 CP가 팔을 붙잡았지만, 태광이 손을 휘저었다. 어쩔 도리가 없다. 재란은 다가오는 태광을 향해 걸어가 어깨를 붙잡았다. 그때 세현과 눈이 딱 마주쳤다. 얼마나 놀랐는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서 있었다.
“야 이 자식아. 누가 술 그렇게 마시래? 어디서 배웠어?”
“그만 하세요. 취하셨어요.”
“내가 기분이 좋아서 말이야. 좀 마셨지. 그래도 너는 안 돼. 너는 마시면 안 된다고.”
“알았어요. 안 마셔요.”
“그래. 재란아. 네가 나중에 나 챙겨라. 알았지?”
“네.”
“나는 너 믿고 마신다?”
“네.”
태광은 목청이 크고 재란의 목소리는 나직했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지현오CP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뭡니까? 둘이 무슨 관계에요?”
태광이 씩 웃었다. 그는 자랑스럽게 재란의 어깨를 꽉 쥐고 모두가 잘 보이게끔 몸을 바로 세웠다.
“내 딸이야. 이재란.”
“예?”
순식간에 식당 안은 아수라장이 됐다. 경악한 사람들은 저마다 소리를 질러댔고 재란에게 접근했던 남자들은 안색이 변했다. 그들로서는 믿기 힘든 이야기였다. 태광과 인연이 오래된 직원들은 태광의 결혼 시기를 알고 있기에 그랬고 무엇보다 이태광 대표와 전혀 닮지 않은 미모의 딸이란 부분이 더 그랬다. 이렇게 장성한 미모의 딸이라니. 지현오CP 가 대뜸 소리를 질렀다.
“딸이라고요? 아니 그걸 왜 이제 말하세요?”
“정정당당하게 알바로 채용된 거고 남들이랑 똑같이 일해야 하니까 그랬지. 이제는 다 끝났으니까 말한 거고. 지금 알면 되지 뭐. 다들 기억해둬. 이재란. 내 딸이야. 뉴욕에서 미술 대학에 다니고 있고 이렇게 예쁘고, 또 예쁘고, 아무튼 엄청 예뻐. 그래서 내가 골치가 아파. 사내놈들이 죄다 난리야. 난리. 어디 함부로 내 딸을…….”
재란은 세현만 봤다. 세현의 얼굴이 의문에서 분노로, 그리고 다시 허탈함으로 변했다. 딱딱해진 입매와 힘이 잔뜩 들어간 턱선에서 세현의 심경을 짐작했다.
‘역시 나는 걸림돌이야.’
재란은 이제는 쓸쓸해 보이는 세현을 다가가서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러지 못했다. 그에게로 갈 수 없었다. 멀어지지도 다가가지도 못한다. 지현오 CP의 도움을 받으며 태광을 제자리에 앉혀놓고 재란은 술 깨는 음료를 사겠다며 밖으로 나왔다. 사실 저 안에 있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다리가 무거웠다. 재란은 발목에 무거운 쇳덩이가 채워져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 멀어져도 될까? 재란은 길 위에 우뚝 서서 눈을 감았다. 세현이 화가 났을 게 분명했다. 그 화를 대면하는 게 무서웠다.
“같이 갈까?”
등 뒤에서 세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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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눈두덩이를 살짝 덮은 긴 앞머리 덕분에 세현의 얼굴에는 짙은 그림자가 졌다. 재란은 검지로 커튼 걷듯 머리카락을 쓸어올렸다. 길고 보기 좋은 반달 눈이 재란을 보고 웃었다. 거실은 그들이 숨어있기에 적당할 만큼 어두웠다. 재란은 오늘만이라도 세현의 쓸쓸함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순간, 재란이 입꼬리를 올리고 장난스럽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세현이 알아차리기 전에 얼른 그의 티셔츠를 잡고 그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야! 뭐 하는 거야?”
당황한 세현이 뒷걸음을 쳤다. 한 사람분의 옷 안에 두 사람이 들어가니 티셔츠가 있는 대로 늘어났다. 그 안에서 재란은 따뜻한 피부의 감촉을 느끼며 두 팔로 세현을 꽉 끌어안았다. 그가 키득키득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재란은 말랑한 볼을 세현의 심장에 갖다 대고 마구 문질렀다. 그러자 세현이 재란을 번쩍 들었다.
“꺅!”
티셔츠 안에 갇혀 보이는 게 없는 재란은 발이 공중에 뜨자 순간 무서워 소리를 질렀다.
“네가 먼저 시작한 거야. 이재란.”
달깍 하는 소리가 나는 거로 봐선 방으로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짐작대로 세현이 재란을 안은 채 그대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는 두 다리까지 동원해서 재란을 칭칭 동여맸다. 티셔츠 안이 점점 더워졌다. 재란이 몸을 빼려고 하는데 세현은 꼼짝도 안 했다. 이렇게 되면 필살기를 써야 한다. 재란은 세현을 간지럽히기 시작했다. 세현은 넘어가게 웃으며 몸을 비트면서도 재란을 놓지 않았다.
“인제 그만! 더워 죽겠어. 나가게 해줘.”
“그러게 왜 얌전한 사자를 건드려?”
“팬으로서 사심 좀 채웠다.”
“웃기시네. 내 부탁 들어주면 풀어주지.”
“뭐든, 뭐든 말해. 다 들어 줄 테니까.”
“오케이.”
재란이 겨우 머리를 빼내자 세현은 또 웃어댔다. 열이 올라 상기된 두 볼과 잔뜩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너무 귀여워서다. 재란은 조금 멍해져 있는데 세현이 끌어당겨 머리카락을 정리하고 다시 끌어안았다.
“너한테 맛있는 냄새가 나. 달콤하고 부드러운 냄새.”
“케이크를 만들었으니까.”
“이런 냄새 풍기며 다른 남자 만나는 거 싫어. 이재란. 선보러 가지 마.”
재란은 쓰게 웃었다.
“내 말 기억하지?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다 해주겠다고 했잖아. 선보러 나가는 일은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일이야.”
“... 못된 할망구.”
“박세현이 이렇게 나쁜 말 한다는 거 누가 알까?”
“네가 이렇게 내 속을 썩이는 것도 아무도 모를 거야.”
재란은 세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재란은 균형을 잡는 게 점점 힘들어진다고 생각했다. 만약 재란이 이 아슬아슬한 줄타기에서 떨어지게 된다면 제일 상처 입을 사람은 자신이길 바랐다. 그게 재란의 운명이라고 스스로 믿었다.